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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 4대 명필 한석봉, 영암이 키우다 영암이 세상이였다
조선 최고의 명필가(名筆家)를 뽑으라면 당연 한석봉을 빼놓을 수 없다. 본명인 한호보다 한석봉으로 더 알려진 한석봉은 해서, 행서, 초서 등 여러 가지 서체에 두루 능한 명필가로서 추사 김정희와 쌍벽을 이룬 서예가다. 한석봉은 자신만의 독특한 글씨로 심지어 명나라까지 명필가로서의 이름을 떨쳤다.
한석봉은 명나라에 가는 사신을 수행하거나 외국 사신을 맞을 때 잔치를 베푸는 자리인 연석(宴席)에 나가 정묘한 명(名) 필치로 명성을 떨쳤다고 전해오고 있다.
한석봉의 이름은‘한호(韓濩)’다. 본관 삼화(三和), 자 경홍(景洪), 호 석봉(石峯).청사(淸沙)다. 1543(중종 38)년 개성(송악)에서 태어나 1605년 63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1567년 과거에 급제했으며 그는 서예가,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그의 부는 한언공, 모는 홍주 백씨이다. 1543년 개성에서 태어난 한호는 군수를 역임한 한 대가의 5대손이자 정5품직인 정량을 지낸 한세관의 손자이다.
한호의 호를 석봉이 된 이유는 그가 태어난 개성의‘석봉산’아래에서 살았기 때문에 호를‘석봉(石峯)’이라고 지었다.
그 유복한 가문은 한호가 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한테 글을 배웠다. 10세 때는 할아버지마저 돌아가셔 집안 살림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풍비박산이 된 것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한석봉은 어려서부터 책을 접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또한 글쓰기를 좋아했다. 책과 글쓰기를 좋아했지만 워낙 집안이 가난해 서당(書堂)을 다니기가 힘들었다.
한호의 할아버지가 정5품직인 정량을 지낼 정도로 넉넉한 가문을 자랑했지만 그 유복한 가문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산이 풍비박산이 돼 한호는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서경덕의 소개로 영암 덕진면 영보출신인 영계(榮溪) 신희남(愼喜男, 1517~1591)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이계기로 개성에서 먼 영암까지 거처를 옮긴 것이다. 이때 한호의 나이는 당시 12세였다. 그는 25세까지 13년간 영계 신희남 선생이 계신 서당인 이곳‘죽림정사(竹林精舍)’에서 공부하며 청춘을 불태워왔다.
13년간 영암에서 살면서 그가 진사시에 합격할 때까지 영계 신희남의 문하에 들어가 필법을 전수받았다. 한석봉은 영암읍 농덕리(옛 들구실) 가장 위쪽에 자리하고 있는‘죽림정사’라는 곳에서 공부를 했다.
영계 신희남 스승한테 공부를 한 한호는 명종 22년인 1567년 25세 때 타고 난 문장 실력으로 소과(小科)의 하나인 진사시(進士試)에 합격을 했다. 한호는 그 후 48명(승문원 40명, 규장각 8명)밖에 못하는 사자관(寫字官)에 발탁돼 국가의 주요 문서 및 외교 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도맡았다. 한호는 이런 계기로 명나라에 중국 사행을 다녀오게 되면서 그때 대외적으로 자신이 갖고 있는 특출한 명필로 이름이 나게 됐다.
한호가 한석봉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지는 가운데 1572년(선조 5)에 임당 정유길, 1582년(선조 15)에 율곡 이이, 1601년(선조 34)에 월사 이정구의 사행(私行)과 1581(선조 14), 1593년(선조 26)에 조선시대 대중과의 외교관계로 보낸 사절 및 사신으로서 주청사로 파견할 때 사자관으로 5차례 동행했다.
*죽림정사는 조선시대 이전부터 있었다. 이곳에서 영계 신희남 선생을 비롯한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죽림정사에서 우리나라 최고 명필인 한호 한석봉이 이곳 죽림정사에서 명계 신희남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글씨를 배웠다. 죽림정사에는 조선시대 대학자인 이율곡, 김서하 선생 등의 현판이 있었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천함에 따라 서당이 폐쇄되면서 건물이 사라졌다. 이로 인해 현판과 소장품들이 분실되는 등 폐허가 되어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방치되어 오다가 2008년 영암군향토문화유산으로 등록하여 2009년에 영암군으로부터 향토문화유산증건사업 보조금과 평산신씨 둔덕종회 기금 및 후손의 현성금으로 다시 중건하여 명필가를 배출하는 학당으로서의 면모를 갖춰 혼을 다시 피어오게 하고 있다.
정사(精舍)는 옛 선비들에게 끝없는 공부와 자기 수양을 통해 태어나는 선비정신의 산실이면서 학문의 전당으로서 인간 됨됨이를 만들어 주는 등 입신을 세워주고 있다. 동시에 세상에 먼지를 닦아내고 초심으로 돌아가는 소중한 씻김의 자리이면서 깨끗한 영혼을 갖추게 하는 곳이다.
*영계 신희남(1517~1591)은 영암 영보에서 태어났다. 그는 조선 초기.중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자는 길원(吉遠), 호는 영계(瀯溪)이며 본관은 거창(居昌)이다. 부친은 신우장이며 모친은 평시령 김제의 딸이다. 거창신씨인 영계 신희남은 8세에는 교하에 살던 신지건, 13세에는 장단에 살던 신희복, 18세에는 개성에 사는 서경덕에게 시사했다. 22세에는 한양에서 성혼의 부친인 성수침을 찾아가 배웠다. 1543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선무랑(宣務郞)이 되었다. 1555년 선교로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570년 정5품 수찬(修撰)과 정4품 장령(將領)을 역임하고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그는 또 부교리, 사간, 교리, 집의, 좌승지 등을 지내고 1576년 종2품으로 강원도관찰사 나갔다가 병조, 예조의 참의를 역임했다. 신희남은 1581년 동서분당의 붕당(朋黨)으로 정국이 혼란해지자 환멸을 느끼고 종4품으로 금산군수를 나갔다가 사직하고 사색당쟁을 피해 고향 영암으로 낙향했다.
낙향한 영계 신희남은 할아버지 신영명(愼榮命, 1451~1498)이 1474(성종 5)년 살던 집을 허물고 이곳에다 지었던 이우당(二友堂)을 1474년(성종 5)을 개수하며 인근 서당인 죽림정사에 나가 후학을 가르치는 등으로 여생을 보냈다. 이후 단종 때 영암으로 들어온 15대 조부인 통례공 신후경(愼後庚)의 둘째 아들 신영명의 구서를 1580년 신영명의 손자인 강원도 감사 영계 신희남이 40년 관직생활을 마치고 귀향하여 허술해진 당을 개수하고 당 부근에 연못을 파서 청백을 상징하는 연(蓮)을 심고 언덕에다 충절을 상징하는 오죽(烏竹)을 심고 편액(萹額)을 이우당(二友堂)이라고 하였다. 1474(성종5)에 건축한 이우당 앞에 송양서원(松陽書院)을 개설하여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한 영계 신희남, 예조참판을 역임한 소은 신천익, 예조좌랑을 역임한 호산 신해익 등을 배양했다.
또한 영계 신희남은 최덕지와 신후경이 낙향하여 건축한 영보정(永保亭)을 중수하고 대학자인 이조판서를 역임한 율곡 이이, 청백리이자 영의정을 역임한 백순, 종계변무를 시정하고 호조판서를 역임한 이후백과 도외지교를 맺고 학문을 교류하였다.
영계 신희남은 이이, 김인후, 박순, 이준백, 정탁, 백광훈, 심희수, 임억령, 신장 등 당대의 거유(鉅儒)인 학식이 많은 이름난 선비들과 서로 사귀고 놀거나 왕래했고 특히 유희춘과 절친했다.
영계 신희남이 한호를 만나게 된 계기는 신희남 나이 30세 전후 진사에 들고 난 후 황해도로 을사사화로 유배를 당한 선거관과 백인걸을 문안하고 오는 길에 한호를 만나 낙향하면서 함께 그를 영암으로 데리고 와 글씨를 가르쳤다.
조선시대 최고의 명필가로 명성을 떨친 한호는 아버지와 친분이 있었던 서경덕의 소개로 영암에 계신 양계 신희남 선생의 문하로 들어갈 때 어머니도 함께 갔다. 한호 어머니는 맹모삼천지교라 할까 아들 교육을 위해 어디 든 먼 곳을 마다하자 않고 자식이 훌륭하게 성장할 수 있다면 개성에서 천리길이 넘는 이곳 영암으로 오로지 한호의 교육을 위해 찾았던 것이다.
한호를 낳아 훌륭한 인물로 키운 한호 어머니는 홍주 백씨로 알려져 있다. 한호 어머니는 중종(1488~1544) 때 개성의 양반가문에서 태어나 같은 고을 청주 한씨 가문의 한언공(韓彦恭)에게 시집을 갔다.
남편 한언공은 곡산군수를 지낸 현대가(1420~1479)의 5대 손으로 부친은 사헌부 정4품인 장령(掌令)을 지낸 한세관이다. 한언공과의 사이에서 한호(한석봉, 1543~1606)를 낳았다.
한호가 태어났을 때 일관이 점을 쳐보고“옥토끼(달에 있는 토끼)가 동방에 태어나면 낙양의 종이 값이 오르는 법인데 이 아이는 반드시 글씨로 이름이 날 것이다”라고 예시했다.
이런 좋은 점 꾀가 나왔지만 안타깝게도 불운이 겹치는 운세가 됐다. 홍주 백씨는 아들 한호가 2살 때에 남편인 한언공을 잃은 등 불운이 덮쳤다. 한호 9살 때에는 시아버지마저 세상을 떠 이로 인해 가세는 기울어지게 되고 결국은 한호를 키울 일이 막막했다.“이젠 어떻게 살아가야한다요”통곡하며 눈물을 흘리며 실의에 빠질 정도로 앞날이 캄캄했다.
절망에 빠질 상황, 홍주 백씨는 한호를 키우기 위해 점쟁이의 예언대로 영특한 한호를 어떻게 해서든 하나밖에 없는 한호를 반듯하고 훌륭하게 키워내겠다고 눈물을 거두며 입을 악물었다. 흐트러진 머리 옷맵시를 다시 가다듬고서 점쟁이의 예언대로 글씨를 잘 쓰는 재주 많은 이들로 더 공부를 가르쳐 훌륭한 아들로 키워냈다.
김육(1580~1658)이 엮은 개성의 지리서‘중경지(송도지)’는 한호는 집이 가난하여 종이가 없어 집을 나가서는 돌다리에 글씨를 쓰고 집에서는 질그릇이나 항아리에다 글씨 연습을 했다고 기록했다. 글을 쓸 먹과 종이를 살만한 형편이 못돼 돌다리나 질그릇과 항아리를 종이삼아 먹물대신 물을 찍어서 글씨 연습을 했다.
한호의 어머니인 홍주 백씨는 한호가 글씨 쓰기를 좋아하는 것을 보고“너는 그리도 글씨 쓰는 게 좋으냐?”묻자 한호는“네 어머니 그래요 소자는 글씨를 쓰고 있으면 무척 행복합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런 한호를 보고 어머니는 근심이 깊을 수밖에 없었다. 남편과 시아버지가 죽고 집안이 풍비박산되어 살림이 넉넉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장 끼니를 해결해야할 방법도 찾을 길이 막막했고 한호의 교육 문제를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 슬픈 가슴을 쓸어내려야만했다.
이런 어려운 처지에서 한호가 9살 때 구세주가 나타났다. 바로 아버지와 친분이 두터운 도학(道學)에 능통한 서경덕 소개로 알게 된 전남 영암에 있는 영계 신희남 선생이다. 명종시대의 문필가인 신명명의 손자인 신희남 선생을 만나 한 가닥 희망을 찾게 됐다.
영계 신희남이 1543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대과를 준비할 때 1545년 명종 즉위 시 윤원형 일파 소윤이 윤임 일파 대윤을 숙청하면서 사림이 크게 화를 입은 사건의 을사사화(乙巳士禍)로 인한 관직을 박탈당하고 그의 나이 30세 때 양주에 유배 중인 신거관(1498~1564)과 개성의 백인걸(1497~1579)을 만나러 갔다. 신희남이가 개성을 찾아 만났던 유학자인 백인걸은 1537년 식년문과 병과에 급제하고 남평 현감을 지낼 당시 1547년 안변에 유배생활을 하다가 1551년에 사면되어 개성에 머무르고 있었다. 신희남은 1551년에 사면돼 야중에 있는 신거관과 개성에 있는 백인걸(1497~1579)을 만나러 갔던 것이다. 신희남은 1543년 진사가 되어 대과공부 중에 잠시 서경덕과 황진이, 박연폭포가 사는 고을(개성) 찾아 남평현감을 지낸 백인걸을 보러갔다. 신희남은 백인걸뿐만 아니라 평소 존경했던 본인 나이 18세 때 도약을 가르쳐준 서경덕 스승을 뵙고 싶었던 마음을 갖고 있었기에 개성에 사는 서경덕(1489~1546)) 스승도 뵐 겸 겸사겸사 개성을 찾았다.
*휴암 백인걸(1497~1579)은 조선 중기의 유학자다. 선조 때 직제학, 이조판판, 대사간, 대사헌을 거쳐 공조참판으로서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겸임했다. 대사헌(大司憲)이 되어 권신 등의 비위를 논핵하다가 사임했다. 청백리(淸白吏)로 뽑힌 인물이다.
개성을 찾은 신희남은 관직에서 물러나 있는 백인걸을 만나게 된다. 백인걸을 만나 포옹하며“오서오시게나 먼 길 오르랴 고생이 많았소이다”하며 백인걸은 반갑게 신희남을 맞이했다.
신희남을 만난 백인걸은 신희남에게 개성에 사는 한호와 그의 집안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백인걸은 신희남에게“영계 선생 먼 걸음 하셨네 이렇게 훌륭한 분이 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나를 만나려 여기까지 오다니 감격스럽구려”하며 서로 기쁨의 웃음꽃을 피운 채 밤새 기울이는 술 한 잔에 날이 샐 정도로 정담은 무르익어갔다. 신희남을 봐 매우 기쁘고 그동안 나누지 못한 이야기와 부탁할 일을 하지 못했다는 듯이 백인걸은 신희남을 보자마자“영계 자네 마침 잘 왔네 이곳 개성에 글씨를 잘 쓴 신동이 있다네”하며 한호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신희남을 만난 백인걸은“한호의 아버지는 군수를 역임한 한대가의 5대손이자 정랑 한세관의 손자요 한언공이라네 아버지와 친분이 두터운 분이 서경덕이고”한다는 말에 평소 서경덕을 시사(侍師)로 모셨던 분이기에 평소 스승을 존경했던 신희남은“아 그러십니까? 제가 서경덕 스승님을 참 존경했고 다시 뵙고 싶었는데 잘 됐습니다. 어디 만나게 좀 해줄 수 없는지요?”해 백인걸은“알았네”하며 신희남이를 서경덕과 다시 만나게 해줬다. 오랜만에 스승을 뵌 신희남은 매우 반가워하며 큰 절로 감격의 표현을 해보였다. 신희남은 서경덕을 뵙고“스승님 오랜만입니다”.“지체보존하신지요 진즉 찾아뵙어야하는데 이제 찾아 인사를 드려 면목이 없습니다”라고 하자 서경덕은“여보게 무슨 그런 소리를 다 하는가 이렇게 찾아준 건만으로도 감동스럽고 고마울 뿐 일세 어서 앉으시게나”하며 반갑게 대해줬다.
그리고 살아가는 이야기, 나라에 대한 이야기, 세상 이야기 등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글씨를 잘 쓴 한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서경덕은 신희남에게“한호가 글씨 쓰기를 좋아하는 재주가 많은 영특한 아이인데 가정 형편이 매우 어렵고 누가 키울만한 그런 사람도 없고 하니 자네가 이 아이를 좀 맡아 가르치면 어떻겠는가”하며 한호를 소개해줬다.
신희남은 서경덕의 이야기를 듣고“예 스승님 잘 알았습니다”.“그렇지 않아도 백인걸 어르신을 만났는데 한호에 대한 이야기를 해 알고 있습니다”라고 하면서“스승님의 간절한 부탁이기도 하니 제가 한번 데려다가 가르쳐보겠습니다”라고 한호를 만나게 된다. 이때 한호 나이 9세였다.
신희남은 백인걸과 서경덕의 이야기를 듣고 한호를 만나 한호의 글씨 솜씨를 확인해 본다. 신희남은 한호의 글씨를 쓴 것을 보고“보통 아이가 아니구나”관심 두며 눈여겨봤다. 한호의 글씨를 본 신희남은 한호에게 필법 몇 가지를 바로 잡아주기도 할 정도로 한호에 대한 애정을 보였다.
한호의 교육문제에 걱정을 많이 한 홍주 백씨는 서경덕 선생한테 이야기를 듣고 어찌나 반가운지 냉큼 달여와 신희남 선생의 발아래 엎드려“우리 아이의 스승이 되어주십시오”사정하듯이 간절히 부탁을 했다.
백인걸은 신희남에게“그렇게 하시게 왕대밭에 왕대 나는 법이니 훌륭한 스승 밑에 훌륭한 제자가 당연지사 아닌가?”서경덕도 한호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을 거들었다.
그러자 신희남은“내 고향은 영암입니다”,“이곳 개성에서 저 남쪽까지는 천리도 더 되는 먼 곳입니다”. 한동안 고개를 흔든 채 고민하다가“알았습니다. 이 아이의 장래를 위하는 길인데 천리면 어떻고 만리면 또 어떻습니까?”수락을 하면서“좋습니다. 하지만 제 형편도 넉넉지 못하니 아이가 고생을 할 것입니다”하며 한호를 데리고 가겠다고 약속했다.
백인걸 알선으로 신희남을 다시 만난 서경덕은 신희남에게 한호의 아버지와 친분이 있다며 한호에 대한 이야기를 더 자세히 들려주면서“한호를 잘 키우고 가르쳐야하는데 글씨를 참 잘 쓴 재주 많은 아이인데 집안이 기울어져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라는 안타까움은 소식을 전하며“영계 선생이 이 아이를 좀 데려다 가르쳐줄 수 없겠소”하며 신희남한테 재차 한호를 소개해줬다. 서경덕한테 한호를 소개를 받은 신희남은 자세한 이야기를 들고 고개를 끄덕이며“네 알겠습니다 스승님”.“덕망이 높고 지체가 훌륭하신 스승님께서 이런 청을 하니 영광스럽다만 고민해보겠습니다”망설이다가“그럼 한호를 제가 한번 가르쳐보겠습니다”라고 청을 들어줬다.
*화담 서경덕은 1489(성종 20)에 태어나 1546(명종 1)에 사망한 도학의 대가이다. 서경덕은 이(理)보다 기(氣)를 중시하는 독자적인 기일원론(氣一元論)을 완성하여 주기론(主氣論)의 선구자가 됐다. 서경덕은 송대의 준돈이, 소옹 및 장재의 철학사상을 조화시켜 독자적인 기일원론의 학설을 제창했다.
서경덕은 1502년(연산군 8) 서경(서경)을 배우다가 태음력과 수학적 계산인 일(日), 월(月) 운행의 도수(度數)에 의문이 생기자 보름 동안 궁리하여 스스로 해득했다.
서경덕은 1519년 조광조에 의해 채택된 현량과에 수석으로 추천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개성 화담(花潭)에 서재를 세우고 연구와 교육에 힘썼다. 1531년 어머니의 요청으로 생원시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성리학 연구에 몰두했다.
서경덕은 1544년 김안국 등이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추천하여 임명되었으나 이것 또한 사양하고 계속 화담에 머물며 연구와 교육에 정진했다.
그런 후 개성에 머문 신희남은“모든 것을 정리하고 저도 이 아이와 함께 영암으로 가 아이의 뒷바라지를 하겠습니다”하며 고향으로 낙향하는 길에 한호와 그의 어머니인 홍주 백씨와 함께 영암으로 내려왔다. 홍주 백씨는 얼마 되지 않는 가산을 정리한 뒤 짐을 챙기고서 한호를 데리고 신희남의 뒤를 따라 오로지 한호의 교육을 위해 영암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신희남은 영암 죽림정사에서 자신의 대과(大科) 준비를 하면서 한호를 가르쳤다. 홍주 백씨는 영암 학산면 용산리 마을에 거처를 삼고 떡을 만들어 서호 아천포 다리거리 밑이나 독천장에서 떡을 팔았다. 떡 장사를 하며 생계를 이어갔고 장사는 그런대로 잘 됐다. 하지만 여유를 부릴 만큼의 넉넉하지는 않았다. 그랬어도 나름대로 한호의 교육을 시킬 수 있었다.
*아천포는 서호 몽해리 아천 마을 동쪽 아천교 아래에 있는 포구다. 지금의 학산천 중류에 해당한다. 영산강이 있는 곳에 있는 포구로서 수많은 갯배들이 들락거렸던 번창한 포구였다. 아천(牙川)은 내를 앞에 둔 언덕위의 작은 마을이다. 배가 드나들 때는 작은 이곳을 작은 포구의‘아시내개’라 불렀다. 지금은 영산강 하구언으로 인한 옛 포구의 풍경은 볼 수가 없고 포구 앞 바다는 간척지로 벼해 논농사를 짓는 들녘으로 변했다. 영산강을 막기 전에는 바다물이 드나들며 고깃배와 여객선이 떠다녔으며 숭어, 운저리(망둥어), 장어, 대간이, 게. 맛, 모시조개, 굴 등 각종 해산물이 풍부해 어업으로 먹고 살았다.
아천포가 있는 영산강은 중국과 일본으로 오가는 오랜 뱃길이었으며 처음과 끝은 시종(始終)이었고 시종은 큰 바다로 나가는 영암고을(백제 곤미현 월내군, 신라 영암, 고려 낭주)의 길목이었으며 큰 바다로 나갈 때는 서호강 대섬을 지나 시종 남해신사에서 제(祭)를 올렸다.
아천포는 일제강점기 후기에 목포를 왕래하는 객선이 많이 다니기도 했으며 1940년대 말 간척으로 인하여 물길이 차단되면서 뱃길도 중단됐다. 아시내개라고 하는 아천포는 지금의 학파농장 상단에 있는 포구였다. 1949년 학파방조제가 만들어지면서 아천포는 소멸되고 말았다. 학파농장은 영암군 학산면 출신 사업가 현준호(1889~1950)가 1939년부터 1949년까지 영암군 서호면 성재리와 군서면 양장리 사이에 방조제를 막아 생긴 농장이다. 간척으로 상대포와 아천포의 뱃길이 차단되었고 대신 제방 아래에 성재포가 형성됐다.
한호 한석봉에 대해 일화(逸話)를 빼놓을 수가 없다. 떡 썰기와 글씨 쓰기 대결이 한석봉에 대한 가장 큰 인상 깊은 이야기로 전해오고 있다.
한호가 영암에 내려 온지 3년이 지난 11세 때 어느 날, 신희남이 대과를 치르러 한양에 가고 없을 때 한호는 불현듯 어머니가 보고 싶었고 그리움이 사무쳤다. 월출산에 둥실 떠 오른 달이 어머니를 더욱 그립게 만들었다. 달을 본 한호의 마음을 심란했다. 한호는 보고픔을 못 참고 바로 밤길을 달려 자신이 공부를 한 죽림정사(영앙읍 농덕리)에서 어머니가 계신 학산 용산리까지 쉬지 않고 갔다.
한호가 갑자기 나타나자 어머니는“너 하던 공부는 안하고 여기 왜 왔느냐”,“10년이 아직도 멀었는데 왜 벌써 왔느냐?”하자 한호는“소자는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어머니 글씨는 배울 만큼 배웠으니 이제부터는 어머니와 함께 살고 싶습니다”하자 어머니는“나는 네가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내 잘 살기를 원치 않는다”.“그렇다하니 그럼 얼마나 배웠는지 보자꾸나 나는 떡을 썰 테니 너는 글씨를 써라”하며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지 못하며 한호와의 대화를 했다. 오랜만에 보는 아들이었지만 어머니는 냉정했다. 쌀쌀스런 표정을 하며 떡만 썰며 한호가 집에 찾아오는 것을 그리 반갑게 생각 안했다.
어머니는 떡을 썰면서“그래 그럼 어디 한번 보자 네가 정말 글씨를 잘 배웠는지 잘 쓰는지를 봐야겠구나”하며“나는 떡을 썰을 테니 너는 글씨를 써라”하며 등잔불을 껐다. 떡 썰기와 글씨쓰기에서 누가 더 솜씨가 좋은지 어디 비교를 해보자는 달인열전이었다. 그것도 어두컴컴한 밤에, 칠흑 같은 밤에서는 글씨 쓰는 소리와 떡 써는 소리만이 정적을 울렸다. 숨죽인 듯 들려오는 소리가 어느 정도 정막을 깨우자 어머니는 다시 등잔불을 켰다.
칠흑 같은 어두컴컴한 상태에서 한 떡 썰기와 글씨 쓰기는 확연했다. 불을 켜고 보니 어머니는 일정한 크기와 두께로 떡이 썰어져있었고 반면에 아들은 쓴 글씨는 크기가 제각각이었고 모양 또한 삐틀삐틀 마치 고양이와 개가 마구 밟고 지나다닌 것처럼 괴발개발의 글 쓴 솜씨에 불과했다.
어머니는 한호의 글씨 쓴 것을 보고 단호하게 그 자리에서 호통을 쳤다. 어머니는 한호에게“더 이상 배울게 없다던 놈이 이런 글씨를 쓰다니”,“어머니는 불을 끄고도 떡이 일정하게 썰어져있지 않느냐”,“넌 그게 뭐냐”,“이놈아 넌 아직 멀었다 더 배워야 돼”하며 실망을 하며 분노를 참치 못했다. 자식에 대한 기대가 무너진 듯해 가슴이 내려앉았다.
어머니는 한호한테 제차“네가 글씨를 다 배웠다고 하는 놈이 이정도였더냐”,“넌 아직 멀었다”호통을 치며 밖으로 쫒아냈다. 한호한테“불을 끄고도 잘 쓸 수 있을 때까지 집에 올 생각을 하지 말거라”,“어서 다시 가서 배워 오거라”하며 한호를 엄하게 대하며 다시 서당인 죽림정사로 보냈다.
석봉인 한호는 깨달음을 준 어머니로부터 가르침을 얻고 반성하며 용서를 빌고서 다시 죽림정사로 돌아가 더 열심히 공부에 전념했다.
어머니의 철저한 훈육에 한호는 세월이 흘러 1567년 해인 24살 때 소과의 하나인‘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다. 장원급제를 한호는 1583년 사헌부 감찰을 역임했고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왕의 행재소서 문서관계의 일을 맡았다. 그런 후 가평군수, 흡곡현령 등을 지냈다. 한석봉은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명나라에서 한석봉이 쓴 글씨를 보고 왕희지와 우열을 가리기가 매우 어려울 정도로 버금가는 명필이라는 극찬과 함께 칭송을 받았다.
한석봉은 선조가 임진왜란 직후 종4품 가평군수에 임명했으나 탄핵을 받아 종6품 통천현감으로 좌천됐다. 63세를 일기로 사망하자 도학에서는 서경덕, 충의에서는 송상현, 문장에서는 차천로, 필법에서는 한석봉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한석봉이 서가의 명필가로 성장하게 된 것은 부모님의 뒷바라지가 컸기 때문이다. 한석봉 어머니는 어려운 살림에도 불구하고 한석봉을 뒷바라지하며 공부를 시킨 세상 사람들한테 존경을 받을 만한 훌륭한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훌륭한 가르침으로 인하여 한석봉은 벼슬길에 나서게 되는 등 모자지간의 관계는 오늘 날에도 귀감이 되고 있다.
한석봉은 조선시대 최고의 명필가로 성장하게 됐고 이름을 떨치자 조정에서는 그에게 임금이 내리는 문서와 외교 문서를 쓰는 관리인‘서사관(書寫官)’이라는 벼슬자리를 내렸으며 그런 벼슬길에 오른 한석봉은 왕의 명으로 사신(使臣)으로서 명나라를 오가며 뛰어난 필체로 이름을 날리며 나라에 이바지했다.
조선 초 4대 서가 명필가로서 왕희지, 안진경의 필법을 익혀 해(楷), 행(行), 초(草) 등 각 서체에 모두 뛰어났던 한석봉, 서체에 능통한 한호는 스승이 내린 호(石峯)대로 마천철연(摩穿鐵硏, 쇠 벼룩을 갈아 구멍을 뚫다)을 더하여 1567년(명종 22) 24살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나라에 부름을 받은 한석봉, 천거로 1583년 사헌부 감찰, 1599년 시어(詩語)가 되었던 그는 가평군수가 된 한석봉, 이후 1604년(선조 37) 흡곡현령 존숭도감의 관아에서 필사하는 일을 맡아하는 잡직의 구실아치인 서사관(書寫官)을 지냈던 한석봉 그는 조선의 한 시대를 살면서 나라를 부강하게 했다.
한석봉의 글씨체 워낙 뛰어날 정도로 아름다웠고 예술미가 돋보여 선조는 한석봉이 쓴 글씨를 항상 벽에 걸어두고 감상했다고 한다. 심지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조선을 도우러 왔던 명나라 장군 이여송도 한석봉에게 글씨를 부탁해 가져갔다는 일화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한석봉의 글씨는 조선은 물론 이웃 중국에서도 탁월한 명필가로서의 이름이 났고 인기가 높았다. 선조는 한석봉의 글씨를 항상 벽에 붙여놓고 감상하며“어쩜 글씨를 저렇게 잘 쓰고 아름다울까 명필 중에 명필가”라며 칭찬하고 감탄했다고 한다. 이름난 서원 중에는 한석봉이 쓴 현판이 걸러져있다. 도산서원, 옥산서원 등 조선의 이름난 서원에는 다 한석봉이 쓴 것이다.
한석봉은 해서(楷書)면 해서, 행서(行書)면 행서, 초서(草書)면 초서 등 어느 글씨체든 능수 능란한 뛰어난 달필가였다. 모든 서체에 뛰어난 솜씨를 보인 한석봉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자기만의 독특한 글씨체를 만들어 한석봉체로서의 당대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명필가다운 명필로 명성을 떨쳤다.
한석봉은 추사 김정희와 더불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서예가다. 그는 명필가라는 명예로 활동을 하다가 1603년 63세의 일기로 에 세상을 떠났다.
한석봉이 쓴 글씨는 한석봉중유여장서첩과 도산서원, 옥산서원을 비롯해 허엽신도비, 서경덕신도비, 기자묘비, 김광계비, 행주승전비, 선죽교비, 좌상유홍묘표 등 비문이 주로 남아 있다. 모간으로 석봉서법, 석봉천자문 등이 있다. 영암 구림 육우당, 영암 영보 영보정, 나주 노안 쌍계정, 광주 광산 풍영정, 경북 경주 안강읍 옥산서원 구인당 현판도 그의 필체다.
한석봉 글씨를 엿볼 수 있는 것 하나가 '한석봉천자문' 을 들 수 있다. 한석봉천자문을 보면 한호의 글씨는 반듯하다. 기세가 아주 뛰어난게 특징이다. 획의 굵기가 적절하여 나악하지가 않다. 또 펼쳐진 폭도 넉넉하여 여유로운 느낌을 준다.
한호 한석봉은 일생동안 수많은 교서를 써 남겼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에는 승전을 기리는 기념비의 글씨를 썼다. 그는 또 여러 명망가의 비석에 쓰인 글씨를 써줬다. 한석봉을 상징하는 글씨는 역시 한석봉천자문이다. 해서체는 오늘날의 가장 모범적인 글씨로 여기며 그 글씨체를 기본교서로 삼고 있다.
조선 초기 4대 서가 명필가인 예서체에 뛰어난 비해당 안평대군 이용, 인수체에 뛰어난 자암 김구, 초서체에 뛰어난 봉래 양사언, 사자관체에 뛰어난 석봉 한호 등이 조선시대 4대 명필가로 뽑고 있다.
선조와의 한석봉은 아주 친밀한 관계였다. 1599년 한호가 57세였던 해에 선조는 긴 세월 동안 글씨로 나라에 봉사한 이 신하에게 휴가를 겸하여 지방의 한직으로 내보냈다. 바로 가평군수로 그를 보내 고을 일을 보면서 편안하게 쓰고 싶은 글씨를 마음껏 쓰도록 배려해줬다.
임지로 떠난 한호 한석봉에게 선조 임금은 다음과 같은 말을 전별했다.
'굳이 너의 글씨를 얻으려 하는 이라면 그는 너의 글씨를 후세에 견하려는 아이니 싫증을 느낄 때면 억지로 하지 말되 게을리 하지도 서두르지도 말라' 이런 전별의 편지를 보내면서 한석봉의 능력을 알아보고 그를 북돋아줬다. 이로 인해 한석봉의 삶이 달라 졌다. 세상을 바꾸기도 했다. 서경덕의 소개로 한호를 만난 신희남, 영계 신희남은 한석봉의 인생을 바꾼 참된 스승이다.
석봉 한호는 '서강' 이라는 시를 남겼다.
넓고 맑은 물결은 거울인양 번쩍일제
남간에 기대어서 창랑가 읊조린다
양기슭 갈대숲엔 갈바람이 사나운데
수없이 나는 돛들 석양에 어지럽구나
한강의 아름다운 경치가 마치 그림을 그리는 듯하다는 한호가 한강을 봐라보면서 어부의 노래(청량가)를 읊조리며 갈대숲을 흔들리게 할 정도로 서풍(갈바람)이 세차게 불어대 한강물도 출렁거리고 물결위로 내려앉은 석양 빛에 어지로울 정도다 라는 한강의 풍경을 시로 표현했다.
또한 한석봉은
짚방석 내지 마라 낙엽엔들 못 앉즈랴
솔불 혀지 마라 이제 진 달 도다 온다
아희야 박주산채 만정 업다 말고 내여라
짚방석 내지 마라 낙엽엔들 못 앉으랴
솔불 켜지 마라 어제 진 달 솟아 온다
아이야 변변치 못한 술과 산나물일망정 없다 말고 내오거라
짚방석이라도 내놓으려하는데 그냥 낙엽 위에 앉겠다는 것이다. 관솔불 밝히려는데 달이 돋아오르니 켜지 말라는 것이다. 애야 잡곡으로 빚은 막걸리와 산에서 캐온 산나물이지만 없다 말고 내놇으라는 것이다. 짚방석 대신 낙엽, 솔불 대신 달빛이면 되지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겠느냐는 격식을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석봉 한호의 소박을 함을 엿볼 수 있는 운치난 풍류적인 정감을 느낄 수 있는 시조이다.
비교적 한가한 가운데 태어난 석봉 한호는 8세에 서당에 입문했다. 12세 때 당대 문호였던 영계 신희남의 문하생으로 들어가면서 그의 인생이 확 달라지게 된다. 한석봉은 15세에 생원시에 급제해 성균관에 입학하게 되고 공부를 열심히 하여 25세에 진사시에 합격을 한다. 한호는 진사시에는 합격할 실력을 갖추었지만 끝내는 급제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한호는 뛰어난 글씨로 사자관에 박탁하는 운이 따랐다. 사자관에 근무하면서 그는 국왕의 어서와 외교문서의 필사를 전담했다. 석봉 한호는 선조의 눈에 들어 그는 오랫 동안 승문원 사자관으로 근무했다. 그는 그런 탁월함으로 그의 글씨는 중국에서도 명필로 알려지게 되는 등 명나라에 사신이 파견될 때 다섯 차례에 걸쳐 사자관으로 동행하면서 명나라 문인들이 감탄과 호평을 아끼지 않을 정도로 한석봉은 중국에서도 명필가로 명성을 떨쳤다.
최고의 후원자인 선조 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석봉 한호, 한석봉은 사헌부의 잇단 파직 건의에도 선조 임금은 그들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 번도 처벌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그를 조선의 사신들과 동행시켜 명나라를 다녀오게 했다.
떡장수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던 한석봉에 관 일화는 오늘날까지도 유명하게 전해지고 있다. 조선4대 명필 중 하나인 명인 한석봉, 사헌부에서는 한호의 됨됨이, 즉 명종22년(1567) 진사시에 급제한 것이 전부인 한호가 글씨를 잘 쓴다는 이유로만으로 선조가 발탁하게 되자 중앙관리들이 격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거부감을 보인 채 한호의 진출에 대해 견제구를 날렸다. 사헌부에서는 용심(남을 시기하는 심술궂은 마음), 비루(행동이나 성질이 너절하고 더러운), 몸가짐 등을 언급하며 문제를 삼고 상소를 올렸지만 선조는 단호하게 사헌부의 상소를 물리쳤다. 선조는 한호가 명필 수준에 이르렸고 누구보다 한호의 글씨를 좋아했고 아꼈기 때문이다. 사헌부에서는 이런저런 일로 한호에 대해 문제를 삼았지만 한호는 선조의 총애를 받고 그 자리를 지키며 글씨를 쓰는 요원으로서 '사지관' 을 맡아 묵묵히 일해 오면서 명성을 날렸다.
석봉 한호만의 글씨체가 나오게 된 것은 이렇다. 여말초애는 선비들이 주로 조맹부의 송설체를 즐겨 썼다. 한호, 윤순, 김정희와 함께 흔히 조선 4대 명필로 꼽히는 안평대군이 잘 썼던 글씨가 바로 조맹부의 '송설체' 이다. 반면 한호는 조맹부 송설체보다 왕희지체를 좋아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꿈에 왕희지가 글씨를 써줬기 대문이다. 그는 '왕희지체' 를 기본으로 하여 자신의 색깔을 가미해 한석봉체라는 독특한 서체를 남겼다.
조선시대의 명필 석봉 한호, 그를 선조 이상으로 한호의 글씨를 좋아한 사람은 앞에서도 다루었듯이 다름 아닌 임진왜란 때 조선을 찾은 명나라 장수와 사신이었다고 한다. 특히 명 조정 내의 고위직 인사들이 한호의 글씨를 좋아했기 때문에 조선에 온 장수나 사신은 상납을 위해 한호의 글씨를 노력 끝에 어렵게 구해 선물로 줬다. 어떠한 상납품보다 한호의 글씨가 더 귀한 선물로 그들은 여겼다.
석봉 한호는 명나라에 가는 사신단에 필사요원, 즉 사자관으로 수행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도 글을 많이 남겼다. 이수광은 그의 저서인 '지봉유설' 에서 "한호가 북경(베이징)에 갈 때 어는 중국사람 집에서 이백의 시 하나를 흰 벽에 써준 적이 있었는데 벽에 써줬던 글이 내가(이수봉) 24년이 지나고 나서 마침 그 집에 들렸는데 먹 기운이 새것과 같았다. 이는 중국 사람이 한호의 글씨를 매우 소중하게 여겨 아끼고 보호했던 까닥이다" 라고 적고 있다. 석봉 한호에의 글씨에 대한 예찬을 이것뿐만 아니다. 당시 명나라 최고의 문학가였던 왕세정도 한호의 글씨를 보고서 "목마른 말이 냇가를 달려 가고 성난 사자가 돌을 내리치는 형세" 라고 한호의 글씨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모든 일은 다 마음에서 이루어지는데 왕세정의 병통은 진실하지 못한 데가 있다. 한호는 액자(현판에 쓰는 글씨)는 잘 쓰지만 초서와 예서는 그의 특징이 아니다 아마 왕세정이 그렇게 말했다면 다른 뜻이 있어서일 게다" 라고 영의정 이항복으로부터 왕세정의 이 같은 극찬을 들은 선조의 반응이다.
조선 초 4대 명필가인 석봉 한호는 초서나 예서보다는 실용서체인 해서나 행서 등에 능했다. 한호의 장단점을 선조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선조 임금은 한호의 글씨체를 좋아했고 아끼며 그를 총애했다. 이유는 당대 첫손으로 꼽히는 명나라 문인 왕세정이 극찬을 해서 한호의 글씨가 좋다는 것을 믿을 수박에 없었다. 명나라에서는 다른 서체보다 한호가 쓴 서체를 더 좋아했고 조선에서 보내는 외교문서를 석봉체로 써 달라고 요구할 만큼 한호의 글씨를 좋아하고 아끼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한호는 명필가로서의 인기가 많았다. 석봉 한호의 인생에서 또 하나의 전환점이 된 것은 '가평군수' 로 임명을 받고 재직하는 일이다. 누구보다 한호를 아꼈던 선조 임금은 경치 좋은 곳에서 마음껏 공부에 더 전념하고 훌륭한 글씨를 쓰는 명필가로 탄생하기를 그 명성을 떨치기를 나라에 이바지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배려하는 등 선조는 한호를 향한 사랑하는 마음은 지대했다.
선조 임금의 큰 사랑을 받은 한호는 관리로서 재능은 없어 보여 사헌부에서는 그에 대해 낮게 평가하며 끌어내리려고 했다. 시쳇말로 왕따를 시키려고 했었다. 사헌부에서는 "연일 한호가 수령으로서 직무를 태만 하는 바람에 백성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지고 있다" 고 상소문을 올리면서 "전하 한호를 당장 파직시켜주시옵서서" 하며 그를 파직할 것을 간곡히 청했다. 그랬지만 선조는 조사해볼 것을 명하면서도 아무런 처벌을 하지 않았다.
선조 임금은 한호에 대해 총애가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를 보면 선조 37년(1604) 3월 대마도 도주가 편액을 요청하자 예조에서는 당시 "흡곡현령으로 있던 한호에게 쓰게 하면 어떻겠나이까 전하" 선조에게 물었다. 이에 대해 선조는 "닭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쓸 수 있겠는가 한양에 있는 아무나 보고 쓰도록 해서 내주어라" 했다고 한다. 선조 임금은 대명외교문서에만 한호의 글씨를 써야한다고 생각헸기에 절데 그럴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선조로서는 아직 강화도 맺지 않은 대마도 도주에게 글씨를 써서 보내다는 것 자체가 마땅치 않게 생각하고 있는데다가 한호의 글씨를 함부로 난발하는 것도 안 좋게 봤고 한호의 글씨를 소중하게 생각했기에 한호한테 요청한 것에 대해선 언짢게 여겼다.
명나라 저명한 학자인 왕세정이 석봉 한호의 글씨를 보고서'성난 사자가 돌을 헤치는 것 같고 목마른 천리마가 강물로 달려가는 것 같다' 고 석봉 한호의 글씨를 격찬했을 만큼 글씨를 잘 썼던 석봉 한호는 조선시대의 명필가로서의 인물이지만 오늘날에도 대한민국의 역사적 인룰로서의 가치가 있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명나라 이여송과 마귀, 사신으로 온 동계달과 양찬 등도 한석봉의 글씨를 요청해 받아갔다니 한석봉의 글씨가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짐작하게 된다.
석봉 한호의 글씨를 누구보다 알아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선조, 선조 임금은 한석봉의 대자 글씨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기이하고 장대하기가 측량할 수 없다'이런 말을 해대며 찬탄했다.
석봉 한호에 대한 사랑, 그 사랑이 하늘도 감동할 정도로 컸던 선조 임금은 술을 종아하는 한석봉에게 음식과 어주를 자주 하사했다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선조 임금의 한석봉을 향한 총애,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도 정랑과 가평군수의 벼슬을 내려 그를 예우했다
선조 임금한테 명필가로 극찬하고 인정받은 석봉 한호였고 그의 글씨는 국내외서는 높은 평가를 받지만 문벌을 중시하는 조선 관료사회에서는 한석봉이가 가난하고 지체가 변변치 못하다는 이유로 한미한 가문과 대관에 급제하지 못한 전력을 문제를 삼아 그의 글씨를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하며 폄하했다.
석봉 한호와 같은 시대의 최립은 한호에 대한 폄하는 것에 대해 저서인 '간이집' 에서 이러한 세태를 통렬히 비판했다. 문벌귀족들은 한석봉의 글씨를 폄하할 만한 못 된다는 최립은 '말세의 습속을 보면 '남의 평가를 귀동냥한 것만 소중히 여기고 자신이 직접 본 것은 천시하여 믿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조선의 풍속은 문벌만을 따져 평가하기 때문에 경홍(한호의 자)의 글씨도 그릇 비평을 받을 때가 있었다. 일찍이 나는 이런 사태를 분하게 여겨왔다. 사람들은 경홍의 손에서 글씨가 나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멋대로 폄하했던 것인데 만약 왕우군(왕희지)의 범접을 임서한 경홍의 글씨를 금석에 새겨 왕우군의 작품과 뒤섞어 전하게 된다면 과연 그것을 구별해 낼 사람이 있을까 의심스럽다' 라고 간이집에 써놓으며 한석봉의 글씨를 낮게 평가하는 문벌들을 좋게 생각 안했다.
조선시대 최고의 명필 한석봉, 그는 개성에서 태어났지만 그가 명필가로서의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영암이 낳은 신희남 스승한테 서예를 배웠기에 가능했다. 영암의 정기를 받았기에 한석봉은 조선시대 때 왕이나 신하 및 백성들이 또는 외국에서 그를 훌륭한 명필가로 인정을 받게 됐다.
명필가인 한석봉을 말하기를 명대 후반의 저명한 학자인 왕세정은 “성난 사자가 돌을 헤치는 것 같고 목마른 천리마가 물로 달려가는 것 같다”라고 그를 평가했으며 명나라 사신인 주지번은“왕희지, 안진경과 우열을 다툴만하다”라고 격찬했다.
또한 문관들뿐만 아니라 중국의 문관들에게도 한석봉의 필체를 보고 놀라운 표정들 이었다. 명필다운 명필을 하는 것 같아 그를 부러워했으며 그의 다재다능한 재주에 인기가 높았다.
또한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이여송과 마귀, 동계달과 유구의 사신양찬 등도 한석봉에게 기념으로 남기기 위해 글씨를 하나 써달라고 요청할 정도였다니 과언(誇言), 한석봉은 조선의 최고의 명필가가 아닌가한다. 그런 석봉 한호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안평대군, 윤순, 김정희와 함께 조선 4대 명필로 꼽고 있다.
그런 한석봉은 우리나라에서는 선조의 총애를 많이 받은 걸로 알려지고 있다. 선조는 한석봉의 필체에 반해 한석봉의 글씨를 항상 벽에 걸어두고 감상할 정도였으며 그의 글씨에 감탄한 선조는 필체가 뛰어난 한석봉과 음식과 술을 자주 하사했고 귀한 진상품인 벼루‘구룡연(九龍蓮)’을 하사 받기도 했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한석봉은 선조 임금한테 받은 구룡연을 두고 한석봉필서첩(韓石峯筆書帖)에 구룡연이라는 시를 지어 넣기도 했을 정도로 선조 임금과의 각별한 사이임을 증명하고 있다.
구룡연
봄날의 이슬 기운 연지 위를 적시고
햇살과 안개 빛이 붓끝을 감아 돈다
황정경 쓰는 사이 신룡의 도움 감지되니
산음에 있는 우객을 언젠가는 만나리
봄날의 이슬 기운
벼루의 오목한 부위(연지.硯池)를 적시고
햇살과 안개 빛이 붓끝을 감아 돈다
도교경전(황정경.黃庭經)을 쓰고 있는데
소원을 들어주는 용(신용.新龍, 임금을 말함)이 느껴지고
남쪽 고을(산음.山陰)에 있는
날개 있는 신선(우객.羽客, 임금을 보좌한 석봉을 말함))을 언젠가는 꼭 만나리라
또한 가평군수로 재임하고 있을 시 선조 임금은 한석봉에게
취리건곤 필탈조화(醉裏乾坤 筆奪造化)
'크게 취한 가운데로 우주가 내 품에 안기니
붓으로 그 조화를 담아냈구나'
라는 어필을 한석봉에게 하사하기도 했다.
이긍익의 사서집 '연려기술 선조고조고사' 본말에 한석봉은 임금에게 지우를 받아 총예가 융숭했고 하사품이 끊이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가평군수로 임명되었는데 몇 년 뒤 사헌부에서 탄핵했지만 추고만 지시했다. 그가 공조 낭관이 되었을 때는 일상적인 업무를 규칙대로 처리하지 않아 파직되는 것이 마땅했지만 주상은 처벌하지 말라고 하명했으며 병이 위독해지자 여의에게 빨리 약을 가지고 가서 치료하게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임금은 오랫동안 애도했다는 선조 임금이 총애를 한 한석봉에 관한 글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한석봉은 1545년 6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한석봉 사후 2010년 4월‘조선국 통훈대부 가평군수 증승지 한공지묘’비석이 개성에서 발굴됐다. 그의 혼은 공부했던 영암 죽림정사와 중건한 덕진 영보정, 현판이 걸려있는 구림 육우당에는 아직도 숨 쉬고 있을 것 같다. 아마 그는 명필가로 만든 영계 신희남 스승을 저 하늘나라에서도 그 은혜를 잊지 않을 것으로 본다. 또한 한석봉 어머니 홍주 백씨도 자식인 한호를 훌륭한 인물로 가르쳐준 것에 대해 저 하늘에서도 그“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하며 큰 절을 하지 않을까한다. 그리고 개성에서 영암으로 가게 한 서경덕에게도 감사의 말을 하지 않을까한다. 그 계기로 영암을 제2의 고향을 삼은 것에 대한 한석봉 어머니가 살았던 학산 용산리 마을과 떡을 팔았던 아천포 다릿거리와 독천장 등도 지우지 않고 세상은 떠났지만 그런 삶의 터전에 대해서도 필시 좋은 기운이 상승해 번창하라고 기도하지 않을까한다.
한석봉은 사람됨이 중후하고 과묵했다고 한다. 술을 잘 마시어 술을 만나면 흠뻑 취하여 유유자적하며 지칠 줄 모르고 읊조렸다고 한다. 높은 명성을 얻고 나서는 공경들한테 예찬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한석봉은 속이 너그럽고 시샘하는 것이 적어서 비록 입으로는 남의 좋고 나쁨을 말하지 않으나 속으로는 소신이 확고하여 뜻에 맞지 않으면 부드러운 일로 구차스럽게 비위를 맞춘 적이 없었다고 한다. 시를 지음에는 유독 여백의 시풍을 좋아하여 이따금씩 정취가 퍽 있어 한석봉의 글에 예찬했다고 한다.
석봉 한호의 일생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은 그를 가르쳤던 영계 신희남 스승과 그를 각별하게 여기고 총애를 했던 선조 임금이다.
한석봉 인생에서 신 같은 존재인 영계 신희남, 한석봉을 훌륭한 인물로 키운 영계 신희남
신망이 두터움지고 뛰어난 기질을 갖춘 아이구나
희망이 보여지나니 반드시 만인이 너를 선망하리
남문에 입성할진데 이어찌 한평생 기쁨 없을리오
영계 신희남은 제자였던 석봉 한호에게 '총망하고 재주가 많은 너는 필시 세상 사람들이 우라러 볼 것이요/임금의 명을 받아 총애 속에 이 나라를 위해 헌신하며 명예를 얻을 것이다' 라는 제자인 한석봉에게 큰 기대를 가졌던 영계 신희남의 마음을 담은 글이다.
한석봉을 어여삐 여기고 남달리 총애했던 조선 14대 왕 선조, 나라에 인재로 쓴 임금 선조
선망의 대상이 될 정도로 그대는 나라의 보배로다
조선의 기운이 돌 정도로 그대는 나라의 빛이로다
조선의 명필 석봉 한호에 대한 선조 임금은 한석봉에 대해 '네가 과연 신이 아니고 무엇이라는 말이냐 너의 글씨를 보면 세상을 보는 것 같고 신비스럽구나/분명 알고 있거늘 너의 글씨와 성품은 이 나라의 값진 보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의심할 여지가 없도다/그대의 필력은 마치 용이 꿈틀거리는 듯 힘찬 기운이 솟고 힘찬 기운은 나라와 세상을 밝게 하도다' 라는 선조 임금이 한석봉에 대해 예찬하는 글이다.
한석봉을 키운 신희남과 한석봉을 총애한 선조, 이 두 분들의 이름과 명칭으로 한석봉을 향한 마음을 풀어봤다.
‘영암이 없었다면 한석봉도 없었을 것이다’라는 과언이 아닐 정도로‘한석봉을 훌륭하게 만드는 곳은 영암이었다’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아니 틀린 말이 아닌 사실적인 이야기다. 한석봉을 훌륭한 아들로 키우기 위해 "나는 떡을 썰 테니 너는 글을 쓰라" 했던 한석봉 어머니 홍주 백씨는 맹자의 어머니 맹모 못지않을 만큼 자식 교육에는 아끼지 않았다. 없는 살림이어도 내 자식만큼은 훌륭하게 키워야겠다는 자식을 향한 희생은 빛났다. 신사임당이 이율곡을 훌륭하게 키웠던 것처럼 홍주 백씨도 한석봉이를 조선시대 최고의 명필가로 만들어냈다.
명필가가 된 한석봉은 아마 영암에서 배우지 못했다면 그도 명필가라는 명성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서경덕의 소개로 만난 신희남 스승에 의해 서예의 경지에 오른 명필, 명필가를 만들어낸 영암은 인물을 배출한 고장이 아닌가한다.
조선 초 4대 명필, 한석봉이를 태어나게 한 곳은 개성이었지만 그를 키워낸 곳은 영암이었다.
영암이 만들어낸 한석봉
한석봉
한편의 드라마를 쓴 영암이로다
석봉의 이야기를 쓴 영암이로다
봉명의 발자취를 쓴 영암이로다
명필가로 사자관으로 출세를 한 한석봉은 영암에 개성이 있네 할 것 같다.
김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