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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그때 증파이유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작전의 이유….
△최웅=숙영편성을 하다 다시 거둬들이는 상황에서 그 당시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동국대로 왔습니다. 와가지고 하는 얘기가 [광주에 7여단2개대대가 계엄군으로 나가 있는데 소요 진압작전을 못하고 매우 고전하고 있다. 그러니 최장군이 지휘하는 11여단이 거기에 나가게 되었으니 가서 임무수행을 잘하도록 하라] 이러한 지침을 받은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김영진=그때 특별하게 다른 얘기는 없었습니까? 가령 현지에서 어떤 유언비어가 있고….
△최웅=유언비어가 있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김영진=무슨 얘기를 어떻게 했습니까?
△최웅=좋지않은 유언비어가 있는데 경상도 사람들이 와서 광주사람을 괴롭힌다는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88년 12월19일 청문회)
최웅은 이처럼 18일 오후 정호용사령관의 광주 출동지시를 시인했음에도 점차 이 부분이 심각한 쟁점으로 부각되자 저녁에 이해찬의원의 질문에 대해서는 [날씨가 더운 파키스탄에서 어제 막 돌아와서….]라며 정호용씨의 유언비어 관련 발언이 18일이 아니라 19∼20일께라고 황급히 정정, 의혹을 남긴다.
최웅씨의 오전증언과 오후증언 중 과연 어느쪽이 진실인지는 정호용과 최웅 그리고 신만이 알고있겠으나 19일 오전 8시부터 9시40분까지 열린 계엄 및 현지지휘관 파병요청없이 3공수 투입
정호용, 동국대 숙영지 방문 직접명령 19일 06시30분 작전권 2군사에 이양돼
최세창인솔 서울마장동∼청량리∼광주역 도착…[영산포 역사] 80년 5월 부분 지워져
왜 그랬을까? 7공수 2개 대대가 광주현지에 출동해 시위진압에 나서기도 전에 최웅단장으로 하여금 11공수를 이동시키고 또 11공수여단이 광주에 도착한 후 병력부족 여부를 확인하지도 않은 채 계속해서 3공수가 연이어 증파된 것은, 과연 무슨 [흑막전술]에서 였을까.
육군본부 작전상황실이 국회 [광주특위]의 요구에 의해 제출한 80년 5월17일부터 그해 6월18일까지의 [작전상황일지]에는 공수부대가운데서도 [최정예]로 알려진 3특전여단의 부대이동에 대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수록돼 있다.
△일련번호 46 <접수시간 19일 23:08>
△제목:3특전여단 부대이동
△부대:3공수
△일시:5월19일 23:00∼5:20
△인원:2백65/1천2백12 (주:장교2백65명, 사병1천2백12 명)
△이동로: 3공수∼천호대교 ∼마장동∼청량리
△열차출발 1차20일 01:00 청량리출05:50 광주도착 2차:20일 01:10∼07:00
△객차:20량
△화물:3량 계 23량
△인솔자:준장 최세창 (여단장)
△일련번호 51 <접수시간 20일 07:28>
△제목:3여단 광주도착
△1차:20일 07:03
△2차:20일07:30예정
참고로 일련번호 52번의 제목은 현재 청와대에서 집무중인 [김영삼 신민당총재 숙소 출동배치]로 기록돼 있다.
일시는 5월20일 오전7시20∼9시4분, 병력은 수경사 헌병단소속 1/30명 (주:장교1명, 사병30명), 장비는 오토바이 2대등.]
1천4백여명 투입
아무튼 이와같은 3공수의 광주투입으로 18일부터 계속된 7, 11, 3공수여단의 광주지역 증파가 완료되며 광주지역에 투입된 공수부대의 총원은 장교·하사관 5백4명, 사병 2천9백1명으로 불어난다.
참고로 광주로 투입된 첫 공수부대인 7공수는 17일자정을 전후, 그리고 11공수는 19일새벽 4시까지 이동을 마친다.
그러나 신군부는 이미 19일 오전 6시30분에 3여단의 작전통제권을 2군사령부에 이양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다.
즉 특전사 전투상보를 보면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20-80호에 의거, 당시 육본기동 예비대로 편성돼 있던 3여단을 2군사령관의 작전통제권하에 두고 광주지역 소요사태 진압에 동원토록 하고 있다.
그 시간은 19일 오전6시30분. 7여단이 시위진압에 투입되기도 전에 11여단 증파결정이 내려진 것과 마찬가지로 11여단병력이 광주시내 시위진압에 투입된 19일 오전10시보다 훨씬 이전에 3여단에 대한 사실상의 증파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그리고 이때에도 역시 현지 지휘관의 증파요구는 전혀 없었다.
최세창준장이 이끄는 3특전여단 (3공수)이 열차의 바퀴를 멈춘 곳은 역시 광주역, 집결지는 전남대로, 육군본부 작전상황일지에 따르면 시간은 20일 오전7시35분께. 병력배치는 낮12시30분 대대단위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11특전대대는 금남로에, 15특전대대는 광주역에, 13특전대대는 시청에, 16특전대대는 전남대입구에 배치된다.
오후5시께 62특전대대는 20만 시위군중이 운집한 금남로를 중심으로 cbs (현 가톨릭센터건물), 광주은행에 투입돼 이른바 그네들의 진압작전을 펼친다.
이날밤 9시15분께엔 31사단 자체병력 (장교급 13명·사병 4백44명)이 집결배치
전남대에 병력집결
그리고 광주 외곽도로등이 봉쇄되기 시작한다.
실로 광주항쟁의 대전환점을 가져온 20일밤의 금남로차량시위는 예의 특전단 (공수부대)의무시무시한 돌격작전으로 시위에 참여한 차량들과 운전기사들은 정전된 (과연 누가 한전의 스위치를 내려버렸을까) 금남로에서 처참하게 으깨져버린다.
그럼 3공수가 첫 군화발을 내딛은 광주역은? 그리고 그 뒷얘기는? 기자가 확인해본 바에 따르면 일제 대정시절부터 기록되어왔다는 [영산포역사] [광주역사]등에서 80년 5월부분이 완전히 하얀잉크로 지워져 버렸지 않은가. 왜 그랬을까. 누가, 누구에 의해서, 왜 지워버렸을까…. 쑤께끼다.
참고로 80년 당시의 광주역장은 서기관급인 김영인 최수용등으로 그들은 과연 무엇을 보았을는지?
당시 현지 지휘관이었던 31사단장 정웅과 전교사 (CAC)사령관 윤흥정의 국회청문회 증언기록을 보자.
△박찬종의원=증인께서는 당시 31사단장으로서 혹시 전교사 사령관 등에게 5월17일 계엄확대조치와 관련해서 광주지역의 기존병력으로는 시위진압이 어렵다는 예견이나 이런 견해를 상부에 보고한 일이 있습니까.
△정웅증인=없습니다.
△박찬종=그렇다면 공수부대나 육군본부 예비대인20사단의 파견을 요청하신 일도 없습니까.
△정웅=없습니다. 요전에 청문회에서 윤흥정 증인도 공수부대나 20사단 파견을 전혀 요청한 바가 없다고 증언하셨는데,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상황이 당시의 시국을 전망했을때 올바른 판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1988년12월21일 청문회)
△김인곤의원=증인은 공수부대의 투입이 그 당시 상황으로 보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느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광주를 진압하는데 공수부대까지 투입할 필요가 없다는 보고를 하신일은 있습니까?
△윤흥정증인=군인은 명령에 살고 죽고 합니다. 2군사령관이 공수부대를 보내면서 어디에 투입을 하라면 거기에 대해서는 제가 생각할 권리도 없고 의무도 없어서 그런것은 별로 생각해 보지 못하고 지시대로 수행했습니다.
△김인곤=그렇다면 계엄분소장으로서 자청해서 공수부대를 데려온 것은 아니군요.
△윤흥정=그렇습니다. (1988년 12월7일 청문회. 당시 전남·북 계엄분소장 및 전투병과 교육사령부 사령관)
다음은 당시 공수11여단장이었던 최웅증인과 김영진의 원사이의 문답내용이다. 최웅은 정호용 특전사령관의 이렇게 증었했었다.
△김영진의원
증인=80년 5월18일 새벽이 되겠습니다마는 그때 11여단은 서울에 있는 동국대학에 주둔했습니다. 주둔을 하고서 숙영편성을 거의 마칠 무렵인 오후3시쯤 되겠습니다.
"20사단파병 요청 안해"
일반 참모회의의 지시사항(육군본부 [소요진압과 그 교훈] 58쪽)을 살펴보면 진실의 윤곽은 이미 드러나기 시작한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