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보고서는 "캄보디아 기록보존센터"(Documentation Center of Cambodia: DC-Cam)가 2011년 1월에 발행한 기록정리 보고서를 "크메르의 세계"가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 보고서는 "뚜올슬렝 교도소" 생존자가 7명에 지나지 않았다는 기존의 견해에 대해, 중대한 관점 변화를 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크메르의 세계"는 오픈 2주년 기념으로, 이 보고서를 완역하여 공개한다. |
사실자료 : S-21 교도소의 죄수들
FACT SHEET : POL POT AND HIS PRISONERS AT SECRET PRISON S-21
* 공동저자 : 께오 다실(Dacil Q. Keo) 및 유인 니언(Nean Yin).
* 연구비 지원 : "슬륵 릿 연구소"(Sleuk Rith Insititute),
"미국 국제개발처"(USAID),
"스웨덴 국제개발처"(Sida). |
1979년 1월 10일, 베트남 군인들은 부패한 살냄새의 악취를 따라 철조망이 둘러쳐진 건물군으로 차를 몰았다. 이곳은 "크메르루즈"(Khmer Rouge) 정권 최고의 보안센터 역할을 했다. "S-21 보안감옥"(뚜올슬렝 교도소)이라 불린 이 시설에서, 수감자들은 수갑이 채워진 채 사진을 찍은 후, 심문과 고문을 받고 처형당했다. "S-21"이란 명칭에서 "S"는 국가 보안조직의 크메르어 명칭인 "산떼발"(Santebal)의 약자였고, "21"은 초대 소장이었던 낫(Nath: 본명-인론[In Lon])이 무선통신에서 사용하던 암호명이었다.
"S-21 교도소" 죄수들 중 다수는 크메르루즈 당원이었다. 이들 중에는 장관을 역임한 고위급 인사들과 그 가족들도 포함됐다. 그들은 CIA와 KGB 같은 외국 정부를 위한 간첩행위를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고, 따라서 "엉까"(Angkar: "조직"이란 의미)에 대한 배신자들로 낙인찍혔다.(주1) 수감자들은 또한 다른 이들과 공모한 것으로 상정되었고, 그 때문에 "배신자들의 연계망"을 강압적으로 자백해야만 했다. 때때로 이러한 자백은 100명 이상의 사람들을 포함하기도 했다.(주2)
"S-21"의 심문 요원들은 "채찍질을 당하거나 전기고문을 받을 때 울어서는 안된다"와 같은 10가지 보안규정에 기반한 기술들을 사용했다.(주3) 죄수들은 때때로 자신들이 어찌하여 수감된 것인지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자신들의 범죄를 자백해야만 했다.(주4) 만일 그들이 자백하지 않으면 신체적, 정신적 고문을 당해야만 했다. 하지만 일단 자백을 하고나면, 그들은 처형당했다.
수감자들은 처음에 교도소 내에서 처형됐다. 하지만 사체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고 악취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변하자, 죄수들은 대규모로 트럭에 실려 15 km 정도 떨어진 "벙 쩌응 엑"(Boeung Choeung Ek: '까마귀 발 연못'이란 의미)이라 불린 장소로 이동되어 살해됐다. 그곳의 벌판에서 죄수들을 기다린 것은 뗑(Teng)이란 청년이 이끌던 일군의 조직이었다. 20대 초반이었던 뗑의 조직원들은 10대들이었고, 그들은 1977년 이 벌판에 지어진 2층 건물에 거주했다. 이들은 죄수들이 "쩌응 엑"에 도착하기 전에 미리 그 수를 통보받고, 땅을 파둔 채 기다리고 있었다. 과거 "S-21"의 간수였던 힘 후이(Him Huy)의 증언에 따르면,(주5) 도착한 죄수들을 처형하는 것도 뗑과 그 부하들의 업무였다고 한다.(주6)
프놈펜에 위치한 "뚜올슬렝 교도소"(S-21)는 테러와 광기, 그리고 잔학성의 작은 우주였다. 이러한 만행은 "캄푸치아 공산당"(CPK: 크메르루즈)이 집권했던 1975년 4월 17일부터 1979년 1월 6일 사이에 저질러졌다. 크메르루즈는 "민주 캄푸치아"(국가명칭)에는 감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전했지만,(주7) "뚜올슬렝 교도소"는 전국에 산재해있던 196곳의 교도소 중 하나였다.(주8) 이곳에서는 14,000명이 살해되고 단 7명만이 살아남았다는 충격적인 통계로 인해, 20세기에 가장 치명적인 교도소의 하나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이러한 통계치는 일치하지 않는다. 최근 "크메르루즈 국제재판 특별법정"(ECCC)은 S-21 교도소장이었던 깡 껙 이우(Kaing Guek Eav: 일명-돗[Duch]) 피고인의 재판(사건번호 제001호)에서 독자적인 통계치를 근거로 활용하기도 했다. ECCC는 보수적인 관점에서 추정한 통계치로서 12,273명(주9)을 채택했는데, 어떤 학자는 20,000명(주10)이란 수치를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생존자 수에 대해서는 더더욱 깊은 연구가 없었는데, 대부분의 서방 언론들은 일반적으로 7명이란 수치를 받아들이고 있다. 이러한 7명이란 생존자 수는 "S-21"에 대해 잔학성의 이미지를 악명높게 부가하면서, 현재까지 30년 이상 반복적으로 되뇌이고 있다.
(사진: DC-Cam) S-21에서 살아남은 7인을 촬영한 사진. 우로부터 쭘 메이(Chum Mey), 로이 니어꽁(Ruy Neakong), 임 짠(Im Chan), 완 낫(Vann Nath), 보우 멩(Bou Meng), 판 탄 짠(Phan Than Chan), 웅 뻿(Ung Pech).
이 "7명"이란 수치는 과거 구-동독의 영화사 "스튜디오 H&S"(Studio H&S)가 1981년 제작한 영화 <엉까>(Die Angkar)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이 영화는 "S-21"의 생존자 7명의 모습이 들어있는 사진을 보여준다. 이후 이 사진이 수많은 주요 작품들에 등장했고, 그러한 작품 중에는 S-21 생존자였던 [화가] 완낫(Vann Nath)이 1998년 저술한 <캄보디아 교도소의 초상화: 크메르루즈 S-21에서의 일년>(A Cambodian Prison Portrait: One Year in the Khmer Rouge’s S-21)도 포함된다. 완낫은 전문가들이나 학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한 주요한 정보원이기도 했다.(주11)
하지만 일부에서는 7명이란 생존자 수가 의도적으로 연출된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도 한다. "7"이란 숫자가 "승전일"(day of victory), 즉 베트남 군대가 크메르루즈 정권을 붕괴시켰던 1월 7일을 비유했다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캄보디아 기록보존센터"(DC-Cam)는 수년 간의 연구 끝에 1975-1978년 사이에 최소 179명 이상이 석방됐음을 추정해낼 수 있었고, 베트남 군대가 1979년 1월 7일에 크메르루즈 정권을 몰아낸 후에도 그 중 23명 정도가 생존해 있었음도 알 수 있었다.
석방된 179명 중 100명은 군인들이었는데, 이들의 현황에 관해서는 크메르루즈 시대의 수많은 문서들 및 "뚜올슬렝 학살박물관"(Tuol Sleng Genocide Museum) 선임 기록보존관 니언 유인(Nean Yin)이 취합한 여러 인터뷰들에 근거한 것이다. 석방자 179명 중 대부분은 현재 소재 파악이 되지 않고 있으며, 1979년 이후에 생존이 확인된 이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1979년 이후에도 생존이 확인된 23명 역시 절반 이상은 행방불명이 되었거나 사망했다. 그 중 현재도 생존해 있다는 소식이 최근에 들어온 몇몇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 응웡 짠팔(Norng Chanphal): "사건번호 제001호" 법정에 증인으로 출두.
- 완낫(Vann Nath)과 쭘 메이(Chum Mei): 타큐멘타리 영화에 출연.
- 보우 멩(Bou Meng): 그에 관한 책이 출판됨.
- 그 외 1명의 생존자: 향후 열릴 예정인 "사건번호 제002호" 재판에서, 시민사회 이해당사자 신분으로 지원.
(주1) "크메르루즈"는 크메르어로 "조직"를 의미하는 "엉까"란 말을 당 지도부나 "캄푸치아 공산당"(Communist Party of Kampuchea: CPK)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했다.
(주2) Dy, Khamboly. A History of Democratic Kampuchea (1975-1979). Phnom Penh: Documentation Center of Cambodia, 2007. p.52.
(주3) 앞의 자료, p.50.
(주4) 현재의 "뚜올슬렝 학살박물관"(Tuol Sleng Genocide Museum)의 기록보존소는 4,186건에 달하는 필사 혹은 타이핑된 자백서들을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DC-Cam도 833건의 자백서를 보유하고 있다.
(주5) "요우 후이"(You Huy)란 별명으로도 불리는 힘 후이(Him Huy)를 후이 스레(Huy Sre)와 혼동해서는 안된다. 후이 스레는 "S-24"라고 불렸던 "쁘레이 사 교도소"(Prey Sar prison)의 소장이었다. 전문가들조차 과거에 이 두 사람을 혼동하곤 했다. 예를 들어, 크레이그 에치슨(Craig Etcheson)은 자신의 저서 <킬링필드 이후: 캄보디아 학살의 교훈>(After the Killing Fields - Lessons from the Cambodian Genocide: Praeger Publishers, 2005)에서, 한 문서를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1977년 7월 23일 날짜로 간수 지휘관인 요우 후이가 서명하고, 'S-21' 부소장이었던 호(Hor)가 확인한 문서이다. 이 문서는 바로 그날 처형된 18세의 죄수에 관한 신상명세를 담고 있는데, 후이가 하단에 적은 수기(手記)를 보면 거의 사후의 기록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또한 오늘 160명의 어린이들을 처형하여, 총 178명의 적들을 죽였음"이라 적혀있다>(p.83) 하지만 에치슨이 인용한 문서(처형당한 사람들, 후이 스레 부분) --- Document Number D01175, DC-Cam Archives, Phnom Penh, Cambodia --- 가 실제로는 "S-24" 소장이었던 후이 스레(별칭: 닌 후이[Nin Huy])가 작성한 것이었고, 문서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S-21" 보안과장이던 힘 후이가 작성한 것이 아니었다.
(주6) Dacil Keo가 Him Huy와 프놈펜에서 가졌던 인터뷰. 2010-12-10.
(주7) 폴 포트(Pol Pot)는 1978년 8월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에게는 감옥이 없을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감옥'이란 말조차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악성 분자들에게는 단지 해야만 할 생산적 과제만이 주어질 뿐이다." --- “벨기에 캄보디아 협회 대표단과 폴 포트의 대화: 1978년 8월 5일"(Conversations of Pol Pot with Delegation of the Belgium Kampuchea Society, August 5, 1978). Document Number D00108, DC-Cam Archives, Phnom Penh, Cambo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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