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가 자 : 최정아
학 교 : 명지대학교
참가년도 : 2002-01-01
참가지역 : Vermont
20살에 내게 찾아온 새로운 기회
강해지기 위해 떠나자!!
울지만 말자!!
이것이 바로 무작정 미국으로 떠난 철없는 나의 참가동기이다. 나는 영어를 100배 늘이고 싶지
도, 돈을 많이 모으고 싶지도 않았다. 단지 하나..강해지고 싶었던 것이다. 집에서 막내인 나는
지난 1년 대학 생활을 하면서 내 자신이 남에게 의지하기 좋아하는 약한 사람이라는 걸 절실히 느
꼈다. 그래서인지 나에게는 더더욱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2002년 1월 10일 ..
인천공항에서 아버지와 오빠를 뒤로한 채 난생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23시간의 거리의 미국
Vermont로 출발했다. 23시간동안 초조함과 긴장됨은 계속 되었고,,잠 많은 내가 정말 단 한시간
도 눈을 부칠 수 없었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의사소통은 될까? 등등..두렵지 않은 것이
없었고, 내 머릿속과 마음속은 답답하기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은 미국이라는 낯선 나라에 발을 닿는 순간부터 현실로 다가왔다. 내가 일하
고 머물렀던 곳은 Vermont 주에 있는 작은 마을 West Dover였고, Mountaineer Inn 이라는 곳에서
웨이트리스와 하우스 키핑을 하는 것이었다. 숙식이 포함되어있는 일이었기에 시간당 6.5$ 을 받
고 일하였다.
도착한 다음날..
부부인 주인아저씨 Ned 와 Royal아주머니를 만나 인사를 하고, 간단한 일 소개와 같이 일할 동료
들을 소개받았다. 모든 것이 새롭고 낯설기만 했다. 시차적응 때문에 3일간의 휴식기간을 주셨는
데, 이 3일이 정말 나에게는 3년이나 되는 것처럼 길고 불편하기만 하였다. 식사하러 내려가면 혹
시나 나에게 질문이나 하지 않을까.. 내가 대답을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 때문에 바보처럼
밥을 거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때 내가 느낀 하나의 무서운 생각..
내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내가 어리광 부리면 받아주는 부모님도, 힘들다고 하면 도와주는 친구들도..심지어는 같은 인종
의 동양인도. 그 어느 누구도 없었다.
오직 나 자신 뿐이었다.
내가 선택한 일이고, 내가 부닥쳐야 만 하는 일뿐이었다.
내가 가장 먼저 부닥친 일 중의 하나는 바로 동료들과 사귀는 것이었다.
그 중 처음으로 사귀게된 친구는 나의 룸메이트 레이첼(호주,20세)이었다. 레이첼은 나와 가장 오
랫동안 같이 있었던 친구였고, 첫인상부터 차가운 느낌을 주어 다가가기가 많이 힘들었던 친구였
다. 그리고 만난 친구는 에반(호주 ,19세) 이다. 에반은 내가 도착한 날 새벽에 프론 데스크에 만
나게 되서 반갑다며 ,같이 일 잘해 보자며 쪽지를 남겨놓은 정 많은 친구였다. 에반은 내가 머물
렀던 동안 가장 편하고 힘이 되었던 친구였다. 그리고..마지막 아담 (미국, 20세) 이다. 아담은
나에게 마치 메니저 같이 무서운 친구였다. 나의 실수를 절대 웃음으로 넘어가지 않는 아담 앞에
서는 나는 항상 긴장하고 있어야만 했다.
이렇게 우리 넷이 이 Inn에 일하는 주 사람이었다. 우리는 27개의 방을 가지고 있었고, 3개의 리
빙룸과 게임룸등 그리 작지 않은 인이었다.
이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나의 3개월 간의 Mountaineer INN 에서의 생활을 본격적으로 말해
보려고 한다.
1월 14일 월요일..
처음으로 배운 것은 하우스 키핑이었다. 2시간동안의 아줌마, 아저씨의 교육을 받고, 전문 하우스
키퍼인 Joyce 할머니 와 Shelby아줌마를 만나 본격적으로 일을 배웠다. 일을 하기 전에는 그냥 청
소하는 거니까 쉽겠지. 했던 나의 생각을 단번에 깨지게 한 일이 바로 하우스 키핑이다. 침대 시
트를 갈고, 화장실 청소를 하고, 방 하나하나 체크를 해가며 빠진 것을 메우고.이런 것들이 물론
전문 지식을 요하는 것은 아니었지만,,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갈수록 독한 세제들로 손도 부르
트고,, 무릎, 허리..아프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하기가 싫다
고 해서 거를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또한 하우스키핑이었다. 정말 매일 한결같이 해야만 하는 힘
든 일이었다.
하지만, 하우스키핑을 하는 동안은 몸이 피곤한 것 외에는 크게 따르는 문제는 없었다. 그렇지
만, 웨이트리스는 너무나 달랐다. 손님들을 직접적으로 만나, 주문을 받고, 손님들의 필요사항을
곧바로 수행하는 일이었기에, 영어는 수단이 아닌, 정말 필수, 기본이었다. 이때부터 나의 고난
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웨이트리스를 하면서 나는 우리 주방장 아저씨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30대 중반인 주방
장 Mike아저씨는 나에게 가장 무서운 분이셨고, 내가 실수를 하면 정말로 심하게 화를 내셨던 분
이셨다. 그런 주방장 아저씨와, 실수 투성이 웨이트리스 내가 만났으니, 주방은 정말 하루도 조용
할 날이 없었다.
나의 실수가 아니었을지라도, 나는 그것을 정확하게 영어로 설명할 수가 없어 그냥 모두다 내 잘
못으로 넘기기 일쑤였고, 주문이 잘못 나간 음식은 내가 다 먹어야 하는 곤욕(?)도 겪어야 했다.
주방장 아저씨에게 혼나고 " 울지만 말자" 라고 했던 내 약속을 몇 번이나 깰 뻔했는지 지금 생각
해보면 열 손가락이 모자를 정도이다. 그 중 하나 평생을 가도 잊어먹을 수 없는 날이 있다. 그것
은 바로 나의 스무 살의 생일..
내가 이곳에 온지 일주일 되는 날이어서 나의 생일인지 그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을 뿐더러 우리
는 이 날이 주말인지라 모두들 바빠서 정신이 없었다. 아침 6시30분부터 70 명에 가까운 손님들
의 음식을 준비하고, 웨이트리스를 시작하였다. 이때 내 또래의 여자들 3명이 놀러왔었는데, 내
가 오늘의 메뉴를 말하자마자 내 영어발음을 듣고 , 내 앞에서 식탁을 치며 웃기 시작하였다. 나
는 너무 무안하여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고, 이 테이블의 주문을 겨우 받은 뒤, 정신 없이 실수
를 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무서운 주방장아저씨의 호된 야단은 말할 것 없이 뒤따랐다.
같은 날 저녁식사 시간이었다. 저녁 일은 오후 5시부터 준비해서, 손님들이 모두 가실 때까지 10
시이고, 11시이고 계속 된다. 사람이 워낙 많았고, 우리는 2명의 웨이트리스밖에 없었다. 한사람
에 8개의 테이블씩 맡게 되어 우리는 정말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에피타이저,
셀러드, 메인요리까지 무사히 수행을 하고, 디저트가 나가는데서 나는 한 테이블을 까맣게 잊어먹
은 것이다. 그때는 이미 다른 테이블은 디저트가 이미 끝난 상태였고, 주방장아저씨는 디저트가
끝났기에 주방을 모두 정리하고 계셨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혼날 것을 각오하고, 주방장 아저씨
의 눈도 보지 못한 채 더듬더듬 이야기를 했고, 주방장아저씨는 너무나 화가 나셨는지 나에게 소
리를 지르시고, 나는 그 앞에서 어찌할 줄을 모르고 내 또래의 동료들이 보는 앞에서 가만히 서있
어야만 했다. 입술을 깨물면서 간신히 눈물을 참고, 다시 손님들 앞에 가서 사과를 하고, 주방장
아저씨께도 계속 사과를 하였다. 이 날 하루는 정말 나에게는 너무나 서러운 생일이었을 뿐더러
달리 보면 나에게 가장 큰 자극을 주는 하루였다. 이 날 이후로 나는 정말 제대로 달라져야 겠다
는 다짐을 했고, 포기하려기 보다 노력하기로 했다.
첫 한 주가 이렇게 힘들게 지나고 나니, 폭풍이 왔다 간 것처럼 시차도 적응되고, 일도 적응되
고,, 차츰 미국생활을 즐길 수 있는 나름대로의 여유가 찾아왔다. 하지만 나는 정말 한순간도 긴
장을 놓칠 수가 없었고, 매일매일 영어 때문에 너무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하지만 우리 인
안에서는 내 맘대로 큰소리로 영어를 연습할 수 있는 곳이 없었고, 나는 혼자 중얼거리거나, 머
리 속으로 생각만 하고 정작 밖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이런 것은 정말 아무 데도 쓸모
없다는 것을 깨닫고, 아침 산책을 결심하였다.
영하 10도 까지도 내려가는 추운 버몬트에서의 아침 산책은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이것
은 나에게 단순한 산책이 아니었다. 나 혼자 영어로 말할 수 있는.. 그 어느 누구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발음이 잘못됐을까봐 조마조마 할 필요도 없는 그야말로 나만의 영어 시간이었
다. 아침 5시 50분이면 졸리고 너무나도 피곤한 몸을 이끌고, 나갔다. 눈이 무릅까지 쌓여있는
길, 살을 여미듯 차갑게 부는 바람에도 다만 5분, 10분이라도 그냥 나가서 한, 두 마디 크게 떠들
다 들어오면, 영어에 너무나 자신감 없는 나에게 정말 조금씩의 자신감이 생기는 듯 하였다. 물
론 이것이 눈에 보이듯 크게 드러난 효과는 아니지만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면 지금 외국인 앞에
서 어떻게든 말할 수 있는 용기의 근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생활에 익숙해지고, 내 생활이 나태해져 여가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결정한 것은 우리 인이 있는 웨스트도버에서 20거리에 있는
Willmington 에 있는 태권도장에 가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이런 작은 도시에 태권도장이 있다는
것이 너무 신기해서 관심만 가지고 있다가, 용기 내서 가보기로 결심을 했다. 가서 관장 님과, 다
른 마음씨 좋으신 아주머니들을 만나고, 한국인이 자기의 도장에 온 것이 처음이라며 공짜로 다니
라고 하셨다.
아버지의 권유로 15세때 2단을 딴 나는 태권도가 나에게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줄은 전혀 몰랐었
다. 그렇게 해서 일주일에 두 번 수요일과, 금요일에 도장을 다녔다. 물론 일이 많은 날 수요일
은 못 갈 때도 있었지만, 금요일은 저녁웨이트리스가 없는 날이라, 항상 갈 수 있었다. 외국 아이
들과, 어른들이 한국어로 숫자를 세고, 어설픈 한국어로 태권도 용어를 쓰는 모습이 나에게는 너
무나 인상적이었고, 여기서는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한국말을 배우는 정반대의 상황이 생겼다.
나 또한 이 사람들에게 모르는 영어도 배우면서 나에게는 일주일의 이 두 시간이 너무나 진귀하였
다. 그래서 결국 부모님께 부탁을 하여 나의 도복과 나의 검은 띠를 두르고, 이 곳 사람들과 같
이 운동할 수 있었다.
이렇게 일주일에 두 번 태권도를 가고, 가끔 가지는 데이오프 날이 오면, 어김없이 근처 Mount
Snow 라는 스키장에 갔었다. 나는 스키장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인에서 일을 하여서 스키장
을 가려면 일반인과 같은 가격으로 가야만 했다. 하지만, 우리 주인 아저씨와 아주머니께서 내가
스키를 탈 수 있도록 , 쿠폰을 마련해 주셨고, 사무실에서 일하는 미쉘 언니가 자기 동생이 못 신
던 스키를 3달 내내 빌려주셨다. 스키장에 처음 가는 것이 처음이었지만, 혼자 가서 다른 미국 사
람들을 만나고, 때론 우리 인의 손님들을 만나 같이 스키를 타고 하면서 상상 못할 만큼 넓은 미
국의 스키장을 느낄 수 있었다.
하루 하루가 너무나 빠르게.. 때로는 너무나 천천히...그렇게 나의 버몬튼의 3개월이 지나가고 있
었다. 때로는 주방장 아저씨의 장난 섞인 칭찬에 하루종일 기분이 좋기도 하고, 같은 또래의 친구
들이 3명이나 있지만, 영어를 잘 하지 못해 소외감도 느끼고, 나의 조금한 기념품에 눈시울을 붉
히던 호주 친구들..나의 실수를 웃음으로 넘겨주시는 손님..나의 실수를 안타깝게 여기셔서 내 앞
치마에 가득 팁을 넣어주시고 가는 손님...등등..버몬트에서의 하루 하루와, 한 명 한 명의 손님
들 ..
또 순간, 순간 느꼈던 나의 감정들 모두 하나도 잊어먹을 수가 없다.
이제 나는 스무 살이다.
스무 살이 된 지금 ...
경험으로 몰랐던 나의 약한 모습들..의외의 나의 강한 모습들을 찾았다. 버몬트에서 떠나기 마지
막날 주인아주머니께서 3개월 동안 무엇을 배웠냐는 질문에.." 돈버는 게 너무 힘들다 " 고 대답
했던 나의 말처럼 내가 번 돈의 소중함은 무엇보다 잘 알았고, 자식을 키우시기 위해 돈을 버시
는 ..자신의 행복을 얻는 듯 자식의 행복을 위해 돈을 버시는 부모님의 소중함은 다시 한번 가슴
속 깊이 새길 수 있었다. 일을 마친 후 50일간의 북아메리카 여행을 하면서 돈버는 것만큼 돈을
절약해서 쓰는 것은 더더욱 힘들고, 여행이 단순히 즐기고, 재미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 또한 알
게되었다.
내가 90일간 일을 하고, 50일간 여행을 하는 약 4개월 반의 시간이 나에게 얼만큼의 가치가 있는
지 나는 지금 평가하지 못한다. 하지만 확실히 달라진 것은 하나다.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자
신감을 얻은 것이다. 힘들고, 앞뒤가 막막한 상황이 와도, 닥치면 해낼 수 있다는 나 자신에 대
한 믿음을 얻었다.
사람에게는 세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고 아버지께서 항상 얘기해주셨다.
스무 살이 된 나에게 달콤한 선물과 행복한 시간들 대신에 눈물겹도록 힘든 타지 생활이 나를 큰
사람이 되도록 만드는 기회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아직도 나의 타지 생활을 끝이 나지 않았다.
지금은 캐나다 밴쿠버 에서 어학연수를 하면서 또 다른 어려움과 문제들이 매일같이 생겨난다. 어
른들께서 나이가 들수록 어려운 일은 더 많이 생긴다고 하는 말이 생각나면서 미국에서의 나의
W&T 경험은 내가 나이 들면서 앞으로 겪을 어려움 들을 대처할 수 있는 방패를 마련한 것 같은 생
각이 든다.
나는 이제 약한 내 모습에 괴로워하고, 쉽게 우는 철없는 십대가 더 이상 아니다. 20대의 시작을
힘든 경험으로 맞이했지만,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나의 이 경험을 내 인생의 첫 번째 맞이
한 성공의 기회로 삼고 싶다.
첫댓글예쁜정아 넓은 세상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고 있다니 참 보기 좋구나 .치열하게 자기 인생을 꿈꾸고 개척해가며 살때지. 하지만 언젠가는 그것도 허무하게 느껴지게 되는 날이 올 때가 있을 거야. 하느님이 허락하신 세상의 기쁨도 맛보면서 영원한 것에도 관심을 가졌으면 좋을 것 같애
첫댓글 예쁜정아 넓은 세상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고 있다니 참 보기 좋구나 .치열하게 자기 인생을 꿈꾸고 개척해가며 살때지. 하지만 언젠가는 그것도 허무하게 느껴지게 되는 날이 올 때가 있을 거야. 하느님이 허락하신 세상의 기쁨도 맛보면서 영원한 것에도 관심을 가졌으면 좋을 것 같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