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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려유물 - 놋 주전자
유 물 명 칭 : 놋 주전자
국적, 시대 : 한국(韓國), 고려(高麗)
재 질 : 금속(金屬), 동합금제(銅合金製)
높 이 : 17.4cm
용도기능: 식(食), 음식기(飮食器), 음식(飮食), 주전자(酒煎子)
높이 17.4cm의 이 놋주전자는 고려 사람들의 정교한 청동 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2.고려의 차[茶] 문화
귀족과 승려의 차 마시기
고려에서는 차를 많이 마셨다. 국왕과 귀족, 승려들이 차를 즐기는 주된 계층이었다. 백성들이 공납으로 차를 바쳤던 것으로 보아 차의 생산과 소비는 대규모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려 지배층은 중국 다도(茶道)의 고전인 다경(茶經)을 읽을 만큼 고려 지배층은 차 마시는 데 익숙하였다.
이슬 기운 하늘 향기가 함께 일어나는구나
고려인들이 마신 차는 중국산과 국산, 가루를 내어 뜨거운 물에 풀어먹는 것과 잎을 끓은 물에 끓여 우려먹는 것이 있었다. 중국차는 송나라 황제가 선물로 보내거나 송나라 상인에게 구입하였다. 고려의 차는 남쪽에서 산출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화계에서 채취한 것이 좋았던 것 같다.
좋은 차는 좋은 다구(茶具)에서 나온다
차를 마시는데 필요한 도구로는 불을 때는 풍로, 물을 끓이는 솥, 그리고 차를 담아 마시는 잔이나 사발을 들 수 있다. 가루차는 뭉친 단이나 찻잎을 가는 다마가 필요하였다. 이 다구들은 붉은 다상(茶床)에 진열되었다.
마시자 시원하여 골수를 바꾸는 듯
'석지조'란 '돌로 만든 못 부뚜막'을 뜻한다. 돌은 파서 차를 끓여 마실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차를 마시기 좋은 명승지에는 석지조가 만들어졌다. 석지조는 고려 차문화의 고아한 운치를 잘 알려준다.
고증관련
텍스트 검수
이규식 (주)하우스바리(대표이사), 2002년 3월 사학 전공 박사학위
채웅석 카톨릭대학교 국사학과(교수), 1999년 2월 고려시대사 전공 문학박사학위
이종서 울산대학교 인문대학(교수), 한국중세사전공 문학박사학위
이미지 검수
정완진 서울대학교 의류학과(강사), 한국복식 전공 박사학위
강인선 (주)거북이북스/청강문화산업대학(대표이사/겸임교수), 애니메이션 전공 석사학위
이종서 울산대학교 인문대학(교수), 한국중세사전공 문학박사학위
3.고려시대 원나라식, 고고관 착용 공민왕비
시대 : 고려말(AD 1354)
옷해설
고고관은 전형적인 몽고 복식임에도 불구하고 고려 상 류 사회가 몽고복식을 전적으로 수용할 수 밖에 없었 기 때문에 고려왕비(高麗王妃)가 제사 지낼때도 원나라 상류층에서 입었던 고고관을 착용하게 된 것이다.
배경
몽고의 침략으로 고려는 원나라의 속국이 되었고 원나라 왕실의 속국이라는 정치적인 영향외에 몽고의 문화적인 압력 때문에 고려 상류층은 몽고 복식 일색으로 변화할 수 밖에 없었는데 역시 <고려도경>에 보면 고려의 원나라의 고려에 대한 강력한 동화정책(同化政策)의 결과로 고려말 고려의 상류계층은 거의 전적으로 몽고복식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원과의 국혼관계로 원의 공주가 고려의 왕비가 됨으로 궁중관복에 몽고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4.고려 호족
고려전기 - 호족사회의 성립과 배경>
신라 말에 흥기한 호족(귀족)도 대토지 소유라는 재력을 갖고 있었다. 사전(寺田) 및 둔전(屯田)의 사령화(私領化), 정전(丁田)의 사전화(私田化) 등의 추세에 의하여 그 지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리고 귀족, 관료들에게 지급되었던 식읍(食邑), 녹읍(祿邑)도 수취체제의 혼란으로 호족들의 전장(田蔣)으로 되었으며, 그들은 장두(蔣頭)라는 관리인까지 파견하기도 했던 것이다. 호족들은 사병(私兵)을 중심으로 한 무력도 가지고 있었다. 지방호족들의 사병은 같은 친족들도 있었겠지만 주로 유민이나 일정한 지역의 주민이 모집 내지 징집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들 사병과는 의제가족적(擬制家族的)인 관계가 유지되었으리라 추측된다. 기록에 보면 「족(族)」「당(黨)」 등으로 표현되 자들이 사병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한편 그들은 중앙과 비슷한 관부 조직을 가지고 지역민들을 통치하고 있었다. 그들은 당대등(堂大等), 대등(大等)이란 직함을 가지고 병부(兵部), 창부(倉部)와 같이 중앙과 동일한 명칭의 부서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와 같은 통치기구는 일률적인 것이 아니고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달랐을 뿐만 아니라 신라시대의 주치(州治)나 소경(小京)의 일부에는 「학원(學院)」이 설치 운영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 지역에 유력한 호족들이 많이 있었던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중국의 경우와 같이 나말려초의 호족도 경제력은 물론 권력, 무력을 갖추고 문화의 독점력까지 누리고 있는 존재였다. 즉 지방의 유력한 족단(族團)이거나 실력자였다. 이러한 호족은 나말에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여 고려왕조를 성립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왕조 성립 후 호족들은 두 가지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하나는 중앙으로 진출하여 문벌귀족이 되었고 다른 하나는 지방에 남아있으면서 왕권 강화와 더불어 향리화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지방에 남아 있던 향리들도 과거나 천거를 통해 중앙관리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은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중앙에서 고위관직에 오르는 데에도 별다른 제약을 없었다. 고려시대 문벌귀족의 저변에도 호족의 후신이라 할 수 있는 향리의 세계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호족의 역사적 성격도 중국의 경우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 하겠다. 요컨대 중국사나 한국사를 막론하고 호족은 대토지 소유라는 경제력을 근간으로 하여 권력이나 무력, 그리고 문화의 독점력까지 갖춘 지방의 유력한 족단이나 그 일원을 가리키는 용어라고 하겠다. 하편 호족은 고대사회 속에서 왕권과 대립하는 일면 타협하기도 하는 존재였다. 그러다가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여 새로운 사회의 건설에 큰 역할을 하였다. 새롭게 재편된 왕조체제 속에서도 문벌 귀족의 저변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호족의 개념과 성격이 대략 이렇다고 할 때 나말려초의 사회상황을 논하는데 호족이란 용어의 사용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 하는 문제를 따져 볼 필요가 있다. 논자에 따라서는 이 용어의 사용이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있기 때문이다. 호족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적당치 않다는 것이다. 또 나말려초 사회변동의 담당자층을 호족 대신에 「호부층(豪富層)이라는 용어로 표현한 경우도 있었다. 그 이유는 호족에 대한 종래의 내용 규정들이 소위 족단이라는 혈연적인 기반, 정치적으로는 낙향한 귀족이나 촌주 등 과거 수장층과의 계보적 연결,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공동체원에 대한 공납제적 지배라는 면에 중점을 두어 사용해옴으로써 새 시대를 향한 변혁세력으로서의 성격보다는 오히려 구시대적인 성격이 강조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호족이라는 일종의 단체 개념보다는 호부(豪富)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개별적인 존재로 수렴되고 다양한 사회 경제적 분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라 하고 있다.
5.고려유물 - 놋숟가락
유물명칭: 놋숟가락
국적/시대: 한국(韓國) / 고려(高麗)
재질: 금속(金屬) / 동합금제(銅合金製)
크기 가운데 것 길이(길이) : 30cm
용도기능: 식(食) / 음식기(飮食器) / 음식(飮食) / 시저(匙箸)
출토지: 인종(仁宗) 장릉(長陵) 출토(出土)
소장기관: 국립중앙(國立中央)박물관
식사를 할 때 반드시 필요한 용기로 숟가락은 밥이나 국을 떠먹을 때, 젓가락은 반찬을 집어 먹을 때 각각 사용된다. 숟가락의 형태는 자루가 길고 음식을 뜨는 부분이 약간 패어 있으며, 자루 윗부분에는 칠보나 각종 문양을 새겨 장식한 것이 많다. 또한 젓가락은 긴 막대형으로 생겼으며 위의 손잡이 부분에는 숟가락처럼 칠보나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이러한 수저는 대개 은 · 놋쇠 · 백통 등으로 만들었다. 고려에서는 수저의 손잡이 부분이 넓어지며 휘어있고 앞부분은 세로로 길게 만들어져 있다.
6.고려무기 - 투구[兜]
유물명칭: 투구(兜)
국적/시대: 한국(韓國) / 고려(高麗)
재질: 금속(金屬) / 철제(鐵製)
크기 직경(직경) : 25cm
용도기능: 군사(軍事) / 장비(裝備) / 갑주(甲胄) / 주(胄)
출토지: 평안북도(平安北道) 구성시(龜城市)
갑(甲)은 갑옷, 주(胄)는 투구를 이른다. ‘갑옷’은 전쟁에서 화살 ·창검을 막기 위해 쇠나 가죽의 비늘을 붙여서 만든 옷이며, ‘투구’는 적의 무기로부터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머리에 쓰던 쇠모자이다. 갑주는 전투시에 전사(戰士)들이 몸을 지키기 위하여 착용하던 무구(武具)인데, 미개인도 야수의 가죽으로 몸을 감싸 입고 적의 공격으로부터 몸을 지켰다. 한국에서 갑주(甲胄)의 사용은 삼국시대로 들어서면서부터였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볼 수 있는 기마(騎馬)의 무장(武將)은 괘갑(甲)을 착용하였는데, 양식은 중국 북위(北魏)의 토우(土偶:흙으로 만든 인형)나 천무상(天武像)의 것과 비슷하다. 걷고 있는 모습의 병졸은 짧은 갑옷에 허리받이를 두르고 맨손에 칼과 방패를 쥐고 있다. 투구는 주발을 엎어 놓은 형상인데, 앞에는 차양(遮陽)이 있고 후두부(後頭部)는 목의 둘레를 싸게 되어 있으며, 정수리 부분에 술같이 생긴 장식 또는 깃털 모양의 장식이 달려 있다. 남한에서도 이와 비슷한 괘갑(甲)과 단갑(短甲)이 사용된 듯한데, 고대 신라 고분인 경주 금관총(金冠塚)에서는 쇠에다 구리를 도금한 작은 갑옷미늘과 금동판(金銅板)의 작은 갑옷미늘이 출토되었고, 대구 달성고분(達城古墳)에서는 금동제의 팔꿈치받이가 출토되었다. 어느 것이나 중국 남북조의 형식을 답습한 것이라 생각된다.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 중기까지 중국 당송(唐宋)의 갑제(甲制)를 본받은 괘갑이나 포백갑(布帛甲)이 쓰였던 사실은, 당시 고분의 석조상(石彫像)이나 불교미술이 그것을 보여 주고 있다. 13세기 이후는 원(元) ·명(明) ·청(淸)의 갑제에 의한 면오갑(綿甲:솜두루마기의 갑옷)을 입었고, 투구는 정수리 부분이 뾰족하고 주발 모양을 한 첨두철발형(尖頭鐵鉢型)의 몽골식 쇠투구 ·가죽투구가 성행하여, 이것이 조선 후기까지 이어졌다.
기록을 보면, 《양서(梁書)》에 고구려에는 개갑(鎧甲)이 있어 전투를 연습하였다 하였고, 《당서(唐書)》에는 당 태종이 명광개(明光鎧) 1만벌을 얻었다고 씌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총융청(摠戎廳)에 여러 종류의 갑옷이 있었는데, 다홍대단도금동엽(多紅大緞塗金銅葉)갑주 ·모단피(冒緞皮)갑주 ·두석린(豆錫鱗)갑주 ·화단피(禾緞皮)갑주 ·남대단철(藍大緞鐵)갑주 ·피출(皮出)갑주 ·철갑주 ·환(環)갑주 ·다홍성성전도금동엽(多紅猩猩氈塗金銅葉)갑주 ·각색 목면피(木綿皮)갑주 ·각색 장단피(緞皮)갑주 ·백단피(白緞皮)갑주 등으로 철제 ·피혁제 ·포백제 등에 다양한 무늬를 새겨 넣고 여러 비단으로 겉을 꾸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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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재경군, 숙제 조사를했을경우 저작권 문제 때문에 출처를 꼭 써줘야합니다. 수정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