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2. 8. 25. 19:02
■ 이덕손묘지명(李德孫墓誌銘)
[시대] 고려
[관향] 합천
[연대] 1301년(충렬왕27년)
[문화재지정] 미지정
[탁본문] 현존하지 않음
[찬자/서자/각자] 시한향(是漢鄕) / 미상 / 미상
[개요]
묘지명은 안정복(安鼎福)이 편찬한 『잡동산이(雜同散異)』 제 4책(아세아문화사)에 수록되어 있다. 1301년(충렬27)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 시한향(是漢鄕)이 작성하였다.
묘지명의 주인공 이덕손(李德孫 : ?~1301년)은 합주(陜州 : 지금의 경남 합천) 사람으로서 뒤에 첩(帖)으로 이름을 고쳤다. 증조부는 미상이며, 조부는 익단(益端)이다. 아버지는 순목(淳牧)이며, 어머니 하양군부인(河陽郡夫人) 이씨(李氏)는 문비(文庇)의 딸이다.
--------------------------------------------------------------------------------------------------------------------------------------------------------
찬성사치사 장숙공 이덕손묘지명(贊成事致仕 莊淑公李德孫墓誌銘)
이씨(李氏)는 공의 성씨이며, 합주(陜州 : 지금의 경남 합천)를 고향으로 하여 태어났다.
지금 임금으로부터 신임을 얻은 이가 누구인가? 오직 상국(相國 : 재상)인 장숙공(莊淑公) 뿐이다.
공의 이름은 덕손(德孫)이다. 뒤에 첩(帖)으로 이름을 고쳤다. 증조부의 이름은 ▨이다. 조부 익단(益端)은 합주(陜州)의 사호(司戶)이다. 아버지 순목(淳牧)은 벼슬이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에 이르렀다. 아버지는 운인(韻人 : 근대의 시인)이다.
어머니 하양군부인(河陽郡夫人) 이씨(李氏)는 문비(文庇)의 딸이다. 어머니 또한 합주 사람이다.
복야(아버지 순목)는 아들이 다섯이다. 모두 벼슬을 했는데, 공은 막내아들이다.
공은 성품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정밀하고 밝았다. 약관의 나이에 초경군(草經郡 : 지역 미상)의 수령을 지냈다. 원종(元宗) 9년(1268) 유성(柳聖)과 김준(金俊) 등의 목을 베었다. 기묘년(충렬5, 1279) 판도총랑(版圖摠郞)으로 동경유수(東京留守)로 부임하였다.
지금의 임금(忠烈王) 8년(1282) 일본을 정벌하였다. 신묘년(충렬17, 1291) 서북면지휘사(西北面指揮使)가 되어 나갔고, 응양군상장군(鷹揚軍上將軍)으로 오랑캐 땅에 머물렀다. 3년의 임기가 차자 삼사우사(三司右使)로 옮겼다. 공이 병을 이유로 내세우자, 임금은 어쩔 수 없어 벼슬에 물러나 은퇴하게 하였다. 당시 나이는 61세였다.
밀직부사(密直副史) 최서(崔瑞)와 판서학사(判書學士) 최알(崔謁) 등이 축하하였다. 대덕(大德) 5년(충렬27, 1301) 7월 집에서 별세하였다. 대덕산(大德山) 옥동(玉洞)의 동쪽 기슭에 장례를 지냈다.공은 유성일(庾成一)의 딸과 혼인하여 1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지금 우사간지제고(右司諫知制誥)인 설(偰)이다. 딸은 송린(宋璘)에게 시집을 갔다. 송린(宋璘)은 상장군 판시찰사(上將軍 判是察司) 분(玢)의 둘째 아들이다. 대덕(大德) 5년(충렬27, 1301)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 시한향(是漢鄕)이 짓다.
[原文]
贊成事致仕莊淑公李德孫墓誌銘
夫李其姓鄕其陜而生今世得於君者誰歟惟相國莊淑公諱德孫後改帖者是也曾祖諱祖益端爲州司戶及考淳牧官至尙書右僕射近代韻人也妣河陽郡夫人李氏文庇之女也亦陜州人僕射有子五人皆列簪裾公乃季子也公性聰敏而精明弱冠宰草經郡元王九年誅柳聖金俊等己初以版圖捴卽赴東京留守方今八年征日本辛卯出爲西北面指揮使以鷹揚上將首居戎秩三歲遷三司右使公稱病上不得巳仍今致仕時年六十一密直副史崔公瑞判書學士崔謁等以始賀之大德五年七月薨于私第葬于大德山玉洞之東麓公娶庾成一之女生一男一女男今右司諫知制誥偰女適宋璘大將軍判提察司玢之二子也大德五年 翰林學士承旨是漢鄕誌. <끝>
-------------------------------------------------------------------------------------------------------------------------------------------------------
■ 이덕손처 유씨묘지명(李德孫妻 庾氏墓誌銘)
[시대] 고려
[본관] 무송(茂松)
[관향] 경남 합천
[연대] 1326년(충숙왕13년, 원(元) 진종(晋宗) 태정(泰定) 3년)
[문화재지정] 미지정
[탁본문] 탁본문 현존하지 않음
[찬자/서자/각자] 미상 / 미상 / 미상
[개요]
묘지명은 안정복(安鼎福)이 편찬한『잡동산이(雜同散異)』제4책(아세아문화사)에 수록되어 있다.
1326년(충숙왕 13) 작성되었으나, 작성자는 미상이다.
묘지명에 따르면 부인 유씨(庾氏, 1247~1326)는 강양(江陽) 출신 이덕손(李德孫)의 처이다.
손은 뒤에 이름을 첩(帖)으로 고쳤다. 마지막 벼슬은 찬성사(贊成事)이며, 시호는 장숙공(莊淑公)이다. 아버지는 중고(中古) 때의 명유(名儒)인 순목(淳牧)이다.
유씨 부인의 증조부는 경현(敬玄), 조부는 홍(弘), 아버지는 해(垓)이다. 옛 이름은 세방(世方)이다. 어머니는 경원 이씨(慶源李氏)로 장(長)의 딸이다.
부인의 품성은 부드럽고 고요하다. 남편으로 올바르고 순리로서 섬겨 부인으로서의 도리를 다하였다.
이덕손이 별세한 후 혼자서 26년간을 살면서 착한 일을 닦는 것을 일로 삼았다.
무송군대부인(茂松郡大夫人)에 봉해졌다.
참고로 남편 이덕손의 묘지명이 있다.
--------------------------------------------------------------------------------------------------------------------------------------------------------
무송군대부인 유씨 묘지명(茂松郡大夫人 庾氏墓誌銘)
증조부 경현(敬玄)은 우복야 한림학사승지(右僕射 翰林學士承旨)이다. 조부 홍(弘)은 추밀원좌승선 예부시랑 보문각직학사(樞密院左承宣 禮部侍郞 寶文閣直學士)이다. 아버지 해(垓)의 옛 이름은 세방(世方)이며, 추밀원부사 우산기상시(樞密院副使 右散騎常侍)이다.
해(垓)는 경원이씨(慶源李氏)를 부인으로 맞이했다. 부인의 아버지 장(長)은 용호군 상장군(龍虎軍 上將軍)이다. 부인은 강양(江陽) 출신인 이덕손(李德孫)에게 시집갔다. (덕손은) 뒤에 이름을 첩(帖)으로 고쳤다.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역임하면서 훌륭한 공적이 많았다. 벼슬은 지도첨의부사(知都僉議府事)에 이르렀다. 노년에 찬성사(贊成事)로서 별세하였다.
시호는 장숙공(莊淑公)이다. 공의 아버지 순목(淳牧)은 우복야 한림학사승지(右僕射 翰林學士承旨)이다. 중고(中古) 때의 명유(名儒)이다. 유씨(庾氏)와 이씨(李氏) 양가는 명망있고 훌륭하여, 으뜸으로 꼽히는 집안이다.
부인의 품성은 부드럽고 고요하다. 남편을 올바르고 순리로서 섬겨 부인으로서의 도리를 다하였다. 이씨(덕손)가 부귀를 지키고 위태롭거나 지나치지 않았던 것은 부인의 내조 때문이다. 이씨가 별세한 후 혼자서 26년간을 살면서 착한 일을 닦는 것을 일로 삼았다.
부인은 1남 1녀를 낳았다. 아들 설(偰)은 지금 중대광 첨의찬성사 상호군(重大匡 僉議贊成事 上護軍)이다. 화성(華城) 지씨(池氏)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부인의 아버지 윤보(允輔)는 시호가 장렬공(莊烈公)이다. 아들 두 명을 낳았다. 딸은 밀직사지신사국학대사성(密直司知申事 國學大司成)인 여량(礪良) 송인(宋隣)에게 시집갔으나, 먼저 죽었다.
(인의 아버지) 진(珍)은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또한 우리나라의 빼어난 인물이다. 부인은 은총을 받아 무송군(茂松郡)에 봉해졌는데, 아들이 귀하게 되어 거듭 봉해져 대부인(大夫人)이 되었다. 따뜻한 정으로 가르치니 설(偰)도 자못 부지런하고 총명하였다.
대덕산(大德山) 동쪽 기슭의 선영(先塋) 곁에 선적사(禪寂寺)라는 원찰(願刹)을 짓고, 명복과 복을 비는 제사를 지낸지 몇 년이 되었다. 부인은 나이 80세인 태정(泰定) 3년 병인년(충숙왕 13, 1326) 9월에 병이 들었으며, 28일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승려를 불러 머리를 깎고 목진(目眞)이라 이름을 지었다.
10월 7일에 정원리(正元里) 집에서 조용히 별세하였다. 옆에서 모시는 자도 깨닫지 못했다. (남편인) 장숙공(莊淑公) 무덤 곁에 장사를 지냈다. 큰아들 상공(相公)과 나는 문정공(文靖公)의 문하로 서로 깊이 신뢰하였기 때문에 묘지명을 부탁하였다.
명(銘)에 이르기를, 유씨의 본가는 면면히 이어온 집안이지만,
이 씨에게 시집간 뒤로는 어진 아내가 되었도다.
남편을 도와 이루게 하고 잘 따라 자애스러운 어머니가 되었도다.
어머니로서 빛남이 있고, 자식들이 효도하는데 짝이 없을 정도이네.
하늘 또한 장수를 하게 했으니,
어머니여 아들이여 삼한의 으뜸이라 칭송할 만 하도다.
돌에 새겨 영원히 전하려 하노라.
--------------------------------------------------------------------------------------------------------------------------------------------------------
[原文]
■ 茂松郡大夫人庾氏誌銘
曾大父諱敬玄右僕射翰林學士承旨大父諱樞密院左承宣禮部侍郞寶文閣直學士父諱垓舊曰世方樞密院副使右散騎常侍垓娶慶源李氏父諱長上護軍上將軍夫人年若干適李氏系出江 諱德孫後改曰帖凡中外所歷多有績官至知都僉議府事臨老以賛成事放笏及卒謚曰莊淑公父諱淳牧右僕射翰林學士承旨中古名儒庚李兩家皆 顯世 甲乙者夫人 性柔靜其事 義以順之所盡婦道故李氏之能守富貴不 者夫人以助☐耳李氏卒後孀居二十六年常以修善爲事也夫人生一男一女男曰偰 重大匡僉議賛成事上護軍娶等城池氏父諱允輔謚莊烈公有子二人女適礪良宋氏諱璘密直司知申事國學大司成先沒父諱珍僉議中賛亦三韓國華宗也 夫人私封茂松郡以子 累封爲大夫人於其温淸偰頗有勤因敎誓就大德山東麓先塋之側構一願刹曰禪寂薦冥祐己有年矣夫人年八十泰定三年丙寅九月輪 至二十八日洗浴更衣請僧剃據 名目其十月七日薨于正元里之私第亡逝也修然侍側者不之覺也葬于莊 公之兆次長子相公與予同出文鎭公之門下 信己熟均承 之銘之曰庚氏本家 聯之後自奴隴西家 與奴賛成好述賛成並母母儀兒子孝無天亦何年九其壽母兮子兮三韓 首刻于貞珉用傳不迫封三韓國大夫人撰誌人不記其爲. <끝>
[문헌자료 : 『雜同散異』 제4책]
[참고내용]
잡동산이(雜同散異)는 조선 시대의 학자 안정복(安鼎福)이 지은 잡기(雜記). 경(經), 사(史), 자(子), 집(集)에 대한 글을 뽑아서 모으고, 세상에 떠도는 여러 이야기들을 적어서 엮은 책이다. 모두 53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