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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鎭海) 불모산(佛母山,802M)을 가다.
글 쓴 이 都 寅 高 枓 永
1월27일, 새벽 하늘은 잔월효성(殘月曉星)으로 빛나고, 날씨는 고요하고 포근하도다.
절기(節氣)는 소한(小寒) 대한(大寒)을 지나고, 입춘(立春)을 향해 달리니... 무자년(戊子年)의 봄은 여느 해보다 빠르게 오는 것 인가?
신년(新年) 들어 첫 산행이다. 차에 오르니 처음 오신 분들이 너무 많아서 되려 분위기가 낯설 정도이다. 잔치가 많아서 인가? 정회원님들의 참석이 많이도 부진하다.(35명)
현풍 휴게소에서 간단한 조반을 드시고는 곧장 내달아, 진해시 자은동 초등학교 출발기점에 이르니 시계는 9시 45분을 가르킨다.
언덕위로 여러 통나무 계단을 올라 황량(荒凉)한 텃밭 공지(空地)에서, 최대장의 구호아래 간단한 준비운동으로 몸을 푼뒤 일렬로 걸어 오르니... 날씨는 화창하고 포근하여 봄 나드리를 나온 것 같으다.
왼편 언덕 아래로 저만큼 초등학교 운동장에는 조기 축구로 분주한 장정들 10여 명이 보이고, 이따금씩 새벽 등산을 마치고 산에서 내려 오는 몇 몇 사람들을 제(除)하고는 비교적 조용한 분위기다.
10여 분을 걸어 오르니 등산로 옆으로는 녹차(綠茶)나무를 심어 가꾸어 놓았으며, 추운 날씨에도 유난히 푸른 빛깔을 띄고 있어 보기에도 상큼하다.
안내판에 진해시에서 80여 톤의 녹차나무를 실어다 심었으며, '산불예방 방지턱'의 효과도 있고, 진해시민들은 누구나 때 맞춰 녹차를 채취해도 좋다고 적혀있다. (5월,7월,9월에 많이 채취하는데 그 중에서도 5월에 채취 하는 것이 가장 좋다함)
녹차나무 뒤로는 측백(側柏)나무도 많이 심어져 있어 영문을 몰라 했드니, 자라나는 청소년들을 위해서 그네들의 학습장으로, 또 건강에 좋다는 ‘피톤치드(산림욕의 효용,근원:소나무나 잣나무보다 월등히 많다함)’를 많이 공급하기 위해서 심어 놓았다고 쓰여 있다.
시민들을 위해, 자라나는 청소년들을 위한, 진해시 공무원들의 정책(政策)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대학(大學)에 “정유구어민사(政惟救於民事:정치는 오로지 백성을 구하고 섬기는데 있다.)”라고 한 말이 이 곳에서 실천되고 있음을 봅니다.
어디 그뿐인가, 등산로 주변에는 체육시설이며 벤취(긴의자)들을 배치 해 놓아 이 곳을 찾는 모든분 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으니... 진해시(鎭海市) 앞으로 펼쳐지는 넓은 바다의 여유로움이 시민들의 마음을 넉넉하게 하는가 봅니다.
녹차향기, 솔향기, 측백향기를 맡으며 20여 분을 걸어 오르니 조그마한 시루샘터가 보이고, 주위로는 깨끗이 정돈되어 등산객을 위한 배려(配慮)가 이만 저만이 아니다.
한바가지의 물로 목을 축이니 세속의 찌든 마음이 다 씻어 지는 듯... 온 몸이 다 시원하구나! 잠시 휴식하고 다시 오르니 선두는 얼마쯤 갔는지 짐작키 어렵고, 필자 주위로는 노장 서부장님, 정의석 부회장님, 디카맨 황재덕 부회장님, 박태옥 회원님 등 이 일렬로 오르신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20여 분을 더 올라 고개마루에서 잠시 쉬는데 주위를 조망(眺望)하기에는 더 없이 좋다.
동쪽으로는 가덕도와 연안의 섬들이 올망 졸망 한폭의 그림같고, 남쪽으로는 천자봉(天子峰,502m)이 우뚝 솟아 바다를 연모(戀慕)해 달리는 천마(天馬)의 모습이다. 서쪽으로는 진해만(鎭海灣)의 모습이 아스라이 펼쳐지고, 저만큼 깊숙한 해안가 한편으로는 해군사관학교로 짐작되는 곳이 보인다.
진해시(鎭海市)는 해안가를 중심으로 빙둘러 산을 등지고 바다를 바라보며 정겹게 모여 사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출발기점인 자은동, 풍호동(豊湖洞) 일대는 신흥도시로 발전해서 인지 새로 지은 고층의 아파트 빌딩들이 숲을 이루고, 충무동, 여좌동(餘佐洞), 태백동 일대는 오래전에 형성된 시가지라 번화하게 보이면서도 높은 빌딩들이 그리 많지는 않아 보인다.
해안도시를 중심으로 진해만(鎭海灣)에는 소죽도(小竹島), 대죽도(大竹島)가 동그스럼 하니 쟁반처럼 물위에 떠 있어... 진해만의 푸른 공간을 절묘하게 수(繡)놓고 있으며...
고절산(191m) 끝으로는 소율도(小栗島), 대율도(大栗島)가 부도(釜島)와 화도(花島)로 빙 둘러 이어져 보이니... 수 수만년 전에는 모두가 육지였나 보다.
임진란(1592년) 당시에는 수군(水軍)의 이름으로 명성을 떨쳤던 후예(後裔)들이 오늘날에는 해군(海軍)의 이름으로 우리의 바다를 지키고 계시니... 5,000만의 국민들은 든든 합니다 그려!
다시 북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웅산(熊山,곰메바위)으로 가는 앞산이 절묘(絶妙)하다. 층층으로 나무계단을 수십층으로 놓여 있어 보기에도 좋고, 등산객에게는 안전의 효과를 최대한 고려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기념촬영을 하느라 분주하고 분주하도다! 몇 몇 회원님들에게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 여러 계단을 올라 봉우리 정상에 이르니, 곰메바위(熊山,653m)가 저만큼 맞은편에서 우뚝솟아 하늘을 향해 포효(咆哮)하고 있도다!
천지자연의 조화로 생겨 막 피기전(前)의 연화봉(蓮花峰)이요! 만세(萬歲)의 웅산암(熊山巖)이로다!
적당한 거리에 곰메바위 주위로는 거의 민둥산이라, 그 기상이 한층더 웅혼하고 장엄하게 보이도다! 모두들 감탄에 감탄을 연발하면서 기념촬영에 여념이 없다.
10여 분을 더 걸어 가까이서 안내판을 보니, 신라때는 국태민안(國泰民安)을 비는 제사를 지내던 명산이요, “웅산신당(熊山神堂)”을 두어 춘추로 제를 올렸다 하고, 근대에는 고종황제 비(妃) 명성황후께서 세자(순종)를 책봉하고, 세자의 무병장수(無病長壽)를 비는 100일 산신제를 드렸다고 적혀 있다.
선채로 간단한 예(禮)를 드리고 물러나 적당한 거리에서 김광남 사장님, 황재덕 부회장님, 이태만 총무님 등 여러명 이서 곰메바위를 감상하며 가져온 과일들을 나누어 드신다. 얼마를 쉬었던가?
포근한 날씨라고는 하나 고산(高山)의 기후는 달라서 한기(寒氣)가 다 느껴진다. 오래 오래 머무르고 싶은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불모산(佛母山)을 향해 나아 갑니다. 이제부터는 능선길이라 걷기도 한결 수월하고, 왼편으로는 진해시가지 와 바다, 북으로 펼쳐지는 산촌의 풍경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어 몸과 마음이 다 시원합니다.
능선길 좌우로는 낙엽수들이 많아서 철쭉, 싸리나무, 굴참나무, 낙엽송 등 이름모를 나무들이 싻눈을 감춘채 봄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듯... 호오이~ 호오이~ 낙엽을 밟으며 20여 분을 걸어 웅산(熊山,709m)에 이른다.
웅산은 거대한 바위봉이 이름에 걸맞게 곰이 웅크리고 앉은 모양이다. 정상은 생각외로 평평해서 많은 사람들이 쉬어 갈 수 있는 곳이라. 도착 하는데로 준비한 도시락으로 삼삼오오 모여앉아 시장끼를 달래신다.
1월의 날씨 답지않게 포근하고 고요해서 겨울 산행 날씨로는 더 없이 좋으며, 사방의 경치를 한눈에 볼 수 있어 더욱 좋다.
점심후 잠시 휴식하며 사방을 둘러보니, 서북쪽으로는 창원시가 바둑판처럼 반 듯 반듯하게 열지어 보이고, 북동쪽으로는 장유면이 저만큼 떨어져 김해시의 넓은들 한편을 자리하고 있다.
이곳 불모산(佛母山)은 백두대간상의 지리산 부근에서 남동쪽으로 진주의 옥산, 태봉산, 무선산, 백운산을 거쳐 가야의 여항산, 서북산을 지나 마산의 무학산, 창원의 천주산을 거쳐 이곳 불모산(802m)에 이르고, 다시 굴암산(663m), 보배산(479m)을 거쳐 남해 바다에 그 맥을 떨구고 있으니... 이름하여 낙남정맥(洛南正脈)이라고 한다.
행정상으로는 불모산을 경계로 하여 서남으로는 진해시, 북서쪽으로는 창원시, 동쪽으로는 김해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이 곳은 그 옛날 6가야(금관가야, 아라가야, 고령가야, 성주가야, 대가야, 소가야) 중에서 금관가야의 역사를 더듬어 볼 수 있는 곳이다.
AD 42년 수로왕이 금관가야를 세우고 48년에 인도 아요디(아유타) 왕국에서 건너온 허황옥 공주를 맞아 들여 결혼한 곳이 명월사터(明月寺址)라 하며... 그때 함께 들어온 공주의 오빠 장유화상이 지은절이 용지봉(743m) 아래 장유암(長遊庵)이라 한다.
이 밖에도 가야와 수로왕에 관련된 지명은 많아서, AD 48년에 공주를 맞이한 곳이 진해시 가덕도 선착장 주위에 있는 망산도(望山島)라 하고, 신어산 기슭에 은하사(銀河寺)도 장유화상이 지었다고 전해 오며...
김해시에는 수로왕릉을 비롯하여 허황옥 왕비릉, 2대 거등왕께서 부모님의 은혜를 기리는 뜻에서 지었다는 무척산의 모은암(母恩庵)이 있고, 구지봉(수로왕탄생설화가 있는곳), 초선대(招仙臺) 등 이 있다.
무엇보다 김해패총(金海貝塚:조개무덤)에서는 ‘화천(貨泉)’이라고 하는 엽전이 발견되었으며, 이는 서기 14년 중국에서 발행된 것이라 한다.
이웃하여 창원시내에 있는 성산패총(城山貝塚)에서는 기원전 1세기에 주조된 ‘오수전(五銖錢)’도 출토되었으며, 그 곳에서는 쇠를 녹였던 흔적인 야철지(冶鐵址)가 발견되어 이곳 불모산에서 철을 생산 하였다는 기록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로서 마창진(마산,창원,진해) 일대와 김해시 일대가 그 옛날(기원전1세기)부터 중국과의 문물 교류가 있었다는 증거가 되는 셈이며, 우리의 선진된 철생산국으로서 이웃나라 일본 등에 거래 하였다는 것이 증명된다고 하겠다.
끝없이 이어지는 상념(想念)을 뒤로 하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는다. 이제 마지막 답산처(踏山處)인 불모산 정상을 향하여 20여 분을 나아가니 웅산(熊山)의 구름다리가 놓여있다. 그다지 깊지도 않은 계곡이건마는 등산객을 위한 진해시의 배려가 따사롭다.
불모산(802m) 정상 주위로는 억새풀이 많고, 정상에는 통신탑이 하늘을 찌를 듯이 여러기가 세워져 있어 접근 금지다.
한겨울의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여러 회원님들이 함께 모여 성주사(聖住寺) 계곡으로 하산 한다.
성주사로 내려가는 길은 경사가 가파르고 음지(陰地)가 많아서 며칠전에 내린 잔설(殘雪)이 상당하다. 조심 조심 하산하며 구획된 창원의 시가지를 내려다 보니, 6~70년대에 산업의 동력이 되었던 건설의 메아리가 잠잠이 들려 오는 듯 합니다.
쉬다가 걷고 쉬다 걸으며 성주사에 도착하니, 경내(境內)는 많은 불사(佛事)가 진행중에 있다. 제일 윗 쪽에 새로 지은 전각에는 단청(丹靑)도 하지 않았으며, 현판(懸板) 또한 보이지 않아서 어떤 용도로 쓰일런지 궁금하다.
개울이 흐르는 옆으로 돌계단을 내려오니 큰바위 축대에 “여인불입(餘人不入)”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어, 무언의 미소를 짓게한다. ‘외인출입금지’라는 뜻과 ‘여인출입금지(女人出入禁止)’라는 이중의 뉘앙스를 풍기고 있는 것 같아서... 참으로 수도자 다운 발상 이라고 생각된다.
넓은 경내로 들어서니 지장전(地藏殿)은 서향으로 지어져, 정면5칸 측면3칸의 다포개 팔작지붕 형태를 하고 있으며, 최근에 지어진 듯 단청은 하지 않았다. 북편으로는 시멘트로 거대한 전각이 지어져 공양간을 겸하여 대법회 장소로 활용되고 있는 듯 하며...
그 옆으로 산기슭 높은 대(臺)위에는 남향한 대웅전이 고즈넉이 진좌(鎭坐)하고 있다. 안내판에 대웅전(지방문화재 제134호)은 조선 숙종대에 지어졌으며, 정면3칸 측면3칸의 겹처마 다포개 맞배지붕이다.
고색창연(古色蒼然)한 모습으로 그 역사성을 알겠으며, 좌측의 삼성각(三聖閣)과 우측의 영산전(靈山殿)도 건축양식이 맞배지붕으로 지어져 있다
성주사(聖住寺)는 신라 흥덕왕 18년(827)에 무염국사(無染國師)가 창건 하였다 하며, 임진란때 불타 없어진 것을 조선 선조 37년(1604) 진경대사(眞鏡大師)가 중건 하고, 숙종대에 다시 지어져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전하는 얘기로는 진경대사가 중건할 당시에 곰(熊)이 불사(佛事)를 도와 건축자재를 날랐다고 하여 한때는 웅신사(熊神寺)라 했다 한다.
이 밖에도 보타전(寶陀殿), 설선당(說禪堂), 염화실, 불모당(佛母堂), 요사(寮舍) 등 이 있으며, 창건 이래로 1,200여 년동안 사바세계(娑婆世界)의 전법도량으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습니다.
편안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산문(山門)밖을 나서니, 짧은 겨울해가 어느듯 서산에 기울어 가고 있다.
무자신년(戊子新年)의 설계는 불모산(佛母山)에서 하고
올 한해 남산님들의 모든 소원을 곰메바위에서 빌어...
하시는 일마다 소원성취(所願成就)하시고 건강하소서...
단기4341년(서기2008년)1월 27일
진해시(鎭海市) 불모산(佛母山,802m)을 가다.
첫댓글 불모산 종주산행에서 "곰메바위"가 일품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