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남한산성 망월사 참배순례(09. 06. 23)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1394년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길 때 창건되었으나 후에 절터만 남아 있었으며 현재 사찰은 1990년 복원되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누가 언제 창건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조선 초 태조(太祖)가 한양에 도읍을 세울 때 서울의 장의사(莊義寺)를 헐은 뒤 그곳에 있던 불상과 금자(金字)로 된 《화엄경》, 금솥 등을 이 절로 보냈다고 한다. 이후의 연혁은 전하는 것이 없다. 단지 《남한지(南漢誌)》에 따르면 남한산성 내에 있었던 9개 사찰 중 가장 오래된 절이었다. 옛 절터는 경기도 기념물 제111호로 지정되었다.
남한산성은 1624년(조선 인조 2) 벽암(碧巖) 각성(覺性)이 팔도도총섭이 되어 전국에서 승려를 모아 2년만에 완성한 산성이다....
본래 산성 내에는 옥정사와 망월사 2개의 사찰만 있었으나, 산성 축조에 동원된 승려들의 숙식과 훈련장소를 확보하기 위해 한흥사와 장경사·천주사·국청사·개원사·남단사·동림사 등 7개의 사찰을 더 지었다. 신경준(申景濬:1712∼1781)이 지은 《가람고(伽藍考)》에는 망월사가 이미 폐사지로 나오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산성 내의 다른 사찰과 함께 의병들의 본거지로 사용되다가 의병 본거지가 탄로나 일제에 의해 모두 파괴되었다고 한다. 이 중 망월사와 함께 장경사·국청사·개원사가 복원되었다. 1990년부터 중창 불사를 일으켜 오늘에 이른다.
산성과 더불어 나라를 지킨 절 망월사(望月寺)는 남한산성 안에 자리 잡고 있다. 남한산성은 조선시대의 중요한 국가방어시설로서 성 안에는 행궁 이외에 여러 방어시설이 건설되었었다. 병자호란 때는 인조가 이곳으로 옮겨와 청나라에 대항하였고, 결국 삼전도라는 치욕을 안게 한 장소이기도 하다. 이처럼 남한산성과 이곳에서 있었던 역사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그러나 남한산성이 스님들에 의해 건설되었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에도 계속 승군이 주둔하였던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국가에서는 대단위 토목사업이나 국가적인 건설 사업에 승군의 힘을 빌었었다. 승군은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열심히 국가사업에 참여해 임무를 완수했고, 이런 승군을 국가에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 초부터 그렇게 탄압하고 억압했던 불교가 다시 세상에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일련의 사건의 한 중심에 망월사가 위치하고 있었다. 남한산성은 국가의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많은 역사적 사건을 간직하고 있는 명소들이 산성 안에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망월사 매림헌(梅林軒)...]
주 계단 서쪽 편에 높은 축대를 쌓아올리고 이곳에 요사를 배치했다. 요사는 'ㄱ'자형의 평면을 하고 있는데, 초익공의 형태를 사용했다. 요사의 전면에는 '매림헌(梅林軒)'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우측에는 요즘지은 건물로 방문하는 불자들을 위해 음료수와 또 불교용품들을 판매하는 매점이 만들어져 있다.
[망월사 범종각...]
대웅보전 왼편에 범종각이 위치하고 있다. 대웅보전을 향해 만들어져 있는데, 정면이 3간이며, 측면이 2간이다. 2003년에 조영한 건물로 아직 단청은 베풀지 않았다. 높은 원주형의 초석을 사용했고, 상부에는 배흘림기둥을 사용했다. 외2출목, 내4출목의 다포 공포를 구성했으며, 지붕은 팔작지붕을 사용했다. 정면 원기둥 4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주련을 걸었다. 聞鍾聲煩惱斷/ 종소리를 들으면 번뇌가 끊어지고 智慧長菩提生/ 지혜는 자라나 보리심을 발한다. 離地獄出三界/ 지옥을 벗어나 삼계로 나와 願成佛度衆生/ 원컨대 성불해 중생을 구하소서 범종각에는 범종만 걸려 있을 뿐 운판이나 목어 등 다른 사물들은 보이지 않는다. 범종은 전통적인 한국종의 형태를 따른 것으로 2003년에 조성한 것이다.
[망월사 대웅보전...]
망월사는 중심 불전으로 대웅보전을 두고 있으나, 전면에 대웅보전과 버금가는 크기의 극락보전을 두고 있어 2불전의 병립체제를 갖추고 있다는 말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대웅보전은 높은 축대에 의해 만들어진 넓은 대지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 평면은 정면 5간, 측면 3간이다. 정면과 측면 모두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는 간(어간)의 폭을 다른 간에 비해 현저히 크게 만들어 중심을 강조하고 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양쪽 용마루 끝에 치미를 장식했다. 치미는 고대에 사용하던 지붕장식재로 건물의 화재를 방지하기 위해,
또는 건물의 위계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었다. 경주의 황룡사를 발굴할 때 거대한 치미가 발견되어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아무리 거대한 치미지만 일단 용마루에 얹히면 세세한 부분의 디테일은 아래에서 보이지 않게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이 치미에는 조그만 사람 얼굴이 익살스럽게 조각되어 있다. 치미를 만든 장인이 이곳에 자신의 웃는 모습을 그려 넣었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신라인의 엄격함 속에서 또 다른 자유분방함을 볼 수 있는 수작이라고 할 수 있다.
[망월사 산신각...]
대웅보전 뒤 오른편으로는 다시 산으로 오를 수 있도록 돌을 다듬어 깔아놓은 긴 계단이 만들어져 있다. 이곳을 통해 산으로 오르면 그곳에 작은 대지가 조성되어 있고, 이곳에 산신각을 모셨다. 계단의 난간 정면에는 사자가 묘사되어 있다. 대웅보전 정면에 있는 사실적인 사자의 모습이 아니라 익살스럽게 묘사되어 있는 정겨운 사자상이다. 산신각 전면에 조성된 대지 주위에도 석난간을 돌렸다. 이곳 역시 입구를 사자가 지켜서고 있다. 이 역시 익살스럽고, 귀엽기까지 한 정겨운 사자다.
감히 범접하지 말라는 의미의 사자가 아니라 다가와서 한번 쓰다듬어 달라고 응석부리고 있는 듯하다. 산신각이라고 했으나, 이곳에 건물은 없다. 산신각은 건물의 형태가 아닌 석굴의 형태로 조성하였다. 산신각이라기보다 산신굴이란 말이 더 어울린다 할 수 있다. 산신의 모습은 화강암을 이용해 만들었는데, 그 뒤로 또 다른 산신상이 있다. 아마도 기존에 이곳에 모셔졌던 산신으로 보인다. 새로 조성한 산신이 타고 있는 호랑이가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면, 기존의 상에는 귀여운 호랑이가 입을 다문 채 묘사되어있다. 매우 대비가 되는 모습이다.
[망월사 다층 석탑...]
대웅보전 오른 편에는 매우 넓은 대지가 조성되어 있고, 이곳에 석탑을 건립했다. 성법선사 사적비에 의하면 2001년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석탑은 기단에서부터 상부로 층층이 올라갈수록 체감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매우 안정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기단 하부에는 코끼리를 조각했다. 그 위에 팔부신중의 모습을, 또 그 위로 부처님의 모습을 조각했다. 기단은 원형의 평면을 기본으로 사용하고 있다. 기단 상부의 탑신은 아래 3층을 팔각형 평면으로 만들었으며, 그 상부는 모두 4각형 평면으로 만들어 변화를 주었다. 이곳 석탑에 사찰관계자께서 부처님 사리를 봉안했다는 애기를 들었음
[망월사 탑 앞에 향불 피우는 향각...]
각층에는 모두 목조건축의 모습을 세세하게 묘사하였으며, 각 면마다 목조 건물 속에 앉아있는 부처님의 모습을 가득히 조각했다. 석탑 주변의 축대는 일반적인 축대로 만들지 않고 이곳을 막아 벽을 조성했다. 이른바 석병(石屛)을 만든 것이다. 흰색의 화강암과 검은색의 대리석이 조화롭게 벽면에 부착되어 있는데, 흰색의 화강암에는 사천왕과 금강역사상을 양각으로 조각했다. 또한 검은색의 대리석에는 묘법연화경을 새겨 넣었다.
망월사 극락보전(極樂寶澱)...]
대웅보전이 조성되어 있는 넓은 대지 아래에 또 다른 넓은 부지를 조성하고 이곳에 극락보전을 조영했다. 극락보전은 정면 5간, 측면 2간의 평면을 하고 있다. 그러나 각 간의 간살이가 넓지 않아 같은 정면 5간의 대웅보전보다 규모가 작다. 건물의 크기뿐만 아니라 세부의 처리와 장엄 및 불단, 닫집 등 모든 부분이 대웅보전과 비교해 간략한 편이다. 근래에 만들어지는 건물들의 초석은 대부분 다듬돌 초석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데, 극락보전에서는 막돌초석을 사용했다. 다듬돌 초석은 매우 딱딱한 느낌을 주는 반면에 막돌초석은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