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태는 한 배우가 두 편의 영화로 칸영화제에 진출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주위의 호들갑과 달리 정작 본인은 심드렁한 이유, 충무로에 "B급 영화판"을 만들고 싶다는 A급 스타의 투덜거림에 귀를 기울인다.
장병원 기자 출연한 영화 두 편이 동시에 칸영화제에 진출했다.
유지태 글쎄. 난 칸영화제와 부산영화제의 차이가 뭔지 모르겠다.
김세윤 기자 외국 관객들의 평가가 궁금하지 않나.
유지태 이런 말 하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칸에 갔다고 난리 치는 게 참 촌스럽다고 생각한다. 옛날에 달을 보면서 ‘저 곳은 어떤 곳일까’ 궁금해 할 때 첫발을 내디딘 암스트롱은 영웅이 됐지만, 영화 <아폴로 13>처럼 곧 아무도 관심 안 가질 때가 오지 않나. 국제 영화제도 언젠가 그런 날이 올 거다. 일본만 해도 자기네 영화가 칸을 가든 베니스를 가든 별 관심 없다. 물론 감독에겐 영화제 진출이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자신이 영화를 계속 만드는 기반이 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배우로서는 잘 모르겠다. 내가 뭐 서양 영화에 출연할 것도 아니고. 게다가 말도 잘 안 통하는데.
김세윤 기자 그럼 좀 쉬다 온다고 생각하든가.
유지태 글쎄. <남극일기>도 촬영해야 하고 내가 연출하는 단편영화도 준비하는 상황이라 맘 편히 즐기지는 못할 것 같다.
장병원 기자 애초 비경쟁 부문으로 초청된 <올드보이>가 갑자기 경쟁 부문으로 바뀐 과정을 들었나?
유지태 짐 자무시 감독이 영화를 보고 ‘이건 경쟁 부문에 올려야 하지 않겠냐’고 추천해서 그렇게 된 것으로 안다.
장병원 기자 짐 자무시는 심사위원도 아닌데 어떻게…
유지태 글쎄.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네. 뭐, 그러거나 말거나.(웃음)
김세윤 기자 최근 출연한 연극 <해일>이 성황리에 끝났다고 들었다.
유지태 영화의 리얼리티와 연극의 리얼리티 사이의 경계가 어디인지 예전부터 궁금했다. 예를 들어 <도그빌>같은 경우 연극적인 구성이면서도 문득 영화적으로 몰입되는 순간이 있지 않은가. 그런 과정을 알고 싶어서 출연했다. 상업 영화 배우 활동을 하면서 연기 훈련이 필요하기도 했고.
장병원 기자 상당히 흡입력 있는 연기를 했다는데….
유지태 연극은 보셨나?
장병원, 김세윤 기자 아직…
유지태 안 보셨으니 그 얘기는 하지 말자.
김세윤 기자 일전에 저예산 독립영화 제작사를 차리고 싶다고도 했는데.
유지태 그건 기자가 오버해서 쓴 거고 다만 상업 영화가 발전할수록 순수하게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쉽게 기회를 얻지 못하는, 그래서 투자자가 나타날 때 까지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하는 병폐가 있지 않나. 그걸 극복하고 작가 영화가 살아남을 방법이 뭘까, 하는 정도의 고민을 갖고 있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B급 영화판을 만들고 싶은 거다. 가령 <꽃섬><눈물><욕망><송환><영매>, 그런 영화들이 지금의 배급 라인 갖고는 제대로 설 자리가 없으니까 다른 대안적 배급망을 고민하고 있다.
장병원 기자 얼마 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일본 독립영화 관계자를 만났는데 한 해 개봉하는 영화 중 60%가 독립영화라는 말을 듣고 놀랐다.
유지태 걔들은 소극장 문화가 활발하니까.
김세윤 기자 충무로의 우스개 중에 "<희생>을 본 10만 관객은 다 어디로 갔나"라는 말이 있지 않나. 예술영화 상영 공간을 확보된다고 자동으로 수요가 늘지는 않을 텐데.
유지태 예전에 영화를 보는 방식이 문학 매체였다면 이제는 레저라고 생각 한다. 즐기러 가는 거지. 하지만 즐긴다고 해서 웃기 위해 가는 건 아니다. 영화만 재밌으면 따라올 거다. 너무 잘난 체하거나 마스터베이션 하는 영화들은 관객들과 멀어질 거고.
김세윤 기자 저예산 독립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특별한 계기라도 있나?
유지태 내가 연출을 한들 상업 영화 감독이 될 것도 아니고, 할 이유도 없고. 그런 쪽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도 없다. 제작사를 차려서 돈을 많이 벌고 싶은 것도 아니고. 단순히 만들고 싶다는 욕구뿐이다.
장병원 기자 연기 활동과 연기 외적인 활동을 어떻게 조화시킬지 궁금하다.
유지태 그건 왜 연극을 하세요? 왜 영화를 만드세요? 하는 것과 같은 질문이다. 재밌으니까 하고, 하고 싶으니까 하는 거지.
장병원 기자 충무로에는 그렇게 활동하는 배우가 없으니까 그런 질문을 하는 거 아닌가. 가령 미국에서는 하비 케이틀 같은 배우가 인디영화에 자진해서 출연하고 제작도 한다.
김 스타성을 지닌 배우의 행보치고는 의외라는 거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유지태 몇해 전 일본에 머물 때였다. 난 계속 영화를 하고 싶은데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영화를 찍어야 좋을까 고민을 하게 됐다. 영화라는 게 미술과 달라서 개인이 하기에는 너무나 큰 비용이 들어가니까, 대안 영화를 해야지 하고 마음 먹었다. 자, 대안 영화를 한다면 그것의 미래는 어찌 될 것이냐. 상업 영화판에서 살아남을 방법은 무엇이냐, 하는 고민으로 이어진거고.
장병원 기자 일본엔 왜 간 건가?
유지태 <봄날의 간다> 홍보차 일본에 갔다가 그냥 주저앉았다.
장병원 기자 신문엔 유학 갔다고 나왔다.
유지태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뭐 별 생각을 다했다. 신문 배달을 해볼까도 했다. 일본 신문 배달은 페이도 많고 장학금도 주니까. 그런데 내가 하고 싶은 건 결국 영화더라. 그래서 영화 공부하고 사람 만나고, 그러다 의사 소통해야 하니까 일본어 공부도 하고.
김세윤 기자 얼마 전 한 인터뷰에서 “영화는 필름으로 남지만 연극은 몸으로 남는다”고 했는데.
유지태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사진 찍는 사람이 있다. 연극 배우 출신이다. 연극한 지 20년이 지난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란다. 과연 난 20년 동안 무엇을 남겼는가. 알아 주는 사람 하나 없는 내가 과연 배우인가. 그때부터 사진을 찍게 됐단다. 자기 후배들만큼은 사진으로라도 그 모습을 남겨줘야 겠다는 생각에서. 참 갸륵한 생각이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그들은 연기자다. 모델이 아니다. 연기하는 ‘모습’이 아니라 ‘연기’를 담아야 한다. 표현하는 매체가 바뀌더라도 그들이 체득한 크리에이티브는 변하지 않을 거다. 그들의 연기를 영화 같은 매체에 담아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장병원 기자 하지만 영화와 연극 사이에 미묘한 차이가 있지 않나. 발휘해야 하는 크리에이티브도 틀리고.
유지태 예를 들면 이런 방식은 어떤가. 한 작품을 연극으로 2개월 동안 공연하면서 완전히 체화한다. 그 다음 그 배우 그대로 그걸 영화로 만드는 거다. <헤드윅>이나 <라이방> 같은 게 비슷한 케이스일 텐데, 나는 그 방법이 대안 영화로서 바람직한 행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장병원 기자 이제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이하 <여자는...>) 얘기를 해보자. 영화는 어땠나?
유지태 연극 공연 때문에 못 보다가 어제 처음 봤다. 한동안 연극 속 캐릭터에 빠져 있다가 오랜만에 문호를 보니까 너무 웃기더라. 내가 보지 못한 모습이 많이 담겨 있으니까 재밌다. 어머니도 함께 봤는데 당신이 어른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참 재밌다고 하시더라. 그러면서 다시는 이런 영화 찍지 말라고, 벗는 영화 찍지 말라고 했다.(웃음) 어머니는 영화 보고 우셨단다. 아들이 2개월 동안 20kg쯤 찌우면서 몸에 무리가 오는 걸 다 보셨거든. 그땐 정말 어마어마했다. 한 100kg까지 쪘으니까.
장병원 기자 홍상수 감독의 연출 스타일은 적응할 만했나? 현장에서 즉석으로 대본 써서 돌리는 걸로 유명한데.
유지태 감독님은 배우가 매너리즘에 빠져 하는 대사들이 싫단다. 아침에 즉석으로 주는 대사들은 생소한 느낌을 담아낼 때가 많아서 선호한다고 하셨다. 어느 정도는 동감하지만 배우로서는 참 난처하다. 암튼 내 인생에서 7분짜리 롱테이크는 다시 찍어보기 힘들 것 같다.
장병원 기자 연기하기 힘들었겠다.
유지태 홍감독 영화를 보면서 내가 상상컨대 대사 같은 건 배우한테 맡겨줄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 모든 걸 머릿속에 넣어두고 제어하려고 하신다. 대사 톤이며 말투까지 일일이.
장병원 기자 자신의 의견을 제안해 보지 그랬나.
유지태 어떤 감독이든 난 항상 제안한다.(웃음) 불만을 가슴속에 담아두면 필름에 드러나니까 얘기를 해서 풀어야 한다.
김세윤 기자 홍상수 감독은 배우에 따라 영화의 방향이 좌우된다고 말한다. 이 영화도 김상경이 했으면 분위기가 달라졌을 거라던데?
유지태 글쎄. 그런 것 같지 않던데. 홍감독님이 겉보기엔 상당히 열려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다. 머릿속에 치밀하게 계산해 놓을 걸 배우들이 해내기를 원한다. 배우들이 자기 것을 버리고 감독의 머릿속에 있는 어떤 걸 순간적으로 보여 줄 때 감독으로서 만족감을 얻는다.
장병원 기자 아무래도 배우로서는 동의하기 힘든 스타일 아닌가.
유지태 동의는 된다. 중요한 건 공감이다. 배우 스스로가 그 역할, 상황에 공감하느냐 아니냐.
장병원 기자 도저히 공감이 안 되는 상황도 있지 않나.
유지태 그럴 때 소통하는 거지. 입은 뒀다 뭐 하나.(웃음)
장병원 기자 소통이 잘 안 되면 어쩌나.
유지태 그러니까 재밌는 거지 뭐. 1백% 다 통하면 무슨 재민가.(웃음) <샤이닝> 찍고 나서 잭 니콜슨한테 스탠리 큐브릭에 대해서 얘기해달라고 했더니 "세상에 수십 번을 다시 찍으면서 왜 다시 찍는지 얘기를 안해주는 게 무슨 천재감독이냐. 그건 미친놈이다”고 했다는데, 난 그런 모습이 참 보기 좋다. 감추고 솔직하지 못한 얘기를 하는 건 재미없지 않나? 그렇다고 내가 누구를 욕한다는 얘기가 아니라.(웃음)
김세윤 기자 배우는 마치 자신이 미장센을 구성하는 소품 취급을 받을 때 힘들다던데.
유지태 감독이 무슨 생각을 할지 모를 때 배우들은 참 난감하다. 다시 찍는 데는 이유가 있어야 하는 데 그런 설명도 없이 강요하는 건 희생이다. 기껏 찍어놓고 처음 찍은 필름을 붙이는 사람도 있다. 그건 배우를 두 번 죽이는 일이지.
김세윤 기자 함께 작업했던 감독들은 어땠나.
유지태 박찬욱 감독은 합리적인 스타일이다. <올드보이> 때 한번은 사운드가 마음에 안 들어서 "좀 더 갔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건 나중에 후시 녹음 하면 돼" 그러는 거다. 그래서 "후시를 안 할 정도로 동시에서 뽑아냈으면 좋겠습니다" 그랬더니, "그건 참 바보 같은 생각이야. 후시라는 좋은 메커니즘이 있는데 왜 그렇게 힘을 소모해. 괜찮아"라고 하셨다. 요가할 때도 그 메뚜기 자세를 피아노 줄에 매달고 하고 싶지 않았다. 아주 잘하지는 못해도 진짜 해보이고 싶었다. 사람들이 야, 저거 피아노줄이야 이러는 말을 듣기는 싫었으니까. 근데 요가 학원을 다 돌아다니면서 배워봐도 국내에서 그 자세를 실제로 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하루는 감독님이 오더니 "야, 너 왜 그런 데 힘을 빼니? 피아노줄 있잖아 피아노줄", 그러는 거다.
김세윤 기자 홍상수 감독보다는 같이 일하기 편했겠다.
유지태 <올드보이>와 <여자는...>은 완전히 다른 영화다. 같은 잣대로 평가하면 안된다. 난 배우는 학생으로서 두 가지를 다 배우는 거다. 여기서 합리적인 걸 배우면 저기서 미학적인 걸 배우는 거지.
장병원 기자 <여자는...>에서 유지태의 연기는 이전까지 보여 주지 않던 모습들이다. 촬영 전에 고민을 많이 했을 것 같다.
유지태 내가 어떻게 보일 것이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최선을 다하느냐 못하느냐가 중요한거지. 어떻게 보일 것이냐를 생각하면 영화 못한다. 난 내가 옳다고 믿고 재밌다고 생각 하면 밀어부친다. 깨질 때 깨지더라도. 10편이나 하면서 얼굴 많이 두꺼워졌다.
김세윤 기자 개인적으로 유지태는 ‘자신감’이 아니라 ‘자괴감’으로 연기하는 배우라고 생각해왔다. 늘 자신의 연기가 부족하다고 말하던데….
유지태 자괴감이라기보다는 부족함을 느낄 뿐이다. 더 잘할 수 있는데 하는 생각을 매번 한다.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는 방법이다.
김세윤 기자 데뷔 초기 영화에 비하면 이제 확실히 스크린 위에서 존재감을 갖는 배우가 되었다.
유지태 배우가 안 좋다 그러면 영화도 안 좋은 거고 감독도 안 좋은거다. 근데 우리나라는 한 배우만 주시한다. 배우가 못했다고? 그건 잘못된 시각이다. 나도 옛날엔 그랬다. 저 배우 왜 저렇게 연기 못하지? 근데 요즘에는 내가 그 상황을 너무 잘 아니까 ‘저 감독 진짜 이상하다’, "저 장면 찍을 때 무슨 문제가 있었을까" 그렇게 본다.
김세윤 기자 지금까지 계속 비슷한 나이의 배역을 맡아왔다.
유지태 오히려 나보다 나이가 많은 배역이 많다. 내 비슷한 또래 배우들이 차태현, 권상우, 송승헌, 이정진. 이런 하이틴 스타들인데. 난 배역 나이가 많지 않은가.
김세윤 기자 일전에 천호진은 자기 배역보다 7~8년 더 먹은 배우가 연기를 해야 제맛이 난다고 주장했는데.
유지태 실제로 할리우드 책에 보면 그렇게 나와 있다. 그래서 나도 <올드보이> 때 박찬욱 감독한테 뭐, 그렇다는데 괜찮겠느냐. 내 나이에 비해서 배역의 나이가 너무 많은 거 아니냐 그랬더니, 박감독 왈 "그게 또 무슨 소리야 연기만 잘하면 되는거지"라고 했다. 난 그 말이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연극을 하면서 얻은 가장 큰 선물은 잘하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망보다 더 중요한 건 어떤 작품을 할 때 그걸 이뤄내고자 하는 노력이 아름답고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너무 재밌고 지겹지가 않는거다. 아까 자괴감으로 연기한다고 했지만 그런 것들이 나로 하여금 힘을 내게 한다. 평가는 나중 문제다. 타인의 취향이니까. 사람들이 좋아하고 말고는 그들의 몫이지 내 몫은 아니다.
장병원 기자 배우가 아닌 디렉터로서는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은가.
유지태 사람이 보이는 영화. 특히 배우가 보였으면 좋겠다. 내가 배우를 해서 그런지 몰라도 사람 안에 미장센이 다 들어가 있는 것 같다. 매번 다른 스타일로 찍고 싶다. 한 가지 스타일을 고수하는 건 재미없는 것 같고. 그저 다양한 방식을 실험해 보고 싶은 거다.
김세윤 기자 장편을 만들 계획도 세운 건가?
유지태 여러 감독이 옴니버스로 HD영화를 찍는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그게 엎어졌다. 그러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봤다. 투자받을 것인가 내 돈으로 찍을 것인가. 결론은 내 힘으로 찍어야 한다는 거다. 만일 투자를 받는다면 그 사람들이 투자하는 목적이 무엇이겠나. 십중팔구 배우 유지태를 보고 투자하는 사람들일 거다. 투자를 받든 자체적으로 제작을 하든 많은 돈을 들여서 영화를 만들고 싶지는 않다.
장병원 기자 디지털이나 HD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뭔가. 경제적이 이유 외에.
유지태 필름은 해상도가 550만 화소고 HD는 220만 화소인데, 두 배 차이다. 하지만 필름은 옵티컬, 광학 녹음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손실되는 화소 수가 많다. 결국 200만 화소 수 화질로 보게 된다. 하지만 HD카메라는 손실이 거의 없다. 최근 <태극기 휘날리며>가 DLP프로젝트를 통해 디지털 상영을 했는데 내 생각에는 머지않아 상영 시스템 전체가 그렇게 변할 것이다. 그렇다면 HD카메라로 찍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거고 그럼 번거롭게 아날로그로 돌아가서 키네코 같은 그런 작업도 없어질 거다. HD의 미래가 밝다는 생각이 든다. 디지털이 상용화되면 결국엔 데이터 싸움일 것 같다. 가령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데이터가 얼마나 많겠는가. 그게 경쟁력이다. 난 할리우드에서 한국 배우가 경쟁력을 갖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한국 사람은 한국영화의 경쟁력을 쌓아야 한다고 본다. 예를 들어서 피터 잭슨처럼 자기 뉴질랜드 안에서 다 만들어 놓고 너희들 이거 한 번 볼래? 죽인다? 이래야 한다. 그게 더 바람직하지 않은가.
장병원 기자 하지만 영화 산업의 외형이 커지면서 거대 영화에 대한 욕망은 더욱 솟아난다.
유지태 <태극기>나 <실미도>를 사람들이 할리우드에 비교를 많이 하는데 그것 참 바보 같은 짓이다. 한국에서 아무리 제작비를 크게 써도 할리우드의 B급 영화에 못 미친다. 그들이 알아주면 좋겠지만 걔들에게는 역시 동양영화, 동양 배우에 불과하다. 따라서 스펙터클이나 기획 영화가 아니라 <올드보이>나 <여자는...>처럼 한국인의 시선, 한국의 미학으로서 경쟁력을 살려야 한다고 생간한다. 다시 말해 드라마나 독특함으로 승부를 걸어야 할 거다. 할리우드영화를 재현하고 흉내내는 영화를 만들 돈이면 차라리 작가 영화 몇 편을 제작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장병원 기자 칸영화제가 부산영화제와 다른 지점이 바로 거기다. 한국영화라면 의례 떠오르는 뻔한 코드에서 벗어난 영화들을 그들이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그런 평가를 지켜보기 위해서라도 칸에 가야 한다.
유지태 내가 칸에 안 간다고 했더니 설득하려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그런데 결국 그들은 날 설득하지 못했다. 근데 지금 그런 이유라면 재밌겠다. 그들의 평가가 어떨까를 구경하는 것.
장병원 기자 요즘엔 바빠서 영화 많이 못 보겠다.
유 최근에는 거의 못 봤다. 밑천도 딸려 죽겠는데. 영화 보고 공부 좀 하고 그래야 되는데.
장병원 기자 일본갈 때처럼 어디론가 떠나는 건 어떤가.
유지태 이것도 박찬욱 감독님 말씀인데 나는 솔직히 어디 가서 수양을 쌓는 건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시나리오를 어디 가서 쓴다? 이것도 거짓말이다. 생활의 여유를 갖는 것도 좋겠지만 난 어디 조용한 데 틀어박히지 않으면 시나리오 못써, 이러는 사람들은 바보라고 생각한다. 변명이라고 본다. 게으름에 대한 변명.
김세윤 기자 <남극일기> 촬영은 언제부터인가.
유지태 5월 25일. 죽었다 이제.(웃음) 갔다오자마자 바로 10회 찍고 6월 7일에 내 단편 찍고 7월에 바로 뉴질랜드 가니까….
장병원 기자 뉴질랜드에서는 얼마나 찍나?
유지태 2개월 정도. 미치겠다. 쉬고 싶다.
장병원 기자 <남극일기>는 꽤 오래된 프로젝트다.
유 제작비가 많은 데다가 코미디도 없고 멜로도 없고 작품도 무겁고, 게다가 남자들만 나오는 칙칙한 얘기니까 투자자들도 흥행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겠지.
장병원 기자 어떤 영화가 나올까, 궁금하다
유지태 나는 좀 기대가 된다. 내가 나오는 장면이나 비중은 크지 않지만 배우들이 똘똘 뭉쳐서 하면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을거고, 특히 아직 보여지지 않은 배우들, 다들 연극하는 분들인데 그 분들의 힘이 굉장히 궁금하다. 어떤 식으로 드러날지. 나 <버티컬 리미트> 같은 시나리오였다면 흥미가 없었겠지만 사람을 감동시키는 울림이 있는 영화가 나올 거라는 믿음이 있다. 내가 맡은 역할이 나약하지만 냉정하게 흔들리지 말아야 하는 캐릭터이기 때문에 재밌을 것도 같고.
김세윤 기자 그 영화 끝나면 또 연극?
유지태 겨울에 <해일> 재공연할 생각이다. 내후년쯤엔 창작극 한 편을 더 할 생각이고.
장병원 기자 내후년 계획까지 미리 세워 두나?
유지태 그래야 준비를 하니까. 그때까지 몸을 좀 만들어서 실험극 한 번 해보자는 얘기를 하는 중이다. 내가 옛날에 무용도 했으니까 최근 머스 커닝햄 공연 같은. 바람은 그런데 뭐, 아니면 말고. 해봤는데 꽝이면 할 수 없지 뭐.
김세윤 기자 <남극일기>는 촬영 준비도 만만치 않겠다.
유지태 리딩 작업 했고. 산행 훈련도 받았다. 썰매 끄는 것도 배우고.
장병원 기자 남극 탐험. 그 힘든 걸 왜 하는지 일반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안 간다.
유지태 훈련받으면서 박영석 대장을 만났다. 바보 같은 질문인 줄 알면서도 내가 물어봤다. 대체 왜 남극에 가세요? 그랬더니 "그냥 가는 거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그곳이다"고 하더라. 논리적으로 설명하라면 못한다면서. 언젠가 박영석 대장이 한 인터뷰 보면 그런 얘기가 나온다. 동료가 조난을 당해서 함께 가지 못할 상황이 됐다. 그때 그 다친 동료가 대장의 어깨를 툭 치면서 ‘야, 걸어 가나 비행기 타고 가나 똑같아. 내려가.’ 그 동료를 뒤로한 채 내려오는 그 걸음은 과연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을 하게 된다. 똑같은 게 아닐까. 내가 왜 연기를 하는 거냐. 내가 왜 영화를 만들려고 하는 거냐. 논리적으로 설명할 순 없지만 나 역시 그냥 계속 도전하는 거다.
첫댓글 이 기사는 못보던 건데... 유지태씨의 사고와 가치관을 좀더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거 같아 흐뭇~
이렇게 보면 너무나 확신있으셔서 무시무시하신 분..ㅋㅋ
무섭게 자라 오셨군요. 무섭게 관찰하고... 당신은 정말 무서운 분이십니다. 앞으로도 더 무서워 질 듯하네요.ㅎㅎ
기대됩니다.
무시무시하다는 말이 적절한 것 같아요.. 이런 사람이구나...... 신념에 있어서는 양보가 없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