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야의 종'이 33번 울리는 것은
하늘 세상인 도리천(=33천)에 닿으려는 염원 때문
2014년 한 해도 막을 내리고 있다. 몇 시간 뒤 보신각 제야의 종소리와 함께 역사 속에 묻히게 된다. '제야의 종소리'는 현대식 세시풍속의 하나로 자리 잡았고, 이 종소리가 울려야 새해가 됐음을 실감한다. 타종을 직접 보기 위해 보신각 주변에 인파가 몰리기도 하고, 집에서 TV 앞에 모여 앉아 행사 모습을 지켜보기도 한다.
'제야(除夜)'는 음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날인 섣달 그믐날 밤을 뜻한다. 제석(除夕) 또는 세제(歲除)라고도 한다. 예부터 이날에는 궁중이나 민가에서 여러 가지 행사와 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이날 밤 대궐 뜰에서 악귀를 쫓는 의식을 하기도 했고, 민가에서는 밤잠을 자면 눈썹이 희어진다는 말이 있어 밤을 새며 윷놀이를 하거나 이야기꽃을 피우곤 했다.
동서를 막론하고 종(鐘)의 역사는 깊다. 종소리는 사악함을 물리치고 경사를 맞이하는 상징으로, 시작과 끝을 알리는 신호로 오랫동안 사용돼 왔다. 불교에서는 108번뇌를 깨닫게 한다는 의미에서 아침·저녁으로 또는 섣달 그믐날 밤에 108번을 울리곤 했다. 보신각 제야의 종이 33번 울리는 것은 제석천(불교의 수호신)이 이끄는 하늘 세상인 도리천(33천)에 닿으려는 꿈을 담고 있으며, 나라의 태평과 국민의 편안함을 기원하기 위해서다.
조선시대에는 통행금지를 알리기 위해 매일 밤 10시쯤 종각의 종을 28번 쳤는데 이를 인경(人定)이라 한다. 새벽에는 통행금지 해제를 알리기 위해 오경 삼점(五更 三點)에 33번을 쳤으며 이를 파루(罷漏)라고 한다. '오경'은 하룻밤을 다섯 부분으로 나누었을 때 맨 마지막 부분으로 새벽 3~5시에 해당한다. 오늘날 보신각 제야의 종을 33번 치는 것은 이 파루에서 유래했다고도 볼 수 있다.
(춘천에서 12.31 참가)
그러나 지금은 연례행사가 된 제야의 종의 출발은 이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아픈 역사가 숨어 있다. 기록에 따르면 1895년 9월 인정과 파루는 정오 및 자정에만 타종하도록 변경되고, 1908년에 이르러서는 이마저 없어지고 포(砲)를 쏘는 것으로 대체된다. 이때까지 '제야의 종'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섣달 그믐날 밤 한 해를 마감하고 새해를 여는 소리로서 '제야의 종'이 생겨난 것은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에 의해서였다.
1926년에 설립된 경성방송국이 1929년 1월 1일 남산 기슭에 있던 일본 절 본원사에서 범종을 옮겨 와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10초에 한 번씩 치면서 중계한 것이 '제야의 종'의 출발이었다. 이후 해마다 조선의 종소리와 이른바 '내지'의 종소리를 번갈아 섞어 가며 제야의 종소리를 생중계하는 행사가 일제 강점기 내내 이루어졌다. 에밀레종 등 우리의 유명 사찰 종을 울리며 '흥아(興亞)의 종소리로 신천지 건설'을 외쳐 대던 당시를 생각하면 끔찍하기도 하다.
보신각 종이 '제야의 종'이라는 이름으로 해마다 울리기 시작한 것은 1953년이다. 그해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보신각을 재건하고 12월 31일 자정 보신각 종이 '제야의 종소리'로 울려 퍼졌다. 이후 보신각 제야의 종소리는 세시풍속으로 연례행사가 됐다. 1985년에는 피로가 누적된 원래의 종을 새로이 주조된 종이 대체하며 제야의 종소리를 울리게 됐고,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연원이야 어찌 됐던 제야의 종은 이제 우리의 연례행사로 자리 잡았다. '제야(除夜)'는 글자 그대로 어둠을 걷어 내는 것이며, 나아가 한 해를 말끔히 해소하고 새로운 해를 맞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종소리는 언제나 엄숙하고 감동적이다. 가슴을 짓눌렀던 대립과 갈등, 서글픔은 제야의 종소리에 실어 훌훌 날려 보내고 함께 어울려 2015년 새해를 희망으로 맞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