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에 갈려고 하니 여러 가지로 신경이 쓰인다. 이국만리의 대장정은 그저 멍할 따름이다.
괌과 뉴질랜드의 관광은 석 달간의 간격이 있다. 괌은 2월 말에 갔고 뉴질랜드는 5월 초에 갔다. 12년 전에 카나다를 갔을 때는 7월이었다. 괌은 여름이어서 해수욕을 즐겼으나 뉴질랜드는 늦은 가을이란다.
학교의 여러 선생님들은 이번의 호기를 무척 부러워하고 있었다. 사실 방송고를 4년째 근무하는 노고에 대한 보답으로 생각된다. 해마다 1명에서 2명을 위로 차원에서 보내고 있다. 다만 작년까지 호주에 9박 10이었는데 이번에는 뉴질랜드 7박8일이라서 내심으로 약간 껄끄러운 마음이다.
그래도 만나는 사람마다 해외 무료 여행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물어오니까, 한편으로 뿌듯한 마음도 든다. 지난번에 가족과 함께 괌에 갈 때는 사실 올 때까지 부담이 되는 것은, 돈보다도 괌 참사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다. 혹시나 우리 비행기가 잘못되지는 않을까. 가족 모두 탑승하는데... 정말 아무에게도 이야기를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만 앓았다.
가이드는 한국사람을 등쳐먹는다는 이야기가 실감이 났다. 무슨 쇼 한번 구경에 10만원씩이나 하니, 5명이 나서면 50만원이었다. 3박4일간의 짧은 기간이어서 다행이었지만 정말 무서운 곳에 있다가 온 듯하다. 애들은 돈을 쓸 준비를 하고 왔어 시간 보내는 데만 신경을 썼다.
이번의 뉴질랜드 여행은 지난 여행의 연장선상에서 한 번 보내려고 한다. 사진도 많이 찍고 연수도 알차게 보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3일날 새벽 3시 30분에 동대구 고속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4시간 이상을 인천공항으로 가는데 보내야 한다니. 게다가 뉴질랜드에 즉시 가지 않고, 일본에서 6시까지 있다가, 밤에 10시간 30분의 비행 끝에 크라이스트처치의 시내관광을 하러간다니 정말 아득하기만 했다.
인천공항서도 헷갈렸다. "만남의 장소"를 잘못알고 2시간 가까이 엉뚱한 곳에서 기다렸다가 경찰의 도움으로 겨우 찾았다. 뉴질랜드로 떠난다니 첫 비행기소리(사실은 일본을 경유함)에 눈물이 핑돌았다. 감격한 모양이었다. 거의 비몽사몽간에 밤을 보냈다. 검문 검색 후에 세관까지 통과하였다.
헤글리 박물관에 가서 원주민 마오리족에 관해서 소상하게 들을 기회를 가졌다. 트램을 타고 시내관광을 하였는데, 19세 소녀가 과자를 판매하는데 과자보다 아가시가 예뻐서 모두 사진을 찍는 법석을 벌였다. 시소유의 모나베일에서도 오리들의 천국이었다. 장어가 득실거리지만 마오리족 외에는 아무도 먹질 않는단다. 호텔에 돌아오니 하루종일 시내관광으로 피로하여 마치 고문을 당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고등학교인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에서 6명의 한국 학생(년간 1만불의 학비와 기숙사비를 낸다)을 만났고, 섬너비치(sumner beach)의 동굴관광을 마치고, 남섬 프랑스마을과 치즈공장으로 갔으나 견학은 할 수가 없었다. 오는 도중에 가이드로부터 "한국을 살기좋은 나라로 만들어 주십시오"라는 말에 모두 감명을 받았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웰링턴(수도)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다. 마운트 빅토리아를 올랐으나 부산처럼 산 위에 집이 있었고 그리고 큰 도시는 아님을 느꼈다. 총인구(400만 이하)가 부산만큼 되고 한국보다 약간 큰 나라(백인 80%, 마오리 15%, 기타 5%)이다. 공식으로 PPTA(고등학교 교사연합회)를 방문하니, 교사들이 봉급의 1%를 내어서 운영하는 민영방식이었다. 다시 TCS(방송통신학교)를 방문하였다. 학생들이 보내온 과제물을 꼼꼼히 검사하시는 선생님 한 분과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는데 몹시 피곤해 보인다고 말했다. TE PAPA에서 박물관을 관람하였는데 역시 마오리족에 관한 생활상을 보여주는 곳이었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하더니 정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같이 다리가 시원찮은 사람에게는 더욱 악순환이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시내에 들어오니 과거에 Canada를 방문했던 기억으로 비슷한 것을 많이 느꼈다. 특히 영어로 쓰인 간판들을 보니 더욱 닮았었다. 그리고 카나다처럼 1차 산업인 낙농과 목축을 중심으로 생활을 이어간 점이 많이 닮았다. 그러나 집의 구조라든가 하는 점은 너무 대조적이었다. 오클랜드와 웰링턴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이 초라한 목조 건물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조식 후에 오클랜드 비행기를 탔다. 다시 휴양지 타우포로 3시간 이동하여 후카폭포를 구경하였다. 실제로는 WAIKATO river였다. 달의 화산이란 곳을 40분간 걸었다. 정말 견디기 힘든 곳이었다. 다리가 휘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저녁만찬에서 마오리족의 민속 노래를 들었다. 혀를 내미는 습관은 상대를 위협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한국에서 온 관광객들이 160만원이면 호주-뉴질랜드 7박8일을 관광할 수가 있다고 하였다. TV에서 북한 문제에 대해서 나왔다. "Issue is not clear."라고 하였다.
아침에 하무라나 공원(Hamurana Park)에서 red wood(수령 100년짜리 나무)를 보았다. 캘리포니아산이었다. 그 후에 애그로돔(agrodome)에서 양들의 쇼가 나왔다. 19종의 양들이 나오고 양몰이 개들의 쇼가 겹쳐지면서 장관을 이루었다. 그리고 양털깎이 쇼를 보여주었다. 식후에 와카레와레라는 마오리족의 집단 촌락구조를 방문하였고, 진흙열탕(20m정도 치솟았음)도 관람하고 폴리네시안 유황온천에서 목욕도하였다. NZ(뉴질랜드)는 자연이 중심이어서 어떤 선생님은 "천국에 온 것 같다."고 하였으나, 필자에게는 사람 살 곳이 못되는 곳으로 느껴졌다. 물론 대자본을 가진 사람에게는 몰라도 서민이 살기에는 무척 고달픈 곳으로 비쳤다.
오클랜드를 항해의 도시(city of sailor)라고 한다. 에덴동산의 전망대에서 사진을 3장 찍고 바람이 너무 세어서 버스로 들어가 버렸다. 물건 파는 상점에서 양털 차 시트(16만원)를 사고 치약과 비누를 샀다. 3일째부터 코를 몹시 고는 Mr. Lee와 방 배정이 오는 날까지 몹시 시달렸다. 피곤한 중에도 외로움이 몹시 견디기 힘든 과제였다. 5시 이후에는 문을 닫는 상점과 TV를 틀어주지 않는 대부분의 도시들 때문에 더욱 괴로웠다. 그러나 초등학교 영어 교재에 대한 생각도 났다. 제목을 만들 때 <(DB by C 방식에 의한) 초등영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되었다.(여기서 DB는 data base, C는 category)
한편 지난해에 출판한 <독서미학>도 생각해보았다. <독서미학>은 거의 모든 플롯중심의 문학(주로 소설과 희곡)에서 미적 경험의 내용을 분석하고 평가한다. 즉 미적 경험의 내용인 표준미학에서는 미적 판단 속의 미적 범주(숭고미와 우아미와 추의미 등)를, 그리고 효용미학에서는 미적 정화(카타르시스)를, 그리고 풍요제 미학에서는 희생양의 종류를 중심으로 검토한다. 특히 미적 범주는 새로운 내용이 나타나면 새로운 범주에 추가한다. 또한 검토된 모든 미적 경험의 내용(표준미학 효용미학 풍요제 미학)은 나라별로 시대별로 분류하여 비교 미학의 근거로 활용할 수가 있다.
연수여행은 갈 때의 푸른 희망은 비행기 속에서 날려버리고 지루한 여정이 계속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과거 Canada연수에서도 3일이 지나니 집에 오고 싶고 달보고 외로움을 달랬던 기억이 이번 연수에서도 반복되었음을 새삼 느낀다. 한국인은 한국에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는 그리고 신토불이가 가장 알맞다는 것을 느꼈다. 문화의 차이점은 정말 극복하기 어려운 과제였다. 특히 나이가 들면 극복의 과제는 더욱 힘들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많이 배우고 온 NZ에 너무 혹평이 가해지지 않았나하는 우려도 있지만 나이든 사람의 하나로서 어쩔 수가 없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