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의 녹음
이 향 숙
차창을 열면 손에 묻을 듯한 녹음 사이로 유월의 햇살이 부서진다. 이런 날이면 녹음만큼이나 푸르던 그가 그리워진다.
십 여 년 전 봄날 점심시간이 지나고 햇볕이 구멍가게 그늘 막에 걸쳤을 때쯤 사십대 아주머니가 오셨다. 유난히 하얀 피부, 단정한 옷 위로 입은 앞치마가 봄의 빛깔로 산뜻했다. 새로 지은 아파트 앞에 슈퍼마켙을 연지 몇 개월이 지났지만 입주민이 하루가 다르게 늘고 있는 터라 간간이 만날 수 있는 새 얼굴이었다. 상냥한 음색으로 먼저 인사를 건네며 매장으로 들어서더니 채소는 싱싱하고 빛깔 좋은 것으로 과일은 당도 높은 것을, 식료품은 꼼꼼히도 재보더니 한 바구니 사들고 나가신다.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며칠째 그렇게 장바구니를 채워 가셨다. 그때만 해도 서른을 갓 넘긴 나이 탓인지 장사 하고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성격의 나는 매사에 소극 적이고 낯가림이 심했지만 용기를 내어 아주머니에게 한 마디 던졌다. “식당 하세요.”그냥 말없이 웃는다. 그 웃음은 참 따뜻한 봄바람처럼 내 가슴에 와 닿았다. 며칠이 지나서야 그가 늘 봉사하던 곳의 사정으로 예닐곱 명의 장애우 들을 집으로 초대해 돌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적 능력이 대여섯 살인 장애우를 예닐곱 명씩 돌본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텐데 조금도 고단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삼시 세끼를 식단에 맞추어 먹이고 씻기고 산책을 시켰다. 산책하는 모습은 한 줄로 서서 천천히 걷는데 그들은 주위의 작은 움직임에도 호기심으로 어수선 해지기 일쑤다. 몸만 컸지 마치 유치원생들의 나들이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한창 사춘기를 맞이했던 딸 지원이도 공부하는 짬짬이 어머니를 도와서 장애우를 돌보는 것을 당연시 했었다.
재주가 많은 그가 청주에서 미용실을 운영한 적이 있다. 머리도 할 겸 한번 미용실에 들른 적이 있다. 조금 늦은 점심시간에 배달되는 보리밥을 썩썩 비벼서 맛있게 나누어 먹고 누가 손님 이랄 것도 없이 커피를 타고 청소를 하는 모습들이 참 좋았다. 동네 사랑방 같은 그곳은 어둠의 세계에 갇힌 한 여인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곳이기도 하다. 단골 손님이기도 했던 여인의 기구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소녀티를 채 벗지도 못한 아이가 가장이 되어 청춘을 사창가에서 보내게 되었다. 십년이 지나도록 돈이 모아지기는커녕 빛만 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었다. 그런 사정을 알게 된 그가 당신도 넉넉하지 못한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사재를 털어 빚을 갚아주고 여인을 그곳에서 구해 냈다.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후에도 잘 다독이어 좋은 사람에게 시집을 보내고 언제나 달려 올 수 있는 든든한 친정이 되어 주었다. 그 후 미호에 있는 마트 앞에서 작은 분식집을 운영 했었다. 그해 여름 장마와 후덥지근한 날씨로 채소값이 천정부지로 올랐다. 가뜩이나 운영이 부담스러울 텐데 저렴한 가격보다도 품질이 좋은 식자재를 구입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윤을 남기자고 하는 장사에 이득이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진심은 통하는 법이고 그것이 장사의 밑천이기도 했다. 그의 남편은 외국의 건설 현장에서 근무를 했었는데 1년에 한 번 한국에 들어와 한 달간의 휴가를 보냈다. 오랜만에 만나 가족끼리 여행도 하고 만난 음식도 해먹으며 지내겠지 싶었다. 하지만 휴가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여독이 채 풀리지도 않았을 텐데 부부가 함께 봉사를 떠났다. 평상시 돌보던 장애우가 있는 시설의 도배도 하고 페인트를 칠한다. 마치 오랫동안 손 보지 못했던 당신의 집을 수리 하듯이 정성을 다했다.
지금은 시집 간 딸이 살고 있는 삽교천으로 이사를 가셨다. 아마도 삽교천 구석구석 당신의 손길이 필요한 그 어느 곳에선가 소리 없이 누군가를 위해 애쓰고 있을 것이다.
유월의 푸른 숲이 눈부시다. 유난히 짙은 녹음을 좋아 하는 그가 그리워진다. 나는 언제고 그를 만날 것을 기대 한다. 그리고 삶속에서 그를 닮고 싶다.
첫댓글 부족한 글 솜씨로 아름다운 분의 삶을 감히 그려 봅니다. 주인공 께서는 마음에 차지 않더라도 넓은 아량을 부탁드립니다...우리들은 어느 한부분에서는 이렇게 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선지 많은 사람들은 사회복지학을 공부합니다. 학문으로서 끝나지 않고 생활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