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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시어 : 꽃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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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문이 추구하는 3가지 기준들 중 2가지 이상이 상급이어서 인상적으로 읽히는 작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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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문이 추구하는 3가지 기준들 중 한 가지가 상급이거나 중상급이고, 다른 한 가지는 중급이거나 중상급으로 평가될 수 있는 글입니다. 조금 더 인상적인 중심맥락을 확보하거나 조금 더 인상적이고 주목도 높게 써서 임팩트를 높이는 방향으로 공부해야 합니다.
☞ 15, 26, 28, 29, 30, 32, 34, 35, 41, 53,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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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6 (두 등급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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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문이 추구하는 3가지 기준들 중 한 가지가 중상급 정도이고 다른 한 가지가 중급 정도인 작문입니다. 메인으로 추구하는 기준이 높아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 1, 3, 4, 5, 7, 8, 9, 10, 14, 16, 20, 21, 22, 24, 25, 31, 33, 36, 39, 42, 43, 44, 45, 47, 48, 49, 50, 51, 54, 57,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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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17, 18, 59, 61(두 등급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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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가지 기준 모두 평범한 수준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글들입니다. 또 어떤 글들은 중심맥락이 모호해서 자신이 전달하려는 바가 무엇인지가 불분명한 글도 있고, 자신이 추구하는 바가 보이기는 하지만, 그런 효과가 나지 않고 어색해진 글도 있습니다. 자신이 추구하는 기준이 뚜렷해지고 강력해지도록 연습을 꾸준히 해야 합니다.
☞ 11, 12, 19, 23, 27, 37, 38, 40, 52, 55, 56
제시어: 꽃보다~
# 1.
<회고록>
1985년 2월, 칼바람이 불던 아주 추운 늦겨울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었고, 마침 졸업식 날은 어머니의 생신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전하는 온기. 추운 겨울의 온도마저 따뜻하게 했던 것은 다름 아닌 꽃이었다.
“엄마는 꽃보다 돈이 더 좋은데...”
말은 그렇게 하셨지만, 그 꽃 한 아름으로 그 날 어머니의 입가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매일같이 투닥거리던 우리 집의 평화를 잠시나마 찾아준 것이 겨우 그 꽃이었기에, 나는 꽃을 참말로 귀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 꽃은 내가 어머니께 선물한 마지막 꽃이었다. 대학에 입학한 후 나는 꽃의 가치를 더 이상 믿지 않는 사람이 됐다.
1987년 6월, 전기구이 통닭을 본 적이 있다. 뱅글뱅글 돌아가는 통닭. 내가 그 꼴이었다. 물에 푹 적셔졌다가, 꺼내져서 흠씬 두들겨 맞고, 의자에 묶여 돌기를 서너 번 반복. 육질이 아주 쫀득쫀득 해지는 과정인가 싶다. 나는 그렇게 전기구이 통닭이 되는 것 마냥 쫄깃쫄깃해졌다. 대신 힘없이 축 늘어지고, 눈물 콧물을 다 뺐다. 그 와중에 귀는 잘 살아 있어서 내 앞에 놈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알아 들었다. 그 때였다. 내가 꽃의 가치를 믿지 않기로 한 것이.
“오늘 와이프 생일인데, 꽃이나 사주면 되겠지?”
“꽃보다 나은 게 별로 없죠.”
그들에게도 꽃은 가정의 평화를 지키는 상징물이었다. 나에게 이렇게 악랄한 사람들이 집에 꽃 한 송이 들고 갈 생각에 구역질이 나왔다. 이후, 나에게 꽃은 가치 있는 존재로 취급받지 못했다.
2020년 4월, 너무나 쉼 없이 달려온 세월. 바쁘게 지내다 보니 내가 꽃을 싫어한다는 사실도 잊고 살았다. 어머니에게 드린 그 꽃 한 아름. 그 이후 꽃을 거들떠보지도 않던 내가, 올해 처음으로 바깥의 꽃을 유심히 살피고 있다. 이젠 가고 싶어도 저 꽃 사이로 나가지 못한다. 나는 이곳에 갇혔다. 아니, 우리 모두가 이곳에 갇혔다. 사라졌으면 좋겠던 그 꽃이, 그 역겹던 꽃이 이제는 그립다. 나는 그 동안 무엇을 생각했나. 꽃은 꽃 그대로 아름답고, 가치 있다. 꽃에게서 꽃보다 나은 가치를 찾기 위해 나는 꽃을 사랑하기도 했고, 원망하기도 했다. 잠시 동안 이 거리를 밝게 비추는 순수한 마음의 저 분홍 꽃은 곧 이 세계를 떠날 텐데. 꽃에게 미안하다. ‘나의 신념에 너를 끼워 맞추지 않으리’ 다짐한다.
마지막 문장이 중심맥락을 드러내는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통찰의 차별성이 일정 수준으로 있고, 그것에 대해 우리가 생각할 여지가 어느 정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목도 면에서도 잘 읽히게 쓰는 장점이 있지만, 조금 더 인상적인 표현이 포함되도록 쓰는 연습을 더 해야 합니다.
# 2.
어린 나는 할머니의 손을 잡는 것을 좋아했다. 할머니는 내 손을 이끌고 바다로 데려가곤 했다. 작은 손으로 보말을 따고 있으면, 할머니는 저 멀리서 소쿠리 한 가득 보말을 담아왔다. 할머니의 손을 잡고 돌아오는 길, 나는 문득 보말이 붙어있던 거친 돌덩이가 할머니 손을 닮아있다는 생각을 했다.
할머니 손을 닮은 거친 돌들은 섬 지천에 깔려있었다. 맨질맨질 대리석은 없고 맨 울퉁불퉁한 현무암만 가득했다. 그것들은 구멍이 숭숭 뚫리기까지 해 곰보돌이라 불렸다. 그 모난 돌들은 서로의 깨진 곳을 감싸 돌담을 만들었다. 어찌나 끈끈하게 얽히어있는지, 빈틈으로 서로를 메우면 절대 무너지지 않았다.
섬을 만들었다는 태초의 신이 할망인 탓일까. 섬에는 여자들이 많았다. 불운하게도 우리 할머니는 운명을 거스르지 못했다. 딸 셋을 내리 낳은 우리 할머니. 아들을 낳지 못한 그녀는 작은 할머니가 들어오는 것을 울음처럼 삼켜야 했다. 아들자(子) 돌림의 김말자. 어른들이 붙여준 엄마의 이름은 할머니 가슴에 피멍을 남겼다. 그녀는 딸애의 이름 석 자를 외면하기 위해 해산한지 일주일 만에 바다로 향했다. 거센 물결은 그녀의 생각을 지웠다. 할머니는 살기 위해 바다 저 깊은 곳에 잠겨야 했다.
바다는 낙원이자 지옥이었다. 무정한 바다는 할아버지를 삼켰다. 큰 이모가 열 살, 작은 이모가 일곱 살, 그리고 막내둥이 우리 엄마가 갓 두 돌 되던 해였다. 사실 섬 아낙들에게 바깥 양반이 죽는 일은 대단히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남자들은 배를 타고 먼 바다에 고기 잡으러 나갔다가 재수 없으면 죽었다. 매장조차 사치인 시절이었다.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날에도, 할머니는 바다로 향했다.
섬 여자들은 글은 몰라도 바다는 알아야 했다. 그네들은 물을 무서워해선 안 됐다. 짜디짠 바닷물은 그네들의 살갗을 아프게 했고, 거센 수압은 귀를 멀게 했다. 살을 에는 겨울이 찾아와도, 그네들은 무명천 덧대고 살얼음이 채 걷히지 않은 바다로 뛰어들었다. 성게나 바위가 긁어 난 상처는 전흔처럼 몸 곳곳에 새겨졌다. 크고 작은 상처가 할머니의 팔을 뒤덮을 즈음, 할머니는 큰 딸 대학 보내고, 작은 딸 육지로 시집보냈다. 할머니는 딸들이 당신처럼 살지 않길 바랐다. 그녀는 천방지축 막내딸에게 너도 언니들처럼 육지로 나가라고, 행여나 물질할 생각은 꿈에도 말라고, 그렇게 신신당부 했었다.
할머니는 꽃보다 돌이었다. 섬 여자들은 돌이어야만 했다. 그네들을 거친 돌로 만든 것이 바다였지만, 그네들을 유일하게 감싸는 것도 바다였다. 그네들은 모이면 투박하게 서로의 안부를 묻곤 했다. 곰보돌처럼 그네들의 말은 거칠었다. 말 몇 마디 전하는 시간도 아까워 말끝조차 줄였다. 하지만 엉기성기 쌓아놓은 돌담이 무너지지 않는 것처럼, 그네들의 투박한 말 이면에는 끈끈한 유대가 있었다. 섬 여자들은 그렇게 돌담처럼 얽히어 살았다. 이리저리 채여 스스로 모난 돌이 되었지만 그네들은 그렇게 살아남았다.
휘-이-이-
수면위로 얼굴을 내민 잠녀가 기다란 한숨을 토했다.
공감/감동의 요소도 일정한 수준으로 있고, 주목도도 높은 글입니다. 특히 주목도가 높게 읽히는 것이 장점입니다. 자연스럽게 읽히고, 감수성이 예민하다는 점이 느껴집니다. 공감/감동의 요소가 조금 더 높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장치가 있어야 하는데 사물, 공통의 기억, 사건 등이 보편적 코드를 건드리는 계기가 되는데 그런 요소들을 활용해보기 바랍니다.
# 3.
집에 피아노를 전공하는 사람이 있다. 어릴 때는 그가 참으로 잘해줬다. 그래서인지 나는 인형 놀이보다는 총 놀이, 어여쁜 원피스보다는 무릎 나온 청바지를 좋아했다. 덕분에 내 몸에 남은 흉터도 한 두개가 아니다. 그럼에도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즐거움이 가득하다. 어지간히도 좋았나보다.
그가 자랄수록 특유의 기질이 나타났다. 좋게 말하면 ‘예술성’, 나쁘게 말하면 ‘예민성’. 그렇게 우리 사이도 멀어졌다. 사춘기로 예민성이 극에 달할 때쯤엔 예고를 자퇴하겠다고 떼를 썼다. 하루 8시간 이상씩 피아노와 한 방에 갇혀 연습하던 그에게 권태기가 왔던 걸까. 담임선생님의 끈질긴 설득 덕에 계속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러곤 수시로 대학에 입학했다. 수능 날 아침 쿨쿨 자던 그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 시절을 보며 ‘대학 입학 별거 아니네’ 하는 착각 속에 살던 나는 수능을 두 번이나 봤으니 말이다.
그래도 유일하게 그에게 감사한 날이 있다. 바로 연주회 ‘다음’ 날이다. 독주회라도 한 다음날에는 식탁 가득 먹을 것들이 쌓여 있었다. 뒷풀이에 참석하는 그를 뒤로 하고 집에 와서 잠들 때면 설렘이 가득했다. ‘내일 아침에는 어떤 케이크를 먹을까. 초콜릿은 몇개나 먹을까’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 방문을 열 때면 코부터 간질거린다. ‘아, 설마’하고 방문을 나서면 ‘역시나’ 여기저기 꽃다발들이 놓여있다. 비염에 꽃가루 알레르기까지 있는 나에게는 고된 하루가 시작된다. 그럼에도 케이크는 놓칠 수 없다. 쥐꼬리만 한 한 달 용돈으로는 꿈도 못 꾸는 각종 케이크들이 날 유혹하기 때문이다. 연주 잘 봤다, 초대해줘서 고맙다 등의 인사치레가 적힌 쪽지는 한곳에 모아두고 일단 먹는다. 허락보다는 용서받는 게 쉽다고 했다. 먹다가 코를 풀어야 할 때 쯤 꽃다발이 눈에 들어온다. ‘꽃보다 케이크를 사오지!’
이 생각은 비단 나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성악가 아버지를 둔 친한 언니와 오랜만에 만났을 때의 얘기다. 언니의 아버지는 유명한 성악가이신데, 연주회라도 하는 날이면 꽃다발을 너무 많이 받아서 처치가 곤란하다고 했다. 안 그래도 꽃다발이 비싸던데 그 가격이면 차라리 케이크나 와인을 사오면 얼마나 좋겠냐면서 말이다. 그 말에 나도 공감했다. 왜 굳이 꽃이냐. 차라리 살이라도 되는 음식을 사오지!
‘살과 피가 되는 음식이 최고다’ 라는 생각으로 살아가던 어느 날이다. 우연한 기회로 만나게 된 사람과 좋은 관계로 발전해나가고 있을 때, 그 사람에게서 꽃선물을 받았다. 연주회에서 받는 화려하고 큰 꽃은 아니었지만, 그나마 마스크라도 써서 그랬을까. 꽃가루보다는 꽃 향기가 먼저 느껴졌다. 미세먼지 가득한 공기, 치열하게 살아가는 하루 끝에 자연의 순수함을 마주했다. 회색빛 일상으로 잠들어버린 감각들을 오묘한 향과 색으로 깨우는 느낌이랄까. 마치 길가다 까르르 웃는 어린아이의 웃음소리를 듣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과 비슷하다.
연주회 하면 꽃다발. 아니 그 외에도 졸업식, 입학식. 우리는 누군가의 시작과 끝을 꽃다발로 축하하고 응원한다. 단 한 순간의 연주를 위해 피아노와 고독하게 싸워온 한 연주가에게, 새로운 발자국을 위해 지난 날을 견뎌온 한 학생을 위해 고생했다, 고맙다, 사랑한다라는 말과 함께 지쳐 쓰러진 감각을 깨워주는 것은 아닌지. 미각을 즐겁게 하는 것만큼 가치 있는 것 같다.
작문이 추구하는 요소들이 조금씩 섞여 있는 무난한 글인데, 임팩트가 강한 요소가 부족한 글입니다. 무난하지만, 인상적인 글이 되기에는 부족한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요소를 강하게 추구해야겠다, 고 하는 계획을 정교하게 하고 작문을 쓰는 연습을 더 해야 합니다.
# 4.
우리 집 베란다에는 난초가 가득하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일 무렵 아버지가 승진하신 날부터 우리 집 베란다는 난초 세상이 되었다. 아버지는 승진 기념 선물로 받은 난초를 대거 베란다로 옮겼고 난초를 가꾸는 데에 맛이 들리셨다. 우리 집 난초들은 귀한 대접을 받는다. ‘빨리’, ‘어서’를 외치던 아버지는 베란다 문만 열면 다른 세상으로 간 듯 행동했다. 족히 열 개가 넘는 난초들을 하나하나 닦고 물을 여러 번 나누어 조금씩 준다. 10살 즈음 난초가 잡초의 친구라고 여기던 나는 TV 속 농번기 활동을 따라 난초의 작은 잎들을 모조리 뜯어 놓았다. 아버지는 기겁해 나를 베란다에 얼씬도 못하게 하였다. 난초에 밀린 나는 아버지의 난초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직접 가꾼 귀한 난초들을 중요한 날 선물로 보내곤 했다. 아버지도 좋은 일이 있을 때면 난초 세상에 새 구성원들을 잔뜩 받아들였다. 향도, 꽃도 없는 난초가 뭐가 좋은지. 나는 그저 아빠가 나의 입학식이나 졸업식 때 난초를 가져오지 않기만을 바랐다. 나는 크고 화려한 꽃다발이 좋았다. 행사 내내 꽃다발을 한아름 안고 있으면 특별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축하와 감사의 표현은 모름지기 화려한 꽃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소소하고 재미없는 난초보다야 화려한 꽃들이 아름다웠다.
나는 최근 두 달 간 집에서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코로나19가 심해져 사회적 거리두기가 2단계로 격상되었기 때문이다. 카페에서 일을 할 수도 없고, 외식도 꺼려져 온종일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어제는 저녁을 먹고 오랜만에 산책에 나섰다. 외출이 드물었던 터라 날씨에 맞지 않게 옷을 입어버렸다. 집에서 한시간정도 떨어진 곳까지 걸어갔을 즈음 얇은 옷과 신발에 손과 발이 굳어 더는 걷기가 힘들었다.
나는 눈앞에 보이는 작은 카페로 들어갔다. 빨갛게 얼어붙은 내 볼과 손을 본 주인은 방금 구운 듯 작은 김이 보이는 따뜻한 마들렌을 건넸다. 주인은 몸을 조금 녹이다 가라고 권했다. 마음속으로는 수십 번 좋다고 외쳤다. 하지만 취식이 금지된 카페에서 오래 머물렀다가는 괜한 오해를 사거나 카페에 피해가 될 것 같았다. 그러니 마음과 다르게 나는 괜찮다고,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만 계산하겠다고 말했다. “괜찮아요. 그럼 제가 커피를 천천히 내리면 되죠.” 주인은 손님이 반갑다며 자신을 봐서라도 몸을 녹이고 가라고 말했다. 주인은 가게를 연지 얼마 되지 않아 코로나19가 심해져 인테리어도, 홍보도 충분히 하지 못해 카페가 이렇게 밋밋하고 한적하다며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한껏 멋진 인테리어를 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엄두를 낼 수 없다고 덧붙였다. 따뜻한 마들렌을 손에서 굴리며 카페를 둘러봤다. 카페는 정말 화려하거나 아기자기한 것과 모두 거리가 먼 듯했다. 필수적인 인테리어로만 이뤄져 소박한 느낌을 자아냈다. 주인의 미소와 카페의 따뜻함은 어떤 카페보다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따뜻한 커피가 식어갈 즈음 나는 집에 도착했다. 불이 꺼진 거실에 들어서자 베란다에 눈길이 갔다. 난초들이 푸른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은은한 난초는 색색의 꽃들보다 아름다운 자태를 뿜어내었다.
나는 오늘 난초를 사러 간다. 가장 소박하지만 은은한 난초를 고를 것이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 어울리는 그곳에 난초를 선물할 것이다. 꽃보다 난초가 어울리는 그곳에.
작문이 추구하는 요소들이 조금씩 섞여 있는 무난한 글인데, 임팩트가 강한 요소가 부족한 글입니다. 소박한 것이 화려한 것보다 훌륭하다는 것이 평면적으로 또는 감성적으로 드러나기는 한데 왜 정말 그런지에 대한 생각이 더 전개된다면 통찰의 차별성이 도드라질 것으로 보입니다. 인상적인 표현이 몇 군데 있다면 그것도 글이 한 단계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방법입니다.
# 5.
어버이날, 어떤 선물을 드려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에 지하철역 앞에서 다양한 식물과 카네이션을 팔고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형형색색의 화려한 카네이션과 꽃들도 많았지만 그보다는 초록색 식물들에 눈길이 더 갔다. 그 시선을 눈치 챘는지 점원은 식물에 효과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일조량이 많지 않거나 물을 자주 주지 않아도 잘 자라면서 실내공기까지 정화시켜줘요” 그렇게 스투키를 사서 선물로 드렸다. 스투키를 선물해 드리고 6달이 지난 지금 가끔 생각날 때마다 물준 것이 전부인데 이 녀석은 무럭무럭 혼자서도 잘 자랐다. 꽃보다 화려하지 않지만 혼자서도 잘 자라며, 공기정화까지 시켜주는 스투키는 내 눈에 더 눈길이 가기 시작했다.
흔히 청춘을 꽃에 비유한다. 꽃은 화려하고 이쁘다. 청춘 또한 인생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시기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계속 청춘에 머물러 있고 싶어 한다. 보톡스, 안티에이징 화장품 같이 젊음을 계속 유지하는 비결에 사람들은 열광한다. 이러한 열광 속에는 사람들이 ‘늙어가는 것’, ‘나이 듦’에 대한 공포가 자리 잡혀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나이 들고, 늙어간다. 그러나 계속해서 젊음을 추구하면서 늙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다. 그러한 공포를 유발하는 이유는 우리가 노인은 곧 혐오에 대상이자 부정적인 존재라는 인식에서 비롯됨이 아닐까
노인혐오는 우리사회에 이미 자리잡혀있다. 각종 언론과 인터넷에서는 고령화 사회, 저출산 문제를 언급한다. 그렇게 노인은 우리가 미래에 부양해야할 짐이라는 인식을 심어놓는다. 지하철 자리싸움을 하는 노인들, 음식점이나 카페에서 반말하는 노인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장면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행동을 보고도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어차피 말을 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 요즘 자주 사용되는 ‘꼰대’라는 단어도 윗세대들은 모두 말이 통하지 않는 어른들이라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이는 곧 윗세대와 우리세대들은 서로 상호교류 할 수 없다고 단정 짓는다. 대화를 해볼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렇게 ‘꼰대’대열에 합류하지 않기 위해 젊음을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우리의 젊음은 영원하지 않다. 아무리 물을 주고, 일조량을 높여도 꽃은 시들기 마련이다. 우리도 곧 어른이 되며, 노인이 된다. 그들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다. 그들의 삶속에는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많은 지혜들이 녹아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대상이라는 전제를 없애야 한다. 우리가 소통을 하기 위해 한발 짝 다가간다면 그들은 기꺼이 그 소통에 응할 것이다. 스투키는 꽃보다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오랜 시간을 혼자서 견뎌오고 성장하며 우리 집 공기를 계속해서 정화시켜 준다. 노인들은 화려한 모습은 사라졌을지라도 삶속에서 녹아든 다양한 인생관이 존재한다. 그러한 인생관은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다른 세계를 보여줄지도 모른다.
중심맥락을 뚜렷하게 잘 정리해 썼는데 그 내용은 예상 가능한 범주안에 있기 때문에 생각할 여지가 일정하게 있지만, 강한 수준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인혐오의 문제가 결국은 무엇을 근원으로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을 펼친다면 통찰의 차별성을 더 높일 수 있습니다. 주목도 면에서 표현을 더 함축적이고 인상적으로 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 6.
땔감 (Prod. ChangSeok) – Jack
Yo
하늘에 닿고 싶던 어린 날
무서움 따윈 다 버린 나
혹시 슈퍼맨의 피가 흐르나
망토를 두르고 무작정 Bungee
동시에 마당에 번지는 피
엄마가 말했지
여자 애가 무슨 슈퍼맨 놀이니
태어나자마자 얽매인
중력 아닌 다른 족쇄
‘얌전히 있어라’
‘여자가 있으니 환해졌네’
‘반반하게 생겨선’
만만하게 구는 상대에게
예쁜 말로만 상대했던 지난 날
얽매인 족쇄는
내가 내 삶의 main이 아니면
풀 수 없는 것 Shout out 외쳐
난 꽃보다 나무가 될 거야
꽃을 피우는 Tree
한 개피 피우면 올라가는 연기처럼
구름 위로 뻗어 올라가는 잭의 Tree처럼
하늘과 가장 가까운 나무가 될게
한 철 머물다 가는 꽃이 아니라
내 몸을 불 태우는 나무가 될 거야
이 세상에 온기를 남길 거야
죽어도 살아있을 거야
On my way 불 태우러 가는 중
함께 가자 이 랩을 듣는 너를 태우러 가는 중
On my way 불 태우러 가는 중
One way 유턴은 없어
얽매인 족쇄는
내가 내 삶의 main이 아니면
풀 수 없는 것 Shout out 외쳐
난 꽃보다 나무가 될 거야
꽃을 피우는 Tree
한 개피 피우면 올라가는 연기처럼
구름 위로 뻗어 올라가는 잭의 Tree처럼
하늘과 가장 가까운 나무가 될게
랩 가사처럼 읽히는 면이 강하므로 주목도가 높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중심맥락이 지니는 통찰의 면도 아주 강한 것은 아니지만 일정 수준 이상으로 있다고 할 수 있고,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요소도 일정하게 있습니다.
# 7.
1. 클라라 슈만은 1896년 사망했다.
클라라는 세계적인 작곡가 남편 슈만의 묘지 옆에 나란히 묻혔다. 아내이자 뮤즈로서 슈만의 아름다운 연주곡을 탄생시킨 일등공신이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 연주와 작곡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
2. 나혜석은 1896년 태어났다.
조선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최초의 여성 유학생. 늘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던 수재. 신여성으로서 여러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으나, 훗날 남루한 행색으로 떠돌다 무연고로 거리에서 사망한다.
3. 예술의 역사 속에서 여성은 뮤즈였다. 남성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는 아름다운 존재. 그들을 뒤에서 보좌하며 빛나게 해주는 존재. 클라라 역시 남편 슈만의 그늘 아래서 예쁜 꽃으로 살았다. 그 당시 세상의 흐름이 그랬다. 클라라는 남편을 열심히 내조하며 그의 작품 활동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녀를 부러워했다. ‘그녀로 인해 한 남자가 세기에 남는 음악을 만들었다.’, ‘그녀의 모습은 음악과 함께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등등 로맨틱의 대명사로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렇게 클라라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예술가보단 뮤즈로 회자되었다. 그런데 만약 클라라도 사실은 자기 이름으로 작곡을 하고 적극적인 음악활동을 하고 싶은 꿈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슈만의 로맨틱한 그늘 아래서 불행했을지 모른다.
클라라가 죽은 그해 동쪽의 작은 나라 조선에서 나혜석은 태어났다. 나혜석은 세상의 흐름에 의문을 가졌다. ‘왜 여성이 주인공이 될 수 없는가?’, 여성에게만 강요되는 온갖 것들에 항의했다. 꽃이 되기를 거부하며 저항했다. 여성에게만 정조를 강요하는 현실을 개탄하는 ‘이혼고백서’를 발표하는가 하면, ‘양처현모’라는 말로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해 부덕을 장려한다는 ‘현모양처’를 비꼬았다. 소설 『경희』에서는 축첩 관행에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해 조선 후기 사회에 큰 파장을 불렀다. 뮤즈로서의, 아내로서의, 엄마로서의 여성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여성이 존중 받는 사회를 만들고 싶어 했다. 꽃보다 이름. 즉, 온전한 존재로 인정받기 위해 분투했다. 그는 후세 여성들의 더 나은 인간다운 삶을 위해 스스로를 불꽃으로 태우며 그렇게 거리에서 쓸쓸히 사라졌다.
4. 수원시립미술관 2층에는 나혜석의 자화상이 걸려있다. 평방 60cm 액자 속 검은 옷을 입고 있는 우울한 표정의 여인. 여인은 말없이 관람객들을 쳐다본다. 만약 살아생전 온전히 이름 석 자로 인정받았다면 지금 저 자화상은 웃는 얼굴이었을까? 클라라처럼 남편의 내조를 하며 적당히 그림만 그렸다면 ‘여류’화가가 아닌 서양화의 대가로 자리매김 했을까? 또 만약 그랬다면 차가운 거리가 아니라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따뜻한 침대에 누워 삶을 마감했을까? 나는 그림 앞에 서서 이런 저런 상상을 해본다. 그가 거리에서 부랑자로 죽은 후 세상은 많이 변했다. 이제 더 이상 현모양처를 강요하지도 않고, 이혼했다고 손가락질 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여성들은 무언의 압박을 받으며 유리천장 속에서 클라라로 살아간다. 이것이 과연 진정으로 나혜석이 바라던 세상일까? 그림을 보아도 자화상 속 여인은 말이 없다. 나는 그림 속 여인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가만히 읊조려 본다. ‘꽃보다 이름. 클라라, 나혜석. 나혜석, 클라라...’
통찰 면에서 생각해볼 만한 여지가 어느 정도 있다고 할 수 있는 글입니다. 중심맥락의 내용이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며 우리가 예상하는 범주안에서 이뤄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점이 한계입니다. 주목도 역시 통찰과 비슷한 수준으로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어떤 요소라도 조금 더 임팩트가 강하게 읽히면 좋겠습니다. 정서나 감정을 건드리는 식으로 쓸 수 있는 소재이기도 해서 그 부분에 대한 시도도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 8.
1.
결심했다. 바로 내일, 그녀에게 청혼할 것이다. 내일이면 그녀와 만난 지 딱 1000일이 되는 날이다. 이미 최고급 레스토랑을 예약해 놨다. 가슴이 떨리지만, 나는 분명 잘 해낼 것이다.
돌이켜보면 기념일마다 그녀에게 꽃을 선물했다. 아마도 그녀는 내일도 꽃을 받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여기서 반전. 멋지게 차려 입어놓고는 빈손으로 마중 나오는 나를 보고, 그녀는 아마도 내가 1000일을 잊어버렸을 거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실망할 것이다. 하지만 내 주머니 속에는 더 좋은 게 숨겨져 있다는 것을, 그녀는 상상도 못하고 있겠지 아마.
2.
속이 안 좋다. 어제 달린 게 후회된다. 오늘 데이트가 있는 것도 깜빡하고, 불금의 분위기에 취해 아침까지 마시고 정신 없이 춤을 췄다. 어제 남친한테는 밤 10시 쯤에 일찍 잔다고 말해놔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눈을 떠보니 어느 새 오후 세시다. 큰일났다. 우선 핸드폰부터 확인했다. 역시나 카톡이 와있다. “연락이 안 오네~ 데이트 나올 준비하고 있는 거지? 예쁘게 챙겨입고 와~”. 벙쪘다. 이게 뭔가 싶었다. 얘가 원래 예쁘게 입고 오라는 말을 하는 애가 아닌데… 그래도 일단 어제 밤 클럽에 간 건 들키지 않은 것 같아서 다행이다. 약속 시간이 오후 네시니까… 조금 늦더라도 세수는 해야겠지? 대충 씻고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는다. 예쁘게 입고 오라는 말이 조금 걸렸지만, 그냥 평소에 입던 대로 편한 옷들로. 시계를 보니 벌써 세시 사십분, 평소대로 화장은 가볍게 스킵한다. 3년 가까이 만나다 보니, 이제 서로 편하게 만나도 별 감흥이 없다. 아니, 사실 더이상 설렘이 없다. 어쨌든 조만간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급하게 택시를 잡는다. 아니 그런데 이 아저씨, 왜 이렇게 운전이 거칠어? 몸이 좌우로 마구잡이로 쏠린다. 으윽,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이 속이 메슥거린다. 설상가상으로 아랫배도 살살 아파온다. 어제 먹은 과일 안주가 상했나. 어쩐지 맛이 좀 시큼하더라니…
3.
저기, 그녀가 탄 택시가 온다. 약속 시간보다 늦었지만, 아무래도 상관 없다. 오늘은 좋은 날이 될 테니까! 원래 예약해 둔 레스토랑에서 청혼할 생각이었지만 그녀를 기다리는 지금 이 곳, 생각보다 사람도 없고 날씨도 좋고 분위기도 괜찮다. 결심했다. 그녀가 내리자마자 다가가서 한 쪽 무릎을 꿇고 주머니 속에 숨겨뒀던 비장의 무기를 꺼낼 것이다. 바로 반지. 그래,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꽃보다 반지!
4.
우여곡절 도착했다. 배가 부글부글 끓는다. 멀리서 남친이 다가온다. 올, 웬일로 정장? 오늘이 무슨 날이었나 싶다가도,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이미 내 온 신경은, 금방이라도 모든 것을 쏟아낼 준비를 마쳐버린 괄약근에만 집중돼 있다. 남친이 말한다. “꽃이 안 보여서 실망했어, 자기야?” 얘는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지? 꽃은 무슨 꽃이야 지금. 다 필요 없어,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꽃보다 휴지!
재미있게 읽혀서 주목도는 높은 편인데 다른 요소가 미약한 점이 약점이자 한계입니다. 다른 요소를 어떻게 키울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겠습니다.
# 9.
“담임선생님 잘 갖다 드려. 그릇은 다시 받아오고.”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6년 동안, 어머니는 매년 3월마다 연례행사를 치르셨다. 새로운 선생님을 만나는 3월, 어머니는 하얀 그릇에 제철 복숭아를 담는다. 평소 좋아하시던 프리지아 꽃으로 여백을 채우고 황금색 보자기로 정성스레 감싼다. 그리고 그 사이에 끼워 넣는 하얀 봉투. 꽃을 만지작하는 어린 나의 궁둥이를 가볍게 때리시며 어머니는 “꽃보다 봉투가 더 중요해”라고 신신당부하셨다.
초등학생이던 나는 모질 병을 앓고 있었다. 내 의사와 상관없이 이상한 소리를 내거나 몸을 흔드는 병. 틱 장애나 뚜렛 증후군이라고 한다. 지금이야 유명하지만 그 때만 해도 생소한 병이었다. 어린 꼬마의 기괴하고도 낯선 행동을 보고서 선생들의 반응은 둘 중 하나였다. 무시하거나 야단치거나. 다만 뒤에서 험담을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3반 걔 알지? 정신적으로 문제 있는 것 같아” 프리지아와 복숭아로 가득 찬 황금 보자기는 그런 아들의 병을 아니꼽게 보지 말아달라는 어머니의 뇌물이었다.
뇌물은 주기가 참 힘들다. 나를 속물로 보진 않을까. 상대가 거절하면 어쩌나. 무엇보다 아들의 병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마땅치 않았을 터. “우리 아이는 자폐아가 아닙니다. 정신병도 아닙니다. 이상한 행동을 보여도 이해해주세요” 아들의 증상을 꼭꼭 눌러쓴 세 장짜리 편지. 봉투에 담긴 편지는 실로 병을 고치기 위해 안 해본 것이 없는 모성애의 결실이었다. 서울과 지방, 한약과 양약을 가리지 않았다. 유명한 의사는 전국 팔도를 뒤져서라도 꼭 찾아가던 그 모성애였다. 그 편지를 꽃 사이 어딘가에 잘 감추고서야 어머니의 3월은 시작됐다.
초등학교 5학년을 앞 둔 그해 3월도 어머니는 프리지아를 꺾어 오셨다. 매년 그랬듯 담임선생님께 복숭아를 가져다 드렸다. 교대를 갓 졸업하고 우리 학교에 첫 부임한 초짜 교사였다. 선생님, 선물이래요. 누가? 엄마가요. 좋게 말해 관심이 필요한 아이, 나쁘게 말하면 골칫덩어리. 이미 학교에 소문은 자자했다. 어머니의 선물과 구구절절한 편지가 부담스러웠던 선생들은 서로 나를 떠넘겼고 결국 초짜 신임에게 공이 넘어간 것. 다음 날 나를 조용히 부르신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복숭아 안 좋아해. 가져가. 대신 이걸 어머니께 전해드려. 돌아서는 등 뒤로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꽃은 선생님이 가질게. 꽃이 복숭아보다 중요한 것 같아.
뇌물은 거절하는 것도 힘들다. 거절하면 서먹해지지 않을까. 좋은 게 좋은 거 아닐까. 무엇보다 생소한 학생의 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마땅치 않았을 터. “어머니, 잠시 지나가는 사소한 감기일겁니다. 서준이는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초등학생일 뿐입니다.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아끼고 똑같이 지도하겠습니다.” 혹시 무슨 문제가 있나 싶어 유전병 검사까지 마다 않았던 어머니. 다른 아이들과 달리 클 것을 우려해 정신병 책을 수도 없이 찾아 읽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가 5년 동안 그토록 듣고 싶던 세 단어는 초짜 선생의 답장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었다. ‘사소하다. 평범하다. 똑같다’ “꽃은 마음에 드셨나보다” 어머니의 말맺음은 가늘게 떨렸다.
우리 집 부엌엔 그때 쓰던 황금보자기가 남아있고 어머니는 여전히 프리지아꽃을 좋아하신다. 보자기와 꽃을 볼 때면 문득 열두살의 3월이 생각난다. 꽃보다 아름다웠던 선생님의 배려가 가끔 생각이 난다.
작문이 추구하는 3가지 요소가 골고루 포함돼 있는 글입니다. 어느 한 요소가 임팩트 있게 작동해서 도드라져 보이면 좋을 텐데 그 부분이 아쉽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공감/감동의 요소가 조금 더 강조되어서 읽는 사람의 마음과 정서를 움직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런 효과가 크게 나지 않으므로 다시쓰기를 할 때 시도해보면 좋겠습니다.
# 10.
[칼럼] 윤여정의 ‘필모’엔 여성사가 있다.
배우 윤여정을 좋아하게 된 계기는 <꽃보다 누나>, <윤식당> 등 tvN의 공식 마스코트가 되기 전이다. 지금은 젊은 세대에게 예능에서 활약하는 대중적인 배우지만, 기자는 10대 때 이재용 감독의 희대의 망작 <여배우들>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영화는 20대부터 60대까지 세대를 대표하는 여섯 명의 여성 배우들이 잡지 특집 화보를 위해서 만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흥미로운 제목과 달리 ‘여자가 셋 이상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라는 시시하고 가부장적인 교훈을 남긴 영화였지만, 3번이나 관람했던 기억이 있다. 그럴 수밖에 없던 이유가 당시 2009년에는 여성 서사의 영화가 정말 희귀했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도 ‘여자만’, ‘여성의 카리스마’를 다룬 이야기 새롭다는 것을 은연중에 느꼈던 것이 분명하다.
찬란한 6명의 배우 중에서도 윤여정에게 가장 호감을 느꼈던 이유는 단순하게도 담배 때문이었다. 선배 배우인 윤여정이 후배 배우인 김민희와 자연스레 ‘맞담’하는 장면은 정말로 센세이션이었다. “나이 든 여자가!, 어린 후배와 맞담을?” 하며 그 장면을 몇 번이고 곱씹어서 봤다. 카리스마적이고 비교적 ‘열린 사고’를 가진 여성을 난생처음 처음 만난 순간이었다. 지금도 윤여정 배우를 여전히 존경하는 이유는 그녀의 필모그래피엔 21세기 여성의 현대사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2016년에 개봉했던 <죽여주는 여자>에서 그녀가 연기한 ‘박카스 할머니’ 또한 충격적이었다. 매춘하는 노인 여성으로 기구한 여성의 삶을 연기하며 노인의 ‘성’에 대한 편견을 깨게 해줬다. 이렇듯 윤여정 털털한 성격과 대범하고 센스있는 작품 선택은 다음 세대의 여성들에게 교육적 콘텐츠를 남겼다. 가정과 학교, 사회에서는 여성들에게 가르쳐주지 않는 실존하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기자는 그녀의 필모그래피를 보면서 반성한다. 저널리즘 기관에서 최근에서야 여성 아카이브를 시도하고 있다. 여성사를 본격적으로 다루려고 하지만 그 또한 디지털 성범죄와 관련된 기획 기사가 전부다. 언론이 여성의 이야기를 역사화하는 것은 의미 있으며 꼭 필요한 부분이다. 새로운 캐릭터를 끊임없이 연기하는 윤여정처럼 우리는 이주민, 노인, 장애인, 청소년, 아동 다양한 범주의 여성을 논하고 기록하고 모아야 할 것이다. 또한, 윤여정의 행보에서 콘텐츠를 제작하는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역량도 배운다. 담담하고 담백하게 다양성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때때로 소수자를 소재로 기획하고자 하면 유독 촌스러워질 때가 있다. 적나라하게 현실을 반영하기 위해서 유난히 ‘노력’하는 탓에 안타깝지만 당연하게도 독자들에게 외면받는다. 때론 거추장스럽고 부사적인 것을 빼고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유쾌하게 기획할 수 있도록 일상적으로 다루는 연습이 필요하다. 곧 개봉할 영화 <미나리>에서 그녀가 어떤 여성사를 새로 그려갈지 기대가 된다.
통찰 면에서의 차별성이 일정 정도 있고, 주목도는 평균 이상으로 확보한 작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칼럼이라는 글의 형식이나 장르에 맞는 글이어서 주목도가 있고 칼럼에 등장하는 여러 사례들이 눈길을 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통찰의 면은 다소간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범주안에 있기는 한데 그것을 윤여정이라는 구체적인 인물로 풀어내는 방식이 자연스럽고 눈길을 끕니다.
# 11.
“사모님은 좋으시겠어요 선생님, 이렇게 ‘사랑꾼’인 남편을 두셔서”. 꽂집 사장의 말을 들은 나는 겸연쩍게 뒷머리를 긁었다. 꽃집의 창문 너머로 내 병원의 간판이 보였다. ‘OO성형외과’. 요즘 부쩍 환자가 늘어나 아내와 보내는 시간이 적어진 나는, 퇴근길에 병원의 맞은편 꽃집에서 꽃을 사가는 일이 잦았다. 낮엔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백화점에서 아내의 옷과 고급 식기류를 사오기도 했다. 프랑스 직공이 직접 수를 놓은 하얀 실크 원피스, 아내에게 제일 잘 맞는 옷감이다. 그 옷을 입을 아내를 상상하는 사이, 꽃이 완성됐다. 하얀 원피스가 잘 어울리는 아내에게 제격인 꽃, 러넌큘러스다. 나는 양손에 아내를 위한 선물을 가득 들고 집으로 향했다. 아파트 이웃들이 쳐다보는 부러움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집에 들어가자 사랑스러운 아내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내 손에 든 꽃을 보고 감동을 했는지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면서. “꽃보다 이쁜 우리 여보, 사랑해”. 나는 아내의 이마에 키스를 하며 꽃을 건넸다. 아내가 감동을 받았는지 몸을 움찔하고 움직였다. 오늘 산 하얀 실크 원피스를 건네자 아내의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 원피스는 아내의 하얗고 푸른 살결에 잘 어우러졌다. 아내가 옷을 입는 사이에, 어제 깨진 식기류의 자리에 새로 산 식기류를 채워넣은 나는 우리집 가장 구석에 있는 방으로 향했다. 한 쪽 벽면은 클래식과 오페라 음악이 즐비한 책장이 진열되어 있는 작은 방. 내가 여가시간을 보내는 취미공간이다.
잠들기 전까지 나는 이 공간에서 휴식을 취하곤 했다. 아내와 함께 영화를 볼 때도 있지만, 나는 주로 이곳에서 복싱을 한다. 특히 나는 이 공간에 있는 하얀 샌드백을 좋아한다. 오랜기간 사용해서 예전만큼은 못하지만, 또 이만큼 손맛이 가는 샌드백도 없어서 요즘 특별 관리를 하고 있다. 오늘은 프랑스에서 건너온 명품 실크 커버를 씌웠으니 손에 감기는 타격감이 더 기대된다. 아, 복싱을 하기 전에 음악을 트는 것은 필수다. 저번에 운동을 하는 소리가 시끄럽다고 이웃이 항의를 했기 때문이다. 클래식의 볼륨을 최대한 높인 나는 땀을 흘리며 샌드백을 쳤다. 그가 샌드백을 치는 소리와 신음 소리가 함께 음악 사이로 배어나왔다. 오늘은 오래된 샌드백이 일찍 터져서 예상보다 일찍 복싱을 마무리했다. 선홍색 피가 묻은 붕대를 풀며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에게, 아내가 웃으면서 와인을 건넸다. 그는 입 안에서 와인을 음미하며 눈을 감았다.
[어제 오후 11시경, 유명 성형외과 원장 김 모씨가 자택에서 숨진 상태로 발견되었습니다. 사망 원인은 음독으로 추정되며, 경찰은 김 모씨를 살해한 혐의로 김 모씨의 아내인 이 모씨를 검거했습니다. 체포 당시 아내 이씨는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로 가정 폭력에 노출된 모습을 보였는데요. 이씨를 인계한 경찰은 ”온 몸에서 상처와 피멍이 발견되었지만, 복부에서 가장 심한 폭력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언급하였습니다. 이씨의 증언에 따르면, 지난 3년간 김씨가 자신을 샌드백 대신 사용하며 가학적인 가정 폭력을 일삼았다고 증언한 바 있습니다. 이씨는 김씨가 폭력을 행하는 날에 입도록 강요했던 혈흔이 묻은 흰 옷들을 제출한 바 있습니다. <이웃 주민> ”항상 옆집 아저씨가 꽃을 사 가는 날엔 클래식 소리가 크게 들렸어요. 이전엔 신음소리가 나서 항의만 했었는데 그게 설마 맞는 소리일 줄은..“. 현재 전치 6주 진단을 받은 이씨는 회복 후 재판 절차를 거칠 예정입니다. OOO 뉴스, OOO입니다.]
개연성과 핍진성이 부족하게 읽힙니다. 소재주의적 접근이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있으려면 소재가 주는 파격성이나 충격에 걸맞은 효과가 나와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부족합니다. 플롯을 짤 때는 개연성이 높게 해야 하는데 인과관계가 잘 드러나야 합니다. 갈등의 정도는 엄청나게 높은 데 비해서 갈등의 원인이나 맥락에 대해서 알 수 없는 속에서, 즉 왜 그런 폭력을 쓰는 상황이 됐는지 알 수 없는 속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면 읽는 이가 이야기에 몰입하기가 어려워집니다.
# 12.
스무 살이 된 1월부터 나는 임금 노동자였다. 좋은 대학에 입학해 부모로부터 자립하겠다는 나의 꿈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최종 문턱에서 원하던 대학에 입학하지 못했기에 자립은커녕 부모님께 의존해야 할 상황에 놓였기 때문이었다.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나는 못내 모아두었던 장학금 몇 푼을 들고 혈혈단신으로 서울에 입성했다.
네 평짜리 고시원을 계약하고 곧바로 월세를 해결할 알바 자리를 찾았다. 3일 전부터 알바천국을 보며 알아두었던 생맥줏집이었다. 점장은 일거리가 많았는지 내게 곧바로 출근할 수 있느냐고 물어봤다. 고시원에 짐을 갖다 놓고 바로 면접을 보러 갔건만, 나는 짐을 푼 지 두 시간 만에 곧바로 500CC 6잔을 고사리 같은 한 손에 끼는 법을 배우며 알바에 적응했다. 그렇게 두달 쯤하고 나니 밤낮이 바뀌어 도저히 공부는커녕 온전한 생활을 하기 어려워졌다. 재수생의 서러움도 서글픈데, 낯선 곳에서 혼자 살려니 자괴감만 더해갔다. 먼저 대학에 입학한 동기들의 삶이 부럽기만 했다.
나름대로 살길을 찾는다고, 당시 고시원 근처에 있던 공기업의 채용공고를 보고 지원했다. 9 to 6. 집도 가깝고, 일도 어렵지 않았다. 지금도 신의 직장이라 불리는 금융 공기업이다. 채용 담당자는 재수생 신분으로 제대로 일할 수 있겠느냐며 물었다. 그리고 운 좋게도 내가 선발됐다. 대학 휴학생들도 지원했지만 내 눈빛에서 보인 절박함이 드러났나 보다.
그 공기업은 내게 작은 사회를 보여주었다. 돈을 빌리러 오는 기업인, 기업의 능력을 보고 보증을 제대로 서줄수록 평가받는 직업인, 은연중에 드러나는 갑질과 정치권의 영향력.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문구점이나 식당에서든 기업의 이름만 대면 '장부 외상'이 가능했다는 점이다. 계약직인 나로서는 장부 외상을 상상할 수 없었지만 곧이어 누가 사적으로 장부 외상을 남용하는지는 확인할 수 있었다. 남몰래 알게 된 비밀을 노트에 적으며 3개월을 꼬박 채운 뒤 먼지만 쌓여가는 나의 재수학원 책을 보고 퇴사를 결심했다.
"참 좋을 때다. 지금이 제일 좋을 때야." 꽃보다 청춘이라던 20살의 절반이 그렇게 지나갔다. 인생의 쓴맛과 생계의 고귀함을 동시에 체험하게 해준 스무 살이지만 나는 그 스무 살을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다. 외로움과 자책감은 처음이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한 시인은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느냐고 외친다. 그런데 그 꽃이 흔들리다 못해 떨어진다면? 나의 스무 살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아무 생각일랑 떨쳐 버리고 나무에 의탁해 가볍게 청춘을 소비하고 싶다. 나중에 조금 더 어른이 되어 문제를 대처할 수 있을 때가 됐을 때, 그때 맞아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꽃도 나무가 있을 때 제대로 피어나는 법이니까.
중심맥락을 조금 더 뚜렷하게 하는 글쓰기 연습이 더 필요해보입니다. 꽃도 나무가 있을 때 제대로 피어나는 법이라는 문장이 중심맥락을 포괄하고 있다고 여겨지는데 그 부분을 조금 더 뚜렷하게 해주고 그것이 이 이야기의 플롯에 잘 반영될 수 있도록 쓰는 게 필요합니다.
# 13.
여행을 좋아하기도 하고,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아해서 <<꽃보다 청춘>>이라는 예능을 좋아한다. 친구들과 떠나는 무계획 해외여행. 생각만 해도 즐겁다. 이런 욕구를 예능을 통해서라도 해소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아니면 친구들을 납치해서 진짜 ‘꽃보다 청춘’을 찍을 수도 있었으니까. 수 많은 <<꽃보다 청춘>> 시리즈가 있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편은 아프리카편이었다. 나랑 비슷한 또래들이 아프리카라는 생소한 여행지로 여행을 떠나는 모습이 너무 부러웠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출연진이 여행중 혼자 여행하는 여성과 대화를 하는데, 그 분이 YOLO(You Only Live Once)라는 말을 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큰 울림이었다. 아니, 주변 모든 또래들이 감동을 받았다. 갑자기 다들 짐꾸러미를 하나씩 싸더니 해외로 나가는 것을 보고 확신이 들었다. 당시 대한민국에는 ‘욜로’ 열풍이 불었다. 다들 인생은 한 번 뿐이라면서 인생을 즐기기 시작했다. 인스타그램에는 누가 해외여행을 잘 다녀왔는지 경쟁이라도 하는 듯 해외여행 사진으로 도배됐다. 누가 어디를 갔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해외여행을 안 간 친구들은 ‘내가 지금 제일 행복하다’ 경쟁을 하기 시작했다. 술자리에서 즐겁게 노는 사진, 친구들과 분위기 좋은 곳에서 노는 사진, 국내여행 사진 등 다들 행복을 뒤집어쓰고 사는 것 같았다. 정말 그런줄 알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다들 하나 둘씩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행복을 바른 그들의 인스타그램 계정이 텅 비거나 사라지는 현상이 많아졌고, 남아있다 하더라도 더 이상 그런 게시물은 올라오지 않았다. 행복 경쟁이 중단됐다. 이 갑작스러운 상황이 많이 당황스러웠다. 오죽 했으면 단톡방에 ‘나 몰래 다들 가계정 만들었냐?’라고 물어봤겠는가.
어느 날 친구가 맥주 한 캔 하자면서 불렀다. 무더운 여름밤, 친구는 게시물에서 보이던 행복이 땀으로 다 빠져나간듯 보였다. 왜 갑자기 인스타 활동이 뜸하냐는 질문에 친구는 담담히 “공허해서”라고 포문을 열고 천천히 자신의 감정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분명 행복했다고 중얼거렸다. 한 번 뿐인 인생 최선을 다해서 놀기 시작했고, 사진을 찍어서 올리면서 추억을 남기는 것이 너무 행복했다고. 그러다 출렁거리던 통장 잔고가 참방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보면서 ‘놀아서 남은 게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렇게 친구는 자신이 느낀 가장 밑바닥의 감정까지 쏟아냈다.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어쩌면 우리는 늘 죽지 않을 것 처럼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젊음을 누리면서, 평생 20대로 살면서, 순간을 즐겁게 사는 것 같다. 선배들이나 어른들은 원래 늙은 상태로 태어난 것 같다. 하지만 우리의 삶 또한 흘러가고, 무한하지 않다. 결국 당장의 소비적 즐거움은 흘러가는 시간을 낭비시켜 공허함을 남기는 독이된다. YOLO에 대한 회의적이게 됐다.
좋아하는 웹툰에 “생은 짧고도 유한하기에, 바르고 가치있게 써야 하지요.”라는 대사가 있다. 어쩌면 YOLO의 진정한 의미는 한 번 사는 짧고도 유한한 삶을 가치있게 사용하는 것이 아닐까? 즐겁게 살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가치있게 살면서 즐거움을 느끼라는 의미다. 우리는 ‘즐거움’이라는 의미를 1차원적인 행복으로만 생각하지만 배움을 통해, 남을 돕는 것을 통해, 경험을 하는 것을 통해 우리는 충분히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만약 YOLO 생활 이후 공허함을 느낀다면 YOLO의 진정한 의미를 찾지 못해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즐거움을 위해 삶을 가치있는 것에 쓰자. 사람은 모두 YOLO니까.
통찰과 주목도로 평가할 수 있는 글입니다. 통찰 면에서는 중심맥락의 내용이 예상 가능한 범주안에 있기 때문에 차별성이 부족해보입니다. 중심맥락의 내용을 더 전개하고 깊어지게 해서 생각의 차별성을 보여주는 식으로 다시쓰기를 해야 합니다. 주목도 면에서는 표현을 더 인상적으로 하고 사례를 고를 때 더 눈길이 가는 것으로 선택하는 연습을 하면 좋겠습니다.
# 14.
궤도를 벗어난지 163일째. 꽃보다 예쁜 나이라고 하는 스물 둘, 나는 우주선에 갇혀 우주를 유영하고 있다. 아무래도 내가 천재였던 게 잘못일까? 아니다. 아무것도 잘못되지 않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검고 깊은 우주를 보고 있자면 내 존재같은 것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정확히 뭐였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우주를 떠도는 수많은, 정말 셀 수 없이 많은 행성의 조각들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아주 작다고 해도 속도는 느리지 않았고, 부딪힌 순간 우리가 타고 있는 우주선은 궤도를 이탈해버렸다. 궤도만 이탈했을 뿐 아니라 자동항법시스템이 고장나버렸다. 수동으로 항로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은 모두 갖추고 있었지만 위치를 탐지하는 기계 또한 함께 고장나버렸다. 위치에 있어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육안뿐. 태양이 어느 방향에 있나 하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태양을 향해 무작정 가까워지기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밀랍 날개가 녹아 바다에 빠지는 대신, 기계와 온몸이 순식간에 타버려 오그라들 것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은 시도해봤다. 지구에 있는 본부에서는 우리를 구하러 오고 있다. 아마도, 그럴 거라고 믿고 있다. 외행성에 다녀오는 5년짜리 프로젝트였다. 궤도를 벗어나기 전까지도 이미 1년동안 날라온 참이었기 때문에 아직 남은 식량은 넉넉하다면 넉넉했다. 희망적으로 본다면 3년 반 안에는 우리를 구하러 온 우주선과 마주칠 것이다. 희망을 빼고 본다면 남은 식량을 한 끼당 1/10로 줄여서 섭취하더라도 평생동안 그 누구도 마주치지 못하고 그냥 비참하게 굶어 죽어갈 것이다. 그러니까 일단 모든 것은 원래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마치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목적했던 외행성을 찍고 다시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는 것처럼.
유서는 우주선을 타기 전부터 이미 다들 써놨다. 애초에 우주 탐사 작전에 100%라는 것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살아돌아가려면 일단 미치지 않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상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기에, 같은 시간에 일어나 우주선을 점검하거나 항해일지를 쓰는 등의 루틴은 유지하고 있다. 매일 어떻게 하면 우주선을 궤도로 돌리거나 본부와 연락할 수 있을지에 대한 방법을 내보고 실행해본다. 여가 시간엔 각자 인생이나 두고온 사람에 대해 생각하거나 게임을 하거나 일기를 쓰거나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우주에서의 시간을 가장 의미있게 보내는 방법을 발견한 것은 궤도 이탈로부터 57일째였다. 와카다 상도 바둑을 둘 줄 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단지 시간을 보내고자 시작했다. 그러나 바둑을 두어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한 번 바둑에 미쳐버리면 답도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게다가 나와 그는 실력이 호각이었다. 누가 더 공부하느냐에 따라 앞서거니 뒤따르니 하는 차이는 있었다. 간혹 한 번 이기고 두 번 진다든지, 세 번 이기고 한 번 진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우리는 나름의 규칙을 정했다. 첫째, 하루에 한 판만 둘 것. 둘째, 대마가 잡히는 등 이미 승패가 명확할 경우 우기면서 끝까지 두지 않을 것. 셋째, 세 번 연달아 이기거나 질 경우 칫수를 고칠 것.
Sujin vs Wakada. 종이에 기록해나가던 동료들도 처음엔 간식을 내기로 거는 등 나름대로 재미있게 임하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규칙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는 의미없고 규칙없는 돌들의 나열로 보일 뿐이다. 점점 이 대국은 와카다와 나만의 진지한 대결이 되어갔다. 게임에 있어서 승패만큼 중요한 게 있을까? 처음에는 그야말로 이기고 지는 데에만 심각하게 집착했다. 한 번 이기면 그날은 하루종일 기분이 좋았다. 지면 분해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머릿 속에서 계속 복기했다. 그 때 그 자리에 두었어야 했는데 하면서 계속 머릿속에서 흰 돌과 검은 돌을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나 20번기가 지나갈 때 쯤부터는 승패보다는 내용이 중요해졌다.
바둑에는 ‘패’라는 게 있다. 서로가 먹고 먹히는 모양일 때, 한 번은 다른 곳에 둔 다음에 다시 돌을 따먹을 수 있는 규칙이다. 이 ‘패’ 때문에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져서 바둑이 발명된 이래 수천, 수만, 수억, 아니 셀 수 없이 많은 판이 두어졌지만 우주에서 단 한 번도 똑같은 대국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있다. 물론 곧바로 반박이 떠올랐다. 똑같이 두어진 판이 있다고 한 들 모든 판이 기록에 남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증명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것. 그러나 정말로 우주에서 바둑을 두기 시작한 이래로, 와카다와 두는 한 판 한 판이 유일하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더이상 누가 이기는지는 이전만큼 중요하진 않게 느껴졌다.
오늘도 와카다와 바둑을 두고 있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두어서 107번기. 이쯤되면 상대의 수가 서로 훤히 읽힐 법한데, 우주선에 탑재된 AI로 각자 바둑을 공부하다보니 점점 실력이 늘어나 오히려 점점 두기가 까다로워지고 있었다. 쉽게 쉽게 정석대로 두어가던 판에서 점점 복잡한 포석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약간 형세가 불리하다는 판단에 무리하게 적의 진영에 들어갔던 탓일까. 내 대마가 몰리고 있었다. 살지 못하면 이대로 패배다. 반면 살아낸다면 역으로 상대의 돌을 압박할 수 있다.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순간. 갑자기 환호성이 들렸다. Connected! We are connected! 와카다도 고개를 돌린 그 순간, 대마를 살아있는 돌과 연결해 살려낼 묘수가 눈에 띄었다. 곧바로 착수했다. 안도감보다 먼저 밀물처럼 희열이 몰려왔다.
주목도 높게 읽히는 게 쓰는 것은 장점입니다. 그런 점을 계속 유지하고 더 발전시켜서 작문을 쓸 때 잘 활용하면 좋겠습니다. 이 글은 통찰의 면이 어정쩡하기도 하고, 전체 글의 내용이 제시어와의 연관성이 좀 부족하게 읽히는 게 한계입니다. 그 점을 고려해서 다시 써보기 바랍니다.
# 15.
1. “지치면 지고 미치면 이긴다.” 검게 선팅된 차창에 흰색 볼드체로,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듯 커다란 글씨로 적혀있다. 그걸 읽는 것만으로도 누가 귀에 대고 크게 소리치는 것만 같았다. 부딪힌 무릎에서 심장이 뛰는 것처럼 욱신욱신 통증이 전해졌다. 검정색 봉고차의 옆 면에는 입시학원 마크가 프린팅 되어 있었다. 입술을 달싹여 혼자 속삭였다. “지치면 지고, 미치면 이긴다.”
2. 이모는 나만 보면 옆구리를 꾹 찌르며 “어깨 좀 펴고 다녀.”라고 속삭였다. 유난히 둥글게 말린 어깨를 가진 나에게, 자신감이 없어 보인다고 구박하곤 했다. 그것이 둥근 어깨 때문인지, 이혼한 부모님 사이에서 이리 저리 떠밀리다 이모 집에 얹혀 살게 된 때문인지 알 수는 없었다. 그다지 생각할 이유도 없다. 사실 나는 내 어깨가 싫지 않기 때문이다. 내 굽은 어깨에는 장점이 하나 있다. 내가 꼭 껴안았던 사람들 모두가 하나 같이 입을 모아 내 품이 ‘맞춤옷 같이 너무 포근’하다고 말했다. 아마 둥그런 어깨 모양 때문에 더 폭 안길 수 있기 때문이겠지.
‘이 미친 세상에 지친 사람들 이리로. Free hug’라는 팻말을 목에 걸고 신촌 한복판을 돌아다녔다. 쭈뼛쭈뼛 다가왔던 이들에게 온 힘으로 포옹했다. 그러고 나면, 한 두 마디씩 그들 인생사를 얻어 들을 수 있었다. 수능을 앞둔 삼수생, 캠퍼스 커플을 하다 헤어져 술독에 빠져 사는 대학생, 또는 그냥 인생이 외로운 사람들. 내가 건넨 보잘것없는 위로에도 이들은 다시 눈빛을 빛내며 돌아갔다. 그들의 결핍과 나의 결핍이 만나 퍼즐의 아귀를 맞추는, 그런 작업이었다.
소나기가 오던 여름날 효정이를 만났다. 어깨 위 반듯한 단발에 벨벳같이 빛나는 까만 머리칼을 가진 애였다. 갑작스런 비에 팻말을 뒤집어쓴 채 어쩔 줄 모르던 나에게 파란 우산을 씌워줬다. “프리허그, 하실래요?” 팻말을 보여주며 내가 묻자 잠시, 새까만 눈동자로 나를 바라봤다. 이내 풀썩 내 품에 안긴 효정이는 그 길로 30분을 내리 엉엉 울었다. 내리는 빗방울이 다 그 애의 눈에서 나오는 눈물 같았다. 우리 둘 다 비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에 속절없이 푹 젖었다.
미안하다며 데리고 들어간 카페에서 따뜻한 차를 홀짝이며 효정이는 속사정을 풀어놨다. 범퍼카 같은 삶을 살아온 애였다. 여기 부딪히고 저기 부딪히는, 그럼에도 아무도 신경 써주지 않는 그런 삶. “저는 주말마다 여기 있어요. 울고 싶을 때 언제든지 오세요.”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듯 무미건조한 얼굴로 말하던 효정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민망해서 어떻게 그러겠느냐면서 손사래를 쳤으면서도 그 애는 꼬박 두 달을 찾아왔다. 올 때마다 꽃 한 송이 씩을 손에 들고 왔다. 이런 데에 익숙하지 않아도 어색하게 건네 받은 그 꽃들이 참 예뻤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생각해요. 고3땐가, 담임 선생님이 그러셨거든요? 지치면 지고, 미치면 이긴다고. 그 때 당시에는 무슨 소린가 했었는데. 이제는 스스로 매일 다짐해요. 남들보다 미쳐야 해, 그래야 이겨.”
“조금 지쳐도, 괜찮지 않아요?”
나의 대답에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를 바라보는 듯한 눈으로 그 애는 말갛게 웃었다.
나뭇잎들이 가을 빛으로 조금씩 물들기 시작하던 때부터 효정이는 발길을 끊었다.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연락할 길이 없었다. 그 애와 나는 주말을 약속한 사이, 그 자리에 내가 있고 그 애가 있던 사이였기에 연락할 필요가 없었다. 그 애가 다시 오면 휴대폰 번호부터 물어 봐야지, 다짐했다.
효정이를 처음 만난 날처럼 소나기가 오던 날 그 애의 삼촌이 나를 찾아왔다. 커다란 꽃다발을 품에 안은 채였다. 두터운 비를 헤치며 다가오는 빨갛고 파란 꽃들과 그가 한 데 뭉쳐, 하나의 모자이크처럼 불분명했다. 꽃다발을 내밀며 효정이가 주는 거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빗소리에 잠겨 웅웅댔다.
“무슨 일이에요? 효정이 어디 있어요?”
“효정이는 없어요. 찾지 마세요.”
무거운 걸음으로 그는 떠났다. 손에 쥔 다발 안의 꽃보다, 효정이의 까만 눈동자가 선명한 감각으로 다가왔다. 끝이 어디인지 모를 만큼 깊고 어두운 눈동자를 가진 그 애가 아마 지쳐버린 걸까. 피부에 와 닿는 빗물의 냉기가 심장에 스며들었다.
3. 찬 바람이 부는 거리엔 벌써 길고 두꺼운 옷에 포장된 사람들이 다닌다. 마스크와 스카프는 그나마 인간적으로 보이게 하던 부위마저 가려 버렸다. 휴대전화 빛에 반사되어 번쩍대는 안광에, 검고 길다란 옷을 입은 거대한 거미들이 지나다니는 것 같았다. 아무도 아무에게 관심이 없었다. 회색 하늘은 먼지 때문인지, 구름 때문인지 먹먹한 빛깔만 내비쳤다. 품 속을 파고드는 추위에 웃옷을 여미며 골목을 돌았다. 쾅. 주차된 차에 부딪혔다.
공감/감동의 요소와 주목도의 요소가 높은 글입니다. 잘 쓴 글입니다. 억지스럽지 않은 전개도 좋고, 전반적으로 자연스럽게 감정과 정서에 소구하는 문장들의 톤도 좋습니다.
# 16.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어느 가을(2020년 11월)에 겪었던 이별에서 비롯된다. 불에 덴 듯 왔다가 소실점 너머로 사라져가는 사랑 앞에서 나는 무능(無能)하고 무력(無力)했으며 무용(無用)했다. 그날 겪었던 천국에서 지옥으로의 극적인 감정 교차, 그 아리고 쓰디쓴 순간이 내 사유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내 사유에 심연이 있다면 꽃보다 아름다운 그녀에게 빚진 바가 크다. 글을 쓰기에 앞서 나는 이런 생각들을 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에 얽힌 곡절을 겪지 않는가. 결국 그것은 어느 가을날에 떨어진 낙엽 하나쯤의 일로 기억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진정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먼저 첫만남, 어색한 대화, 은밀한 약속, 그 과정에서 느꼈던 감정 따위의 추억을 떠올렸다. 기억의 순서대로 글을 써볼 생각이었지만 잡다한 사색이 엉키고 이내 감정이 북받쳐 문장은 쓰이지 않았다. 처음엔 잠을 자려고 애썼다. 아무리 노력해도 잠이 오지 않을 때 글을 읽기 시작했다. 사랑과 이별에 관한 시와 소설, 수필, 철학서적 등을 차분차분 읽었다. 어떤 대목은 메모를 하고 그것을 수시로 꺼내보며 경험의 영역에서 재검토했다. 모호한 착상들은 감정이입을 통해 윤곽이 드러나기를 기다렸다.
견딜 수 없지만 견뎌야 할 수밖에 없는 이별의 하염없음을, 그 처절한 고통에 견주자면 사랑을 알려는 내 노력은 한줌에 지나지 않을 만큼 작고 하찮았다. 사랑에 관해 정신분석가들은 성충동과 결핍에 대한 강박증이라고 주장했고, 사회학자들은 사회성을 인간의 공리로 놓음으로써 간단하게 해결하고자 했다. 그리고 생물학자들은 군집동물의 진화론적 선택이란 결론을 내렸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담론을 검토하고 사유한 끝에 결론을 얻었다. 자신이 겪은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서 이끌어내야 한다는 사실이다. 나에게 있어 이 경험들은 사랑이 무엇인가를 다시 묻게 한다. 내가 겪은 게 진정 사랑이었는가 하는 문제 말이다. 내가 당시 겪은 사랑은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드러내는 경험이었다.
우리는 왜 누군가를 사랑하는가? 사랑은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는 미지의 장소로 떠나는 여향이고, 불가사의한 세계를 향한 모험이다. 모든 사랑은 위험하다. 사랑은 그 속성상 반쯤 미친 상태에서 치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랑은 세계의 법칙들에 의해서는 계산되거나 예측할 수 없는 하나의 사건”이다. 이것이 사랑의 불가사의함이다. 사랑은 욕망과는 다르다. 사랑은 “정성과 재연을 요구”한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은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말을 반복해야 한다. 사랑은 그것을 선언하는 말과 지속하겠다는 약속을 삼켜야만 살아 있을 수 있는 생물이다.
그런 말과 약속이 끊기는 순간 사랑은 덧없이 죽는다. 평범해 보이지만 이것이야말로 사랑이 품은 가장 큰 어려움이다. 많은 사랑들이 이것에 실패하기 때문에 끝난다. 당신이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다면 사랑을 사랑하듯 그 누군가를 사랑하라! 사랑은 그런 노고를 바칠 만큼 가치가 있다. 사랑은 진리 그 자체이고,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다. 사랑은 계속 재발명되고 지켜내야 하는 인류의 위대한 자산이다. 자, 이제 당신의 사랑 이야기를 내게 하라. 나는 당신의 사랑 이야기를 듣겠다.
통찰과 주목도 두 요소에서 평균 또는 평균보다 더 나은 수준으로 읽히는 글입니다. 다시쓰기를 할 때는 제시어와의 연관성이 더 높아보이도록 보완하면 좋겠습니다.
# 17.
매년 어버이날마다 나는 어머니께 안개꽃을 선물해 드렸다. 어머니는 화려함을 뽐내는 장미꽃보다 은은한 아름다움을 가진 안개꽃을 좋아하셨다. 그 색깔도 다양해 매년 다른 색깔로 사갈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나에게 꽃이란 안개꽃과 같은 말이었다. 동네 소꿉 친구의 고등학교 졸업식 날이었다. “아 나도 남자한테 꽃 한 번 받아보고 싶다”는 장난스러운 말을 자주 하던 친구였다. 나는 당연하게도 안개꽃을 사들고 갔다. “걔가 파란 색을 좋아하니 파란 안개꽃을 사가야겠다” 친구가 좋아할 표정을 보니 벌써부터 뿌듯했다. 친구에게 꽃을 건네니 “야 너무 예쁘다, 나도 이제 남자한테 꽃 받았네?”라고 농담을 건네며 아이처럼 좋아했다.
시간이 흘러 대학교에 진학해서도 우리는 누구보다 친하게 지냈다. 같이 카페에서 공부를 하기도 하고, 술도 자주 마셨다. 시도때도 없이 만나던 와중에 친구는 “야 너 학교에 친구 없냐? 왜 나랑만 노냐?”라고 일침을 놨다. 할 말이 없던 나는 “야 내가 너랑 놀아주는 거지 불쌍한 친구야”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날들이 지나고 나는 여자친구가 생겼다. 그 이후로 연락을 하면 친구는 피하기 바빴다. 서운한 것이 있냐고 물어도 답해주지 않고 그저 뚱해 있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그리고 몇 년 후, 그 친구도 참석하는 동창 모임에 가게 됐다. “야 오랜만이다?” 친구는 의외로 반가운 얼굴로 나를 맞아줬다. 자리가 파하고 둘만 남게 됐을 때 친구는 많이 취했는지 나에게 그 때의 섭섭함을 털어놓았다. 솔직히 조금 어이가 없었다. “내가 너한테 섭섭하게 한 게 뭐가 있냐? 뭐가 서운한지 말도 안 해주고 그렇게 잠수 타냐”고 쏘아붙였다. “야 너는 그 때 나한테 파란 안개꽃 왜 줬냐” 전혀 예상치 못한 친구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실 기억도 안 나는 일이었다. “그냥 너가 파란색 좋아하잖아. 안개꽃 이쁘고”. 친구는 갑자기 가방에서 책 사이에 끼워놨던 코팅된 안개꽃 조각을 나에게 건네줬다. “야 집 가서 파란 안개꽃 꽃말 검색해봐. 사람 마음 다 설레게 해놓고. 나쁜 놈.” 친구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에 가버렸다.
“영원한 사랑” 파란 안개꽃의 꽃말이었다. 주로 프로포즈용으로 많이 쓰인다고 했다. 미안한 마음이 들어 순간 울컥했다. ‘꽃보다 꽃말’. 나는 그저 예뻐서 고른 꽃인데, 친구는 그 꽃에 담긴 꽃말을 생각하고 오랜 시간 간직해온 것이었다. 내가 특별한 의미 없이 하는 말이나 행동도 상대방은 전혀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 다르게 받아들인 의미는 실체 없는 희망을 품게 하기도, 미움을 품게 하기도 한다. “미안해. 그때 내가 꽃말까지는 미처 생각 못했어.” 힘없이 보낸 카카오톡 메시지 옆에 1이 사라지지 않는다.
예상 가능하고 평범한 내용으로 중심맥락이 구성된 점이 글의 한계입니다. 통찰 면에서는 생각을 더 전개할 수 있는 여지를 고민해야 하고, 주목도 면에서도 표현력과 구성력에서 더 인상적으로 보일 만한 요소가 어떤 것이 있는지 고민해서 다시 써보기 바랍니다.
# 18.
‘아들, 로스쿨이든 고시든 하고 싶은 거 해. 엄마가 전셋집 빼서라도 밀어줄게.’
잡초는 꽃을 피우기 위해 땅으로부터 가차없이 뽑혀 나가는 숙명을 타고 났다. 인생의 봄은 청춘이라는데 정작 엄마는 반백 년이나 넘게 살면서도 꽃피우지 못한 삶을 살았다. 삼촌들의 학비를 감당하기에도 벅찼던 집안 사정에 4년 장학생으로 원치 않는 대학에 진학한 엄마였다. 이제는 나에게 눈치보지 말고 꽃을 피우라며 그간 뿌리내리고 살았던 전셋집까지 내게 다 바치려 한다.
꽃은 향기를 내뿜으며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지만, 시도때도 없이 뽑히는 잡초에게 하나 남은 것이 있다면 ‘생명력’이다. 삶의 질곡을 다 겪고도 기죽거나 시들지 않는 생명력 말이다. 엄마는 가정교육과를 졸업하고 딴 길로 눈을 돌려 통신회사를 잠깐 다니다가 우리 아빠를 만났더랬다. 임용고시를 보고 정교사가 될 틈도 없이 결혼, 출산 그리고 육아는 쉼없이 들이치는 장대비와 같이 쏟아졌다. 마냥 ‘안사람’이 되기에는 삼남매를 키워내며 너무도 빠듯한 생활이었다. 엄마는 학습지 선생님이 되기도 하고, 운이 좋을 때는 학교 기간제 교사로 채용되기도 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구석에서 잡초는 가꾸지 않아도 자라나고 있었다.
어느 날 불어 닥친 바람은 엄마의 옆자리에 서있던 남편을 저 세상으로 데리고 떠나버렸다. 기댈 곳 없이 혼자서 세찬 바람을 맞으며 잡초는 허연 뿌리와 몸통 송두리째 드러내 따가운 햇볕에 점점 시들었다. 엄마의 닳고 굽어진 주름 손마디와 같이 말이다. 천천히 그렇지만 꾸준하게, 엄마는 막내 아들까지 대학에 보내야 한다는 일념으로 엄마는 다시 일어났다. 지금도 그녀는 늙어서 자식에게 짐이 될 수 없다며 산후도우미 자격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나는 한 송이 꽃보다 잡초, 수없이 나부끼고 밟혀도 일어서는 그런 잡초가 되고 싶다.
엄마가 등장하는 서사구조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중심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예상 가능하고 평범한 통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감/감동의 요소를 추구했을 수도 있는데, 그 점에서의 효과가 강하게 나지는 않습니다. 어떤 요소라도 임팩트 있는 효과가 날 수 있도록 글을 구상한 뒤에 쓰는 연습을 더 해야 합니다.
# 19.
찬 바람에 코가 빨개졌다. 길에는 눈이 쌓여 걸을 때마다 뽀드득 소리가 났다. 털모자에 털장갑, 털양말로 중무장한 사이에서도 눈빛만큼은 반짝반짝거렸다. 나는 깔끔하게 포장된 장미꽃 한 송이를 소중히 감싸쥐었다. ‘꽃 살 돈으로 먹을 걸 사는 게 낫지!’라는 엄마의 가르침 아래 초등학교 졸업식 때조차 제대로 된 꽃 한 번 가져본 적이 없던 차, 오늘의 장미꽃은 죽을 때까지 지켜야 할 나의 가보가 될 것이다. 바로 내 최애로부터 받은 것이니까!
“엄마, 저 교회 갔다가 독서실 다녀올게요!”
일요일 아침, 나는 바깥에 나갈 명분을 대고 ‘덕질 메이트’ 소희를 만났다. 우리가 ‘아미스’ 오빠들의 컴백날을 얼마나 기다려왔던가. 영하 날씨에도 방송국 로비는 이미 팬들로 바글바글했다. “꺄아아아!” 녹화 현장에 입장하면 거기서부터는 환호성 싸움이다. 응원봉과 플랜카드를 격렬히 흔들며 응원법을 외쳤다. 공연이 끝나고 목이 쉰 채로 퇴장하는 길. 아미스 멤버들이 출구에 서서 직접 한 명, 한 명 장미꽃을 전해줬다. “추운데 와줘서 너무 고마워요.” 수수한 꽃 한 송이였지만 내게는 어떤 꽃다발보다도 귀했다. 나는 소희에게 나지막히 말했다. “오늘부터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은 무조건 장미야.”
찌그러질까봐 차마 책가방에 넣지도 못했다. 엘리베이터를 거울삼아 독서실에 다녀온 것처럼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갖가지 간섭이 일어날 우리 가족에게서 이 장미꽃을 지켜야 한다. 숨을 한 번 크게 내쉬고 집안으로 입장했다. “수민아, 어디서 난 꽃이야?” 아니나 다를까, 신발을 벗기도 전에 엄마의 질문이 들어왔다. “이거? 교회에서 줬어! 새로온 사람들 나눠주고 남았다구.” 재빠르게 꽃을 책상으로 옮겼다. 혹여나 잔소리를 이어갈까 바로 씻고 돌아왔는데 언니가 가방과 꽃을 들춰보고 있다. “아, 나가라고!!!”
다음 날, 나는 용돈을 털어 사온 예쁜 꽃병에 장미를 옮겼다. 우리 오빠들의 손길이 닿은 꽃이 방에 있으니 눈을 감아도 떠도, 그들과 함께 숨쉬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며칠 후, 학교에서 돌아오니 꽃이 사라져있다. 다급히 엄마를 찾았다. “그거 다 시들었길래 버렸는데?”, “아, 왜 버렸어! 그 장미꽃 왜 버렸어! 누가 버리래, 내껀데!!!” 눈앞이 캄캄했다. 말라 비틀어져도 평생 간직하고 있어야 했는데.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아니, 얘가 왜 이래? 그럼 다 시든 걸 버리지, 어떻게 계속 놔둬!” 아무도 상처받은 나의 마음을 달래주지 않았다. 심부름으로 우리 집에 반찬을 가져다주러 온 수철이와 이를 받으러 나온 언니가 현관에서 나를 한심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수철이의 표정은 달랐는지도 모르겠다. 자세히 보지도 않았다.
15년 후, 수철이가 장미꽃 100송이를 선물하며 내게 프로포즈를 했다. “너 장미꽃 좋아하잖아” 그때 아미스가 준 장미꽃은 훗날 이런 프로포즈의 로망을 이뤄주기 위함이었을까? 끝까지 일코 코스프레를 하며 덕질을 숨긴 덕에 내가 아이돌을 좋아했었다는 건 가족 중 아무도 모른다. 괜시리 수줍어하는 수철이의 표정이 귀여웠다. 나는 꽃보다 먹을 걸 더 좋아한다는 말을 하려다 말았다. 그런데, 이 레스토랑에 들어오는 아미스 오빠가 보인다. “어머, 어머! 수철아, 잠깐만!!” 지인들과 함께 온 것 같았다. 어쩜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잘생겼는지. 마침 내 옆에 꽃다발이 있다. 이제는 내가 장미꽃을 들고 찾아갈 타이밍이다.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프로포즈를 받은 날, 오늘이 내 덕질 커밍아웃하는 날인가보다. 우리 오늘 조금 싸울 수도 있겠다.
중심맥락이 조금 모호하게 읽히는 글입니다. 어떤 요소를 가장 주요하게 추구한 작문인지를 쓰기 전에 확실하게 정리하고 쓰는 연습을 더 해야 합니다.
# 20.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이 이런 말을 했다. 아침에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아먹는다고. 그럼 아침에 일찍 일어난 벌레는 무슨 봉변이냐고 생각했었다. 나는 지금 새벽에 일어나는 벌레 같다. 새가 눈을 뜨는 아침이 되기 전 도망가는 벌레. 수술과 암술 사이를 드나들며 꽃가루를 배달하듯, 나도 세상의 꽃들 사이에서 물건을 배달하는 삶이다.
해가 뜨기도 전에 눈을 떠 혹여나 아내와 아이가 깰까 조마조마 하며 차 키와 휴대폰을 챙긴다. 나가기 전 음료수 하나만 챙기고 빈속을 달래며 출발한다. 차에 탄 채 사이다를 따 한 모금하니 찌르르하고 빈속을 울린다. 새벽같이 배송을 위해 도로 위를 누비는 애벌레. 새에게 잡아 먹히는 것이 무서워 빠르게 달린다. 그럼 새는 누구일까하고 고민해본다. 나는 누구에게 잡아 먹히는 것이 두려워 아침부터 차를 타고 이렇게 나왔을까.
“돈?” 혼잣말이 툭 하고 튀어나왔다. 아니지. 어쩌면 항상 돈이 부족하다는 아내가 아닐까 생각한다. 월세에, 식비에, 아이들 유치원 값에, 돈 달라며 잡아먹듯이 재촉하는 아내를 벗어나 아침에 이렇게 도망치고 있는 게 맞는 것 같다. 그래서 새가 일어나는 아침이 되기도 전에 더 일찍 일어나는 삶을 살고 있구나. 결혼 전 연애시절 아내는 한 마리 새 같았다. 꽃보다 사람이 아름답다는 말은 그녀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주변에 빛나는 꽃들 사이에서도 더 빛나는 사람. 대학 때 치어리더를 했고, 필라테스 강사도 하며 그 아름다움을 뽐냈다. 그 아름다운 날개 옷이 탐나 훔치면 나도 날개를 달 수 있을 줄 알았다. 죄스러웠다.
배달 갈 때면 매번 상상한다. 이 물품들을 받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하고. 그리고 우리도 이렇게 살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지금처럼 비대면 배송이 늘기 전부터 여기 업체는 새벽 문 앞에 조용히 택배를 두는 게 원칙이었다. 그래서 직접 이 택배를 시키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비싼 집에서 좋은 물건들을 시키는구나 하고 느낄 뿐. 내가 만약 애벌레가 아닌 새였다면 아내도 이런 곳에서 이런 상품을 시키고 있었겠지.
오전 7시, 일을 마치고 집에 잠시 들렸다. 집에 새가 두 마리 있다. 꽃들 사이에 치여 둥지를 지키느라 깃털도 부리도 닳아버린 새. 그리고 밥 달라고 재촉하는 아기 새. 내 몸을 으깨어 이들에게 먹일 수 있으려면 더 일해야 한다. 고된 몸을 이끌고 오후엔 또 다른 배달을 하러 나선다.
주목도가 높고, 공감/감동의 요소도 일정 수준으로 있는 작문입니다. 어떤 요소가 상급으로 평가될 수 있다면 한 단계 더 높은 평가를 할 수 있을 텐데 그런 점이 부족하므로 다시쓰기를 할 때는 언급한 점을 고려해서 다시 써보기 바랍니다.
# 21.
배낭여행은 흔히 젊은층의 전유물로 여겨진다. 얻는 것도 많은 만큼 몸이 고달픈 여행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균 연령 76살인 할아버지들의 배낭여행을 표방한 <꽃보다 할배>는 처음 방영했을 당시 많은 화제를 몰았다. 이순재, 신구 등 선생님 반열에 오른 원로 배우들과 그들을 보좌하는 중년의 이서진 배우의 유럽 여행은 노년에도 청춘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배낭여행이 젊은 층의 로망만이 아닌 지금, ‘꽃중년’이라는 단어가 어색하지 않은 시대가 왔다.
꽃중년 열풍은 중·장년층 중심으로 늙지 않고 젊게 살고 싶은 욕망을 지칭하는 ‘샹그릴라 신드롬’의 확산을 나타낸다. <꽃보다 할배> 방영 이후 나타난 중·장년층 여행객의 증가는, 더 늦기 전에 떠나자는 젊은 층의 ‘YOLO’와 크게 다르지 않다. 몸이 안 따라준다면 기꺼이 헬스나 스포츠로 건강을 되찾는 꽃중년들은 다시 한번 청춘에 다가서고 있다. 관광과 헬스업계와 더불어 화장품과 성형업계에도 꽃중년의 바람이 불고 있다. 성형외과는 이제 중·장년층을 겨냥해 ‘‘꽃중년 성형’ 등을 선보이며, 화장품 제조사들은 앞다투어 ‘안티에이징’ 화장품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젊어 보이는 것’은 결코 ‘젊게 사는 것’과 동일하다고 볼 수 없다. 이러한 강박적인 젊음에 대한 욕망은 젊음을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보는 현상에서 비롯된다.
젊음과 아름다움의 관계는 문학에서도 찾을 수 있다.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주인공 도리언은 자신의 젊음에서 오는 아름다움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인물이다. “얼마나 슬픈가! 나는 늙어 무섭고 흉측한 모습으로 변하겠지”라는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늙어가는 것과 추함을 동일시하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젊음을 강요하는 사회다. 사람들은 늙음을 단맛이 빠져버린 껌으로 여긴다. “저건 우리 시대가 아니야”라는 말로 젊음과 늙음을 구분 짓는다. ‘아줌마’와 ‘아저씨’라는 친근한 표현들은 이제 늙음을 흉보는 말이 되었다. 가장 최근에는 늙음을 혐오스럽게 바라보는 ‘틀딱충’이라는 신조어까지 나타났다.
이미 고령사회를 넘어 초고령사회의 문턱에 진입한 한국에서 노인들은 여전히 주류에 편입되지 못하고 무력하기만 하다. 키오스크로 대표되는 디지털 격차의 벽에 막혀 노인들은 가고 싶어도 못 가는 곳이 많다. 평생을 일만 했는데 돈이 모래알처럼 들어오는 순간 흩어져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노인들이 태반이다. 노인 주거안정을 위한 임대주택 공급은 ‘혐오시설’로 낙인찍혀 공급지 인근 주민들의 반대로 지연되고 있다. 이미 변두리 인간인 노인들은 늙음의 혐오로 정당화된 연령차별주의에 밀려 더욱 변두리로 밀려나고 있다. 장유유서,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수식어가 있음에도 한국은 ‘노인을 위한 나라’와는 거리가 멀다.
노인을 존경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들을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포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늙음을 추함으로 바라보는 사회는 안에서 곪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꽃보다 할배>의 메시지는 단순한 청춘 예찬이 아니다. 그보다는 황혼에서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것, 그리고 늙음도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이는 자세의 중요성이다. 모두가 같이 늙어가니 우리는 당당히 “내 나이가 어때서”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통찰의 측면에서 중심맥락이 더 전개되고 깊어지면 좋겠습니다. 지금 쓴 맥락은 예상 가능한 범주안에 있으므로 평범하게 읽힙니다. 주목도 면에서도 표현을 더 인상적으로 하고 사례도 더 눈길이 가는 것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보완하면 좋겠습니다.
# 59.
나는 기특한 마음이 들어 광대가 올라간 채로 사물함으로 향했다. 성년의 날이라고 이벤트를 준비한 남자친구가 사랑스러웠다. 내 사물함을 열자, 꽃과 편지 그리고 올리브영 봉투가 있었다. 선물을 포장할 생각도 못한 투박한 그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노란 해바라기 꽃의 냄새를 맡았다. ‘아무 냄새도 안 나네?’. 그 다음 선물을 열었다. 마크제이콥스 향수이다. 뚜껑에는 향수병 만한 흰색 데이지가 달려있고 투명한 용기에 황금색이 찰랑거렸다. 너무 예뻐서 마음에 쏙 든다. 마지막 남은 편지는 너무 소중하고 오글거려서 읽기가 조금 두렵다. 잠시 주머니 속에 넣어두고 다음 수업으로 향했다.
일부러 조금 늦게 교실로 향한 나는 맨 뒷줄에 앉았다. 앞자리의 아이들은 재잘재잘 떠드느라 정신이 없다. 신선한 3월의 무역학과 전공필수 시간이다. 대부분의 1,2학년들이 모여 있어 교실은 빛나는 설렘으로 가득했다. 잘생긴 선배, 귀여운 후배, 술 친구 동기, 미팅 같이 나갈 사람 등 다들 저마다의 관심사에 정신이 팔려 교수님의 인기척은 들리지도 않았다. 나의 시선은 계속 교실 뒷문에 고정 되어있었다. “하이 에브리원, 투데이 위 윌…” 목소리가 들린다. 교수님의 영어는 진한 된장 맛이 난다. 언제나 들어도 토종 한국인이다. 그때 익숙한 실루엣이 뒷문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화들짝 놀라 시선을 돌려 앞을 쳐다봤다.
발걸음은 저벅저벅 걸어오더니, 내 옆의 의자를 드르륵 뺀다. 그리고 앉았다. 익숙한 숨결이다. 오른쪽을 바라보자 눈이 마주쳤다. 우리 얼굴은 발그레 상기되었고, 교수님을 의식한 듯 다시 앞을 쳐다봤다. 하지만 서로의 손은 어느새 책상 아래로 포개어져 있었다. 남은 손으로 노트북을 열어 카톡을 켰다. 선물 고맙다며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꽃은 얼마나 예뻤는지 구구절절 써서 전송버튼을 누른다. 옆자리에서 “카톡”소리가 들린다. 3초가 안되어 “편지는?”이라고 답이 온다. 아직 못 봤다고 보낸다. “카톡”. 빨리 편지도 보라며 울상 이모티콘이 왔다. 슬그머니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편지를 꺼내 열었다.
“나는 꽃이에오. 꽃보다 예쁜 너에게 꽂혔음.” 그리고 그 옆에 환하게 웃고 있는 삐뚤 빼뚤 한 꽃그림이 보인다. 오글거리는 걸 부끄럽고 싫어하는 나는 편지를 바로 덮었다. 빨개진 얼굴을 감추고자 태연한 척 창 밖을 바라봤다. 따뜻한 햇살에 빛나는 황금색 나무와 살랑이는 바람. 조금 추운 듯하지만 아주 춥지는 않은 날씨. 그 창 밖에는 어느덧 40에 가까워진 내가 서있다. 서로의 손을 꼭 잡은, 내 무릎만치 오는 아이와 눈높이를 맞춘다. “여기가 엄마가 20대때 다니던 학교야. 날씨가 너무 좋다 그지?” 바람을 타고 그때 그 교실의 웃음소리와 설렘이 내 마음속으로 들어온 것 같다. 마음이 환하고 심장이 두근거린다.
마음이 따뜻해지고 미소가 지어지는 글이라는 점이 장점이지만, 작문이 추구하는 요소가 강하게 추구되지는 못한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정/정서의 움직임을 꾀했다면 조금 더 임팩트가 강한 효과가 나야 합니다. 그래야 차별성이 있는 작문으로 평가받을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 60.
당신들이 우리를 부러워한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당신들 세상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비교 대상에 오르곤 하죠. ‘보다’라는 수식에 붙은 우리 존재는 끝없이 비교를 위해 소비되곤 합니다. 그런데 우리를 시샘하는 당신들의 감정은 그저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색색의 옷을 입고 아름다움을 뽐내는 우리는 필연적으로 눈길을 끄는 존재입니다. 행복의 엔도르핀을 깨우고 잔잔한 미소를 부르기도 하죠. 흔히 우리와 함께라면 ‘좋은 기분’을 선물 받았다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만큼 우리의 존재가 매력적이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우리에겐 그게 목숨입니다.
어떤 생명체든 생명을 영위하는 데에 자신만의 생존 전략이 있습니다. 흐르는 물의 섭리를 거스른 채 거꾸로 올라가 알을 낳는 생명체도, 추운 겨울이 오면 땅을 파고 겨울잠에 드는 생명체도 그들만의 생존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매력이란 곧 생명력입니다. 우리의 열매가 맺어지기 위해서 우리는 온몸을 다해 필사적으로 매력을 뽐냅니다. 쉬이 지나칠 수 없게 고운 자태, 기분이 좋아지는 은은한 내음, 파릇하고 꼿꼿한 절개. 이 한 몸 불살라 매력을 태우고서 우리는 마침내 결실을 보게 됩니다. 대자연 속에 우리 존재가 살아남기 위한 최후의 전략이지요.
그런데 당신들은 겉모양만 보고 ‘아름다움’으로 대상화하고선 우리를 함부로 대합니다. 아름답다면서 우리를 맘대로 꺾고 상처를 줍니다. 본인들의 만족을 채우기 위해 우리를 죽입니다. 우리에게 생명과도 같은 아름다움이 당신들에게는 소소한 만족으로 소비됩니다. 우리보다 어떻다 비교하는 말로 조롱합니다. 우리는 당신들에게 비교의 우열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화려한 생명력은 우리 자신을 스스로 죽이는 칼날로 돌아왔습니다.
당신들만의 폭력적인 판단은 우리에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당신네끼리도 그러더군요. 사회 속 약자를 그저 ‘보호’해야 하는 대상으로 두곤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봅니다. 약자를 보호하는 행위가 당신들만의 윤리에서 만족감을 채워주나 봅니다. 시선도 상처가 될 거란 점은 깨닫지 못하면서 말이죠. ‘우대조건’에는 약자임을 밝혀야 한다는 전제와 도움이 필요한 존재라는 인식이 깔려있습니다. 정작 진정한 우대가 필요한 상황에는 보호는커녕 내치기 바쁘죠. 그저 동정 혹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건네는 선의는 오히려 그들을 다치게 할 뿐입니다. 특별이 아닌 평범하게 사는 것이 그들의 생존 전략이기에.
부디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말아 주세요. 비교나 우열로 우위를 가리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봐주세요. 우리들의 생존 전략을 존중하고 그저 지켜봐 주세요. 당신들의 폭력적인 판단이 멈춘다면, 껍데기가 아닌 단단한 내면을, 그 안의 본질을 볼 수 있을 겁니다.
겉모습만 보고 어떤 대상이나 사물을 판단하고 대상화하는 것, 시선도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중심맥락인데 생각해볼 만한 여지가 있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목도 면에서는 꽃이 화자가 되는 글이라는 점을 알 수는 있는데 어떤 형식이나 장르의 글인지가 불분명한 측면이 있습니다. 이 맥락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필요한 장르나 형식을 찾는다면 새로운 효과가 날 수도 있어보입니다.
# 61.
꽃은 처음부터 꽃이 아니다. 꽃의 성장은 자그마한 한 톨의 씨앗에서 시작된다. 매번 활짝 피어있는 꽃만 봐온 터라 꽃이란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하나의 화신일 뿐이라 생각했었는데 꽃의 파종 과정을 타임랩스로 담은 영상을 보고는 그의 아름다움 뒤에는 그만의 숭고한 노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연약한 새싹의 잎이 딱딱한 씨의 껍질 사이를 오롯이 자신의 힘으로 뚫고 나온다. 그리고 그를 단단히 덮고 있는 흙을 뚫고 나온다. 그때까지 그가 쏟은 노력이 축적된 결과가 바로 꽃인 것이다. 어쩌면 꽃에는 ‘아름답다’는 형용사보다 ‘결실’이라는 명사가 더 어울려 보이기도 하다.
연약한 새싹이 흙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다면 그 씨앗은 결코 꽃을 피울 수 없듯 인생도 마찬가지다. 성장 과정이 하나의 결실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인생이 주는 무게감을 이겨내야 한다. 이러한 인생이 여럿 모여 이루어진 국가 또한 그 무게를 이기느냐 이기지 못하느냐에 따라 결실을 볼 수도, 혹은 싹을 품은 상태 그대로 사멸하게 될 수도 있다.
35년간의 일제강점기를 겪은 이후 이를 치유할 새도 없이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한국은 말 그대로 폐허가 됐다. 그런데도 대한민국은 한국전쟁 휴전 협정 70년 만에 경제 대국이라는 꽃을 피워냈다. 박정희 정권 시절 시행된 새마을 운동은 한국이라는 밭에 경제성장이라는 씨앗을 뿌렸고, 삼성은 그 씨앗에서 꽃을 피워냈다. 삼성전자는 특히 스마트폰, TV, 반도체 분야에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며 그 만의 밭에 수많은 꽃을 피울 수 있었다.
비효율은 비도덕적이라 하며 효율을 최우선시한 결과 삼성 이건희 회장은 삼성을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그 덕분에 한국인들은 해외에서 ‘두 유 노우 삼성?’ 하며 세계 속 높아진 한국의 위상을 확인하는 한편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성장우선주의 경영철학이 끌어낸 무노조경영, 그리고 경영 승계 논란은 삼성이라는 밭에 흐드러지게 핀 꽃들 사이에 숨겨진 그림자였다. 삼성은 그 그림자들을 더 많은 꽃으로 메우려 했을 뿐 한 줌의 풀도, 한 그루의 나무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풀은 잡초일 뿐이며 나무는 꽃의 광합성을 방해하는 존재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탓일까.
최근 삼성 반도체 노동자 희귀질환이 산재 인정을 받았다. 16년 만이다. 과거 나는 그 맞은편에 있는 학원에 다니면서 그 시위 현장을 여러 번 목격했다. 삐까번쩍한 삼성 건물들 앞에서 시위를 하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삼성이라는 밭에서 뽑힌 한 포기의 풀 같았다. 꽃을 위해 희생된 존재들 같았다.
이건희 전 삼성전자 회장의 별세 이후 이재용 부회장은 뉴삼성을 선언했다. 경영 승계 중단, 그리고 무노조 경영의 종식을 알리는 그의 말은 성장우선주의, 그리고 승자독식의 구조에서 벗어날 삼성의 모습을 기대하게 한다.
숲은 꽃뿐만 아니라 풀, 그리고 다양한 식물들 사이로 나무들이 그 자리를 메워 하나의 자연을 이룬다. 지금껏 꽃밭에 머물러 있던 삼성이 숲으로 성장하게 되기를, 특정 사람들 뿐만 아니라 노동자를 포함한 한국인 모두의 자랑이자 자부심이 될 삼성을 기대한다.
결실과 성장을 얘기하다가 삼성으로 이야기를 전환하는 것이 어색한 편입니다.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통찰의 면에서는 효율성과 성장우선주의, 승장독식주의를 개선하거나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게 어떤 것인지에 대한 생각이 더 전개되면 좋겠습니다. 주목도 면에서는 전반적으로 문장을 더 함축적으로 인상적으로 쓰는 연습이 필요해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