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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4-26회
시어동-문장대-문수봉-신선대-입석대-비로봉-천왕봉-장각동
20230115
1. 눈 내리는 속리산 기암능선
다시 속리산에 왔다. 검은 토끼의 해 첫날 1월1일 속리산 남동쪽 갈령에서 출발하여 백두대간 능선 갈령삼거리에 올라선 뒤 북진하여 속리산 천왕봉에 올랐다. 천왕봉에서 백두대간 능선 천왕봉 헬기장에 이른 뒤 장각동계곡으로 하산하였다. 2주 전 청명한 속리산 천왕봉에서의 조망이 떠올라 지금도 가슴이 벅차다. 이번에는 속리산 북동쪽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 화북주차장에서 출발하여 시어동계곡을 거쳐 문장대 사거리 백두대간 능선에 올라선다. 이곳에서 200m 거리에 있는 문장대에 오른 뒤, 문장대-신선대 휴게소-비로봉-상고석문-장각동 갈림목-천왕봉에 이르는 속리산 주능선인 기암괴석의 장쾌한 암릉 지대를 산행한다. 천왕봉에서 장각동갈림목으로 되돌아와 2주 전 하산한 장각동계곡으로 다시 하산한다.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 화북 대형차량 주차장에 도착하니 비가 내린다. 겨울 날씨 답지 않게 봄비 같은 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2년 전에 이곳에서 올라갈 때는 날씨가 청명하였었는데 이번에는 비구름이 내려앉아 잔뜩 찌푸려 있다. 화북탐방지원센터와 오송폭포 입구를 거쳐 시어동계곡으로 들어서 본격적으로 산행을 시작한다. 시어동계곡의 계곡물은 얼었던 얼음이 녹아내리는 봄의 계곡처럼 시냇물이 물소리를 내며 철철 흐른다. 봄비 같은 비가 내리니 봄날의 우중산행의 기분이 느껴진다. 시어동계곡에서 고도를 높이니 이제는 비가 아니라 싸락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싸락눈은 곧 눈송이로 변하여 눈 앞을 가린다. 우중산행에서 이제는 설중산행으로 바뀌었다. 시어동계곡에서 내리는 눈을 맞는 기쁨을 앞으로 다시 맛볼 수 있을까? 세 번째의 백두대간 종주, 이번 백두대간 종주를 끝으로 백두대간 산행을 졸업하려고 한다. 그래서 시어동계곡에 다시 올 수 있을지 의문이다. 오려는 마음만 있으면 올 것이고 눈 내리는 날을 맞추어 오면 눈 내리는 시어동계곡을 걸을 수 있겠지만 확신할 수는 없다. 눈 앞이 감감하고 눈은 안경에 부딪치고 땀방울은 안경 안으로 흘러내린다. 시어동계곡의 설경이 그윽하게 산객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예상시간보다 시간이 훨씬 더 걸려 문장대 사거리에 도착, 백두대간 능선에 올라섰다. 문장대 사거리-문장대-문장대 사거리(왕복)-신선대휴게소-비로봉-장각동갈림목-천왕봉-장각동갈림목(왕복), 이번 백두대간 산행은 이렇게 이어간다. 이정목에 적힌 거리를 바탕으로 이번 백두대간 산행 거리를 계산하면 3.9km에 불과하다. 그런데 접속거리는 8.9km에 이른다. 이번 백두대간 산줄기 산행은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격이다.
문장대에 올랐지만 눈구름 속에 주위는 잿빛의 어둠뿐이다. 문장대 정상에 타포니 현상에 의한 구멍들이 파여 있다. 문장대를 신성시 여기면, 이 구멍은 '태초 生命 탄생의 神秘'를 일러 주는 징표로 읽힐 것이다. 문장대 사거리로 되돌아와서 속리산 기암괴석의 명품인 암릉지대로 들어선다. 문수봉 아래를 거쳐 청법대를 보면서 주춤거리다 사진을 찍지 못했다. 조금 더 멀리서 청법대를 보고 싶었지만 청법대는 잿빛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신선대 휴게소에서 점심식사를 마친 일행을 만났다. 그들과 함께 2년 전에 신선대 휴게소 점심을 먹었는데 이번에는 나 홀로 떨어져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다. 신선대 휴게소에서 남쪽에 솟은 신선대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점심을 뒤로 미루고 일행과 함께 천왕봉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그러나 순식간에 그들은 멀어진다. 내 심장과 무릎으로 그들을 따라갈 수 없다. 포기하자. 그것이 마음이 편안하다.
입석대와 비로봉을 거쳐 두 바위가 양쪽으로 버티고 서 있는 좁은 통로를 통과하여 뒤돌아보면, 고릴라를 닮은 바위를 볼 수 있다. 신기하다. 영락없는 고릴라 모습이다. 고릴라바위를 지나면 멋지게 서있는 입석을 만난다. 고독한 인간의 모습, 그러나 끝없는 의지의 화신 같은 인간처럼 바위가 서 있다. "나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청마 유치환이 읊은 시 '바위'의 모습 같다. "아예 애련에 물들지 않고/ 희로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 비정의 함묵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는" 바위의 모습이 바로 잿빛 눈구름 속에 서 있는 저 모습일 것이다. 감정에 이리저리 잘도 휩쓸리는 이 산객은 입석의 굳은 함묵에 압도되어 촐랑촐랑 재빠르게 달아났다.
천왕봉이 잘 조망되는 산길을 통과하며 천왕봉을 가늠하지만 천왕봉을 찾을 수 없다. 시간에 쫓기며 허겁지겁 상고석문을 거쳐 장각동갈림목, 천왕봉 헬기장에 이르렀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왕봉에 오르지 않은 채 그곳에서 하산할 채비를 하고 있다. 나는 눈 내린 천왕봉, 잿빛 눈구름 속에 꼭꼭 숨어있는 천왕봉을 보고 싶다. 헐레벌떡 천왕봉에 올랐다. 2주 전 1월 1일, 그때 문장대에서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기암괴석의 바위능선을 천왕봉에서 바라보며 얼마나 황홀해 하였는가? 이번에는 잿빛구름의 어둠과 나뭇가지에 내려앉은 순결한 눈꽃 풍경을 감상했다.
속리산(俗離山) 천왕봉에서 조선시대 백호(白湖) 임제(林悌)를 생각하였다. 그는 성리학이 지배하던 조선왕조에서 비교적 자유분방한 사상을 지닌 선비였다고 한다. 그가 황진이 무덤을 지나다가 무덤에 제를 올린 뒤 읊은 시조는 인생무상의 아픔이 진하게 사무친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느냐 누워있느냐/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는고?/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또 그가 속리산(俗離山)에 들어와 지었다는 "道不遠人 人遠道(도불원인인원도)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 山非離俗 俗離山(산비이속속리산) 산은 속세를 떠나지 않으나, 속세가 산을 떠나는구나." 대구(對句)는 도(道)와 인간, 산과 속세는 분리되어 있지 않고 일치되어야 함을 뜻하는 명언이라는 생각이 든다. 속리산(俗離山)은 속세에서 떠나 있는 듯하지만 속세와 이어져 속세와 더불어 있는 俗與山이 된다. 속리산 천왕봉에서 잿빛 눈구름 아래 속세의 장각동계곡으로 내려간다.
2.산행 과정
산행 전체 거리 : 12.78km
전체 소요 시간 : 5시간 20분
2-1. 화북주차장-시어동계곡-문장대 사거리(3.3km. 1시간 40분)
경북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 시어동 화북 대형차량 주차장에서 산행 준비를 마치고 출발한다.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오송폭포(100m)와 성불사(200m), 문장대는 오른쪽으로 꺾어 진행한다. 오송폭포를 구경하고 싶지만 대원들이 내빼는 바람에 그냥 통과한다.
오른쪽 속리산국립공원 문장대 방향으로 진입한다.
본격적으로 산행을 시작한다. 겨울비가 내리고 있다.
고도를 높이니 이제 비가 아닌 싸락눈이 내린다.
봄인 듯 콸콸 물이 쏟아져 내린다.
해발 888m, 문장대까지 0.6km를 남겨둔 지점에서 시어동 계곡을 가로지른다.
산죽밭을 거쳐 마지막 뎈을 지나면 바로 위에 문장대 사거리에 이른다.
백두대간 능선에 올라섰다. 동서는 경북 상주시 화북면과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을 잇고, 남북으로 백두대간 능선이 이어진다.이곳에서 오른쪽 200m 지점에 있는 문장대에 오른 뒤 되돌아와서 천왕봉 방향으로 산행을 이어간다.
2-2. 백두대간 '문장대-천왕봉' 능선 산행(3.9km, 2시간 12분)
문장대 사거리 광장에서 문장대로 향한다.
문장대는 속리산을 대표하는 자연경관 중 하나로 산 정상에 바위로 석대를 쌓아놓은 듯한 형상을 하고 있는 봉우리(1,054m)입니다. 문장대는 본래 구름 속에 감추어져 있다 하여 운장대(雲藏臺)라 불리었으나, 조선 7대 임금인 세조가 속리산에 행차하였을 때 이곳에 올라 신하들과 강론을 하고 시를 읊었다고 하여 문장대(文藏臺)라고 바뀌었다고 합니다.
문장대 정상 아래에 문장대 표석이 둘 세워져 있다. 왼쪽 표석은 충북 보은군, 오른쪽은 경북 상주시에서 세웠다.
문장대에 오르기 전 충북 보은군에서 세운 문장대 표석과 함께 기념했다.
정상엔 타포니 현상에 의한 구멍들이 파여 있다.
문장대 아래 문장대 표석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와서 경북 상주시에서 세운 문장대 표석과 함께 기념했다.
道는 사람을 떠나지 않았는데 사람이 道를 멀리하였고 산은 世俗을 떠나지 않았는데 世俗이 산을 떠났네. 하여 이름 붙여진 문장대 1054m. 구름 속에 갈무리져 雲藏臺라 하다가 世祖가 이곳에 올라 시를 지었다 하여 文藏臺라 했으니 우러러 宇宙의 장대함을 보고 구부려 品類의 繁盛함을 살핀다는 奇妙의 極致. 頂上에는 알이 부화한 둥글게 파인 곳이 있으니 태초 生命 탄생의 神秘를 일러 주도다. 동쪽으로 칠형제봉, 문수봉, 신선대, 비로봉, 천황봉이 이어졌고, 서쪽으로 관음봉, 묘봉이 솟았으며, 비껴서 낙영산과 도명산이 다가선다. 남쪽 아늑한 곳에 법주사를 앉혀 法脈을 잇게 했으니 빼어난 기품, 浩然의 氣概여, 造物主의 조화여, 오! 仙界의 아름다움이여!
박찬선 글짓고 김정홍 글쓰다.
이곳에서 백두대간은 북쪽 늘재로 이어지는데 현재 출입 금지 구역이다.
정면으로 내려가는 길은 법주사 가는 길, 이곳에서 아이젠을 착용하고 신선대 방향으로 진행한다.
상주시 화북주차장에서 출발하여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 시어동계곡을 통하여 백두대간 능선 문장대 사거리에 올랐다. 이곳에서 문장대-천왕봉으로 이어지는 속리산 주능선인 기암괴석의 산줄기를 산행한 뒤 상주시 화북면 상오리 장각동계곡으로 하산한다.
신선대휴게소 1.1km, 천왕봉 3.2km
문수봉과 청법대 아래를 거쳐 신선대 휴게소로 진행한다.
문수봉은 눈구름 속에 보이지 않았고, 치솟은 청법대를 바라만 보고 급하게 내달렸다.
신선대 표석이 설치되어 있고 식탁이 마련되어 있다. 표석이 있지만 이곳은 신선대가 아니다.
신선대 휴게소는 문장대 1.1km, 경업대 0.6km, 천왕봉 2.3km 지점이다.
한 고승이 청법대에서 불경 외는 소리를 듣고 있는데 건너편 산봉우리 바위에서 신선들이 앉아 놀고 있는 것을 보고 가보았는데 아무도 없어 다시 돌아와서 보니 여전히 10여 명의신선들이 담소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후 이곳을 신선들이 놀던 곳이라 하여 신선대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신선대 휴게소에서 남쪽 방향의 신선대를 바라보지만 눈구름 속에 신선대는 숨어 있다.
경업대는 법주사 가는 길 400m 아래에 있다. 그냥 통과한다.
눈구름과 나뭇가지에 가려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다.
해발1000m봉으로, 문장대 1.9km, 천왕봉 1.5km 지점이다.
바위 두 개가 양쪽으로 솟아 있는 좁은 통로를 통과한다.
뎈 계단을 오르며 해발 1031.9m 비로봉을 올려보았다.
비로봉에서 남쪽으로 이어져 내리는 기암괴석 가운데 고릴라 모습을 한 바위가 특이하다.
입석대라고 알려진 바위보다 높이는 낮고 기암괴석은 아니지만 더 입석대처럼 보인다.
이곳에서 천왕봉이 잘 조망되는데 눈구름 속에 가려 깜깜하다.
입석대 0.7km, 천왕봉 0.9km 지점이다.
해발973m, 속리04-07 위치번호표지목이 상고석문 남쪽 출입구에 세워져 있다.
상고암 내려가는 갈림목에 있어서 상고석문이라 이르는 것 같다.
돌무지에는 인간의 소박한 소원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아, 이런 돌무지는 언제 보아도 정겹다.
신선대 휴게소 1.5km, 천왕봉 0.6km 지점으로, 법주사는 5.1km 아래에 있다.
해발1017m, 속리04-06 위치번호 표지목이 세워져 있다. 천왕봉에 오른 뒤 이곳으로 되돌아와 장각동으로 하산한다.
1월 1일에 오른 뒤 14일만에 다시 해발1058m 속리산 최고봉 천왕봉에 올랐다.
안내도의 눈을 쓸어보지만 눈이 얼어붙어서 쓸어지지 않는다.
눈구름 속에 기암괴석의 절경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곳에서 300m 거리의 천왕봉에 오른 뒤 장각동 갈림목으로 되돌아왔다. 20분이 걸렸다.
산객들이 비닐을 치고 점심을 즐기고 있다.
2-3. 장각동계곡 하산길(5.5km, 1시간 28분)
천왕봉 헬기장에서 장각동 4km, 급경사 내리막길을 내려간다.
급경사 비탈길을 내려오면 조금 완만한 경사가 이어지다가 다시 급경사길이 나온다.
이곳까지 오면 급경사 비탈길을 거의 내려온 것이다. 이 아래서 한 번 더 급경사가 이어진다.
해발 520m 장각동1.6km 지점으로 맞은편에 솟은 산봉은 백두대간 697m 산봉이라 어림한다.
급경사 비탈길을 완전히 내려와 이 뎈 계단을 거쳐 장각동계곡으로 내려간다.
계곡을 가로질러 산죽밭을 통과한다. 이곳에서 아이젠과 스틱을 깨끗이 씻어 장각동마을로 내려간다.
속리산 천왕봉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장각동계곡을 거쳐 상주시 화북면 상오리 장각폭포로 이어진다.
장각동계곡을 가로질러 북쪽으로 건넌다.
장각동계곡을 가로질러 남쪽으로 건너간다.
속리산 천왕봉에서 발원한 물이 상주시 화북면 상오리 장각폭포로 흘러내린다.
이 다리를 건너 장각동마을 방향으로 내려간다.
계곡은 봄의 풍경처럼 얼었던 시냇물이 녹아 콸콸콸 물소리를 내며 철철철 흘러내린다.
출발지부터 지금까지 산행한 노선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장각동계곡을 거쳐 속리산국립공원 지역을 빠져 나왔다.
이곳부터 민가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상주 상오리 칠층석탑은 돌을 깎아 만든 탑으로, 2단의 기단 위에 7층으로 몸돌을 쌓아 올렸다. 꼭대기 장식물이 없고 1층 몸돌이 특히 높다. 기단의 짜임새나 몸돌과 지붕돌을 여러 매로 짜 맞춘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 시대 전기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옛날에 이곳에 장각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전한다. 1977년에 옛 모습대로 세웠다. 1층의 기단 몸돌은 크기가 다른 부재를 짜 맞춘 것으로, 남쪽 면에만 모서리 기둥이 있고 서쪽 면에는 가운데 기둥 2개가 새겨져 있다. 이를 제외한 각 층의 몸돌에는 모서리 기둥을 새겼고, 꼭대기에는 장식물로 노반이 남아 있다.
*노반 : 탑의 최상부 옥개석 위에 놓아 상륜부를 받치는 부재
보물 제683호상오리 7층석탑 앞에서 장각동마을과 그 뒤쪽의 백두대간 능선을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짐 정리를 하고 출발한다.
장각동마을 입구에 敬天愛人 장각동 신선마을이라 새긴 표석이 세워져 있다.
산악회 임시본부가 설치되어 있는 금란정 앞 상주시 화북면 상오리 장각동주차장에서 산행을 마친다.
상주의 명소 장각폭포 설명안내판
속리산의 최고봉인 천왕봉에서 시작한 개울이 장각동 계곡을 굽이쳐 흘러 6m 높이의 절벽을 타고 떨어져 작은 연못을 이루며, 주변의 소나무숲과 암석 사이로 흐르는 맑은 물이 한 용소로 깊숙이 떨어지니 이것이 바로 장각동구의 장각폭포다. 수량이 많아 산천을 진행하고 수십 장 애안아래 검푸른 용소는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으며 낙수의 여파로 빙글빙글 돌고있는 수면을 보고 있으면 금방 용이라도 치솟아 오를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폭포 위에는 금란정(金蘭亭)과 노송이 고색창연하게 서 있어 그 풍경의 조화야 말로 무궁하며 조금 밑에 항북정이 있어 산, 폭포, 정자 모두가 한 폭의 그림이다. 폭포 위에 세워진 금란정은 "주위에 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하면 그 이로움은 쇠붙이도 끊을 수 있고 마음을 같이 한다는 말은 그 냄새가 난보다 향기롭다."라는 뜻이라 한다. 금란정에서 동으로는 옥녀봉과 서쪽으로는 장각동계곡, 남쪽으로는 형제봉이 아래를 바라보고 있으며 북으로는 높이 솟은 사모봄이 있다. 장각폭포와 금란정은 사극 '무인시대', '불멸의 이순신', 영화 '낭만자객'의 촬영장소이기도 하다.
금란정기념碑文
백두대간이 높은 구름과 짙은 안개 속을 장엄하게 꿈틀거리며 저 남녘의 지리산으로 뻗어 내려가니 수많은 태산준령과 봉만이 생겨나고 이곳 속리에 이르러 천왕봉도 솟아났다. 그 아래 깊은 골에서 나는 옥같이 맑은 물이 장각골을 지나 낙동강으로 머나먼 길을 나서다가 갑자기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만나 폭포를 이루니 장각폭포다. 이 절벽 위에 아담한 정자 하나 서있으니 金蘭亭이다. 裴公錫奉 南公相欽 金公好仁 金公八洪 盧公裁德 李公重燮 張公在翼 金公益翔 李公昌植 李公重亨 李公基鎬이신 열두 분이 오래 이어온 순수한 금란의 우의를 더욱 돈독히 하고자 금란정이라 이름 짓고 대추나무를 깎아 여섯 개 기둥을 세우고 잣나무를 다듬어 대들보를 올렸으며 소나무 서까래를 걸쳐 흙으로 빚어 가마에서 구워낸 옛적 기와를 이고 송판으로 마루를 깔아 넓이가 두어 칸으로 서기1962년 봄에 준공하였다. 화려하지 않은 그 자태가 소박하면서도 초라하지 않고 간결하면서도 경박하지 않아 이곳 경관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세월이 지나 여기저기 크고 작은 흠이 생기며 차츰 퇴락하여 감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상주시의 많은 지원과 협조가 있어 정자는 여전한 자태로 오늘에 이르렀으니 우리는 매우 감사히 여긴다. 아 참으로 훌륭하다. 정자의 창건 의의와 동기는 단순하였으나 반세기에 이른 오늘에 와서 보니 어느새 관광의 명소가 되어 있어 많은 이들이 아름다움에 도취하여 휴식을 즐기는가 하면 영화의 촬영으로도 유명해졌으며 전국에 알려져 만인의 사랑을 듬뿍 받게 되었으니 선대의 선견지명에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이제 창건하신 분들은 다 가신지 오래이고 자취만 남았으니 우리들 후손은 아름답고 유서깊은 금란정을 기념하며 한글로 번역한 금란정기를 다른 돌에 따로 새겨 이 비와 함께 세운다.
서기 2008년 11월 후손 일동 삼가 세움
정자 이름을 금란이라 한 것은 그 의의를 취한 것이 있다. 주역에 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 하면 그 이로움은 쇠붙이도 끊을 수 있다. 마음을 같이하는 말은 그 냄새가 난처럼 향기롭다 하였다. 저 쇠붙이는 물건 중에 견고한 것이고 난은 물건 중에 향기로운 것이다. 마음을 같이하는 이로움은 견고한 쇠붙이도 끊고 말의 향기로운 냄새가 난과 같게 되는 것은 마음을 같이함이 지극하지 않고서야 그렇데 될 수 있겠는가. 이런 것은 두 사람도 그렇게 하기가 어려운 것인 더구나 많은 많은 사람이겠는가. 임인년 늦봄에 위 아래 마을에 있는 동지 열두 사람이 의견을 합하고 마음을 같이하여 똑같이 재력을 갹출해서 속리산 아래 있는 용추 위에 두 칸의 정자를 새로 지었는데 겨우 수십일이 지나 완성이 되었으니 이 어찌 마음을 같이하는 이로움과 향기로운 말의 냄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여러 분과 정자에 올라서 동쪽으로 바라보니 우뚝 솟은 옥녀봉은 마치 화장을 곱게 하고 소매를 펄럭이며 춤추는 듯하고 서쪽으로 바라보면 깊숙한 장각동에 졸졸 흐르는 계곡 물은 마치 거문고가 울고 옥이 구르는 듯하며 남쪽으로 바라보면 한 쌍의 형제봉이 몸체를 연하여 마주 솟은 것은 마치 훈이 선창하면 지가 화답하는 듯하며 북쪽으로 바라보면 높이 솟은 사모봉이 큰 띠를 드리우고 홀을 바로 잡고서 단지를 향해 읍을 하는 듯하다. 그 옆으로는 백 길이나 높이 솟은 소나무가 우뚝하게 서 있어서 때때로 맑은 바람이 불어오면 여와씨의 생황 소리가 저절로 나오며 그 아래는 천 척의 비단폭포가 날듯이 흘러내려 무지개를 이루는데 웅덩이에 부딪혀 울리는 현자의 종소리가 끊이지 않으니 이러한 것은 이 정자의 큰 경관이다. 그 밖에 사계절의 풍경이 각각 다르고 아침 저녁으로 변하는 모습이 한결같지 않아 이백 같은 시인으로서도 다 읊을 수 없고 왕일소 같은 명필로도 다 쓸 수 없고 장의와 소진 같은 달변으로서도 표현해 낼 수 없고 용면 같은 솜씨도 그려낼 수 없으니 옛 사람이 이른바 별천지이지 인간세상이 아니라는 것이 바로 여기가 아닐까.
아, 아름다운 산과 고은 물은 하늘도 아끼고 땅도 숨겨두었다가 훌륭한 사람을 만날 때까지 기다려서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아직 그런 사람을 만나지 못하였을 적에는 산은 산대로 물은 물대로였음으로 여우와 토끼, 물고기와 용이 사는 굴과 집보다 나을 것이 없었으나 훌륭한 분을 만나게 되면 계곡과 산들이 그 품평을 얻게 되고 연하가 관할을 받게 되어 산은 더욱 아름다워 마치 용이 나는 듯하고 봉황이 나는 듯하며 물도 더욱 아름다워 은빛이 번득이는 듯 옥을 다듬어 놓은 듯한 경치로 바뀌게 되었으니 얼마 전 여우와 토끼, 물고기와 용의 소굴이었던 데서 새가 나는 듯한 화려한 건물을 보게 되었다. 그러니 어떤 사물이 세상에 드러남과 묻혀짐은 훌륭한 사람을 만나느냐 못 만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인데 그 만나고 못만남이 우연한 것이 아니고 반드시 거기에는 시운이 있는 것이다. 오늘날 여러분은 같은 마음으로 뜻을 합하여 이 비경을 얻었으니 훌륭한 사람이 훌륭한 터를 만났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반드시 조물주가 말없이 보호하여 이루어지게 한 것이니 그 점이 축하할 만한 것이다. 그리고 정자의 이름을 이미 금란이라 하였으니 마땅히 이름을 돌아보고 그 의의를 생각하여 변함없이 이어진다면 오늘의 금란이 반드시 후일의 금란이 될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준공을 하고서 이중형군이 나에게 기문을 지으라고 요청하는데 문장 실력이 없는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다고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하는 수 없이 대략 이상과 같이 기술하여 보낸다.
임인년 사월 하순 權五夏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