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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석희 > <손석희의 시선집중 - 3.1절 특집 ‘1919년 3월 1일 독립을 외치다’> 지금부터 진행하겠습니다. 함께 해주신 분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께서 나와 주셨습니다. 그동안에 광복절이라든가 아니면 개천절 특집방송 등에서 몇 차례 모신 바가 있었는데 조선사 관련 저서를 통해서 특히 조선사에 대한 기존의 시각을 바꿔놨다는 평가를 많이 받고 계시고요. 일제 식민 사관을 극복하고 우리 역사를 복원해내는데 애쓰고 계신 분이기도 합니다. 안녕하셨습니까?
◎ 이덕일 > 예, 안녕하세요.
◎ 손석희 > 대개 1, 2부나 아니면 3, 4부에서 뵈었었는데 그때마다 좀 시간이 부족하고 그래서요. 오늘 그냥 1, 2, 3, 4부를 통해서 이덕일 소장님과 함께 하겠습니다.
◎ 이덕일 > 고맙습니다.
◎ 손석희 > 그렇다 하더라도 시간이 여전히 모자랄 것 같기도 합니다.
◎ 이덕일 > 해봐야죠.
◎ 손석희 > 경험에 따르자면. 오늘이 3.1절, 누구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또 자세히 들여다보면 잘 모르는 경우도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대개 유관순 누나, 아니면 한용운 스님, 33인의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분들, 그 이외에는 사실 따지고 보면 졸업한지도 오래되고 하면 잊어버리는 경우도 많이 있고요. 이덕일 소장께서 보시기에 3.1절의 의미는 뭐라고 우선 정리하시겠습니까?
◎ 이덕일 > 3.1절은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우리 역사에서 민중이 스스로 역사의 주체로 나섰던 사건이라고 봐야 됩니다. 여기에는 뿌리가 있는데 3.1운동 25년 전에 이제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죠. 1894년에. 동학농민혁명을 한마디로 몰하면 반제 반봉건입니다. 반외세 반봉건, 그러니까 바깥으로는 일본제국주의 서양제국주의를 물리치고 안으로는 조선왕조가 갖고 있던 봉건성을 극복하자 라는 그런 운동인데 다 아시다시피 동학농민혁명에는 남접에는 전봉준, 그 다음에 북접에는 손병희 선생이 주도를 하죠. 그런데 바로 이 손병희 선생이 3.1운동을 총 주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때 전봉준 장군이란 분을 주목해야 되는데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김남주 시인이라고 있죠. 그분이 쓴 시 중에 ‘황토현에 부치는 노래’라는 시가 있습니다.
◎ 손석희 > 얼마 전은 아닙니다. 좀
◎ 이덕일 > 됐죠. 너무 가까이 있는 것 같이.
◎ 손석희 > 역사를 공부하시니까 짧게 보시는 모양이군요.
◎ 이덕일 > ‘황토현에 부치는 노래’라는 시가 전봉준 장군을 기리는 노래인데 시작이 ‘한 시대의 불행한 아들로 태어나 고독과 위험에 결코 굴하지 않았던 사람’ 뭐 이렇게 시작되는데요. 여기에 쭉 진행하다 보면 어떤 말이 나오느냐 하면 ‘보아다오, 보아다오, 새로 태어난 이 민중을 이 민중의 강인한 투혼을’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바로 이때 김남주 시인이 동학농민혁명에서 바라봤던 민중, 전봉준 자체도 민중이었죠. 그러다가 이 운동이 일본의 진압으로 이제 좌절되고 난 다음에 25년 후에 또 다시 극적인 형태로 이 민중들이 당시에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였던 손병희 선생을 필부로 이 민중들이 또 다시 역사의 전면에 나선 사건이 3.1운동입니다.
◎ 손석희 > 연결돼 있다고 보시는 거군요. 역사적으로 보자면.
◎ 이덕일 > 그렇습니다.
◎ 손석희 > 저희가 보통 학교에서 배울 때에 일제식민통치라는 것이 3.1운동이전과 이후로 나뉘는데 그전까지는 뭐 굉장히 이른바 철권통치, 공포정치가 됐다가 3.1운동이후에 이제 일제강압정치도 유화되는 그런 것으로 이제 배웠습니다.
◎ 이덕일 > 그런데 1910년 나라를 완전히 강점당하고 10년 동안에 일본에서 아주 강압적인 공포 통치를 시행을 하게 되죠. 그걸 갖다 무단통치라고 하는데 그 무단통치에 맞서는 흐름들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해외로 만주로 망명해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분들, 그러니까 나라가 망했을 때 나라 망하는데 나라를 팔아먹는 데 가담했던 지배층들이 있었고 그리고 노론이라는 당파를 중심으로 한 지배층들은 나라를 팔아먹는데 가담해가지고 이제 귀족의 작위를 받고 많은 은사금을 받게 되죠. 그런데 이때 바로 나라 망하는 것과 동시에 만주에 망명해서 만주에 횡도천이라는 작은 마을에 전국 각지에서 망명한 사대부들이 모입니다. 거기서 모이는데 거기 모인 분들이 조선후기 내내 이단으로 몰렸던 양명학자 들, 강화학파 라고 불리우는 양명학자들이 먼저 망명하게 되고 그 다음에 서울에 우당 이회영 일가가 망명해서 또 횡도천에 모이죠. 그 다음에 경상도 안동의 석주 이상룡, 백하 김대략, 이 일가가 또 횡도천에 모입니다. 그리고 그 직전에 전라도 구례의 매천 황현은 목숨을 끊죠. 다 같은 그룹의 사람들이에요. 이들이 횡도천에 모이고 그 옆에 추가가에 모여가지고 1911년 4월 달에 경학사라는 자치조직을 만들고 경학사에서 신흥무관학교를 만드는 겁니다. 그런데 이 경학사에서 바로 민주공화제를 지향해요. 앞으로 새로 만들 우리나라의 정체는 민주공화제다, 아까 우리나라 독립운동은 망한 대한제국을 되살리라는 운동이 아니에요. 대한제국은 망할만 하니까 망한 겁니다. 사실. 새로 우리가 나라를 되찾으면 이건 민주공화제다, 그래서 이분들이 거기에서 신흥무관학교에서 군관들을 기르고 그 다음에 끊임없이 국내에 들어와가지고 작업들을 하죠. 이런 모든 운동들이 결합되고 민중들을 또 10여년의 무단통치의 아주 격심한 공포를 느끼고 있다가 1919년에 이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영향을 끼치고 이런 내외적 요건이 그때 고종의 죽음을 계기로 한 번에 폭발하는 것이 3.1운동이죠.
◎ 손석희 > 1, 2부는 저희가 3.1운동 전의 강압통치에 대해서 조금 살펴보도록 하고요. 3, 4부는 3.1운동 이후시기에 대해서 얘기를 나눴으면 좋겠는데 이른바 무단통치시기, 이건 다른 이른바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통치할 때 초기에 썼던 일반적인 현상입니까? 아니면 우리한테만 이런 것이 있었습니까?
◎ 이덕일 > 우리가 유독 일본 제국주의가 유독 강하게 했죠. 왜냐하면 일본은 그 당시에 식민지가 필요한 형태가 아닌 나라였어요. 사실은. 일본자본주의가 그만큼 발달한 것도 아니었고 그렇기 때문에 뭐 나중에 얘기 나올 기회가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만 토지조사사업으로 토지를 수탈하고 왜냐하면 제국주의는 원래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자본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자본과 노동력이 필요해 가지고 제국주의가 발생하게 되는 건데
◎ 손석희 > 자원이 필요하고 또한.
◎ 이덕일 > 예, 그런데 그게 안 되다 보니까 그냥 땅을 빼앗는 거거든요. 그리고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우리가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지만 중국에서 한 번도 지배를 못 했지 않습니까? 중국 사람들 기록 보면 나와요. 조선 사람들은 워낙 강인하고 굳세가지고 다스리기가 힘들다. 그러니까 일본도 이 점령하는 동안 의병전쟁, 동학 의병전쟁 이런 것을 겪었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아주 강한 통치를 하지 않으면 어렵다 라고 생각해서 총독정치, 그 다음에 헌병통치, 뭐 이런 걸로 대표되는 무단통치를 하는 것이죠.
◎ 손석희 > 대표적으로 방금 말씀하셨습니다만 총독정치, 헌병경찰제도가 있었잖아요. 군인이 그러니까 헌병은 군인인데 경찰역할을 하는 거죠.
◎ 이덕일 > 그렇죠. 먼저 우리나라를 점령할 때 일본에서 자기네가 처음에 표방한 대로였다면 그랬다면 메이저헌법을 적용했어야 됩니다. 그런데 조선은 메이저헌법 적용대상에서 제외함, 그리고 조선총독은 육해군 대장으로만 보임함 해 가지고 군인만의 조선총독으로 오게 만들었어요. 그건 조선을 군사점령 대상으로 봤다 하는 이야기죠. 그리고 헌병경찰제도 라는 건 뭐냐 하면 헌병대장이 경찰서장 역할을 같이 하는 거고 헌병이 경찰역할을 같이 하는 건데요. 이 헌병대가 이 당시에 전국각지에 7, 800개 정도가 있었는데
◎ 손석희 > 우리나라에.
◎ 이덕일 > 예, 이 헌병대장들이 경찰서장이에요. 그런데 이 헌병대장들에게 뭘 줬느냐 하면 즉결심판권을 줍니다. 그러니까 재판 없이 헌병대장이 3개월 이내, 그 다음에 태형까지 할 수 있는 벌금형, 태형까지 할 수 있는 막강한 무소불위의 권한을 주는 거예요. 이런 건 사실 우리나라 역사가 개창된 이래 사실 없던 일이죠. 이 헌병대장에게 이런 즉결심판권을 줘서 즉결심판권에 3개월 이내에 잡아가둘 수 있고 그 다음에 재산을 빼앗을 수 있고
◎ 손석희 > 태형할 수 있고.
◎ 이덕일 > 태형까지 할 수 있고 하는 이러한 제도를 두고 그 다음에 또 하나 단적인 예는 모든 그 공무원들은 다 칼을 차고 다니게 했어요. 심지어 여학교 선생님들도 칼 차고 수업에 들어가게 됐는데 당시 기록 보면 이제 데라우치라는 초대총독, 하세가와라는 2대 총독이 지방을 순시하는데 한 사람이 칼을 안 차고 나갔더니 거기서 너 임마 칼 어쨌어 하면서 막 총독이 화를 냈다는 그러한 회고가 있는데 그 정도로, 그리고 일본 공무원들은 선생님을 포함해서 여학교 소학교 선생님을 포함해서 다 칼 차고 다니는 겁니다. 그리고 헌병대장은 즉결심판권이 있고.
◎ 손석희 > 그게 무슨 범죄행위만이 아니라 예를 들면 행정법규 위반이라든가 이런 것까지 전부 헌병들이 즉결처분하고 그랬었다면서요?
◎ 이덕일 > 눈빛만 잘못 마주쳐도 그런 기록들이 많이 있습니다. 눈빛만 잘못 마주쳐도 저놈이 불온한 것 같다 라고 하면 잡아다가 즉결심판하면 즉결심판이라는 건 자기 마음대로 하는 거예요. 어떤 절차 규정이 있는 게 아니고 헌병 마음대로 하는 건데. 이때 태형이라는 것이 조선왕조해서 한 태형하고 아주 다른 겁니다.
◎ 손석희 > 저희가 흔히 아는 곤장 아닙니까?
◎ 이덕일 > 조선왕조 곤장은 상당히 제한이 돼 있는 거예요. 치는 게. 그래서 아주 세밀한 규정이 정해져 있는데
◎ 손석희 > 그런가요?
◎ 이덕일 > 일본에서 한 태형은 틀 자체가 큰 대자형 태형에다가 사람을 꽁꽁 묶어놓고 특히 무엇보다도 태형을 때리는 이제 도구가 소음경인데 상당히 딱딱한 건데 끝에다가 납을 매답니다. 한번 태형 맞을 때 보통 80대예요. 그런데 한 번 납이 달린 태형으로 한 번 때리면 보통 한 점마다 살점이 다 떨어져 나가 가지고 맞다가 죽는 예가 상당히 많죠. 절대 태형 한 번 맞으면 살아서는 걸어선 못 나가고 죽든지 업혀가든지 하게 되는데 이 태형을 당한, 즉결심판을 당한 사람들 숫자를 통계를 한번 보면 1910년, 11년, 12년, 이때 대략 2만 명 가량 됩니다. 그러니까 엄청 많은 거죠.
◎ 손석희 > 태형의 기준을 보니까요. 언어를 조심해서 사용하지 않는 것, 거동을 조심해서 하지 않는 것, 일본인들에 대한 욕설, 굉장히 자의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이 있어서
◎ 이덕일 > 대부분 자의적으로 판단하는 거죠. 그러니까 한마디로 공포통치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말조심해야 되고 눈빛조심 해야 되고 행동조심 해야 되고 이런 식으로 조금이라도 자칫하다 걸리면 당한다, 그러니까 보통 2만 명이 당했다고 그러면 당시 2천만 인구 중에 100명에 1명인데 어린 애들하고 여성들을 제외하면 거의
◎ 손석희 > 웬만한 사람은 다
◎ 이덕일 > 2, 30명에 한 명꼴로 태형 당하니까 태형 당한 사람을 보면 정말 사람 꼴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럼 나도 거기에 반발은 하지만 이 조심해야 되겠다 라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게 되는 거죠.
◎ 손석희 > ‘맞은 사람은 절대 행보할 수 없고 사람의 등에 업혀 나오면 죽으면 시체는 그 밤으로 행방불명이 된다’ 이건 옛날 서적에 나오는 증언이기도 합니다.
◎ 이덕일 > 그래서 그 당시에 이 태형 맞다가 죽은 사람이 하도 많기 때문에 당시에 총독부에서도 각 경찰서에 내린 문건이 있어요. 앞으로는 이렇게 맞다 죽는 사람이 있으면 성명을 다 기재해가지고 보고하라 라고 할 정도로 그 이야기는 그전에는 보고를 안 했다 하는 이야기죠. 그래서 이 정도의 아주 공포통치, 식민통치를 10년 동안 자행을 한 겁니다.
◎ 손석희 > 그러나 그것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고 봐야 되는 거겠죠.
◎ 이덕일 > 그래서 일본 사람들이 3.1운동 때 엄청난 충격을 받은 거예요. 일본 국민하고 우리하고는 다릅니다. 우리는 원래 조선왕조 자체가 인을 표방하지 않습니까? 고려이고 조선이고 우리는 유학이란 큰 테두리 내에서 가르치는데 이것도 물론 지배층이 다 있지만 기본적으로 백성을 다스릴 때는 인을 바탕으로 다스리기 때문에 격심한 공포통치라는 건 자제하게 되는 분위기가 있는데 일본은 무사통치잖아요. 일본 무사통치 중에 단적인 예가 뭐가 있느냐 하면 사무라이들이 칼을 하나 새로 만듭니다. 그러면 이 칼이 잘 드는지 시험을 해봐야 되는데 이 사무라이들이 그걸 갖다 짐승을 갖다 시험해보지 않고 꼭 사람을 상대로 하는 거예요. 그래서 술 먹다가 나가서 지나가는 사람 하나 그냥 재수 없게 눈에 띄면 그 칼 가지고 목을 치는 겁니다. 치면 잘 잘라지면 칼 좋다고 그러고 그리고 처벌 안 당했어요. 그러니까 백성을 대하는 자세 자체가 한국과 일본이 아주 다릅니다. 지금 일본 가보면 일본 사람들 상당히 공손하죠. 그게 교육의 탓도 있지만 그런 본능적인 과거로부터 사무라이 통치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가 있는 거예요. 그걸 갖다 어떻게 보면 당시 일본은 어쨌든 메이지헌법이 적용이 됐기 때문에 일본 내에서는 태형이 다 법적으로 금지가 됐습니다.
◎ 손석희 > 메이지유신 이후에 상당부분 그런 부분들이 완화됐던 모양이죠?
◎ 이덕일 > 헌법을 만들어야 되니까. 헌법을 메이저헌법을 왜 만들었느냐 하면 일본에서. 일본하고 우리하고는 또 달라요. 우리는 원래 조선은 조선전체가 동일법령이 적용됩니다. 같은 죄로 지면 서울에서 졌던 경상도에서 졌던 전라도에서 졌던 같은 처벌을 받는데 일본에서는 쿤이라고 그러면 봉건영주가 다스리는 지역이에요.
◎ 손석희 > 워낙 특성이 그러니까요. 일본의 정치특성이.
◎ 이덕일 > 그러다 보니까 일본도 처음에
◎ 이덕일 > 그러다 보니까 일본도 처음에 개항할 때 미국의 페리제독에 의해서 불평등 조약을 맺고 개항하지 않았습니까? 그 다음에 일본이 힘을 조금 기른 다음에 미국에다가 조약을 평등조약을 바꾸자 라고 하니까 미국에서 너희 나라 헌법도 없지 않느냐, 전국에 일괄적으로 통용되는 법이 없지 않느냐,
◎ 손석희 > 그래서 나온 거란 말이죠.
◎ 이덕일 > 그래서 일본이 부랴부랴 이제 메이지헌법을 만들게 됐는데 물론 메이지헌법도 문제가 많지만 어쨌든 일본인으로서는 최초로 전국에 통용되는 법을 처음 한번 적용받아 본 겁니다. 조선은 원래 그런 법이 있었고요.
◎ 손석희 > 그런데 그나마 거기서도 식민지는 제외가 돼서 자기들이 예전에 했던 강압적 통치방법,
◎ 이덕일 > 그런 식으로 한 거죠.
◎ 손석희 > 결국 9년 만에 3.1운동이 일어나는데 여기서 잠깐 광고 듣고 1부를 마치고 2부에서 다시 또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과 얘기를 이어 가겠습니다.
<손석희의 시선집중 - 3.1절 특집 ‘1919년 3월 1일 독립을 외치다’> 오늘 가끔씩 나와 주셔서 역사얘기를 해주고 계신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이제 2부를 시작하는데 1, 2부는 3.1운동 이전의 상황에 대해서 얘기 나누고 있습니다. 1부에서는 매우 강압적 무단통치, 대표적으로 있었던 태형의 문제 등등을 놓고 저희가 얘기를 나눴는데 2부에서는 또 다른 얘기들도 나눌 것이 많이 있습니다. 우선 경제적 수탈이 굉장히 심한 시기였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고리대금, 비싼 소작료, 이렇게 해서 그 당시 조선인들의 토지나 가옥을 나름 자기들대로의 합법적으로 강탈했다고 하는데 어떤 방식이었습니까?
◎ 이덕일 > 당시 대한제국을 강점하기 직전에 일본인들에게 나누어준 말하자면 이제 대한제국투자요령서 투자권유서가 있어요. 거기에 보면 대한제국에서 가장 유망한 사업은 고리대금업이다, 많은 돈 안 갖고 가도 된다, 이런 내용이에요. 그러니까 조금만 자본이라도 있으면 가 가지고 이제 아주 가난한 사람들, 예를 들어서 흉년 들었다거나 해서 거의 굶어죽게 된 사람들의 그 토지를 갖다가 고리대금을 빌려주고 그 다음에 그걸 못 갚으면 토지를 빼앗는 그런 방식을 가장 이제 주요한 방식으로, 유명한 사업이라고 하게 되는데 그래서 이런 방식으로 일본인들이 와가지고 땅을 많이 강탈하는데요. 그러다 보니까 일제시대 때 전국 각지에 일본인 소유의 농장들이 많이 생깁니다. 그 중에 이제 대표적인 게 여러 개 있는데 군산에도 있었고, 조정래 선생 소설에도 나오지만 여러 농장들이 있는데 평안북도 용천에 있던 예를 들면 불이농장이라고 있어요. 불이농장은 크기는 정도냐 하면 평수로 따지면 1,500만 평입니다.
◎ 손석희 > 꽤 넓네요.
◎ 이덕일 > 농사짓는 소작인이 1,500명이 넘어요. 그런데 이 농장 조성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총독부에다가 황무지나 해안 개간권은 그냥 받는 겁니다. 받아 가지고는 조선농민들에게 개간을 시키는 거예요. 그런데 개간시킬 때는 개간비용을 주겠다, 그리고 개간 끝나면 소작권을 주겠다고 해놓고 나서는 개간비용을 황무지 개간하는 게 엄청 힘들지 않습니까? 일 다 시키고 나서 그걸 안 주고 그 다음에는 고액의 소작료로 받게 되니까 농민들이 저항을 하죠. 그래서 이게 1925년부터 1931년까지 불이농장 사태가 이 소작쟁의로 일제 소작쟁의로 대단히 크게 번져 가는데 비단 불이농장 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 일본인들의 농장들, 그러니까 처음에 돈을 많이 갖고 온 것도 아니에요. 아주 작은 돈을 가지고 오거나 중소규모의 돈을 가지고 와서 농민들의 토지를 이제 강탈하는 이제 그런 방식이 일본인 민간인들이 주로 사용했던 경제수탈방식이죠.
◎ 손석희 > 또 하나는 이제 그 토지조사사업을 해서 토지강탈을 한 예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 토지조사사업은 굉장히 대대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지는데 이런 바탕에서 등장한 것이 동양척식주식회사라고 하죠.
◎ 이덕일 > 그런데 이 토지조사사업에 대해서 우리나라 분들이 현재까지 이제 그냥 토지조사라는 사업이 있었다, 토지 강탈했다, 이 정도만 대략 알고들 계시는데 이게 어떤 의미냐 하면 조선이라는 나라의 토지소유 구조가 좀 복잡합니다. 뭐냐 하면 조선이라는 나라는 토지의 소유권이 우리가 흔히 말할 때 수조권이라고 세금을 걷는 권리를 뜻하는데 세금을 걷는 권리가
◎ 손석희 > 수조권,
◎ 이덕일 > 예, 수조권 조세 조자 써가지고. 세금을 걷는 권리가 나라에 있으면 관에 있으면 공전이고 개인에게 있으면 사전인데 공전들은 사실상 다 개인 소유주입니다. 그래서 조선법전에도 경국대전 같은 데도 소경권이라는 그러니까 경작하는 권리가 법적으로 보장돼 있어요. 그래서 수조권을 가진 사람이 예를 들어서 일정 정도 이상의 그 세금을 걷게 되면 태형을 맞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뭐냐 하면 소경권, 경작권이 소유권이에요. 대략 수조권은 1/10의 세금을 내는 겁니다. 토지를 소유한 사람은 농사짓고 1/10의 토지를 관청 소속이면 관에다가 내고 벼슬아치에게 관에서 벼슬아치에게 수조권을 줬으면 개인에게 내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걸 갖다가 조선총독부에서 공짜가 붙었다 그래서 이건 나라 거다 라고 해가지고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그 경작권이 소유권인데 이걸 다 뺏어간 거예요. 그래서 여기에서 격렬하게 충돌이 벌어지게 되는 건데,
◎ 손석희 > 조선시대도 왜 이른바 농민수탈, 양민수탈이 많았다고. 그러니까 대개 이제 세금관련으로 그런 얘기들이 많이 나왔습니다만 그런데 최소한의 그 어떤 것은 경작권은 보호하려는 그런 것은 있었는데 이걸 더 악화시킨 것이 일제시대였다, 그런 얘기가 되겠군요.
◎ 이덕일 > 그렇게 되는데 이 경작권이라는 게 조선에서는 소유권이에요. 그것이. 그래서
◎ 손석희 > 내용적으로 보자면.
◎ 이덕일 > 지주가 전주가 이 소유권이 지주에게 있으면 이 소작인은 바꿀 수 있지 않습니까? 못 바꾸는 거예요. 이 경작하는 사람이 대대로 대를 이어서 자기 자식에게 물려주는 토지입니다. 그게. 그런데 조선총독부에서 그걸 대부분 인정 안 하고 하다 보니까 일본이 조선을 점령을 했는데 뭐 자본 수출한다거나 노동을 한다거나 그게 없다 보니까 그 정도 일본 자본주의가 발달 못한 상태다 보니까 가장 만만한 게 땅을 뺏는 거예요.
◎ 손석희 > 그렇게 해서 빼앗아간 토지가 대개 어느 정도 된다고 나오나요?
◎ 이덕일 > 뭐 거의 어떤 조사에 따르면 전 국토의 40%까지 된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토지를 강탈해갔죠.
◎ 손석희 > 사실은 우리가 농경국가임에 틀림이 없었고 그래서 농민들이 땅을 졸지에 빼앗긴다 라는 것은 거의 뭐 생존권을 빼앗기는 것이기 때문에 저항도 있었을 법 한데
◎ 이덕일 > 그래서 저항이 상당히 심했죠. 그런데 이 저항이 일본에서는 어떻게 했느냐 하면 처음에는 신고제를 했어요. 왜 신고제를 했느냐 하면 이 신고라는 건 총독부 통치를 인정한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총독부 통치를 인정 안 하는 사람들은 나 신고 안 해, 이렇게 되면 땅을 빼앗기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 상당히 많은, 신고하는데 대단히 복잡합니다. 왜, 땅을 강탈하는데 목적이 있기 때문에 일반 농민들이 신고하기가 어렵게 돼 있어요. 그래서 일제 시대 때는 자기 마음대로 남의 걸 빼앗는 사람을 갖다 총독부 말뚝이라고 그 당시 토지조사사업을 할 때 총독부라고 쓴 말뚝을 네 군데 박아가지고 땅의 소유권을 표시하게 되는데 자기네 마음대로 갖게 되니까 일제시대 대일강점기 때는 남의 걸 빼앗는 사람을 갖다 총독부 말뚝 박냐, 이런 식의 말이 공공연히 행해질 정도로 아주 많은 문제가 있었고 여기에 대한 저항도 상당히 심했습니다.
◎ 손석희 > 따지고 보면 이런 일제 토지조사, 이것이 끝나고 다음 해에 바로 3.1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에 농민들의 커다란 반감 같은 것이 3.1운동에는 상당 부분 작용했다, 이렇게 봐야 될 것 같군요.
◎ 이덕일 > 그렇죠. 아주 강하죠. 그게 농업국가에서 농민들에게 토지를 강탈한 건데 대부분의 이 뭐 이의신청이라고 그럴까, 이런 것들이 대부분 공전, 공전에서 거의 발전하는데 공전은 국가 땅이 아니라 아까 말씀드린 대로 개인 땅을 갖다가 그런 식으로 이제 국가 거다 라고 가져갔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발생하고 또 예를 들어서 사원전 같은 경우 사찰 아래에 많은 땅들이 있지 않습니까? 이것들이 전부 다 말하자면 개인들의 땅인데 이게 상당히 복잡한 건데 그러니까 가장 중요한 건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관례를 인정 안 하고 소유권을 인정 안하고 근대적 소유체계를 수립한다는 미명하에 국가소유의 토지도 뺏고 일반 농민소유의 토지도 뺏게 되면서 여기에 대한 반감이 3.1운동에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거죠.
◎ 손석희 > 사회적으로는 태형을 대표적으로 하는 폭압정치,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토지수탈사업으로 대표되는 여러 가지 침탈의 현상, 이런 것들이 이제 종합적으로 작용하면서 3.1운동으로 점차 그 동력이 모아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교육제도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교육권 역시 물론 빼앗겼죠.
◎ 이덕일 > 우리나라 현재 교육시스템의 뿌리가 일제 때 만든 여기에서 별로 벗어난 게 없습니다. 우리나라 지금 현재 교육시스템의 뿌리를 만든 사람이 이토 히로부미인데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통감으로 있을 때 1908년에 사립학교령을 만들 고 그 다음에 1911년에 조선교육령이 반포되는데 이 두 개의 틀에서 아직까지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단적인 예로 1908년에 사립학교령은 뭐냐 하면 그 이전에 한번 손 선생님께서 생각해보시면 독립운동가들은 다 투잡이었어요. 하나는 교육가입니다. 안중근 의사도 고향에서 교육하고 학교세우고 다 하지 않습니까? 그 이야기는 뭐냐 하면 그 당시에 학교라는 것은 자기 사랑방에서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1908년 조선교육령에서는 이 조선교육령을 반포하면서 크게 두 가지를 강조하게 되는데 하나는 시설기준을 엄청 강화합니다. 그래서 막대한 돈이 있는 사람만 교육사업에 종사할 수 있게 하고 또 하나는 교육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품성을 중시해요. 그래 가지고 성행이 불량한 자가 있으면 이사장이 됐든 이사가 됐든 교사가 됐든 성행이 불량한 자, 당시 통감부에서 볼 때 성행이 불량한 자가 있으면 허가 취소 사유가 되는데요. 통감부 시각으로 볼 때 성행이 불량한 자가 누구겠어요. 당연히 그 민족독립을 이야기하고 이런 사람들은 다 불량한 거죠.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갖다가 전부 다 교육계에서 내몰게 되는데 지금 우리나라도 보면 예를 들어서 몇몇 교육에 뜻이 있는 선생님들이 한 열 분이 모여서 학교 한 번 만들어보자 이게 안 되지 않습니까? 먼저 막대한 시설이 있어야 되고
◎ 손석희 > 그렇죠. 허가가 나려면.
◎ 이덕일 > 그렇죠. 이 시설을 기준으로 가장 이렇게 하는 나라는 우리나라외에 별로 없어요.
◎ 손석희 > 그런가요?
◎ 이덕일 > 네.
◎ 손석희 > 그래서 이제 이른바 민족교육자들은 관제의 어떤 시스템 속에 들어가지 못하고 서당으로 많이들 이렇게 가셨다면서요?
◎ 이덕일 > 그렇죠. 그래서 서당으로들, 그러니까 인가에서 다 탈락하니까 민족교육을 하거나 뭐 이런 분들이 인가에서 거의 다 탈락하니까 서당으로 많이 빠지게 되는데 그러니까 일본은 또 서당을 그때 서당이 늘어나게 되니까 일본에서 서당에서 불온한 교육을 시킨다고 해 가지고 서당을 수색하고 하는 그런 일들이 있었죠.
◎ 손석희 > 언론은 어땠습니까?
◎ 이덕일 > 언론도 마찬가지죠. 언론도 데라우치가 되고 난 다음에 그 전에 있었던 많은 언론 중에 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를 제외하고 전부 다 폐간시키죠. 그래서 1920년대에 이제 소위 문화통치란 명목으로 신문들을 한국어 신문들을 허가하기 전에 허가하기 전에는 우리말로 발행하는 신문이 이제 하나도 없었다 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죠.
◎ 손석희 > 그래서 이제 3.1운동이 끝나고 20년에 지금 현존하는 신문들, 예를 들면 조선일보나 동아일보나 그때 20년에들 창간이 됐었죠?
◎ 이덕일 > 그때 1920년대에 많이 문화통치라는 그 명목 하에서 이제 신문들이 발간되었죠.
◎ 손석희 > 그러면 그 10년이라는 시간은 말 그대로 암흑기라고 표현하는 게 딱 맞겠네요. 언론도 우리말을 쓰는 언론이 없고 또 정치사회적으로 굉장한 폭압정치가 지속됐고 그 10년을 견뎌낸다는 것이 굉장히 힘든 그런 시기였을 것 같습니다. 역시.
◎ 이덕일 > 그러니까 일본에서는 이렇게 뭐 언론 뭐 교육, 모든 걸 갖다 다 통제했기 때문에 영구히 지배할 수 있겠다 라고 생각했는데 바로 그 10년 지나니까 그 다음에 토지조사사업으로 물적 기반도 강화했고 해가지고 영구히 점령할 수 있다 라고 지배할 수 있다 라고 생각했는데 그 이듬해에 그 전국적인 전민족적인 3.1운동이 일어나니까 엄청 쇼크를 먹은 거죠.
◎ 손석희 > 그러니까 3.1운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여러 가지 이유에 대해선 저희가 대략적으로 짚어보긴 했는데 그 3.1운동을 그러면 직접적으로 촉발시킨 것, 물론 이제 고종의 서거 등등이 얘기가 되고 있습니다만 또 무엇이 있을까요?
◎ 이덕일 > 기본적으로는 가장 중요한 건 우리나라 사람들 자체가 민족적 자존심이 강한 민족입니다. 지금 해외에 나가 보시면 외국 사람들이 우리 나라 사람들이 일본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가 일본을 항상 한수 아래로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그게 잘 이해가 거예요. 외국사람들이. 그 뿌리가 어디에서 나오느냐 하면 역사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기본적으로 일본이 우리를 뭐 지배하는 데에 대한 기본적인 반감이 아주 강한 겁니다. 지금도 한번 바꿔서 생각해 보십시오. 외국이 우리나라 와가지고 이 식민통치 했다 그러면 어떤 나라가 오든지간에 직접 통치한다 그러면 반발이 아주 거세죠. 중국에서는 한국을 직접 통치할 생각을 전혀 못하지 않습니까? 한국을 아는 거예요. 이 민족을 알고. 이 백성들을 알기 때문에 직접 통치, 청나라가 직접 와서도 안 하고 그대로 인조정권 그대로 다 항복 받고도 내버려두고 가지 않습니까? 그게 자기네 나름의 여기를 대하는 한민족을 대하는 최선의 방책이 그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인데
◎ 손석희 > 저는 그걸 가끔 음식으로 생각할 때가 있는데요.
◎ 이덕일 > 중요합니다.
◎ 손석희 > 중국 주변에 있는 나라들은 대개 중국 음식들하고 비슷해졌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전혀 다르잖아요.
◎ 이덕일 > 그래서 저희도 가끔 중국 답사 가면 우리가 중국에 지배 안 당한 아주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음식이다, 그러니까 전혀 방식이 다르지 않습니까? 우리는 되도록 기름기 빼서 먹고 저기는 되도록 되면 중국은 기름기 듬뿍 넣어서 먹고 일본도 가 보면 일본 음식도 중국 쪽하고 조금 더 가깝다면 가깝지 우리하고 가까운 것 같지 않아요. 물론 우리하고 가까운 것도 있긴 있지만요.
◎ 손석희 > 우리는 정말 줏대 있는 민족임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마칠 때가 됐는데요. 1, 2부는. 물론 3, 4부에서 얘기 나누겠습니다만 한 가지만 질문 드리고 넘어갔으면 좋겠습니다. 3.1운동, 운동 자체로만 놓고 봤을 때 대개 이제 사회운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두 가지로 놓고 얘기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두 가지 운동의 유형, 하나는 매우 우연, 물론 그 전에 어떤 갈등, 모순들이 쌓인 상태에서 운동자체는 매우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상황, 또 하나는 그러한 갈등, 이런 것들을 관리하는 조직이 있어서 그 조직의 힘으로 일어나는 운동의 상황, 이렇게들 나눠서 얘기하곤 하는데 3.1운동은 굳이 따진다면,
◎ 이덕일 > 그 둘을 분리한다 라는 게 사실은 쉽지 않은데요. 양자가 3.1운동 결합되게 되는데 제가 볼 때는 토양이 더 중요하지 않았는가, 그러니까 그 전에 조짐들이 있습니 다. 일본에서 2.8독립선언이 일어나고 국내에서도 여러 움직임이, 조금 이따 말씀드리겠습니다만 기독교, 개신교계와 천도교계가 서로 따로 따로 하고 있었어요. 그건 서로 학생들도 따로 따로 하고 있었고 그래서 이것이 자발적으로 여러 움직임이 해야 되겠다 라고 흐르던 것이 하나로 모아지면서 되는 것이기 때문에 토양이 있었고 그 토양을 만든 것이 일본 제국주의의 폭압통치, 일본 제국주의가 점령하고 나서 최소한 조선왕조보다는 나은 통치를 했으면 백성들은 그야말로 내 배부르고 등 따신데 일본이 지배하면 어떻고 누가 지배하면 어떠나 이렇게 나올 수도 있는데
◎ 손석희 > 아마 그러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 이덕일 > 그런데 아까 우리가 봤지만 토지조사사업 같은 걸 통해서 가난한 백성들의 농토까지도 수탈하고 일본인들이 고리대금으로 농토를 빼앗고 이렇게 되면서 위에 사람들은 정치참여의 기회가 봉쇄되고 아랫사람들은 농토를 빼앗기고 이런 것들이 다 결합됐기 때문에 이게 통치가 계속 그 상태로 지속이 될 수는 없는 겁니다.
◎ 손석희 > 예, <손석희 시선집중 - 3.1절 특집> 2부는 여기서 잠깐 마치겠습니다. 광고 듣고 제가 인사드리고 3, 4부에서 또 만나 뵙도록 하겠습니다.
손석희 > <손석희의 시선집중 - 3.1절 특집 ‘1919년 3월 1일 독립을 외치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과 함께 하고 있는 시간입니다. 3, 4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3, 4부는 3.1운동 당시 얘기와 또 그 이후에 독립운동의 어떤 형태적 변화, 이런 것에 대해서 조금 얘기를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1, 2부에서 얘기 나눈 것이 결국 이제 3.1운동을 가져온 정치사회적 배경이 일제 무단통치 이런 것들이라고 얘기가 나왔었는데 직접 계기라고 하면 저희가 배운 것은 고종의 서거고 독살설로 퍼지면서 그것이 전국의 민중들을 일으켜 세웠다, 이렇게 배웠습니다. 이 독살설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겁니까?
◎ 이덕일 > 이 독살설이 광범위하게 퍼졌고 이 독살설을 양반도 믿고 일반 백성들도 다 믿게 되는 데는 몇 가지 요인들이 있습니다. 물론 일제 식민통치가 워낙 폭압적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믿고 싶은 마음도 분명히 있었겠죠. 그런데 그것보다 보다 중요한 건 이 독살설이라는 것이 그 진원지가 왕실에서부터 퍼져나갑니다. 왜 그러냐하면 고종이 오랫동안 와병을 앓다가 시름시름하다가 돌아가셨으면 일단 병살사라고 하는데 이틀 전까지도 멀쩡하다가 갑자기 이제 어느 날 갑자기 세상 떠나는데 그 세상 떠나는 그 즈음에 몇 가지 사건들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게 고종 해외망명설이 있습니다. 독립운동가 이회영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이제 고종을 갖다가 해외로 망명시키는 작업을 하는데 이때 이분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고종이 자기의 시종 출신인 민영달을 통해서 5만 원의 자금을 내렸고 그 5만 원 가지고 북경에다가 행궁까지 다 이제 구해놓은 상태, 그리고 또 하나는 당시 일본이 이때 황태자인 영왕을 갖다가 영친왕을 갖다가 이방자 일본 왕실 사람인 이제 이방자 여사와 이제 결혼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고종으로서는 자기네 핏줄까지 이제 일본 핏줄이 섞이면 이게 완전히 끝나는 것 아니냐 라고 생각해가지고 망명을 결심하고 상당히 구체적으로 진행돼 가던 와중에 갑자기 이제 세상을 떠나죠. 그리고 이 구체적인 이야기들도 이제 독립운동가들이 남긴 기록 속에서는 많이 나오는데 그 한 예가 이완용이 칠십일갑사 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인데요. 이완용이 일본에서 아주 강한 독약 두 통을 사왔는데 한 통을 갖다가 자기 집에 있는 큰 개에게 먹였더니 그 무색무취한 독약인데 한 번 먹여봤더니 송아지만한 큰 개가 단번에 즉사하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갖다가 당시 한상학이라는 어주도감, 고종의 음식을 담당하는 책임자에게 전달해가지고 독살하게 했다,
◎ 손석희 > 그 얘기가 제일 유력하게 퍼진 설이긴 하죠.
◎ 이덕일 > 여러 설들이 퍼지는데요. 또 하나는 우당 이회영 선생의 자부 며느리 조계진 이 왕실쪽 사람의 조대비쪽 사람인데 이분이 왕실 갔다 오더니 다 이제 이러이러해서 독살 당했다 라고 해 가지고 아주 왕실 깊숙한 데서부터 쭉 퍼지는데 이 개연성을 높인 게 두 명의 궁녀가 여기 앞잡이를 했는데 일본이 입을 막기 위해서 이 두 명을
◎ 손석희 > 살해했다,
◎ 이덕일 > 살해했다 라고 하니까 3.1운동이 워낙 퍼지니까 일본에서 그 당시 기관지였던 매일신보, 원래 이제 대한매일신보는 베델이 하던 아주 강하던 항일지였다가 나중에 일본이 베델 쫓아내고 나서 매입해 가지고 주간지 비슷하게 만드는데요. 이 매일신보에 그 두 명의 궁녀에 대한 기사를 씁니다. 뭐라고 쓰느냐 하면 두 명이 죽긴 죽었는데 그렇게 죽은 게 아니라 한 명은 노환으로 죽었고 한명은 뭐 감기 걸려서 이렇게 저렇게 죽었다 라고 하니까
◎ 손석희 > 그건 지금 들어도 억지군요.
◎ 이덕일 > 그러니까 일반 사람들이 볼 때 두 명이 죽고 두 명의 궁녀가 죽었다 라는 게 이쪽 발표로도 어쨌든 사인은 달리나왔지만
◎ 손석희 > 인정된 거니까
◎ 이덕일 > 사실이구나 라는 생각이 광범위하게 확산이 돼나가는 게 다 그런 개연성들이 모여져 갖고 그렇게 되는 거죠.
◎ 손석희 > 하여간 역설적이긴 하지만 고종은 서거함으로써 일제에 굉장히 타격을 입히는 그런 역사적 상황이 됐네요. 3.1운동은 일어났으니.
◎ 이덕일 > 그렇죠. 고종의 성격이, 고종의 통치 스타일이 일본이 대한제국을 먹는 데는 아주 유효했는데 아주 좋았는데 그 다음에 고종은 스타일이 끊임없이 뒤집기를 시도하는 스타일입니다. 그러니까 나라를 빼앗기고 난 다음에 계속 이제 그런 걸 시도하다 보니까 일본에서는 골치를 썩고 있다가 결국 고종이 만약에 망명에 성공하게 되면 세계적인 사건이 됩니다. 그러면 고종이 망명하면 당시 왕제를 실시하고 있는 영국이라든지 독일이라든지 이런 나라들은 황제 출신이 망명해서 망명정부를 세우면 인정하기도 그렇고 안 하기도 그렇고 대단히 복잡한 사건이 발생하죠. 그러니까 일본에서는 해치워버리는 게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한 거죠.
◎ 손석희 > 그래서 독살설의 개연성을 상당히 높인 그런 상황이 됐단 말이죠.
◎ 이덕일 > 예.
◎ 손석희 > 3.1운동하면 민족대표 33인을 기억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분들이 어느 정도의 역할을 했느냐, 물론 역사적으로 나중에 정반대의 평가를 받는 분들도 많이 생겨났습니다만 당시의 33인, 3.1운동의 가장 주축이 된 분들로 생각을 해도 될까요, 아니면 또 다른 시각도 있습니까?
◎ 이덕일 > 이들이 이 당시 민족지도자였던 게 사실이고 3.1운동에서 특히 이제 천도교 3대 교주였던 의암 손병희 선생의 역할이 아주 절대적이죠. 그런데 이 당시에 두 흐름이 있습니다. 개신교 쪽에서는 독립청원을 하려고 했어요.
◎ 손석희 > 어디다가요?
◎ 이덕일 > 일본에다가요. 독립청원과 독립선언은 아주 다른 겁니다.
◎ 손석희 > 그렇죠.
◎ 이덕일 > 독립선언은 우리가 주체가 되는 거고 독립청원은 상대방에게 이제 해달라고 부탁하는 거죠. 그런데 이 손병희 선생 쪽에서 천도교 쪽에서 당시 이제 개신교는 중심지가 서북 황해도, 평안도, 이쪽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쪽 분들이 서울에 와 있는데 만나 보니까 같이 하려고 하니까 이제 같이 하자 라고 이야기가 됐는데 이 개신교 사람들이 서울에 오래 있다 보니까 자금이 떨어지니까 손병희 선생이 당시 거액인 5천 원의 자금까지 지원해줘 가면서 같이 하게 되죠. 사실 33인 중에서 총지휘는 사실 손병희 선생과 개신교 쪽에서는 이승훈 선생이 대표라고 볼 수 있는데 이 두 분을 분석해 보면 묘한 게 또 나옵니다. 뭐냐 하면 손병희 선생은 서자 출신이에요. 그 다음에 이승훈 선생은 이제 평안북도 정주의 아주 가난한 집안 그 당시에 서북민이 차별 받던 시기 아닙니까? 그러니까 나라가 망한 뒤 10여 년 만에 이 서자 출신, 아주 평안도에서 차별 받던 지역에서도 아주 가난한 그야말로 밥도 못 먹던 이런 분들이 당당히 민족의 최고지도자 반열로 뛰어오르게 되는데 그걸 자연스럽게 민중들이 받아들이게 되는 여건이 성숙하는 거죠. 이건 뭐냐 하면 나라가 망했을 때 양반 사대부들이 물론 아까 말씀드린 대로 망명했던 분들이 있지만 대다수는 일본 식민통치에 순응하는 사람이 많았던 반면에 일본의 식민통치에 저항했던 저항해서 나서고 했던 분들 중에서는 스스로 민중들이 뭐 이렇게 손병희 선생도 그렇고 이승훈 선생도 그렇고 다 민중이었던 분들인데 이 분들이 스스로 민중 속에서 성장해가지고 지도자가 됐다 라는 그런 점이 있죠.
◎ 손석희 > 그렇군요. 당초에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려고 했는데 태화관, 종로 2가 쪽에 있죠. 태화관으로 장소를 변경해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부르고 체포가 됐습니다. 이렇게 장소를 변경한 것으로 나중에 좀 후일담이 있는 것 같은데요.
◎ 이덕일 > 나중에 그것 때문에 3.1운동 33인을 의를 조금
◎ 손석희 > 폄하하는
◎ 이덕일 > 그런 분위기도 없지 않았는데 이때 33인들이 기독교, 그러니까 개신교, 천도교, 불교 대표가 이렇게 모여서 33인을 구성하고 이때 학생들이 만나서 같이 하자 라고 해서 학생들도 하려고 했던 거니까 적극 호응을 하게 되는데 학생들이 파고도공원에 모이기로 했었고요. 그런데 민족대표들이 안 나타나니까 이때 당시 이제 강기덕이란 학생, 김원벽 몇몇 대표들이 있습니다. 이 학생들이 태화관까지 찾아가요. 나중에 일제신문을 보면 강기덕이라는 학생대표가 당시 나는 33인들에게 대단히 실례되는 태도를 표했다 라고 할 정도로 상당히 언성이 있었는데 이때 의암 선생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가 여기 있어야될 책임은 우리가 지는 거다, 저는 그런 말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죠. 그러니까 결국 이 사건 총책임은 결국 민족대표를 선언한 이분들이 지게 되는 건데 이분들은 현장에 직접 나갔을 경우에 아주 이제 격렬한 폭력시위가 발생하지 않을까를 우려해가지고 태화관에서 하고 그러나 이분들이 자기네가 안 나타나도 학생들은 이미 모이기로 다 돼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선언서를 다 배부했기 때문에 일어날 것이라는 건 다 알고 있었죠.
◎ 손석희 > 만세시위는 어떤 방식으로 진행이 됐습니까? 촉발과 그 진행이.
◎ 이덕일 > 그러니까 다 방향이 있었어요. 일정하게 나가는 방향들이 있는데 처음에 낭독을 하고 나중에 일본 당국에서 낭독자를 체포하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 결국 낭독자는 체포를 못했죠. 그런데 나중에 독일에 가서 ‘압록강은 흐른다’ 쓴 이미륵 선생도 당시 현장에 있었는데 거기 보면 중절모 쓴 사람이 낭독하고 뭐 하늘 같이 뭐 선언서가 오르고 아주 멋있게 표현을 했습니다만 낭독을 마치고 몇 가지 방향을 학생들이 미리 짰어요. 짜 가지고 학생지도부에서 어디는 뭐 저쪽은 말하자면 서대문 쪽으로 가고 어디 쪽으로 가고 하는 걸 미리 짠 방향대로 군중들이 흩어져가지고 무리를 져가지고 만세시위를 이제 전개를 한 거죠.
◎ 손석희 > 당시에 그 경성의학전문학생으로서 파고다공원에 있었던 탑골공원이죠. 여기에 있었던 이의경의 기록을 보면 ‘누군가가 조용한 가운데 연단에서 독립선언서를 읽었다, 잠깐 동안 침묵이 계속되더니 다음에는 그칠 줄 모르는 만세 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좁은 공원에서 모두 전율했고 마치 폭발하려는 것처럼 공중에는 각양각색의 삐라가 휘날렸고 전군중은 공원에서 나와 시가행진을 했다.’ 이렇게 기록이 돼 있습니다.
◎ 이덕일 > 그 이의경이란 분이 바로 이미륵 선생이에요.
◎ 손석희 > 아, 그런가요?
◎ 이덕일 > 예, 그래서 이 분이 직접 현장에 참가를 하고 그걸 아주 세세하게 전달을 하신 분이죠.
◎ 손석희 > 그것이 이제 점차 전국으로 확대된 것이라고 보면 되겠죠. 그런데 이른바 그 당시에 만세운동도 비폭력주의를 주장하지 않았습니까?
◎ 이덕일 > 예.
◎ 손석희 > 굳이 그렇게 했던 이유라고 할까. 뭘까요?
◎ 이덕일 > 그 당시에 뭐 일본의 헌병통치라는 것이 워낙 이제 폭압적이고 군대와 헌병이 진두에 있는 상황에서 폭력시위로 전환했을 때 일본에서 합법적으로 발포할 수 있는 그런 명분을 주지 않겠나를 우려했을 수도 있고요. 또 하나는 무력으로서 이 당시에 이제 결국 이 당시 군중들이 무장한다고 해봐야 결국 뭐 몽둥이나 들고 돌이나 들고 할 텐데 그렇게 해가지고 군대를 이길 수 있겠는가 라는 생각과 그 다음에 또 하나 외교를 상당히 이 당시에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이런 쪽의 국제여론을 움직이려면 비폭력 평화시위가 좋지 않겠느냐고 생각했던 거죠.
◎ 손석희 > 진압방식은 어땠습니까? 일제의.
◎ 이덕일 > 일본이 상당히 당황을 해가지고 초기에는 그냥 말 탄 기마대에서 진압을 하다가 처음부터 총을 쐈던 건 아니죠. 말 탄 기마대에서 하다가 그 다음에는 칼을 뽑아서 휘두르기 시작하고 그 다음에 이제 발포가 이루어지는데 나중에 일본에서는 일본 하세가와 총독은 군인 중에 아주 사무라이 정신으로 똘똘 뭉친 인물인데 이 인물은 시종일관 그 무력으로 진압하면 된다 라고 생각해가지고 국내에 있는 평화시위인데도 여기에 있는 군대가지고 잘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일본에서 여러 개 연대를 제가 좀 조사를 해보면 8사단, 2사단, 13사단, 9사단, 10사단, 5사단 해가지고 이 많은 사단에서 1개 연대씩을 차출해가지고 원산하고 부산에 보내서 각자 이제 무력으로 그 진압까지 하게 되는 데 한마디로 통치 자체가 안 된 겁니다. 기본이 다 무너졌는데 또 하나 이것이 국내에서만 벌어진 게 아니라 아까 독립운동가들이 모여서 경학사를 만들었던 그 근처가 삼원보라는 곳인데요. 거기서 3월 12일 날 최초로 이제 삼원보에서도 또 이제 만세시위가 일어나고 그 다음에 그 다음 날 북간도 용정, 해란강 흐르는 그 용정에서도 일어나게 되는데 이 용정은 이상설 선생이 망명해가지고 서전서숙을 먼저 세운 상당히 그것도 민족교육과 의식이 강한 곳이죠. 그런데 이 용정에서 벌어진 시위에는 일본인들이 일본인 경찰들이 군중 속에 숨어 있다가 발포를 합니다. 그래 갖고 그때 17명이나 사망을 해요. 이 용정에서. 그러고 나니까 장례식 치를 때 분노한 사람들이 4천여 명이나 모여가지고 장례를 치르면서 시위도 하니까 거기에서는 감히 일본인들도 나타나지 못했을 정도로 이게 해외, 그 다음에 러시아령 연해주 이런 쪽, 또 미주에서도 발생하고 해 가지고 전 세계적으로 우리 교민들이 있는 곳이면 다 이제 만세세위에 동참하는 그런 거대한 세계사적인 사건입니다.
◎ 손석희 > 조선총독부에서 내놓은 통계도 있지만 이건 저희가 뭐 믿긴 좀 어렵고,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여기에 보면 시위횟수가 모두 1393번, 굉장히 많이 일어났던 거죠. 그리고 참여했던 사람들이 195만 4천여 명이라고 하고요. 그때 사망한 사람들이 3750여 명, 그리고 중상을 당해서 며칠 후에 죽은 사람이 또한 4600여 명, 이렇게 기록이 돼있습니다. 아무튼 일본은 굉장히 충격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통치방법을 이른바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전환하게 된다는 것인데 무엇이 어떻게 달라진 걸까요?
◎ 이덕일 > 그러니까 뭐 달라진 형태를 법적으로 보면 조선총독은 육해군대장으로만 보임한다 한다 라고 하는 걸 갖다가 문관도 보임할 수 있다 라고 그걸 바꾸죠. 그러나 이제 일제가 멸망할 때까지 문관은 보임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 손석희 > 그러게요. 바로 다음에 온 사이토 마코토 이 사람도 무관 출신이고,
◎ 이덕일 > 해군대장이죠. 다 그렇게 됐는데 어쨌든 그 여지를 하나 열어놓고 그 다음에 헌병경찰제도를 일반경찰제도로 바꿔가지고 그 다음에 군인이 경찰 역할 하는 걸 그만두게 되고 그 다음에 그 경찰들이 물론 그래봐야 식민지 경찰은 마찬가지인데 그나마 군인이 하는 것보다는 조금 완화된 형태를 취하게 되고 한국은 신문 같은 걸 발행할 수 있게 허용하고 조금 직접적인 폭압 통치가 조금 완화되는 식으로 이제 바뀌게 되는 거죠.
◎ 손석희 > 일본 내에서 바라본 3.1운동은 어땠을까요? 늘 우리 시각에서만 또 얘기할 수도 있는 건데 그쪽 사람들은 어떻게 봤을까요?
◎ 이덕일 > 일본의 시각에서는 일본 내에서 당시 일본 제국위원회에서 상당히 많은 문제제기가 있었습니다만 너희들 아무 걱정 없다고 그러더만 이게 뭐냐, 통치할 수 있겠느냐 라고 하는 그 많은 문제제기가 일본 내에서도 있었고 그래서 3.1운동 이후에 일본 내에서 과연 이게 조선을 계속 통치할 수 있겠느냐, 그런 회의론까지 들게 되는데요. 하세가와는 자기가 이제 폭압통치하다가 이런 일을 당했으니까 나중에 이 일에 책임지고 사임을 하게 되는데요. 그런데 이 하세가와는 시종일관 책임을 이 소요의 근원은 상해에 있다 라고 해 가지고 상해에 모여 있는 독립운동가들, 이들을 부추긴 걸로, 항상 우리 7~80년대 보면 배훼 항상 뭐가 일어나면 누가 있다 라고 했듯이 그 식으로 상해에 있다 라고 주장을 했고요. 그런데 제가 이 ‘조선독립소요사론’이라는 그 한자로 된 책이 있는데 그 책을 한번 누가 쓴 건지 불분명 합니다. 제국유생이란 필명으로 썼는데 일본인 같기도 하고 한데 이 사람은 묘하게 분석을 하는데 그 중에 하나를 여러 가지 뭐 무단통치다, 천도교다 여러 가지를 갖다가 분석하면서 그 중에 한 항목으로 은사수작편당론이라는 걸 하는데 은사수작편당론이 뭐냐 하면 일본 식민지가 되고 나서 너무 노론 한 당파에게만 이권을 몰아줬기 때문에 그래서 소론이나 남인이나 이쪽 계열의 사람들이 3.1운동에 대거 가담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이 거기에 뭐라고 쓰냐 하면 합방이후에 천하의 사업가 이권 세리는 전부 다 노론이 독차지 하지 않았느냐,
◎ 손석희 > 거기도 또 노론 소론이 나오는군요.
◎ 이덕일 > 당시 이 책의 서문을 갖다가 사이토 마고토 그 총독이 써줍니다. 그러니까 총독부 관점이 상당히 어떤 측면에서는 들어가 있다 라고 보여지는데 여기에서 너무 해방이후에 노론당파에게만 너무 총독부에게 이권을 밀어줬기 때문에 다른 당파 사람들이 반발 한 것도 한 원인으로 삼는데 물론 이제 충청도 노론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 손석희 > 해방이후에, 강제병합이후에.
◎ 이덕일 > 네, 그러나 노론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충청권에서도 엄청나게 많은 시위가 발생했기 때문에 이건 뭐 맞다 라고 볼 수는 없는데 상부층에서는 이런 기류가, 이렇게 보는 분석이 하나 있었던 것도 사실이죠.
◎ 손석희 > 저희가 3부를 여기서 또 마칠 때가 됐습니다. 이제 4부에서는 그 이후에 대해서 조금 더 얘기를 나눠야 될 것 같습니다. 잠시 광고 듣겠습니다.
<손석희의 시선집중 - 3.1절 특집 ‘1919년 3월 1일 독립을 외치다’> 오늘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과 함께 1, 2, 3, 4부를 통틀어서 얘기 나누고 있습니다. 시간이 좀 그래도 여유 있을 줄 알았더니 말씀 나누다 보니까 또 이제 한 10여분밖에 안 남은 상황이 됐습니다. 다행히 얘기는 그래도 조금 후반으로 가고 있습니다. 3.1운동이후에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 바로 국내 각지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됐다는 것인 것 같습니다. 상해 임시정부 말고도 국내 여러 지역하고 러시아령에서도 임정이 세워졌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 자세히는 잘 모릅니다. 이건 어떻게 진행이 됐나요?
◎ 이덕일 > 3.1운동이 일어나니까 각지에서 이제 독립할 때가 됐다, 정부수립할 때가 됐다 라고 해가지고 여기저기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데요.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건 물론 일종에 페이퍼정부도 없었던 건 아니지만 다 나름의 기반이 있는 데들에서 수립이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이제 1919년 3월 17일에 러시아령에서는 거기는 대한국민의회란 조직이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임시정부를 수립하는데 여기에서는 대통령을 손병희 선생으로 이렇게 내세우게 되죠. 그러면서 또 어떤 움직임이 있느냐 하면 잘 알려지지는 않았는데 4월 23일 날 국민대회라는 게 종로에서 열려요. 이게 어떻게 보면 3.1운동에 버금가는 그런 사건인데 국민대회를 열 때는 그냥 연 게 아니라 인천만국공원에서 몰래 이 13도 대표가 모입니다. 모여 가지고 4월 23일 날 국민대회를 열자 라고 결의를 하고 그런데 이 국민대회 열자라고 하는 이 사람들은 상해쪽과 상당히 밀접한 관련이 있어요. 그런데 그날 당일에는 자동차 3대를 빌려가지고 그러니까 당일 계획은 서린동에 봉춘관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거기에다가 국민대회란 간판을 걸고 대대적인 시위를 하자 그래서 간판을 그날 걸고 자동차 3대를 빌려 가지고 각자 국민대회 공화만세, 여기서도 또 공화만세가 공화국 이야기가 나옵니다. 공화만세라는 깃발을 내걸고 각지에 자동차 타고 다니면서 삐라를 뿌리고 이렇게 해 가지고 국민대회의 결과물로 정부를 구성하자.
◎ 손석희 > 임시정부 선포문이군요.
◎ 이덕일 > 그래서 이런식으로 해가지고 이것이 총 나중에 집결이 돼서 이제 임시정부가 건립은 되는데
◎ 손석희 > 지금 말씀하신 것만 놓고 보면 벌써 세 군데인데요.
◎ 이덕일 > 총 나온 건 한 7군데 정도 임시정부가 수립이 됐죠.
◎ 손석희 > 정부가 너무 많아도 좀,
◎ 이덕일 > 그러니까 그게 나중에 조정을 해 가지고 서로 조정을 해 가지고 아까 국민대회 결과물로 만들어지는 게 한성정부인데 한성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면서 그 다음에 정부는 상해에 수립하는 걸로 하는데 이게 이제 상해에 여러 이점이 있겠습니다만 이게 비판을 많이 받게 되죠.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왜냐하면 정부를 수립하려면 만주나 연해주에 있어야지 거기가 독립운동의 최일선인데 왜 상해에 수립했느냐 라고 상해는 원래부터 외교독립론 이쪽이 아니냐 라고 하는 이제 비판을 받긴 받습니다만 어쨌든 여러 움직임들이 하나로 상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결집된 게 사실이고 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육군주만참의부라고 해가지고 만주에 참의부라는 무장독립부대를 산하 직할로 또 두게 됩니다. 그러니까 임시정부가 무장투쟁을 도외시 한 것도 아닌 거죠.
◎ 손석희 > 광복군은 상해임정 산하잖습니까?
◎ 이덕일 > 그건 이제 나중에 나오는 거구요. 그 1920년대 이 무렵에는 만주에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라고 있는데 그 참의부가 바로 정식명칭이 대한민국임시정부육군주만참의부, 이렇게 돼 가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육군 직할부대죠. 참의부에서 국내 진공작전을 많이 펼칩니다.
◎ 손석희 > 2006년에 한 7년 전에 대한민국의 건국일인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기념해야 한다, 이런 주장이 나오면서 건국절에 대한 논쟁이 불거진 바 있습니다. 이건 어떻게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이덕일 소장께서.
◎ 이덕일 > 한마디로 뉴라이트계열에서 독립운동을 부인하기 위해서 이제 장난친 거라고 봐야죠. 한국헌법자체 상해임정의 법통을 이었다 라고 했는데 그럼 거기에서부터 시작을 해야 되는 거죠. 그러니까 미국 예로 들면 독립선언한 7월 4일을 건국절로 삼지 않습니까? 멀리 갈 것 없이 미국의 경우로 보더라도 이때 분명히 전민족적인 항거에 3.1운동이 일어났고 그래서 그 결과로 임시정부가 수립됐고 그리고 대한민국 헌법에 그걸 법통으로 삼는다 그랬으면 거기로 가야 되는 거지 왜 느닷없이 48년 이야기가 나오는 건 모든 독립운동을 부정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꼼수예요.
◎ 손석희 > 독립운동을 왜 부정하려고 하겠습니까?
◎ 이덕일 > 자기네는 일본 지배를 용인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소위 말하는 뉴라이트 이쪽에서 말하는 게 식민지 근대화론 아닙니까? 식민지 시대 때 우리가 근대화 됐다고 해가지고 일본 지배를 용인하자 라는 그 관점에서 연장, 그 관점의 연장선상에서 나오는 게 48년 8월 15일 건국절이란 이야기죠.
◎ 손석희 > 여기에 동의하는 분들은 이덕일 소장님 의견에 크게 반대할 수도 있겠군요.
◎ 이덕일 > 그 부분은요. 좌파다, 우파다, 이런 부분이 아니라 우리가 대한민국이라는 한 나라의 한 공동체의 자존심을 갖고 있느냐, 없느냐, 한 나라의 국격이 어디에서 출발해야 되느냐 라고 하는 거죠. 그러면 나라가 우리가 망하고 아까 말씀드린 대로 횡도천 추가가에 모여서 경학사를 1911년에 만들고 3.1운동 이후에 임시정부를 만들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그 결과로 우리가 해방이 된 거지 않습니까? 이걸 부인하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처음부터 남이 갖다 준 거지 우리가 지난하게 싸게 투쟁의 결과 얻었다 라는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하나의 나라로서 꼴을 갖추기 위한 가장 기본조건은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자체가 논쟁이 된다 라는 사실 자체가 우리 사회의 수준이 좀 아직 문제가 있다는 라는 걸 말에 두는 거죠.
◎ 손석희 > 하여간 이런 임시정부의 오랜 활동, 또 3.1운동으로 대표되는 학생 농민 또 유생, 종교인들의 끊임없는 항거, 그것의 하나의 축적물로서 독립을 얻어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데 아시는 것처럼 뭐 1945년에 광복이후에 그런 데도 불구하고 친일과제가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부분들은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제헌국회 설치됐던, 그게 1948년입니다. 그러니까. 그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있었는데 이건 뭐 저희가 드라마나 다른 역사적 사적을 통해서 많이 배우긴 했습니다만 결국 제대로 되지 못했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 이덕일 > 당시 이승만 정권의 세력기반이 이승만 정권의 친일파들을 갖다가 같이 이제 손잡고 정권을 유지하려고 했기 때문에 반민특위 자체를 불편하게 생각을 한 거죠. 그러니까 결국 이승만 정권이 그렇지 않은 성격도 없진 않겠습니다만 주요 구성원들 중에 친일세력들이 많았기 때문에 결국 이 반민특위를 이승만 정부로 구성하고 있는 친일세력들을 제거하려는 것이 아니냐 라고 보면서 여기에 대해서 이제 압박을 가했던 것이 그 반민특위가 제대로 역할 못하게 된 핵심이유죠.
◎ 손석희 > 이덕일 소장께서는 사실 그전부터 친일청산이 제대로 되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 문제가 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 아니냐, 이런 지적을 하신 바가 있는데 어떤 얘기인지 풀어주신다면요.
◎ 이덕일 > 우리 사회의 각 문제점의 뿌리를 찾아가 보면 전부 다 이 문제에 걸려 있어요. 역사학계에 있기 때문에 식민사학 문제를 제기하고 있죠. 법학도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우리가 독일 법을 취한 메이지헌법 딴 거거든요. 음악, 미술 모든 분야 올라가 보면 다 이 문제가 식민지 지배구조 이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가 뭐 해방된 지 이 정도 뭐 68년 이렇게 됐으면 일제 식민통치체제에 대해 전반적으로 한번 검토해볼 때가 됐다 라고 하는 이야기죠.
◎ 손석희 > 그건 사실 꽤 오랜 기간 동안 뿌리 깊게 구조적으로 잡혀 있는 문제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사회시스템 같은 것은, 정치시스템도 마찬가지고. 교육도 마찬가지고. 그걸 그렇게 쉽게 바꾸긴 좀 어렵지 않을까요?
◎ 이덕일 > 각자 자기 분야에서 잘하면 될 것 같아요. 저 같은 경우는 역사분야에서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언론은 언론 쪽에서 하고 법학은 법학 쪽에서 하고 그래서 각 분야 문제를 정리한 상태에서 만나면 되지 않을까 싶죠.
◎ 손석희 > 흔히 이제 과거사 얘기한다고 하면 조금 피로감을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일제 청산도 마찬가지고요. 그런 부분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학도로서.
◎ 이덕일 > 저는 그 부분을 현실 정치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요. 현실정치 이전에 근본 문제, 이렇게 접근해야 되는데 때로는 보면 이 문제가 현실 정치적인 문제로 접근이 되기 때문에 격심한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측면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건 현실정치의 유불리가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앞으로 질적인 도약을 하기 위해선 반드시 짚고 청산하고 넘어가야 한다 라는 그런 차원의 문제로 접근해야 된다고 생각하죠.
◎ 손석희 > 흔히 그런 얘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너무 얽매이다 보면 앞으로 나가기가 어렵지 않느냐, 기본적인 그런 질문이기도 합니다만
◎ 이덕일 > 발목 잡는 걸 끊어야 앞으로 나가죠. 발목 계속 잡힌 상태로 앞으로 나갈 수 있겠습니까?
◎ 손석희 > 매우 간단명료하게 답변해주시는 군요.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열심히 연구하고 계신데 강연도 많이 하고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요즘 주로 어떤 주제로 하십니까?
◎ 이덕일 > 저희는 밖에 외부 가끔 외부 초청강좌 하는 게 있고요. 저희 연구소 내부에서 하는 한가람역사문화 아카데미라는 게 있습니다. 이게 매년 3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서 10주나 12주에 걸쳐서 하는 건데 한 강좌는 저녁 때 하는 겁니다. 한 강좌는 한국사 교양강좌, 또 한 강좌는 1차 사료로 보는 한국사 전문강좌라고 해가지고 한국사 전문강좌는 그야말로 한문으로 된 1차 사료를
◎ 손석희 > 이건 어렵겠는데요.
◎ 이덕일 > 크게 어렵진 않습니다. 어렵게 자꾸 이제 만들어서 일반 대중들로 하여금 역사를 소수의 학자들의 전유물로 삼게 자꾸 만들어놨기 때문에 어렵지, 1차 사료, 저희들이 처음에 첫 시간에는 내가 이걸 왜 앉아 있나 하다가 두세 시간 지나면 아주 재밌다 라고들 다 생각을 하죠.
◎ 손석희 > 저는 굳이 안 가도 될 것 같습니다. 가끔 나오셔서 다 풀어주고 계시기 때문에.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 이덕일 > 예.
◎ 손석희 > 이덕일 소장과 함께 3.1절 특집을 진행했습니다. 오늘 긴 시간 동안 고맙습니다.
◎ 이덕일 > 예, 고맙습니다.
첫댓글 이걸 어떻게 다 타이핑하셨을까? 고생하셨겠네요. 다시듣기 링크하는 방법도 있었을텐데...
다시듣기는 링크 하면 MBC 회원으로 로그인해야 하네요!!! 파일이 커서 첨부도 않되고요.....쩝!!!
녹음 푸느라 고생하셨겠네요.
출력해서 천천히 읽어봐야겠습니다~~
ㅋㅋ 이걸 타이밍 한 것은 아니고 손석희 시선집중에 들어가면 인터뷰가 올라와 있어서 복사해 온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