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들어가며
얼마전엔가 한 영화 작품을 놓고 그 작품이 예술이냐 외설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대중들 사이에서 말이 많았던 적이 있었다. 그 작품에서 나오는 몇몇 성행위 장면이 매우 변태적이고 단순히 사람들의 말초 신경을 자극하기 위해 상품화 한 것이 극에 달했다는 주장과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한 예술 작품이라며 창작의 자유를 짓밟지 말라는 주장이 맞섰었던 기억이 난다. 이 상황을 보고 본인도 과연 예술이란 것이 어떤 것이며 어디까지 예술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인지 기준이 서질 않아서 의아해 했던 적이 있었다. 몰론 사람에 따라서 예술을 보는 눈이 다르겠지만 분명히 예술에 대한 본질적인 의미가 있을 터이고 기본적인 기준도 있을 것 같았다. 본인은 그 때의 그런 상황을 다시 생각해보면서 이 책을 읽어보았고, 예술의 본질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럼 다음에서 예술과 미학에 관해 조금 더 알아보자.
II.예술, 그리고 미학에 관한 고찰.
-예술이란 무엇인가?
예술이란 말은 무척이나 설명하기 어려운 애매한 말이다. 사람들마다 기준이 다르고 또한 막연할 뿐만 아니라 매우 광범위한 것들을 포함하겠지만 이 책에서는 일단 예술을 이렇게 정의 내리고 있다.
일반적으로 예술이란 인간의 산물, 즉 인간이 자연에 첨가한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본문 59P-
그러나 위에 설명한 말로는 쉽게 이해가 가질 않는다. 그래서 사전을 찾아본 결과 사전에 나온 예술의 정의는 또한 이렇다.
예술: ①기예와 학술, 술학 ②특수한 재료, 기교, 양식 따위에 의한 미(美)의 창작 및 표현. 조각, 건축, 회화, 공예(공간 예술), 시, 음악, 무용, 영화, 연극(시간 예술) 따위의 총칭.
위에 정의된 말들을 종합하여 생각 해보면 어느 정도 예술에 대한 의미를 알 수 있다. 아마도 예술을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가장 접하기 쉬운 영화나 사진, 그림 등 구체적인 예들을 떠올리는 게 쉽지 않나 생각된다.
본인이 평소에 생각하기에 예술이란, 어떤 의도를 가진 존재가 그 의도를 드러내기 위해서 표현해 낸 작품이나 활동 따위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랄랑드(Lalande)의 철학 용어 사전에 나온 예술의 정의, <예술이란, 의식적인 존재가 작업에 의하여 아름다움을 산출하는 것을 의미한다.>와 비교 해보면 본인의 생각도 크게 틀리지만은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미학이란?
이 책에서는 미학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미학이란 예술에 대한 철학적 반성을 의미한다. 예술을 반성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아름다움이라는 특수한 가치의 의미를 밝혀 내는 것이다.
-본문60p-
미학을 예술의 정의와 비교해 봤을 때 공통적인 생각이 한가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예술과 미학, 어쩌면 비교가 어려운 개념이겠지만 두 개념 모두가 아름다움을 빼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본인이 추측하기에 아마도 아름다움은 예술의 본질이고 따라서, 예술과 미학을 이해하기에 가장 중요한 개념이자 키워드가 아닌가 생각된다.
1.자연과 예술.
-자연적인 아름다움에 대해
아마도 미와 추에 대한 감정이 모든 예술 활동의 전제가 되지 않나 싶다. 우리가 봄이 되면 아름답게 핀 꽃을 보고 감탄하거나, 늦은 저녁에 노을이 지고 있는 바다를 보며 희열을 느끼듯이, 인간은 흔히 예술품이라고 말하는 아름다운 그림이나 사진, 조각 등을 접하기 전에, 꽃이라든지 노을, 동물 등 인위적인 요소가 제외된 자연스러운 것들에 대해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자연적인 아름다움의 기준은 무엇일까?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은 매우 주관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은 개인 각자의 취미와 관계가 있는 것이고 시대나 혹은 문명에 따라서 달라질 수 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적인 아름다움은 무엇보다도 개인적인 감정에 부응하는 것이며, 우리 속에 즐거움을 솟아나게 하여 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예술적인 아름다움에 대해
그렇다면 예술적인 아름다움은 무엇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것은 단순히 인간의 기술에 의해서 자연적인 아름다움을 묘사하고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조금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렇게 말했다. <눈은 그림으로 그려 놓은 아름다움에서도 실제적인 아름다움에서와 마찬가지의 즐거움을 얻는다.> 결국 예술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일단 자연의 아름다움을 먼저 알고 느낄 줄 알아야 된다는 말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고 해서 자연적인 아름다움만이 모든 아름다움에 우선한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모든 예술 작품의 본질이 되는 것이 자연적인 아름다움이라고 본인은 말하고 싶다.
그리고 자연적인 아름다움과 예술적인 아름다움을 혼동하는 것은 하나의 편견일 뿐이다. 참다운 예술에 들어가려면 이러한 근본적인 편견은 버려야 하는 것이다. 어떤 예술 작품이던지 개인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고, 또한 단지 소수의 몇 사람에게만이라도 감동을 주는 작품이 있다면 그것도 예술 작품이라고 부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도 있다. 그러나 본인이 생각하기에는 예술 작품이 굳이 대다수의 대중을 즐겁게 해주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기 때문에 다수의 외면을 받더라도 소수의 인정을 이끌어 낸다면 그것도 예술 작품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 아니다?
이 책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예술은 모방이 아니다. 자연의 모방은 더더욱 아니다. 모방의 욕구는 예술의 요구가 아니다.
물론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모방이라는 것은 예술이 아니라 단지 예술을 하기 위한 초기 준비 단계로 생각된다. 그러나 자연의 모방이 예술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부분에서는 약간의 반론의 여지가 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는 자연의 모방도 때론 예술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예술 작품의 정의에 따르면 아름다움을 산출하는 작업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왜 자연의 모방은 예술이라고 할 수가 없는가? 우리는 자연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황홀감을 느껴 예술 작품으로 표현해 보려고 한다. 또한 후기에는 자연을 재현해야 한다는 사실주의 예술 풍조도 등장하였다. 사실주의 예술의 대표자인 졸라(Zola)나 꾸르베(Courbet)의 작품들을 단지 예술의 이단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들의 사실주의 작품도 어떤 사람들에겐 커다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예술은 자연과는 다른 세계이며 자연을 그대로 복사한 것이 아닌 것만이 예술이라고 하며, 또한 예술은 사실과 등을 돌림으로서만. 사실에 대한 인상이나 착각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설명한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도 있겠지만 자연은 예술의 기초이며 본질이 될 수도 있다는 본인의 생각과 비교해서는 위의 주장에 공감하지 않는 면이 많다.
일단 이 책에서는 예술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예술은 모든 면에서 현실의 전환이며, 현실의 반영은 아니다.(본인은 현실의 반영도 예술의 한 측면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예술은 개발이며, 다른 세계의 창시이며, 말로의 말과 같이 형식(formes)을 양식(style)으로 바꾸는 놀라운 연금술이다. 예술품의 아름다움은 자연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가치를 재현한 것이 아니라, 특수하고 독자적인 아름다움의 가치를 창조한 것이다. 따라서 예술적인 아름다움을 좀더 상세하게 분석하려면, 예술적 창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것이다.
2.예술적 창조
-창조의 어려움과 과정.
창조라는 말 또한 무척이나 어려운 개념이다. 또한 실제로 하기 어려운 매우 고난이도의 작업이기도 하다. 때로는 고통을 수반하기도 할 것이다. 예술의 창작 작업이 고통스럽다는 말을 하니 우리나라의 90년대 대중 음악을 이끌었던 서태지가 생각난다. 여태까지 말해 왔던 예술가들과는 조금은 다른 범주의 인물이긴 해도 위의 말을 이해하기에는 매우 좋은 예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도 또한 우리나라의 한 시대를 이끌었던 예술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 또한 창작의 고통과 어려움을 몸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그는 사회적으로 이미 높은 자리에 올라갔으나 그런 것들을 포기해 버릴 만큼 예술적 창조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짐작케 한다.
그러나 누구에게라도 예술적인 창조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된다. 비록 예술가들의 그것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아니 어쩌면 그들보다도 더욱 뛰어난 작품을 창조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술적 창조라는 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예술 작품은 대체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그것을 말하고 있다.
예술가들은 <영감>, 무의식적인 자발성이 나타나기를 기원한다. 타르티니는 <악마의 소나타>를 꿈속에서 작곡하였다 하고, 콜레리즈는 <쿠볼라 칸>을 자면서 저술하였다 하고, 또 죠르즈 상드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쇼팡의 경우에, 창조는 자연히 생긴 것이며, 기적적인 것이다. 쇼팡은 창조를 탐구하지도 않았으며 예견하지도 않았다. 창조가 완성된 형태로, 돌연히, 또 숭고한 형태로 찾아 왔다.> 그러나 이러한 증언은 믿기는 어렵다. 앙리 들라크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돌연한 직관이나 영감을 믿는다는 것은 예술가들에게는 흥미 있는 일이다. 실제로, 니체의 말과 같이, 훌륭한 예술가의 상상력은 선한 것, 초라한 것, 악한 것을 계속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나 그의 날카로운 판단력은 이들을 취사선택하고 결합한다.> 뽈라레리는 좀 더 진지한 말을 한다.: <비록 신들이 자비롭게도 우리에게 시의 첫 구절을 베풀어 준다 하더라고, 두 번째 구절을 짓는 것은 우리의 일이다.> (이 둘째 구절은 첫째 구절과 어울리는 것이어야 하고, 그의 초자연적인 형님보다 보잘 것 없는 것 이어는 안 된다.) 알랭은 이에 찬성하지 않는다.: <창작의 최고 법칙은 제작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창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본문69-70p-
위의 구절들은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들이다. 물론 영감이라는 것이 창조에는 무척이나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냥 아무렇게나 주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무의식 중에서라도 늘 창조에 대한 관념이 있었기 때문에 예술가들에게 어느 순간 영감이 주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 작품을 창조하는 데에는 영감이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지만 그 영감을 얻기 위해서는 예술 작품을 위해 늘 생각하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예술가 스스로의 끊임없는 노력과 열정만이 예술적인 창조로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3.미(美)의 감상.
-미적인 기쁨의 주관성
이제는 예술 작품을 <수용>하는 문제로 들어가 보자. <수용>의 문제는 <창조>의 문제와는 대칭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뛰어난 예술 작품도 그것을 제대로 수용할 수 있는 대중들이 없다면 인정받기가 매우 힘들 것이다. 그만큼 예술 행위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대중들을 무시할 수 없다. 아무리 대단한 정신을 담은 예술품이라 해도 대중에게 알리지 못하고 혼자만의 세계에만 갇혀 있다면 예술품의 의미의 유무를 떠나 그것을 아는 사람들조차도 매우 드물 것이다. 따라서 예술과 대중과의 관계는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단 수용의 측면만을 본다면 우리가 순전히 주관적인 세계에 끌려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대중들은 제 각기 자기가 좋아하는 작품에서 자신의 미적 기쁨을 느낀다. 그러나 취향의 다양성은 여러 가지의 형태와 색깔로 장식된 하나의 부채처럼 펼쳐진다. 따라서 예술 애호가들의 기쁨을 연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들의 기쁨은 하나가 아니라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창조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두에게 공통된 심리가 있을지 몰라도 '감상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기준도 없고, 각자가 자기 방식대로 예술을 체험한다. 그러다 보니 예술을 받아들이는 기준 또한 다르기 마련이다.
서두에서 말했듯이 어떤 작품을 가지고 그것이 예술이냐 외설이냐 하는 것도 각자가 작품을 보는 주관적인 느낌이 달라서 그렇지 않나 싶다.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서 그 작품을 예술로도 혹은 단순한 흥미를 끌기 위한 외설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예술 작품은 수용하는 측의 주관성이 매우 강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적 감상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렇다면 미적 감상의 본질이 과연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본문에서 말하는 부분을 잠시 인용해 보자.
미적 감상이란 강박적인 실재, 배타적인 실재의 침입을 받는 것이며,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는 미의 가치가 내 속에 나타나는 것이다. 나는 지금 브란데부르그 협주곡 제 6번을 듣고 있다.: 알토 솔리스트들의 다성부를 들으면, 나는 콘서트 홀의 찢어진 카페트나 낡아빠진 벽지를 쳐다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다가 돌연히, 어느 순간에,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홀도 없고 청중도 없다. 바하의 현존 자체인 소리의 현존만이 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실존의 외적 조건으로부터 나의 넋을 빼앗아 간 것은 대화이다. 콘서트 홀은 어떻게 된 것일까? 물질적인 것은 모두 나에게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나에게는 홀도 존재하지 않는다. 연주자를 보는 시각이나 악기를 듣는 청각은, 나를 나 자신의 피안으로 옮겨다 놓는 감정 변화, 엑스타시라는 근본적인 감정 변화에 따라서 움직이게 된다.
-본문74-75p-
말이 무척 어렵게 느껴지는데 결국 본질은 하나다. 미적인 감상의 본질은 결국 나 자신의 감정 변화란 얘기다. 어떻게 보면 무척 단순하고 당연한 얘기일 지는 몰라도 우리가 미적인 감상을 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감정의 변화를 느끼고 즐기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에 의한 강요가 아닌 우리 스스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감정을 예술 작품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가끔 우리 주변을 보면 예술 작품을 꽤나 안다는 듯이 일부러 어려운 말들을 통해 자신의 기분을 나타내고 마치 그 작품에 홀린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그 기분을 몸짓으로 나타내는 사람들을 보고는 하는데 이것은 미적 감상의 본질을 크게 벗어난 행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인위적인 감정을 느끼려는 것이 아니다. 그냥 단지 그 작품을 보고 자연스럽게 나오는 감정을 표현한 뿐이다.
III.마치며
이상과 같이 예술 그리고 미학에 대해 나름대로 진지하게 생각을 해보았다. 솔직히 이 책에 나온 내용들은 굉장히 어렵고 추상적인 내용들이 많아서 이해하는데 조금은 어려운 면이 없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예술 작품은 무수히 많다. 그런 작품들을 이해하는데 앞서서 이러한 예술의 의미와 그리고 미학의 본질을 이해해 두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요즘은 옛날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이 예술 활동을 하고, 또 예술 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어 있다. 따라서 너도나도 예술 작품이라고 만들어 내고 가운데 과연 그 중에서 얼마나 예술의 본질에 충실하고 의미 있는 작품들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어쩌면 문화의 다양화에 도움이 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대중들의 작품에 대한 눈도 또한 높아져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지금처럼 어떤 작품을 놓고 외설이냐 예술이냐 따지는 것조차 도 대중들은 매우 신중하고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의 내용은 예술의 본질적이고 기본적인 면에 집중하여, 예술을 본질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