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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죽염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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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 게시판 스크랩 역사산책 함양학사루(咸陽學士樓)에서 정쟁(政爭)의 역사를 보다.
함산 추천 0 조회 32 16.02.01 15:2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학사루(咸陽學士樓)는 언제 지어졌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최치원이 함양태수로 있을 때 이 누각에 자주 올랐다 하여 학사루라 불리었고 통일신라시대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는 관아에 딸린 건물로 옆에 객사가 있었고, 동쪽에는 제운루, 서쪽에는 청상루, 남쪽에는 망악루가 있었다고 전한다. 지방관리가 피로한 마음을 풀기 위하여 이곳에 올라 시를 짓고 글을 쓰며 몸과 마음을 달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숙종 18년(1692)에 다시 지었다고 전하며, 1979년에 지금의 위치인 함양군청 정문 앞에 옮겨 지었다. 김종직이 이곳 군수로 있을 때 학사루에 걸린 유자광의 시를 내리도록 한 것이 원인이 되어 무오사화(1498)가 일어났다고 한다. 앞면 5칸·옆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지붕 옆 모습이 여덟 팔(八)자 모양의 화려한 팔작지붕집이다. 임진왜란 때 함양 사근산성(咸陽 沙斤山城, 사적 152)이 함락되면서 불탄 것을 1692년(숙종 18) 군수인 정무가 중건했다는 기록이 발견되었고 원래 조선시대 객사 자리인 지금의 함양초등학교 안에서 교실과 군립도서관 등으로 이용되다가 1979년 이곳으로 이전·복원했다. 

 

함양학사루(咸陽學士樓) 주련 해설

七月蟬聲滿一樓(칠월선성만일루) 칠월의 매미소리 누에 가득한데

登臨回顧叉傷秋(등림회고차상추) 누에 올라 회고하니 감회가 깊구나

長林上下高城出(장림상하고성출) 상하림 긴 숲에 성은 높이 솟았고

大野東南二水流(대야동남이수류) 한들의 동남에 두 냇물 흐르네

學士已乘黃鶴去(학사이승황학거) 학사는 이미 황학 타고 가버렸는데

行人空見白雲流(행인공견백운류) 행인은 부질없이 희구름만 바라보네

可憐風物今猶昔(가련풍물금유석) 가련타 풍물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데

常有詩篇揭軒頭(상유시편게헌두) 언제나 추녀 끝에는 시편이 걸려있네  

  

 

 

 

이 건물은 무시무시한 무오사화(戊午士禍)를 부른 일화가 있다. 김종직(金宗直,1431~1492)이 함양군수로 있을 때 이곳에 걸려 있던 유자광(柳子光, ?~1512)이 쓴 시를 철거한 일 때문에 사적 원한이 발전하여 1498년(연산군4)에 사림파(士林派)가 훈구파(勳舊派)에게 죽임을 당하는 원인을 제공한 곳이다. 성종 때 김종직을 중심으로 사림파라는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하여 정계로 진출하였다. 이들은 3사(司諫院 ·司憲府 ·弘文館)의 언론 및 사관직을 차지하면서 훈구대신들의 비행을 폭로하고 연산군의 향락을 비판하는 등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1498년 성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당상관이 된 훈구파 이극돈이 사림파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史草)점검을 하는 과정에서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과 자신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발견하고, 조의제문은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일을 비방한 것이라고 연산군에게 고하여 선비를 싫어하던 연산군이 김일손을 심문하여 모든 것은 김종직의 선동으로 일어난 것으로 몰아 이미 죽은 김종직의 무덤을 파헤쳐 시체의 목을 베어 죽어서도 죽음을 당하는 부관참시(剖棺斬屍) 사건이 무오사화(戊午士禍)다. 역사를 통해 지난 잘못을 반성하고 밝은 미래를 설계해야 함에도 아직도 그 정쟁(政爭)의 나쁜 역사를 되풀이 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현실이다.

함양선비와누정문화.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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