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권長子權
(창세기 중심으로)
장자는 부모 사이에서 가장 먼저 태어난 아들을 말한다. 장자권은 장자의 지위와 권리를 말한다. 이것은 인류문화 안에서 고금동서로 유사하다. 장자는 종족,가정,가족, 아버지의 계보를 계승하며, 일정한 범위 안에서 우선적 지위와 권위 그리고 그에 따른 책임이 있었다. 성경 유대인들 경우, 재산도 다른 형제들에 비해 두 배 이상 또는 비교 불가하게 상속받는다. (신명 21, 17; 창세 25,5). 성경은 장자를 ‘외아들’이라고도 한다(창세 22,2). 외아들이란 생물학적 숫자상으로 아들 하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바로 구원자 계승권을 의미한다. 장자권은 크게 두 가지이다. 장자권, 즉 장자로서의 권위와 권리를 갖는다(창25,29-34). 그러나 장자권의 권위는 자동으로 승계되지 않는다. 아버지의 장자권 위임 즉 ‘축복’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축복은 되돌릴 수 없다. 하느님의 이름과 권위로 축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창 27장).
그런데 성경에 나타나는 장자는 인간 가정의 장자권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바로 하느님 구원의 계획과 역사에 주도적인 대표자 지도자 역할을 하는 구원자 계승권인 것이다. 탈출기는 유대인의 경우 장자가 인간의 장자이면서 하느님의 장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대속사상’으로 연결한다. 이집트 파라오 왕은 이스라엘의 탈출을 방해하다가 자국의 모든 맏아들을 몰살당하는 심판을 받았다. 할 수 없이 행한 심판이었으나 이집트도 하느님의 백성이다. 정의의 하느님은 나름 공정한 조치를 단행한 것이다.
창세기에는 이러한 장자권을 지킨 사람과 지키지 못한 인물들과 그 사연들을 제시한다.아담은 죄를 지었지만 인류의 유일무이 원조이므로 대체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대로 원조의 자리를 유지한다. 아담의 맏아들은 카인이었으나 그는 동생 아벨을 시기하고 살해하는 극악무도한 짓을 저질러 장자권을 상실했다. 아벨도 허무하게 죽어버렸다. 아담과 하와 사이에서 태어난 3남 셋이 구원자 계승권을 이어받았다. 노아는 아담의 10대 손으로 타락한 세상에서 오직 주님의 눈에 꼭 드는 의롭고 흠 없는 사람이었다. 이 노아는 하느님의 무서운 홍수심판으로부터 방주 한 척을 만들어 인류를 구원하였다. 노아의 구원자 계승권은 그의 아들 셈이 물려받았다.(창 9,26;11,10,10) 하느님의 장자권은 족보상 아담의 20대 칼데아 우르 사람 테라에게 위임되었다. 우르는 당시 앞서간 문명권의 도시로 잡신, 다신, 물신들이 판을 치는 곳이었다. 그곳에 살던 테라는 가나안 땅으로 가기 위해 우르를 떠났는데, 끝까지 가지 못하고 우회하여 하란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죽었다. 몇 줄 되지 않는 테라 이야기 행간은, 영문도 자세히 모르는 채, 구원의 역사 한 몫을 감당한 테라의 위대한 사명을 보여준다(창11,24-32).
테라의 아들이 아브람이다. 주님은 이번에는 확실하고 구체적인 지시를 내렸다. “내가 너에게 줄 땅으로 가거라....세상 모든 종족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땅’이란 하늘이라는 영역에 금을 그어 놓고, 그 아래 물과 흙이 있는 물적인 땅 ‘earth’가 아니다. 그곳은 피조물인 처지로 잡신과 다신으로 우상화한 곳이 아닌 유일신, 편벽된 지역,민족,국가신이 아닌 우주 만물을 주재하시고 천하만민을 돌보시는 보편신, 물신이 아닌 인격신으로 하느님을 알아보도록 맡기는 믿음과 영적인 땅이다. ‘space’라는 단어적 의미라고 할까?. 그런데 딱한 사람들이 물적인 땅 ‘earth’으로 알아듣고, 2023년 현재도 서로 우리 땅이라고 하며 동물들의 세계처럼 참혹한 땅 뺏기 전쟁을 벌이고 있다.
아브람은 늦도록 자식을 얻지 못해, 자신의 종인 이방인 다마스쿠스에게 상속권을 줄 속셈이었다.그러나 하느님은 “네 몸에서 태어난 아이가 상속할 것”이라고 하였다.(창 15,4;17,16-17.21) 이 약속이 늦도록 이루어지지 않자, 아브람의 아내 사라이는 이집트인 여종 하가르를 붙여주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이스마엘이 태어났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에서 조카 롯과 함께 살아남았다. 그가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하느님께 간청하는 창세기 18장과 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는 22장은 구원자 아브라함의 진면목을 드러내주는 명불허전 본문이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에서 조카 롯과 함께 살아남았다.
하느님은 아브람과 사라이의 이름을, 만민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라고 아브라함과 사라로 바꿔주셨다. 그리고 거듭 구원자를 계승할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육체적으로 너무나 늙어버렸기에 두 부부는 하느님의 약속임에도 믿을 수 없었다. 하느님은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진다.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나이 100살 사라는 90살에 외아들 이사악이 태어난다. 아브라함에게는 이미 하가르가 낳아준 이스마엘이 있었다. 외아들 표현에 주의해야 한다. 이사악은 기근으로 가나안으로 이주한 이력 외에 한평생을 포시랍게 산 편이다.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든든한 버팀목과, 의지와 생활력에 지혜까지 겸비한 아내 레베카 덕분일까? 레베카는 구원자 부부 역할에서 남편 이사악보다 주도적인 역할을 감행했다. 이미 쌍둥이 에사우와 야곱의 임신중에 하느님의 계획을 알았고, 탄생 때부터 두 아들의 됨됨이를 알아보았다. 생물학적 큰 아들 에사우는 맏아들 권리를 하찮게 여겼고, 야곱은 존귀하게 알아보았기에, 두 형제는 붉은 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매매하였다. 그러나 아직 유효하지 않다. 하느님을 권위가 위임된 아버지 이사악의 축복이 있어야 한다. 이 축복권은 어머니 레베카가 주도면밀하게 적극적으로 행동하였다. 레베카는 죄가 없다. 하느님의 계획에 야곱 못지 않게 치열하게 협조한 것 뿐, 심지어 혹시라도 있을 ‘저주’는 자기가 감당할 것이라 하면서. 모전자전 카리스마이다. 구원자 계승권은 당연히 자질과 역량을 갖춘 야곱에게 주어졌다.
야곱은 네 명의 부인들에게서 열 두 아들을 두었다. 첫째 부인은 레아이다. 두 사람 사이에서 르우벤-시메온-레위-유다가 태어났다. 시메온과 레위는 가나안 땅 스켐에 살 때 누이동생 디나의 성폭행 사건을 들어 스켐인들을 속여 할례를 받게 한 뒤 몰살시키고, 그들의 가족을 잡아가고 재물을 약탈하였다. 이 사건에 대해 던지는 야곱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너희는 나를 흉측한 인간(34,30)‘으로 만들었다”라는 것이다. 두 사람이 모의는 불의하고 그 행동은 잔악하여 저주감이다(창 49,5-7). 아버지를 흉측한 사람으로 만든 그들은 당연히 장자권 결격자들이다. 2남 3남이 장자권에 실격되고 난 그 다음은 맏아들 르우벤이다. 르우벤은 아버지 소실 빌하를 성추행하였다. 빌하는 이모이며 작은 어머니인 라헬의 여종이고 빌하도 족보상으로 계모가 된다. “이스라엘)야곱이 이를 듣고 알게 되었다.”라고 창세기 저자는 간단하게 일축하지만, 이 사건은 유다인들에게 엄청난 죄악으로 간주되는 일이다. “아버지의 아내의 치부를 드러낸 것은 아버지의 치부를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치부를 드러낸 사람은 그 죗값으로 사형에 처해져야 한다.”(레위기 18,8;20,11) 야곱은 당시에는 침묵했지만 죽음을 앞둔 유언과 축복의 자리에서 잊지않고 질책한다. “너는 내 침상에 올라 내 침상을 더렵혔다(창 49,4;1역대 5,1).
이제 야곱의 열 두 아들중 장자권) 구원자 계승권은 누구에게 위임되어야 할까?
창세기 37장~50장은 구원자 계승권을 두고, 르우벤과 유다의 인물됨을 비교하는 본문을 이곳저곳에 넌지시 흩어놓는다. 하느님도 다 계획이 있고 뜻이 있어 르우벤이 아닌 유다를 선택했으니 알아들을 사람을 알아들으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미 유다의 존재는 창세기 38장에서 급히 등장하고 유다의 역랑과 카리스마는 요셉을 주인공으로 세워 전개되는 이야기에서 묵시적으로 드러난다.
아버지의 편애가 지극했던 작은 어머니 라헬과 그의 소생 배다른 동생 요셉을 해치려는 비극적 형제 사건이 시작되었다. 와중에도 피만은 흘리지 말고 목숨만은 살려주자는 구원자 역할에 두 사람 르우벤과 유다가 나섰다. 그런데 르우벤은 ”구덩이에 던져 버리자“ 라고 하니 잘못하다간 피도 흘리고 죽을 수도 있다(37,21-22). 반면 유다는 노예로 이방인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아버리자고 한다. 요셉의 목숨 부지에 유다의 제안이 더 실제적 효과가 있다. 특이한 것은 형제들이 르우벤의 말에는 무대응 불순응했지만, 유다의 말을 따르기로 행동하고 은전 스무 닢을 받고 팔아넘겼다(37,26-28;42,22). 맏이 르우벤이 잠시 자리를 떠난 뒤 일어난 일이었나보다. 르우벤은 구덩이로 돌아와 요셉이 없자 옷을 찢고 형제들에게 “난 나는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이냐?”라며 울부짖는다. 이 절규는 에사우가 동생 야곱에게 장자권을 탈취당한 사실을 아버지 이사악에게 듣고 몸을 떨며 목 놓아 통곡하던 것과 같다(27,30-38).
모든 나라에 기근이 들었지만, 이집트는 요셉의 지혜로 대비하여 곡물을 가득 저장하고 있었다. 이 정보를 들은 야곱의 아들들은 기근을 해결하기 위해 요셉에게 갔다. 그러나 관리자 요셉에게 염탐꾼으로 오해받았다. 요셉은 그들이 제거하고자 했던 동생이었다. 이 오해를 풀기 위해선 시메온은 현지에 볼모로 잡혔고, 추가로 아버지 야곱의 곁에 있는 벤야민을 데려와 확인시켜야 했다. 설상가상 양식은 돈을 주고 샀는데 돌아와서 보니 각자 자루에 돈이 들어 있었다. 오해가 증폭되는 모양새이다.
그러자 르우벤이 나서서 야곱에게 벤야민을 집으로 무사 귀환시키지 못하면 ”자신의 두 아들을 죽여도 좋다“라고 무모하고 비겁하며 잔인한 맹세를 한다(창세43,37). 이쯤 되면 르우벤은 하느님이라도 된 듯 과장이 심하다. 그러나 생명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다. 또한 하느님도 사람의 목숨을 함부로 다루지 않는다. 그런데 르우벤은 자신이 아닌 아들의 목숨을 담보로 한다. 무모하고 비겁한 부성애이다. “내 아들은 너희와 함께 내려갈 수 없다…. 그렇게 되면 나는 저승으로 내려가야 할 것이다.”라며 야곱은 아들의 생명부지와 자신의 고통을 위해 단호하게 거절한다.
이어 유다가 나섰다. “아버지께서 아우 벤야민을 저희와 함께 보내시면 내려가서 양식을 사다 드리겠습니다. 벤야민을 데려가지 않으면 저희는 요셉에게 가지 못합니다. 그 아이를 저와 함께 보내 주십시오. 그래야 아버지와 우리가 양식을 먹고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제가 그 아이를 맡겠습니다. 그 아이에 대해서는 저에게 책임을 물으십시오. 만일 그 아이를 아버지께 도로 데려오지 못한다면 아버지에 대한 그 죄는 제가 평생 짊어지겠습니다. 저희가 이렇게 머뭇거리지 않았다면 벌써 두 번은 다녀왔을 것입니다”(창 43.8-10).
유다의 설득은 합리적이며 단호하기까지 하다. 게다가 결과의 책임은 자신이 지겠다고 한다. 르우벤처럼 남의 목숨인 아들을 희생양으로 삼지 않는다. 두 인물의 구원자 자질과 역량이 사뭇 비교된다. 유다의 설득이 얼마나 호소력이 있었던지, 야곱을 “자식을 잃어야 한다면 나로서는 잃을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라고 자신의 고통을 감추며 아들 유다의 긴장을 이완시켜주기까지 한다(43,14). 르우벤에게 한 처사와는 대조적이다.
야곱의 아들들은 양식을 얻기 위해 또다시 요셉을 만났다. 염탐꾼이라는 오해를 가까스로 풀었으나, 요셉의 계략에 의해 벤야민은 절도범으로 몰려 인질 신세가 되었다. 그러자 유다가 나서서 “아버지 야곱과 한 약속과 그 비통해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으니, 사건의 책임을 지고 벤야민 대신 자신이 종이 되겠다”라고 자처한다(44,32-34). 유다의 의식과 언행은 독창적이다. 유다는 과거사를 명백한 죄악으로 의식하고 언급한다(44,32). 반면 르우벤은 ‘피에 대한 책임’ 정도로 인식한다(42,33). 이러한 유다의 회개와 희생을 감수하려는 우애에 요셉은 결정적으로 감동했던 것 같다. 그는 신하들을 모두 물린 다음 형제들에서 자신을 밝히고 큰 소리로 목 놓아 울었다고 한다. 형제들도 서로 부둥켜안고 함께 울었을 것이다. 드디어 요셉은 과거사를 종료시킨다. 그리고 이것은 생명과 구원의 역사를 이어가려는 하느님의 섭리였음을 공유하며 큰 역량과 따듯한 우애로 일가족을 부양한다.
그런데 하느님의 심오한 구세사를 통찰하고 응답하여 악을 선으로 승화시키고, 기근으로부터 야곱의 집안과 자손들을 지키고 일으켜 구원받을 큰 무리가 되도록, 수호자 역할을 한 위대한 성조 요셉은 왜 구원 계승권자가 될 수 없었을까? 그 이유는 요셉의 양곡 관리 처사에 있다고 본다. 요셉은 야곱 집안을 지켜낸 미덕의 리더였으나, 또 다른 하느님 백성인 이집트인들에게는 가혹한 리더였다. 기근과 배고픔에 허덕이는 이집트인들에게서 차례로 돈-가축-씨앗-땅)토지를 사들이더니 마지막에는 이집트 국경 시작에서 끝까지 모든 사람을 파라오의 종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사회의 모든 조직과 제도의 죄와 억압의 종살이에서 자유인 해방자가 되게 하고 모두가 하느님의 백성으로 품위 있는 삶을 살게 하려는 하느님 구세사의 계획에 전적으로 반하는 것이다. 그러니 요셉도 당연히 자격 미달이다(47,13-26).
이러한 구원자는 위대한 지도자 모세와 수많은 인물을 거쳐서…. 마침내 신약성경 시대 예수 그리스도께 계승된다. 하느님의 맏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콜로 1,15;로마 8,29).성경과 교회는 그분을 참된 구원자 하느님과 참사람으로 구세주라고 한다(필리피 3,20).
입력: 최성옥 마리 에스텔 수녀, 2023년 10월 26일(목) 19시 42분
수정: 2024년 10월 26일 15:58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