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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야43 원문보기 글쓴이: 고야
고구려의 땅을 찾아 떠나는 여행 제5일(용정-도문-연길, 2009.6.19.금) .
마지막 탐방지는 용문과 도문이다. 오늘도 다른 날과 다를 바가 없다. 백두산 대우호텔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셔틀버스로 정문까지 나와서 우리 버스로 갈아탄다. 그리고 오전 내내 용정을 향해 달린다. . 버스 타는 일은 숙명처럼 다가오고 그럴 때마다 어떻게 하면 편한 자세로 갈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현명한 당면과제가 되었다. 두 발을 올려 책상다리를 하고 졸고 있는데 연변 가이드의 말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그저 하는 이야기라며 꿀에 대한 한담을 늘어놓더니 얼마 가지 않아 차를 세운다. 도로변의 꿀 직판장이다. . 보일 듯 말듯 들어있는 조그마한 비닐 컵의 꿀을 맛보라한다. 사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중국제 꿀이니까.’ . “아! 꿀물?!” 내 머리에 전기불이 반짝 들어왔다. 종이컵에 물을 부어 직판장 아가씨에게 달려가 손가락으로 꿀을 가리키며 컵에 꿀을 좀 넣어 달라했더니 그렇게 많이 달라고 하느냐 하는 시늉을 하며 손사래에 고개까지 흔들어 댄다. 샘플을 재빨리 내 컵에 부어 넣고 손가락으로 휘휘 저어 맹물 같은 꿀물을 마셨다. 어제의 숙취가 좀 풀어지려나?
* 용정가는 길 가의 꿀 직판장에서 . 현기증에 시달리며 한 참을 가는데 이번엔 버스가 GoStop을 하고 있다. 가다 서다의 원인이 도로공사에 있었다. 공사구간을 돌멩이 몇 개로 구분해 놓은 것이 조선족자치주의 경제력을 보는 듯해서 실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 차창 앞 오른쪽으로 실개천 같은 상류의 두만강이 보이기 시작했다. 근방의 산과 들에서는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나는 김좌진, 홍범도 장군이 활약했다며 곧 도착할 용정의 일송정, 용문교, 해란강을 떠 올려 보자는 오회장의 제안이 있었다. 말하자면 ‘선구자’를 합창하자는 말이었다. “자~, 최**선생님이 말 타고 신나게 달리는 노래. 시~작.” .
선구자(先驅者) 조두남 곡. 윤해영 시 . 1.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2.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소리 들릴 때 뜻 깊은 용문교에 달빛 고이 비친다 이역 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3. 용주사 저녁종이 비암산에 울릴 때 사나이 굳은 마음 길이 새겨 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 이어서 애창곡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불러보라는 오회장의 요청에 술이 아직도 떨 깬 김에 듣는 사람들은 생각해 보지도 않고 제 멋대로 불렀다. 두만강을 옆에 두고 두만강 노래를 부르는 맛이 제법이었다. . 드디어 용정(龍井) 용정이라는 이름은 용두레 우물에서부터 비롯된다고 한다. 용이 살았다는 우물을 찾아오는 길손들을 위해 두레를 만들어 두었고 이후로 이 우물은 용두레우물로 불리어졌다. 간도인들에게는 생명의 젖줄이라는 해란강(海蘭江)의 하류 평원의 중심이기도 한 이곳 용정에는 1870년 경부터 한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 일송정(一松亭)이 바라보이는 곳에 잠시 차를 세우고 먼발치로만 구경하기로 했다. 이곳 야산의 중턱쯤에 정자모양의 소나무가 있었고 이 소나무 밑에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항일의 의지를 불태우곤 했다는 것이다.
* 일송정 . 잠시 후 용문교에 도착한 것은 12시 20분. 유유히 흐르는 해란강을 보며 용문교를 건너 대성중학교로 향한다.
* 용문교와 해란강 . 지금은 용정중학교가 된 옛날의 대성중학교는 항일운동가들을 기념하는 기념관으로 주로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관광 명소로 바뀌었다. 용정지역의 6개 학교를 합한 용정중학교는 현대식 건물로 거듭났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에도 몇 대의 버스가 줄을 이었고 해설을 듣기 위해서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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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앞에는 윤동주시인의 시비가 자리하고 있다. 잠시 숙연한 마음으로 만인이 애송하는 그의 시 ‘서시’를 읽어본다. . 서시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 윤동주시인의 시비와 대성중학교
. 이층에 있는 기념관은 대성중학교의 역사와 이 학교의 졸업생 윤동주시인을 비롯해서 안중근 이상설 등의 항일운동가들의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관광 팀별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조선족 여성들이 해설을 맡아 이끌어 주었다. 출구 앞에는 방명록과 후원금 봉투가 놓여 있었다. 우리 일행 중에서도 장학금을 후원하는 모습들이 눈에 띄었다.
. 도문으로 이동하는 다소 무료한 시간에 가이드가 마이크를 잡았다. 퀴즈를 낼 테니 맞추어 보라는 거였다. 선물도 준단다. . 집안의 가로수와 같은 나무를 가리키며 나무이름을 물었다. 이틀 전에 본 나무에다 심양가이드에게 학습한 것이었으니 너무 쉽다며 모두 “파마머리나무“라고 외쳤다. ‘땡’ 아무리 힌트를 주어도 정답이 나오지 않았다. “비슬나무 입니다.” . 가이드는 준비한 선물을 꼭 주어야겠다는 듯 다른 문제를 제시했다. 고향이 북한이라는 가이드는 이북 말을 가르쳐준다며 Y담으로 너스레를 떨더니 “이북에서는 전구를 알 불알, 형광등을 긴 불알, 가로등을 선 불알이라 합니다. 그러면 장식용으로 여러 개의 전구가 뭉쳐 있는 것을 뭐라고 하겠습니까? “떼 불알” 의외로 쉽게 정답이 나오고, 좀은 부끄러운 듯 가이드에게 귓속말로 답을 말했던 그녀에게 선물로 들쭉술이 안겨졌다. . 연변조선족자치주가 기획 상품으로 내놓았다는 들쭉술을 판매하기 위한 작전은 참으로 교묘하게 시작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아무도 사는 사람이 없었다. 가이드는 불굴의 용사처럼 “그래도 한 병은 팔았습니다.”였다. 나중에 들쭉술 값을 문제를 맞춘 사람에게서 받아 내겠다는 넉살 좋은 말이었다. . 2시 10분, 도문 외곽의 이북 땅과 닿을 듯 한, 한적한 곳에 자리한 식당 ‘청기와가든’에 도착했다. 지금까지의 식당 이름만 본다면 외국이라는 느낌이 하나도 들지 않는다. 정겹고 우리 입맛에 딱 맞는 음식만 나올 것 같지만 모두 그렇지는 않다. 더구나 내 컨디션이 말이 아니라 그런지 몇 숱갈 만 뜨고 밖으로 나왔다.
. 가든에서 직선거리 약 50여 m에 철책이 있고 넓지 않은 두만강 저 건너는 북한이다. 식사를 미리 마친 몇 명이 산책을 나왔다가 강 쪽으로 조금 다가가는 순간 버스 기사가 울리는 벼락같은 경적소리에 놀라 넘어질 뻔했다. 국경에 대한 중국 사람들의 생각이 매우 예민한 것을 알았다. 반대로 우리의 국경에 대한 생각은 동포라는 이유로 너무 너그러운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한국계와 중국계 미국 여기자 2명이 북한에 억류되어 고생하고 있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정말 소름이 돋을 일이기도하다.
* 뒷편의 전신주 있느 곳이 북한의 기차길 . 3시에 식당을 나와 버스로 10분이 채 안되는 거리에 도문공원이 있었다. 계단을 오르니 강쪽으로는 ‘도문강’이라 쓴 표지판이 보인다. 중국에서는 두만강을 도문강이라고 한단다.
저 멀리 상류 쪽으로 도문철교가 있다. 북한과 중국을 연결하는 관문으로 김정일의 중국나들이 때는 기차로 이 철교를 건너다닌다고 한다. 도문(圖們)은 길림성 최대의 변경도시로 각 지역으로 가는 기차가 이곳에서 출발하는 철도교통요충지이다.
. 단동에서부터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오고 두만강을 따라 내려가며 도문에 이른 지금도 강 건너에는 항상 이북 땅이 있다. 여기에서도 눈앞에 북한의 남양시가 있고 강변의 한 건물 중앙에는 김일성의 사진이 걸려있는 모습까지도 생생하게 보이고 있다.
버스를 타고 내릴 때에 구걸하는 영감과 뻥튀기를 사라고 졸라대는 아줌마가 졸졸 따라다니며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든다. 다른 지역에서는 없었던 일이다. 그들을 뿌리치고 우리는 연길로 간다. . 3시 20분에 도문을 출발해서 고속도로로 1시간 정도 달리니 연길에 나왔다. 연길(延吉)은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정부 소재지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1952년 9월 3일에 성립되었으며 연길, 훈춘, 도문, 돈화, 용정, 화룡 6개 시와 왕청, 안도 2개현을 관할하고 있다. . 연변에 도착한 것이 4시 30분이니 심양행 비행기를 타기까지 5시간이나 남았다. 식사시간을 제하더라도 많이 남아있는 시간에 뭔가를 해야 했다. 가이드의 꾸준한 발맛사지 제안을 거절한 우리의 인솔자는 시내관광을 결정했다. 그럼에도 가이드는 백두산 지도가 그려진 수건 한 장씩을 모두에게 선물해 주는 탁월한 지혜(?)를 보여 주었다. . 한 시간 반 동안의 시내 관광. 백화점, 재래시장, 시내를 관통하는 해란강을 돌아보며 시간을 보내다가 하남(河南)쪽에 있는 식당으로 이동했다. 식당의 식사 테이불에 체리가 두 접시나 올라 여러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과일에 굼주린 여성들께서 시장을 지나오며 과일을 두 박스나 사 왔는데 심양의 숙소에 가서 먹겠다는 계획을 포기하고(비행기에는 농산물 적재 금지) 먹고 가자며 풀어 놓은 것이다.
* 연길 시내 관광
* 해란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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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8시쯤 연길공항으로 이동한다. 가까운 거리인 듯하다. 연길 가이드는 이 순간에도 끈질김을 보였다. 들쭉술 이야기를 또 꺼내더니 기어이 몇 개의 술을 팔고, 선물이라고 받았던 그녀의 술은 다시 가이드 손으로 돌아갔다. 동포가 객지에서 고생하는구나 하는 안쓰러움이 반, 도대체 중국의 가이드들은 한국 관광객을 봉으로 취급하는구나 하는 불쾌함이 반, 머릿속이 잠시 혼돈에 빠졌다. . 연길공항. 심양으로 가는 남방항공이 9시 40분 출발해야 하는데 시간이 가까이 다가와도 개찰을 한다는 방송이 없다. 출발시간 직전에야 비행기 사정으로 출발시간을 잠시 후에 알려주겠다는 방송이 있었다. 흡연실에서 보이는 건물 밖의 모습은 한 줄기 불빛 속에 비추이는 빗줄기가 제법 세차게 내리는 모습이다. 기상 악화로 비행기가 뜨지 못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 잠시 후에 출발시간을 알려 주겠다는 간헐적인 방송은 출발 예정시간으로부터 2시간을 넘기고도 계속되고 있었다. 정말 짜증나는 일이다. 그러더니 12시 직전에 결항이 결정되었다는 방송을 듣게 되었다. 비가 그쳐가는 중이니 기상악화가 원인이 아니고 비행기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 ‘내일 인천공항에 가기는 다 틀렸다.’ 모두 안색이 별로 좋을 리가 없는데 ‘민감사’만 의미 없는 미소를 짓다가 집에 못 간다니 더 좋아한다며 엉뚱한 소리를 들어야 했다. . 다시 짐을 찾고, 버스를 기다리고, 남방항공이 마련해 준 연길역 근방의 호텔로 돌아오기까지 많은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마침 ‘죽심’이 핸드폰 로밍을 해와 그 핸드폰으로 항공사와 가이드에게 연락을 할 수 있었다. 얼마 후, 이 지역 하나투어 사장과 가이드가 나타나 내일 인천에 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겠다고 약속을 하고 떠났다. ‘죽심’의 공이 지대하다. . 비상사태로 허전해진 마음은 먹고 마시는 일로 달래야 한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기도 했고 점심을 거르다 싶이 한 탓에 배가 많이 고프다. ‘딸랑이’가 어렵게 구해다 끓여준 라면( 중국산 辛라면)이 지금까지 먹은 음식 중에서 가장 으뜸이었다. . 12시가 넘은 시간에 호텔에 들어 온 우리는 술을 살 기회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가이드에게 산 들쭉술이 있었다. 조금 모자란다 싶었는데 ‘죽심’이 마지막 술 ‘수류탄’ 2개를 꺼내 놓았다. 매번 마지막이라며 한 병씩 꺼내 놓더니 지금까지 술을 아껴둔 그 인내력이 놀랍다. . 피곤과 짜증을 해소시킨 뒤 내일에는 행운이 찾아오기를 기대하면서 각자의 방으로 갔다. 어제의 인사불성으로 오늘은 많이 조심해 마셨으니 어제의 잠꼬대처럼 오늘은 “택시, 대치동 갑시다.”하는 일은 없으리라. . 그런데 이게 무슨일? 이 글을 다 써놓고 홈에 올리기 전, 저녁식사를 하는데 켜놓은 TV에서는 KBS의 ‘골든벨을 울려라’ 마지막 장원 문제가 출제되고 있었다. “이상설(李相卨), 이동녕(李東寧), 정순만(鄭淳萬) 등은 1906년 봄 북간도 용정(龍井)으로 망명하였다. 8월경 그 곳에 항일민족교육의 요람인 교육기관을 건립하였는데 이 교육기관의 이름은?“ ‘아~ 글쓰는 도중의 검색과정에서 보긴 보았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니 달리 노인네인가?’ 그 학생은 답을 참 기차도록 잘 맞추어 골든벨을 울렸다. 정답은 서전서숙(瑞甸書塾). . 2009. 7.12 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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