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에서 추려낸 말이긴 하지만
아주 조심스럽게 쓰지 않으면 안 될 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죄’라는 말이다.
하지만 교회는 이 죄 위에 하나의 개념을 덧입혔다.
‘원죄’라는 말이 그것이다.
단적으로 말하지만 성서는 ‘원죄’를 말하지 않았고
‘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들도
오늘날 교회에서 말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따라서 ‘원죄’와 ‘죄’라는 개념에 대해
성서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신앙’이라는 것이기 때문에
죄에 대한 것은 깊게 다루는 것은 논점에서 벗어난 짓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간략하게 말해야 할 것은
죄를 짊어진 사람이 뉘우쳐야 한다는 종교적 용어인
‘회개’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회개해야 할 대상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이 아니라
그동안의 역사 속에서 교회가 저지른 과오들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어야 한다.
신앙과 관련한 문제로 돌아가서 보면
‘성서는 인간을 교리적 존재로 규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실히 해야 한다.
사실 교리적 존재가 되는 것과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같은 말일 수도 없다.
여기서 먼저 ‘믿음’에 대해 말할 때 미뤄 두었던 나머지 말을 해야 한다.
무엇인가에 대한 종교적 믿음의 대상은
종교적 핵심인 ‘신’에 대한 것은 당연히 포함되지만
그 신이 행한 모든 일과 역사까지 믿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 모든 것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고백적 차원의 문제다.
믿음과 신앙고백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실제로 성서에 기록된 모든 것들을
거기 쓰여진 그대로 ‘일어난 사실’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을 믿음이라고 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이 쏟아져나오게 된다.
실제로 교회의 역사에서, 그리고 오늘날의 교회 현장에서도
이런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렇다면 현실적 상황에서 믿음의 대상이 선명해진다.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종교적 사고와 태도,
그리고 거기 기초해서 나오게 되는 구체적 실천의 결과가
‘오늘보다 더 나은 미래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교회는 이 믿음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직은 아니다.
그러나, 이 믿음을 중심에 놓고
종교적 삶이라고 하는 것이 구도자의 길을 걷는 길이라고 한다면
기독교적 개념과 사고, 그에 따르는 실천의 내용은
훨씬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것이 될 것이다.
날마다 좋은 날!!!
- 키작은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