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 소록의 수양매
소록도 중앙공원에 있는 수양매는 수령이 정확하지 않다. 무엇보다도 고사상태에 있는데다가 소록대교가 개통된 2008년 이후에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소록도(小鹿島)는 섬의 모양이 어린 사슴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필자가 수양매를 찾은 것은 2010년 2월 28일이다. 중앙공원의 정원 관리인들에게 수양매의 수령, 유래 등을 물었으나 아는 이는 없었다. 한 관리인은 태풍으로 인하여 수양매가 죽게 되었다고만 전해주었다.
호남 5매의 하나로 이름을 날리던 수양매가 이렇게 고사상태에 있는 것을 보니 안타까운 마음이 앞섰다. 경상남도 산청의 원정매처럼 고사 판정을 받은 후 몇 년 후에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고, 나무 밑에서 자목이 자라나는 사례도 있는 만큼 수양매도 꼭 회생하여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매화나무 주위에 여러 그루의 향나무들이 정연하게 식재되어 자라고 있는 것을 볼 때 수양매는 일제강점기인 1916년경에 이곳에 한센인을 수용하는 ‘자혜병원’이 설립되면서 심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수령은 약 100년 정도가 될 것이고, 나무 높이는 줄기와 가지들이 절단되어 있기는 하지만 약 7m 정도이다.이 나무는 늘어지는 매화나무 종류이기에 수양매 혹은 능수매로 불리는 백매(白梅)이다.
수양매
수양매 윗부분
소록도 자혜병원 원장의 횡포
소록도의 ‘중앙공원’에는 한센인과 관련된 일화가 있다. 조선총독부는 1916년 소록도에 ‘자혜병원’을 설립하고 한센인들을 이곳에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수호 마사히데(周防正秀)는 1933년 9월 1일부터 1942년 6월 20일까지 9년 9개월 동안 제4대 원장으로 재직한 일본인이다. 그는 온갖 강압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한센인들을 동원하여 소록도 내의 각종 공사를 추진하였다. 그가 한센인들에게 온갖 가혹행위를 일삼아 조성한 것 중의 하나가 중앙공원이다. 그는 한센인들에게 인근 완도와 거제도 등에서 집채만 한 바위를 옮겨 오도록 했으며, 때로는 환자들의 재산을 빼앗기도 하였다.
소록도 중앙병원
수호 원장은 한센인들로부터 기금을 강제로 징수하여 1940년 8월 20일 자신의 동상을 건립하였다. 동상의 규모는 동상 자체의 높이는 3.3m, 단을 포함한 동상 전체의 높이는 9.6m였다. 수호 원장은 동상이 건립된 날을 기념하여 ‘보은감사일’로 지정하고 한센인들로 하여금 매월 20일에 자신의 동상 앞에서 참배하고 경의를 표하도록 강요하였다. 수호 원장은 한센인들에게 강제 노동과 가혹행위를 일삼아 오던 중 1942년 6월 20일 ‘보은행사일’ 행사 때 환자 이춘상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이날도 수호 원장은 한센인들을 자신의 동상 앞에 집합시켜 놓고 갖가지 공갈 협박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각종 개발사업의 실적부진을 질타하고 있었다. 이때 그 자리에 참석한 한센인 이춘상은 손가락이 문드러져 없어진 무딘 팔목에 미리 준비한 칼을 헝겊으로 동여맨 후, 훈시를 하고 있던 수호를 향해 단상으로 뛰어 올라가 그를 찔렀다. 수호는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고, 체포된 이춘상은 당시 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 후 태평양전쟁이 치열해지면서 수호 원장의 동상은 전쟁물자로 징발되면서 철거되었다.
애한의 추모비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였고 그 일주일 후인 8월 22일, 자치를 요구하던 원생 협상대표 84명이 이를 거부하는 자들에 의하여 처참하게 학살당하였다. 참사 56년만인 2001년 12월 8일에 화장, 매몰된 현장에서 원생 및 언론기관, 관계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유골 발굴 작업이 실시되어 다수의 유골을 수습하였다. ‘애한(哀恨)의 추모비’가 서 있는 자리는 학살의 현장이다. 이곳에 2002년 8월 22일에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리고, 이들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이해와 온전한 인권회복을 기원하는 뜻을 담아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57년 동안 땅속에 묻혀지고 소록도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져가는 이 비극적인 학살 현장에서 84명의 거룩한 이름을 밝히며 역사의 흐름 앞에 싸웠노라 죽었노라 그러나 이겼노라...... 하는 이 기념비를 세워 전날의 과오를 반성케 하고 앞날에는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성을 최우선 과제로 삼기를 다짐하는 증표의 기념비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이제 이후로는 인간적인 차별이나 정치관리적인 불이익이나 종교적 분쟁과 갈등으로 인한 인권침해는 이 땅 위에서 영원히 사라지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84명의 추모기념비를 우리들의 힘과 정성을 모아 여기에 이 추모비를 건립하게 되었노라.
소록도 원생 84인 희생자 명단
서기 1945. 08. 21~08. 22 사건
박동식 외 83인
애한의 추모비
검시실
검시실 건물은 1935년에 건립되었으며, 2004년 2월 6일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제66호로 지정되었다.검시실(檢屍室) 또는 해부실로 불리는 이 건물은 두 칸으로 나뉘어져 있다. 앞부분의 방은 주로 사망환자의 검시를 위한 해부실로 사용되었고, 뒤쪽의 방은 남성의 정관(精管) 절제(切除)를 행하던 곳이다. 모든 사망환자는 본인이나 가족의 뜻과는 무관하게 이곳에서 사망원인을 규명하기 위한 해부절차를 마친 뒤 간단한 장례식을 거쳐 섬 내의 화장장에서 화장(火葬) 후 납골당에 유골로 안치되었다. 정관 절제는 한센병 환자의 근절을 위하여 1927년 일본의 한센병 연구자에 의하여 제기되었다. 이곳 소록도 병원 당국에서는 개원 이래 남녀 환자 별거제를 실시하여 오던 것을 1936년부터 정관절제를 하는 사람에 한하여 부부 동거를 허용하였다. 정관 절제는 감금실에 수용되었다가 출감하는 환자에 대해서도 그 벌칙의 하나로 행하여졌다.
검시실
감금실
감금실 건물은 1935년에 건립되었으며, 2004년 2월 6일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제67호로 지정되었다. 감금실은 1935년에 제정된 조선나예방령(朝鮮癩豫防令) 제6조 및 동법 시행령 제8조의 규정에 따라 설치된 일제 강점기 인권탄압의 상징물이다. 붉은 벽돌로 지은 건물과 역시 붉은 벽돌의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남쪽과 북쪽의 두 건물이 회랑으로 연결된 ‘에이치(H)’자 형태이며, 방에는 철창이 설치되어 있고, 각 방의 한쪽 마루바닥을 들어 올리면 변기가 나오는 형무소와 비슷한 구조로 되어 있다. 조선나예방령에 의하여 한센환자는 직업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이동권을 박탈당하였으며, 이곳에 수용된 환자들은 원장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변론의 기회조차 없이 이곳에서 감금, 감식, 체벌 등의 징벌을 감수해야 하였다. 또 강제노역이나 온갖 가학적인 행위에도 굴종할 수밖에 없었다. 감금실은 부당한 요양소 운영에 대한 저항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부당한 처우나 박해에 항거하던 환자들이 이곳에서 사망하거나 불구가 되는 일이 많았으며, 출감 시에는 예외 없이 정관절제를 당하였다.
감금실
중앙공원의 조경
공원은 1936년 12월 1일 착공 하였으며, 3년 4개월 동안의 공사기간을 거쳐 1940년 4월 1일 완공되었다. 당시 산림을 깎아 만든 공원의 면적은 약 1만 9,800㎡에 달하였다고 한다. 소록도에 수용된 한센병 환자 연인원 6만여 명을 강제 동원하여 조성하였으며, 득량만과 완도 및 소록도 주변 섬에서 암석을 채석하여 옮겨오고, 일본과 대만 등지에서 관상수를 반입하여 식재하였다. 해방 후 공원의 명칭이 ‘소록도 중앙공원’으로 변경되었고, 1971년과 1972년 공원 확장이 이루어져 현재 면적은 약 2만 5,000㎡에 이른다. 공원 내 정원에는 소나무의 한 종류인 솔송을 비롯하여 황금편백·향나무·후박나무·삼나무·팽나무·종려나무·팔손이나무 등 관상수 100여 종이 자라고 있다.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 소록리 1번지 소록도 중앙공원
구라탑
중앙공원에는 미카엘 대천사가 한센균을 박멸하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한센병은 낫는다’라는 문구를 적어 놓은 구라탑(救癩塔)이 1963년에 건립되었다.
구라탑
한하운 시비
한하운(韓何雲, 1920~1975)은 한센병을 앓았던 시인이다. 그가 지은 시 ‘보리피리’가 새겨진 시비(詩碑)가 이곳 중앙공원 내에 자리하고 있다.
보리피리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靑山)
어린 때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의 거리
인간사(人間事)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ㄹ 닐니리
한하운(韓何雲, 1920~1975)
한하운 시비(사진 앞부분의 반석)
출처:(매화나무, 2010. 9. 10., 김현우)
2023-09-02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