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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림포구는 SNS로 입소문이 나면서 인기를 끌고 있는 부산의 핫플레이스이다. 행정구역상 사하구 장림동에 속해 있으며 포구의 이름은 지명을 따서 장림포구라 한다. 포구를 따라 늘어선 알록달록한 건물과 떠 있는 작은 배들이 베네치아의 무라노 섬을 닮았다고 해서 부산의 베네치아라는 뜻으로 "부네치아"라는 별명이 붙었다. 노을이 아름답고 다대포해수욕장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 아미산전망대, 다대포 꿈의 낙조분수 등과 연계한 관광이 가능해 부산의 새로운 피서지로 떠오르고 있다.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장림 본동 당산제 [長林本洞堂山祭]
부산광역시 사하구 장림1동에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며 지내는 마을 제사.
개설
장림 본동 당산제는 음력 11월 17일 10~11시 사이에 부산광역시 사하구 장림1동 산167-9번지에 있는 제당에서 마을의 수호신에게 동네의 무사태평과 풍요를 기원하며 마을 공동으로 지내는 제사이다. 이를 ‘채씨 할매제’, ‘골미 당산제’ 등이라고도 한다.
연원 및 변천
전설에 따르면, 옛날에 정3품 벼슬을 지내던 김근만이 왜구를 피해 말 7필을 거느리고 장림동 본동 마을로 피난을 왔는데, 섬이어서 자갈과 수풀이 많아 ‘장림(長林)’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당시 당산 근처에 오두막집을 짓고 살고 있는 할머니가 있었는데, 바로 마을 수호신인 채씨 할머니였다. 채씨 할머니는 1686년 처음으로 이 마을에 들어온 입향조(入鄕祖)이다. 그래서 마을 주민들은 평강 채씨 할머니를 장림포(長林浦)의 수호신으로 모시고 동민 전체의 무사태평을 기원하면서 이곳에 제당을 세우고, 해마다 기일(忌日)인 음력 12월 7일을 기하여 자정에 당산제를 모셔왔다. 그러던 중 산신당과 제당이 노후하여 1986년 음력 12월 7일 장림 어촌계 계원 전체의 정성으로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 건립하게 되었다.
신당/신체의 형태
장림1동 산신 제당과 채씨 할매 제당, 골미 당산은 장림1동 산167-9번지, 선광무지개빌라 5동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당산제를 지내는 본동 마을은 당산으로부터 남동쪽으로 1㎞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산신 제당은 건물 면적 10㎡[3평, 앞면 370㎝, 옆면 270㎝]에 서북향을 하고 있는데, 우진각 지붕에 붉은색 벽돌로 벽이 조성되어 있다. 문은 이중으로 되어 있는데, 속문은 두 짝 미닫이 띠살문이고, 겉문은 두 짝 여닫이 나무문이다. 겉문 위에는 ‘산신 제당(山神祭堂)’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제단[두께 3㎝, 앞면 347㎝, 옆면 40㎝, 높이 81㎝]은 목재로 만들어져 있다. 제단 위에는 ‘산령위(山靈位)’라고 쓰인 지방이 위패함[가로 9㎝, 세로 3㎝]에 붙어 있으며, 위패함을 중심으로 정화수 그릇과 촛대가 각각 하나씩 좌우로 나뉘어져 있다. 그리고 제단 앞에는 향로상에 향로가 놓여 있다. 제단의 뒷벽에는 유리 액자에 든 ‘산신도(山神圖)’[가로 87㎝, 세로 99㎝]가 걸려 있다. 채씨 할매 제당은 건물 면적이 15.2㎡[4.6평, 앞면 420㎝, 옆면 363㎝]으로, 서북향을 하고 있다. 기와 우진각 지붕에 붉은색 벽돌로 벽을 마감하고 있다. 문은 이중으로 되어 있는데, 속문은 두 짝 미닫이 띠살문이고, 바깥문은 두 짝 여닫이 나무문이다. 겉문 위에는 ‘제당(祭堂)’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제단[두께 3㎝, 앞면 414㎝, 옆면 37㎝, 높이 84㎝]은 목재로 만들어져 있는데, 제단 위에는 ‘유인평강채씨지신위(孺人平康蔡氏之神位)’라고 쓰인 지방이 위패함[가로 11㎝, 세로가 39㎝]에 붙어 있다. 그리고 정화수 그릇 2개와 촛대 2개가 산신 제단과 같은 형태로 놓여 있고, 제단 앞에는 향로상에 향로가 놓여 있다. 제단의 뒷벽에는 유리 액자에 든 ‘당산 할매도’[가로 82㎝, 세로 114㎝]가 걸려 있다. 채씨 할매 제당의 바깥 왼쪽에는 화강암으로 된 ‘유인평강채씨제당비(孺人平康蔡氏祭堂碑)’[앞면 42㎝, 옆면 18㎝, 높이 122㎝]가 세워져 있는데, 비석의 뒷면에는 채씨 할매 제당의 연혁이 적혀 있다. 골미 당산은 채씨 할매 제당에서 동북쪽으로 80m 쯤에 있는데, 20여 년 된 포구나무가 신체이다. 나무 아래에는 제단[앞면 145㎝, 옆면 79㎝, 높이 12㎝]이 마련되어 있는데, 서북향을 하고 있다. 골미 당산의 주변에는 소나무가 무성하며, 높이 230㎝, 앞면 길이 14m, 옆면 길이 70m의 블록 담이 둘러 있다.
절차
장림 본동 당산제의 제관은 원래 마을의 노인들이 모여 선정했으며, 제관에 대한 보수는 없었다. 2005년 무렵부터는 금덕사의 스님이 와서 제의를 올렸으나, 2011년 현재는 무속인이 주도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제의의 절차를 비롯한 당산제의 많은 부분이 과거의 전통적 모습에 비하여 많은 변화를 겪었다. 우선 과거에는 음력 12월 7일 자정에 제사를 지냈으나, 현재는 음력 11월 17일 10시~11시 무렵에 지낸다. 제의의 경비도 과거에는 경로당·뿌리회·청년회 등에서 보조하고, 부족하면 집집마다 추렴하여 100만 원 정도를 모은 후 이를 금덕사의 스님에게 주면 절에서 음식을 장만하여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현재는 150만 원 정도 소요되는 경비를 어촌계와 노인회에서 일정 부분을 부담하고, 나머지 부족한 부분은 마을의 노인들과 유지들이 추렴하여 충당한다. 제물 역시 제관이 되는 무속인이 마을로부터 돈을 받아 준비해 온다. 산신제에는 돼지머리와 함께 술·과일·포 등의 간략한 제물과 정화수만으로 지낸다. 채씨 할매제의 제물 진설 및 제의 절차는 일반 가정의 기제사와 같되, 돼지머리는 쓰지 않는다. 제의는 ‘산신제→ 채씨 할매제→ 골미 당산제’의 순서로 진행되는데, 산신제 때는 살아 있는 돼지의 목을 찔러 산신으로 하여금 그 비명 소리를 듣고 응감케 한다. 과거 제관은 제의 3일 전부터 제의 후 2개월의 금기 기간을 철저히 지켰다. 그러나 현재는 노인회장과 총무를 비롯해 5명 정도가 제의에 참석하여 음복을 하고, 음복을 한 사람들은 1년 정도 초상집에 갈 일이 있으면 남을 보내는 등 금기를 지키며 조심한다.
축문
축문은 노인회 회장이 읽고, 위패와 함께 소각한다.
부대 행사
장림 본동 당산제를 지내고 난 후에는 부정이 없는 사람만 참석하여 음복하는 것이 원칙인데, 현재는 제사를 지낸 제물을 경로당에 가지고 가서 노인들이 나누어 먹는다. 이때 나누는 음식에 엄격한 금기가 따르는 것은 아니나, 그래도 꺼리는 사람은 먹지 않는다.
현황
장림 본동 당산제를 주관하는 제관을 스님이나 무속인이 맡게 된 것은 주민들의 금기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다. 사회가 다변화되면서 금기를 지키기가 힘들어지자 주민들은 부정이 없다고 생각되는 스님에게 제사를 위임한 것이며, 현재의 무속인으로 하여금 제의를 주관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변화한 것이다. 이는 당산제의 전통이 사라져 가는 한 단계이기도 하지만, 장림 본동 당산제에 참여한 마을 임원이 아직 금기를 약하게나마 유지하고자 하는 모습도 있어, 다른 마을의 당산제보다 변화의 속도가 빠르지는 않은 편이라고 하겠다.
참고문헌
『부산의 당제』(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2005)
『부산의 자연 마을』5-북구·사상구·사하구(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2010)
인터뷰(사하구 장림1동 노인회 전 회장 이광근, 2011. 6. 7)
인터뷰(사하구 장림1동 노인회 현 회장 김홍문, 2011. 6. 8)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포구 사람들」[浦口]
부산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여성 소설가 고금란이 다대포를 배경으로 1994년에 창작한 여성 소설.
개설
여성 소설가 고금란(高金蘭)[1948. 4. 7~]은 1994년 계간지 『문단』에 「포구 사람들」을 발표하고, 이어 1995년 『농민 신문』에 「그들의 행진」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1997년에 여성신문사에서 『바다표범은 왜 시추선으로 올라갔는가』[「포구 사람들」 수록]를, 2002년에는 두 번째 소설집 『빛이 강하면 그늘도 깊다』를 펴냈다. 2012년에는 소설집 『저기, 사랑이 지나가네』 등을 출간하면서 부산 문단에서 활발하게 작품 창작을 이어 나가고 있다. 특히 부산여성문학회 회원인 고금란은 1997년에 부산 여성 문학 우수상을 받는 등 여성 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작가이기도 하다. 2011년에는 제16회 부산 소설 문학상을 받은 바 있다.
구성
「포구 사람들」은 ‘기승전결의 형식’ 또는 ‘연대순으로 줄 맞춘 요점 정리’를 거부하는 발언을 내장하고 있다. 이는 이데올로기적 봉쇄 내지 닫힘을 방지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즉, 인물들의 현재 상황에 초점을 맞추며 인물 중심적인 구성을 취하고 있다.
내용
순금의 남편 지태는 지난겨울 새로 뚫린 강변도로에서 뺑소니차에 치여 척추를 다쳐 몸져누워 있다. 순금은 한쪽 수족이 불편한 시아버지 천 노인의 뒷바라지까지 해야 한다. 남편이 노동력을 상실하기 이전에는 남편이 잡아 온 고기를 선별하여 산 놈은 횟집에 넘기고 죽은 고기는 따로 모아 시장에 내다 팔며 살았다. 순금은 남편이 다친 이후 막연히 돈을 까먹고 있을 수만은 없어 석이네와 함께 횟집을 차렸다. 그러나 말이 좋아 횟집이지 실제로는 손님들이 사 온 고기를 장만하여 회를 만들어 주고 양념과 초장을 얹어 파는 보잘 것 없는 장사였다. 석이네는 장림 무지개 공단의 한 염색 공장에서 일을 하며 죽으나 사나 회사밖에 모르는, 자기보다 열 살이나 많은 남편과 살고 있는 여자다. 어느 날 석이 아버지가 폐수를 유출한 혐의로 경찰서에 잡혀갔다는 소문이 동네에 퍼진다. 염색 단지 내에 묻어 놓은 통신 케이블 매설관을 통해 정기적으로 유독성 폐수를 흘려보내는 공장이 여럿 적발되면서 석이 아버지가 다니는 공장이 가장 크게 걸렸고, 석이 아버지가 그 일을 맡아서 한 바람에 큰 곤욕을 치를 것이라는 이야기가 돈다. 사장이 시킨 일이라고 이야기하면 되지만 석이 아버지가 모든 죄를 뒤집어쓴 것이다. 한편 일제의 징용을 피해 고향 황해도 금산포를 떠났던 천 노인은 전쟁으로 인해 끝내 귀향하지 못하고, 뿌리 없는 나무처럼 떠돌면서 귀향의 꿈을 삶의 버팀목으로 삼는다. 일흔이 넘도록 고깃배를 탔는데, 젊었을 적에 고향을 떠나 삼천포와 거제, 한산도 등 멸치 떼가 나타나는 곳이라면 어디든 쫓아다녔다. 임수경의 방북과 관련된 전대협 배후 조직 책임자 장씨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천 노인은 아비가 부르던 망선배 노래를 통해 잃어버린 고향을 향한 통한의 그리움을 드러낸다.
특징
「포구 사람들」은 부산의 사하구 다대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다대포와 몰운대(沒雲臺) 등지에서 일어나는 일과 더불어 이곳을 묘사하고 있는 내용을 보면, 이를 굉장히 밀도 있게 관찰해 서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작가 고금란이 부산 지역 출신이기 때문에 이 지역을 더욱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문학 평론가 황국명은 고금란의 첫 번째 소설집의 해설에서, 작중 인물들은 생명력이 있는 존재로 건강한 사랑에 이른다고 말하고 있다. 타자와의 화해, 타자로 스며드는 사랑에 이르는 길은 멀고 험하지만, 이를 향한 그리움과 기다림에 지금 여기 불모의 현실을 극복할 단서가 있다고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고금란의 소설은 건강한 삶을 추구하는 굳건한 정신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작가 고금란은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인물들을 그릴 때, 관념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이들의 소탈하고 강인한 삶의 자세에 주목하면서 그들의 용기 있는 모습을 포착하는 데 중심을 둔다. 그것은 터무니없는 낙관적인 전망이 아니라 현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어 더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고금란, 『바다표범은 왜 시추선으로 올라갔는가』(여성신문사, 1997)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그러한 이국적인 풍경과 이름을 가진 또 다른 한 곳을 찾아 길을 나섰다. 비가 온 후 살짝 날씨가 개인 틈을 타서. 부산의 여러 항구와 포구의 중심에서 살짝 벗어 난 바다 그렇지만 살풋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작은 포구 그들은 스스로를 부네치아라고 부른다. 한국의 베네치아 부산의 베네치아 부네치아 장림포구다. 그 곳엔 노을을 아름답게 품고 있는 전망대가 있는 건물이 있고 그 건물 안에는 누구나 들어 가서 편히 쉴 수 있는 휴식처가 있고 카페가 있다. 의자에 온 몸을 푹 숨긴 채 노을을 감상 할 수가 있다. 그 곳에서 차를 마시며 낙동강을 바라 볼 수도 있고 조용하고 아름다운 포구를 하염없이 바라볼 수도 있다. 이 곳에서 스스로 베네치아라고 최면을 걸면 영락없이 베네치아 모습이 살아난다. 직접 가 보았던 텔레비젼에서만 보았던지 풍차모양을 한 공중화장실도 예쁘다. 내 삶에서 욕심을 조금만 내려놓으면 내가 있는 모든 곳에서 삶의 기쁨을 찾고 누릴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의 나폴리에서 부산의 베네치아에서 여행은 꼭 큰 의미나 장엄할 필요도 없다. 이 소년상 이름도 그렇다. 아이스크림을 찾아서 하는 여행이다. 당신도 이 코로나 상황에서 더욱 더 떠나고 싶은 곳이 많을 지도 모르지만 그냥 내 있는 곳 주변을 조금만 눈여겨 본다면 그 모든 곳이 내가 가고 싶은 곳 일 지도 모른다. 여기 이 곳 부네치아처럼... 나의 하루도 |
2022-02-09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