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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랑하는 행복한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헵시바
토라와 제자도 세미나 1 (2021.07.07)
세상은 점점 내리막으로 가고 있다. 한동안 한국 교회가 2000년 전후반에 전세계 미전도종족운동등으로 굉장히 열심을 냈던 기억이 있고, 저 자신도 열심을 냈던 기억이 있다. 한국 교회가 맨 앞에 서서 미전도종족에게 나아간다고 했다. 저희를 파송했던 큰 교회도 저희를 선교사로 인정하면서 그 일을 돕고 있지만, 이전같지 않고 많이 쇠퇴된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열심을 내서 제자 비전 세미나를 해야하는 이유가 있다. 우리 세미나도 7주년 기념으로 하기 때문에, 이 자리에 빽빽해야하고, 막 열심히 해야하는데, 비대면이라고, 목사님 부부와 찬양팀하고 열성분자 몇명만 나와있고, 나머지 분들은 댁에서 실시간으로 하던지, 녹화된 것을 보면서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조금도 뒤로 물러서거나, 조금도 주눅들지 않고 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늘은 세미나 첫 시간이기에, 도대체 우리가 이야기하는 제자 비전이 뭐냐에 대한 이야기를 역사와 함께 설명해드리도록 하겠다.
1. 제자 비전의 역사 : 2000년 역사
제자비전이 뭔가? 다 안다고 하는데, 오늘은 제자비전의 역사와, 우리가 이야기하는 제자비전, 토탈비전이 무엇이고, 이 역사를 걸어온 길을 설명하면서, 우리가 이야기하는 제자 비전의 본질을 다시 한번 새기고, 어떤 부분들은 완전히 새롭게 깨달으면서, 우리가 뭘 어떻게 해야하는지 눈이 밝아지는 시간이 되기 바란다.
일단 제자 비전의 역사는 2000년의 역사이다. 그러나 우리는 2018년에 아주 좋은 말을 만들었다. 그것을 토탈 비전이라고 한다. 이름이라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1) Total Vision : 토라 + 탈미도트(제자도)
토탈 비전은 영어의 Total이지만, Totality(전체주의)는 어감이 좋은 말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Torah와 탈미도트를 합친 말이다. 히브리어에서 왔다. 탈미도트는 제자도의 히브리어이다. 토탈 비전이란, 토라와 제자도라는 의미의 말이다. 정말 좋은 말임에도, 우리가 임의대로 쓸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이 언어의 정의를 하는 것이 중요하기에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토라와 제자도라고 한다면, 이것은 7년의 역사를 가진 것이다. 2013년 초막절에 우리가 역사적으로 온 우주에 토라에 관한한 가장 탁월한 해석과 가르침을 할 수 있는 Rhee라는 분과 전 우주에서 제자도하면 조금도 뒤로 밀리지 않겠다고 하는 고와의 만남이 일어났다. 제자 비전에 나중에 합류하신 분들은 잘 모르지만, 처음부터 참여하신 분들이 역사를 기억하는 것이 굉장히 좋다. 이런 운명적 만남의 사건이 2013년 초막절 때 있었다. 그리고나서 2014년에 첫 번째 토라와 제자도 세미나를 쿠웨이트에서 했다. 제자도를 하는 저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7년 역사 동안에 있었던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이 너무나 놀라운 것들이 많기 때문에, 이것을 언급하는 것이다. 처음에 참여했던 분들이 계셔서, 지난 이틀 동안에 모종의 장소에 다녀오면서 그때 이야기를 하는데, 놀랍게도 7년 전에 시작했던, 그 현장에서 제자도와 토라를 함께 하시던 분들 중에 지금까지 같이 가던 분들이 많지 않더라. 그 이야기는 또 다른 7년 뒤에 몇명이 살아남을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분들이 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했는데, 7년 역사 안에 많이들, 제자들이 다 떠나가고, 다시는 같이 다니지 않더라. 어떤 사람들은 떠날 수 있다는 개연성을 열어드리는데, 가라는 말은 아니다.
2) 제자의 삶: 세상과의 분리, 세상에 '가야'
토라와 제자도의 삶 자체가 제자의 삶인데, 이 삶 자체가 세상의 삶과 굉장히 구분된 어떤 삶의 스타일이기 때문에, 일견은 구분되서 이 안에서는 행복을 누리지만, 또 세상과 조화를 이루는데 여러가지 불편함을 가져다준다. 세상과 분리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이 말씀하신 명령과 여전히 거리가 있는 것이다. 세상과 분리되서 삶에도, 분리되면 안되는 딜레마 가운데 사는 것이다. 세상과 분리되나, 또 세상에 가야한다.
우리는 이 삶을 계속해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이미 이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이 삶을 살아왔고, 삶의 스타일이 변했기 때문에, 이 안에서 안정됨을 누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제자 비전의 삶으로 들어오게 하는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확장성의 한계이다.
전 이 문제로 항상 고민한다. 숫자를 막 늘릴 순 없을지 모르지만, 더 많은 어떤 사람들이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도록, 우리가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데, 그것을 하기엔 우리는 너무 Isolated, 고립되어있는 느낌이 있다. 주님은 그것을 말하신 것은 아니다.
지금부터 토탈 비전이라고 말하겠지만, 토탈 비전의 유효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제자 비전은 너무 맹맹하기에, 토탈 비전이라는 말을 쓰도록 하겠다.
2. 토탈 비전의 유효성
1) 예수님의 대명령, Standing order - 철회되지 않음
이 비전이 사실 예수님의 Standing order라는 것이다. Standing order는 금융쪽으로는 자동이체라는 말이다. 명령자가 철회하지 않는한, 여전히 유효한 것이란 뜻이다. 그래서 한동안 북한에서 김씨 일가의 Standing order가 누구누구를 살해하라고 해서, 굉장히 부정적인 말이었다. 그러나 이 Command, 대 명령은 예수님의 Standing order로, 철회되지 않았다. 이것을 중요하게 기억을 해야하는 이유가, 상황, 역사, 흐름에 있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교회와 같이, 사역과 같이, Standing order가 무엇인지, 주님의 Great commission에 대한 효력을 유지를 못한다. 지금 우리 교회도 제자 비전이라는 이름을 다 지어놓고, 이 교회 안에서 어떤 것을 계속 해나가는 역동성, 그 에너지, 이것들이 분명하게 색깔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이런 반복적인 노력이 있어야만 한다. 특별히 코로나 시대 때, 세상의 흐름에 묻혀있다보면, 그냥 쓸려 없어지게 되어있다. 이미 2000년이 지나면서부터 유명한 주님의 명령은 완전히 색깔을 많이 바랬다. 지금 이 이야기를 하면 여러분들도 다 식상한 것이다
마28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Great Commission <-> Omission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는데, 문제는 이 말씀이 계속해서 동일한 능력, 에너지, 선명성을 가지고 우리 안에 작동하는 것 같진 않다. 여러가지 이유로 말이다. 이것을 떠올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명령에 대한, Standing order의 심각성에 대한 지구적인,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자녀들의 Omission, 태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유명한 책이다. Great omission이란 책이다. Great commission, 명령이란 뜻인데, C, 적용을 빼버렸다. Omission은 태만, 누락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들이 2000년 전의 주님의 이야기에 대한 태만에 대한 이야기였다.
2) 명령의 존재 유무 / 명령의 의미
이 명령의 존재, 심각성, 이런 것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뿐만 아니라, 있다 하더라도 그 뜻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존재 유무, 명령의 의미,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관점이다.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심각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이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기억하고, 사랑하고, 예수님의 명령을 지키고 살아가기 원하시는가? 주님이 하신 명령을 항상 기억하고 그대로 살아가기 원하시는가?
저는 생각할수록 제가 개인적으로는 89년에 주님을 만난 이후에 정말 주님께 대해 심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심각해진 사람들과 만나고, 심각성을 유지하면서 그런 관점으로 살아왔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줄기차게 다녀왔음에도, 이런 상황에서 온 교회나 주변의 어떤 사람들의 노력들은 Pass해서 온 것 같다. 여기까지 와서 토라를 이야기하는 분을 만났기에 앞으로 가고, 유지할 수 있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저도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명령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보자.
3) 너희는 가서 : 예수님의 남은 제자
상대방이 있다. 퇴색되는 이유 중 하나가 의미인데, 너희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희석되어버린 것이다. 누가 너희인가? 저는 이 고민을 굉장히 많이 했고, 말씀도 많이 나누었다. 여기서 너희라고 말씀하신 것을, 지금도 여전히 작동하는 너희라는 말에 내가 해당한다. 라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냐는 것이다. 너희라고 하는 이 너희는 예수님의 남은 제자이다. 해봐야 유다는 이미 죽었고, 두세사람이 빠져서, 많아봐서 9명, 8명의 숫자의 극소수의 사람이다. 그 소수에 나를 집어넣을 수 있겠는가? 이게 굉장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말씀에서 주님이 남은 제자, 이미 남은 제자는 다 떠나고 12명 밖에 안 남았는데, 그 중에서도 몇명 안 남은 사람들에게만 이 토탈 비전이라는 것이 해당하는 것이다. 그것이 해당이 안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Omission 해버리는 것이다. 그 사람들은 어디가느냐? 모른다.
이 문제에 대해서 저는 굉장히 심각했다. 영적인 경험이긴 하지만, 이런 말씀을 계시로 받을 때 굉장히 뜨거운 마음으로, 너희는 가서..! 제가 가겠습니다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왜냐면 이 사람들만이 마지막까지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이다. 이들만 예수님과 유업을 나누는, 마지막까지 항상 함께 있는 사람이다. 굉장히 심각한 것이다.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아니면, 이 말에 해당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막연히 여기고 있으면, 나중에 모든 것이 엉켜서 하긴 한거 같은데, 아버지, 아들의 관계 안에서 열심히 한거 같은데,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것에 해당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굉장히 심각한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이번 기회에 많이 퇴색되고, 먼지켜켜히 쌓여있는 것 같은 제자 비전이라는 단어를 깨끗히 닦아내서, 제자 비전이라는 단어가 토탈 비전이라는 단어가 우리 마음 안에 반짝반짝 빛날 수 있기 바란다. 이것 때문에 세미나를 하는 것이고, 이것을 새롭게해야, 토라를 배우는 이유도 거기에 있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이유도 거기에 있다는 것을 완전히 일치할 수 있어야 한다. 간단한 원리이지만, 이 원리를 여러분 속 안에서 잘 정리되고, 쉬운 언어로, 너희의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대답할 말을 준비해야한다
제자 비전의 사람들은 항상 대답할 말을 준비하는 사람들이다. 뭐 때문에 살아가느냐? 코로나 시대는 너희의 소망이 무엇이냐를 묻는 시즌이다. 이 소망을 어떻게 표현해서 말해줄 수 있을까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얼마 안되는 기회, 얼마 안되는 사람일지라도, 우리 자녀들에게라도 이 말, 소망을 전해줄 수 있어서, 이 소망을 성취할 수 있게 해야한다. 그런데 너무 흔해졌다. 너무 먼지도 많이 쌓였다. 토라 안에서 이것을 쫙 닦아내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너무 위대한 사건이기에, 특별히 우리 쿠웨이트나, 우리나, 살아가는 어떤 것들, 앞에 당면한 훈련들에 너무 몰입하다보면, 이 소망이 반짝반짝 빛나지 않기에, 소망이 흐려져서, 어떻게 되는지, 후루룩 넘어간다. 이 소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여기서 우리가 계속 의식화작업을 해야한다.
소망 -> 의식화 -> 사상화
이것을 계속해서 의식화시켜야 한다. 매일 토라포션을 하는 이유도, 아들의 Great commission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다. 토라가 위대한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아들을 통한 것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다. 우리가 가장 강력하게 끝의 관점을 봐야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그분의 명령을 받는 것을 이루는 것으로 종국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토라의 모든 성취들도 우리가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왔기에, 이 일들, 하나님의 원래 창조 목적으로 가야하기 때문에, 지금 마28:19-20은 항상 우리가 갈고 닦아서 우리에게 언제든지, 너의 소망이 뭐냐? 생명이 뭐냐? 무슨 목적으로 사냐고 묻는 모든 사람들에게 대답할 준비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의식화를 다른 말로 하면 사상화이다. 여러분들 수고하고, 섬기고, 다 여러가지 하는 것에 대해서 조금도 폄훼하거나 나쁘게 말하는 의도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잘 정리된 언어를 가지고, 항상 이것을 준비하고, 먼 곳까지 가야하는 사명을 항상 인식해야 한다. 이 Standing order 는 한번도 취소되지 않고, 불꽃처럼 살아서 어두워진 그곳에 발휘될 수 있게 이 불꽃을 태워야 한다는 것이다.
4) 제자를 삼아 : 보편화 -> 예수님 컨셉 : 유대인 컨셉, 영의 언어
우리가 토탈 비전의 말씀에서 제자를 삼으라고 하신다. 이것에 대해서 아주 분명한 컨셉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제자를 삼는 것이 뭐냐? 제자라는 단어, 정말 많이 오해되고 있고, 정말 많이 남용되고 있다. 제자는 너무 보편화되어있다.
제자라는 단어를 세 차원으로 구분했었다. 아티스트, 병원, 교회에서도 제자라는 단어를 쓰는데, 예수님이 어떤 톤으로 이야기를 했을까? 제자라는 단어를 정확히 잡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교회의 사람들과 제자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많이 섞여있다. 세상의 말, 교회의 말, 그러나 예수님의 말이다. 예수님의 언어로 다시 바꿔야 한다.
예수님의 컨셉은 유대인의 컨셉이라는 것이고, 영의 언어라는 것이다. 제자의 단어를 예수님의 컨셉으로 이해하려면, 유대인 관점, 영의 관점에서 제자라는 단어여야 한다. 우리는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제자라는 말을 섞이게 쓴다. 세상의 제자와 교회의 제자, 예수님의 제자의 말이 섞인다. 모든 단어들이 단어로는 사랑, 축복이라는 단어가 섞여있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Original concept의 단어로 이해할 수 있어야 제자를 만들 수 있다.
(1) 자녀, 아들들
유대인들에게서 제자라는 말은 자녀라는 말과 동일하다. 자녀, 아들들이다. 이방인들은 절대 모른다. 아들, 자녀를 가지고 제자라고 한다!?
막10:24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여기서 예수님이 유대인 관점으로 말씀하셨기에, 제자들을 향하여 얘들아, 히브리어로 브네이, 아들들아라고 부르신다. 그런데 우리는 저런데 관심이 없고, 제자들을 자녀들같이 불렀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라, 내 아들아, 내 자녀야라고 부른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예이다. 제자가 무엇인지 말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게되면, 교회 안에서 종교적 컨셉의 제자라는 사람들은 굉장히 이상하게 보는 것이다. 왜 이 교회에서는 아들, 아버지라고 해요? 목사님이라고 안 하고? 제자를 삼으라는 단어 자체가 많이 오용되어있고, 남용되어있어서, 심지어 오염되어있어서, 세상이나 혹은 종교의 틀과 혼동되어있기에, 우리가 제자비전 이야기를 한다하더라도, 아버지-아들 관계, 이런 것들과 동떨어져있고, Original한 제자의 이야기를 할 때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함으로 또 다른 오해가 발생한다.
이런 것들을 분명하게 알고 있으면서,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 우리의 소망이 무엇이고, 이것이 어떻게 성취되어야 하는지, 여러분 하나하나가 스스로 설명해줄 수 있어야 한다. 너 왜 목사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니? 질문하는 사람 없었는가? 종교화된 사람들 사이에서 본질을 가진 사람들이 설명할 수 없는 수세적 입장에 처한적이 많기에, 이런 세미나를 통해서 이런 부분들에 대해 명확하게 컨셉을 가지고 우리가 그렇다는게 아니라, 원래 그래라는 분명한 생각과 사상을 가지라는 것이다. 이것이 분명할 때 토탈 비전이 얼마나 위대하고, 이것이 토라의 가장 깊은 창세기 1장까지 우리를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 사상, 생각, 깨달음, 인식을 가지고서야, 우리가 이 일, 비전,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과 관계를 맺고, 주님의 뜻대로 살기 원하는 사람들을 이 비전으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미나를 우리 안에 토탈 비전, 제자 비전이라는 것이 우리 안에서 반짝반짝 빛나게 만들기 위해서 이런 노력을 하는 것이다
제자 비전이라는 것도 제 안에서 굉장히 많이 발전했다.
(2) 제자를 "삼아" : 만들어
제자를 만드는게 뭔가? 진흙으로 만드는가? 이것이 바로 토라로 이야기하면 창조의 언어이다. 이런 것들을 설명해줄 수 있어야 한다. 아싸라는 말, 이미 다 아는 단어들인데, 이것이 예수님의 사상 안에서 이렇게 표현되어서 나온 것인데, 이것을 설명해주고, 동의하고, 나 좀 만들어줘, 이런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일에 여러분들이 발전되어야 한다. 이것이 제자 비전을 이루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5) 너희에게 분부 + 모든 것 + 가르쳐
제자를 삼는다는 것,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 지금 28장 19-20절을 가지고도 할 이야기가 너무 많다. 이게 뭐다라는 것을 토라로 재해석해서, 깊이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 분부는 명령인데, 토라로 이야기하면 하드바림, 모든 것이다. 이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이란 것이, 다 토라에서 나왔다. 토라의 사상에서 나왔고, 그것을 예수님의 말로, 예수님의 해석, 계속 설교 때 이야기한 것이지만, 예수님의 해석법, 예수님의 성취 방법, 그 토라를 어떻게 해석해냈고, 지금 계속 듣는 것이 단독자로 살지 말아라, 널 위해 살지 말아라, 다 토라에서 나온 사상이고, 예수님의 해석이다. 그것을 어떻게 마지막까지 성취했느냐? 이것에 대한 정리되어있고, 사상화되어있는 것을 언제든지 나눌 준비를 해야한다
찬양하는 것은 너무 중요하고, 기타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누군가에게 이것을 준비하고, 이 소망을 가지고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아이를 낳고 제자삼는 것도 중요하다. 이것을 사상화, 의식화하는 일들을 가장 쉽게는 집에서 자녀들에게, 우리 KG, 학교, 만나는 환자들 사이에서 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소망에 대한 진지한 준비가 있느냐? 결혼을 해서 새 신혼방이 너무 행복하고 좋다. 그런데, 저 Standing order는 어떡할건데? 이런 것이다. 자기 전에 형제와 예수님의 무효화되지 않고 작동하는 그 명령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오늘 심각하게 생각하느냐? 이 이야기이다. 이것을 다시 한번 일깨우고, 어떻게 이룰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오늘도 또 하는 것이다.
가르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임용고시를 패스해야 한다. 하다못해 경기도 임용이 그렇게 힘들었다고 하지 않는가? 세상의 임용고시도 힘들다면, 하나님의 토라를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은 얼마나 어렵겠는가? 얼마나 열심히 공부해야겠는가? 얼마나 많이 말씀을 공부하고, 묵상하고, 사상화되어야하지 않겠는가? 말은 쉽지만, 가르친다는 것은 정말 어렵다. 저는 이것을 몰랐다. 그래서 예수 믿고 은혜받으니까, 언제든지 가르칠 수 있다고 스스로 생각해서, 선교사되고, 교회 세우고, 병원 세웠다고 설쳤는데, 2014년에 토라 만나고 정신이 드니 창피해서 죽는 줄 알았다. 가르치긴 뭘 가르치는가? 그럼에도 스스로는 나는 말씀을 잘 가르쳐, 설교를 잘 하는 사람이야, 자타가 공인한다고 한다, 누군가가 그런 말을 해주면 진짜인 줄 알고 믿는다. 가르쳐 지키게 해야한다. 카르칼팍에서 가르치려면, 정말 밤을 새면서 공부해야 한다. 다윗이 꼬박 12시부터 한숨도 안 자고 토라 공부 했다는 것을 아시는가?
가르치는 것은 지키게하는 것에 비하면 훨씬 쉽다. 자기 자식 하나라도, 선희가 잘 지키게 할 수 있을까? 그렇게 가르쳤는데, 아직도 그러고 있냐? 토라를 통해서 배우면서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지만, 이 문제, 너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아는 것, 가르치는 것, 지키게 하는 것, 모든 것이다. 이 명령, standing order에 대해서 다시 한번 심각해져야겠다는 것을 상기시켜드리는 것이다.
6) 제자 명령의 이유
왜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셨는가? 이 대 명령을 하신 이유? 저는 이 생각은 한번도 안 해봤다. 하라면 하라고 했는데, 토라를 배우니까 유대인들같이 왜 저 명령을 하셨을까? 라는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그 답을 찾았다. 그것이 요14:6이다
요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아버지께로 오게하기 위한 목적 때문에 이것을 하신 것이다. 여러분들 아버지도, 온다는 것도 다 안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완전하게 성취하는 것이다. 아버지께 온다는 것이 슈브의 개념이고, 여러분들이 배운 많은 토라의 이전 개념들이, 예수님의 단어, 한 문장 안에서 포함되고 성취하는 길이란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아버지께로 갈 뿐만 아니라, 우리와 연결된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이 아버지께로 오게하기 위하여, 이것을 제일 사람들이 싫어한다고 한다. 토라 공부하다보면, 보면 볼수록, 기독교보다는 불교도가 더 아버지께로 오기가 쉽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이 한다. 저는 불교도가 아니다. 왜 그랬을까 했는데, 이해가 가더라. 그 길이 더 빠른 길이다. 젊으신데 더 많이 올라갔다. 저는 형이하학적, 바닥에서 기다보니까 시간이 많이 걸렸다
여기서 정말 위로되는 단어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이라는 단어이다. 나로 말미암는다는게 뭔가? 나로 말미암아서만 아버지께로 올 수 있다. 뻔한 사실 같지만, 이 말은 굉장히 어려운 말이다. 예수님의 길을 따라서만이라는 것이다. 그분이 어떻게 살았는지, 그 뒤를 따라갈 때만, 그래서 여기서 그분과 영의 관계, 루아흐, 그것들이 다 하나로 일치되는 것이다.
신약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들, 원래 하나님이 원하시던 창조 목적과 연결시키는 작업을 가능한 완벽한 수준까지 습득, 완성, 설명, 설득 해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잘 안되었다?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해달라고 하고, 정말 그 사람에게 아버지께 가고자 하는, 예수님의 뜻을 행하고자하는 것, 하나님께 가고자 하느냐? 그런 진정한 소원이 있느냐를 먼저 알아봐달라고 했다. 이런 소원이 있는 사람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하고, 그 사람들에게 길, 진리, 생명을 이야기해줄 수 있어야 하고, 왜 예수님을 말미암아서만 예수님께 갈 수 있는지를 설명해줄 수 있어야 한다.
3. 토탈 비전의 당위성
왜 토라와 제자도가 하나로 합쳐질 수 밖에 없느냐? 하나로 합쳐져야만하는 문제에 대해서 확실한 관점을 갖고 있으면, 토라를 공부한다고 하더라도, 기존의 교회 안에서 토라를 통해서 이 명령을 이룰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설득력 있는 설명을 해줄 수 있는 것이다.
[ 교회 { 토라 { ) 제자도 } ]
교회 안에 제자도를 배우겠다는 사람도, 토라를 배우겠다는 사람도 매우 적은데, 그 두 가지를 함께하겠다는 사람은 더 적다. 이 길만이 우리에게 제자의 길을 갈 수 있게 해준다. 아버지와 아들, 아버지와 아들을 완성한 이스라엘의 스토리들을 다 안다. 그래서 이 교집함이란, 아버지 아브라함, 아들 이삭, 에벤이라고 하는 돌이라는 그림으로 유대인들이 실제로 많이 그린다. 이 가운데 남는 것이, אב 아브와 בן 벤의 교집함인 베트이다. 토라와 제자도는 에벤, 돌인데, 이 교집합은 베트이다. 이 제자도가 창세기의 첫 알파벳이라는 것을 우리가 다 안다.
그리고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제자도 비전 자체가 베레쉬트, 하나님의 심중에 제일 먼저 나온 것이다. 이 아버지와 아들을 완전히 이룬 사람이 야곱이고, 그 야곱은 완벽한 아들이고, 완벽한 아버지,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아버지가 된 것이고, 이것이 토탈 비전이라는 이해를 갖고 있으면, 우리는 창세기를 가지고 제자 비전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삼아서 그것을 완성하셨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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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이야기를 해야하는데, 토탈 비전이 정확히 무엇이냐는 문제를 다시 확실하게 마음 안에서 분명하게 새겨낼 수 있기 바란다. 이것이 예수님의 대명령인데, 온 교회와 모든 선교 단체들조차도 Omission되는데, 이런 명령이 있는지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그 의미에 대해서도 몰랐는데, 가셔서 이 마28:19-20을 잘 갈고 닦으시길 바란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 하나님의 아들이 분부한 것이 무엇이냐? 그분이 어떤 사상, 생각, 근거를 가지고 말씀하셨는가? 그 모든 근거는 토라이고, 그 토라의 해석, 그것을 해석할뿐 아니라, 성취한 부분들을 우리가 반듯하고, 정확하고, 확실하게 알고 있을 떄, 제자삼으라고 하는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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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더 어두워졌기 때문에, 이전에는 쉽게쉽게 교회에 갔지만, 지금은 더 어려운건 사실이지만, 어두울수록 작은 불빛도 작동하는 것처럼, 우리가 작동하게 할 수 있는 소망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진리를 내 안에서 불타게 하면서, 그 진리를 항상 내 안에 소망에 대해서 질문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답한다는 정신만 하더라도 귀한 것이다. 어떤 기회가 있던지간에, 작은 쪼가리에 있는 것들을 볼 수 있게 하면서, 한두마디의 지혜로운 말, 예수님이 떠오르게 해주는 것들을 다 설명 못하더라도, 토라를 갑자기 이야기하면 어려운 것으로 가는데, 내 안에 녹여내면 예수님과 같이 쉬운 말로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예배 가운데 배우는 것은 어려운 말들과 사상을 배우는데, 그것이 내 안에서 소화가 되어서, 아주 쉬운 말들로,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것처럼, 표현과 쉬운 말들로 할 수있는 연구를 해야할 것이다. 결국 다른 방법보다, 자꾸 연습을 하고, 사람들을 조금 더 만나고, 마음을 들여다보는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청년들이 아이들을 낳아서 바쁘지만, 여전히 우리들은 우리 아이들에게조차도 또 새로운 말, 새로운 방법, 창의적인 방법들이 나올 것이고, 그 아이들의 친구들, 부모들과 이런 것들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이 안에서 행복하고, 사랑을 나누는 분위기 가운데 있는게 좋지만, 동시에 대 특명, 한번도 취소되지 않은 Standing order에 대해 깨어나자는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상당히 발전된 디테일의 지식이 나올 것이고, 우리 애들뿐 아니라, 다른 엄마들, 비지니스 관계 가운데 만나는 사람과 어떤 대화를 이끌어나갈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불빛을 보고 다가오게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에 대하여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알지 못하는 사이에 놓쳐버릴 수 있다.
가장 중요한 토탈 비전에 대한 깨어있음을 가지고 있으면, 7-8주년 때 가장 두드러기에 새로운 소망이 다가올 것이다. 어떻게 생명들을 구해낼 수 있을 것이냐? 토라의 지식들, 원리를 나에게 적용했다면, 또 다른 사람들에게 할 수 있겠는가? 주변의 권사님, 자녀들에 대하여 이야기는 것, 굉장히 어려운데, 이런 것들을 도전하면서 하나씩 풀기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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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함은 죽음밖에 없다. 우리는 완전한 지식은 가질 수 없지만, 완전함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그래서 아버지들이 연결되어있고, 연결된 아버지들이 함께 동역하면서, 그때까지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방향을 줄 수 있을 때, 그것이 아보트들과 아브라함까지 연결된 연결선상에서 생명을 흐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루아흐의 생명이 네샤마의 생명까지 올라간 이야기인데, 벌써 이렇게 이야기하면 복잡하다. 네샤마의 생명까지 도달하는 것, 그것을 어떻게 빛을 보이느냐는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다 응용하는 것이다. 많은 것들을 배웠다고 할지라도, 에세이에 많은 것들을 표현할지라도, 그것을 읽을 사람이 있어야 한다. 생명이 흐르게 해야하기 때문에, 말레에서 흐르게 해서, 누군가의 생명까지 도달하는 시각을 가지게 하는 것이 지상 명령, 토탈 비전의 명령에 들어있는 것이다.
* 이바울 목사님
제자삼으라는 말이 유대인 컨셉이다. 아들을 만들어라. 이것이 중요한 것이다. 육신으로는 아들 만들기가 쉽다. 그러나 쉬운게 아니다. 단순히 육체적으로 강제로 다바크를 한다고 해서 되는게 아니다. 아들을 만들려면, 정말 마음으로 서로 다바크가 되어야, 완전히 하나가 되어야 아들을 만드는 것이다. 괜히 강제로 했다고 해서 만들어지는게 아니다. 육신으로도 그런데, 우리가 제자, 즉, 영의 아들을 만들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더 하나가 되어야 하냐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으로 영의 자녀를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실제적인지, 이것은 의식으로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이것은 한 존재에게 빛을 계속 비추면, 자녀를 만들 수 있다. 이 빛을 비춘다는 것이 그래서 토라의 단어에서 조하르라는 것인데, 비추는 빛으로 하르, 잉태한다는 것이다. 빛을 계속 비추면 생명이 잉태되어진다. 그래서 아이를 낳을 수 있다.
우리는 빛이 밝게 해주는 것인 줄 아는데, 토라에선 그렇지 않다. 빛을 비추면 싹이 나고, 생명이 나온다. 빛이라고 하는 것은 잉태를 해서, 아들을 만들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빛이 있어야지, 내가 아들을 만들 순 없다. 예수님이 주신 이유는 내가 너희에게 빛을 주니까, 모든 족속에게 가서 이 진리, 빛을 계속 비춰서 아들들로 만들라는 것이다. 그 빛을 비추면 거기서 생명이 나온다. 이 육체, 나무토막에서 싹이 나온다. 생명이 나온다. 그랬을 때 아들이 나온다.
모든 육체로 태어난 사람들은 다 죽어있는 것이다. 그런데 조하르, 이걸 비추면 그게 아들로 잉태가 되어서, 생명으로 태어난다. 그래서 제자를 삼아라, 제자를 만들어라. 아들, 딸을 만들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들, 제 눈에서 빛이 비춰지는 것을 모르는가? 딱 비추면 화들짝 놀라서 어떻게 아셨어요? 한다. 육체라고 하는 것은 그냥 두면 죽는다. 씨앗과도 같아서 그냥 두면 죽는다. 그런데 생명이 감춰져있는 죽음이기 때문에, 빛만 비추면 거기서 생명이 나온다. Second life를 산다는 것이다. 주님은 너무 간절히 그 영생을 나오게하고 싶은 것이다. 영생을 그 안에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족속에게 가서 내가 빛이니까, 나를 비추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해야한다. 끊임없이 가르친다는 것은 그분을 비추는 것이다. 우리는 내 지식을 가지고 가르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잘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계속 주님을 비추는 것이다. 주님을 못 만난 사람은 주님을 비출 수가 없다. 정말 아버지를 만난 사람은 계속 아버지 이야기를 한다. 그게 진짜 참된 지식이다. 그게 야다이다. 아버지와 관계한 사람은 계속 아버지 이야기를 한다. 사실 주님을 가르쳐서 지키게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쉬운 일이다. 진짜 주님을 만난 자는 주님 이야기를 계속 하는 것이다. 그것이 비추는 것이다. 자나깨나 주님 이이기를 한다.
고세중 목사 / 이바울 목사
작성자 Daniel 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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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랑하는 행복한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헵시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