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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정토 구품의 세계관을 상징하는 3천여평의 연지 뒤에 우뚝 서 있는 구화루의 풍광이 빼어나다. 특히 ‘구품연지’는 발굴 조사결과를 토대로 그대로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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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해상왕 장보고 전설 깃든 고찰 폐사 후 1990년대 들어 본격 복원 시작 고증거친 3천여평 구품연지와 구화루 장관
제주 중문 앞바다는 서해쪽 해류가 흐르는 지역이다. 이 해류는 제주 남쪽 해협으로 올라와서 중국 요동반도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중국대륙연안을 따라 쿠로시오쪽으로 흐른다. 통일신라때 해상왕 장보고는 이 해류를 따라 해상활동을 하면서 물자공급을 받고 안전한 뱃길을 기원하기 위해 기도처가 필요했을 것이다. 이것이 제주 하원 법화사를 장보고가 창건했을 것이라는데 무게가 쏠리는 이유다. 특히 산둥반도 적산촌 법화원과 청해진 법화사, 그리고 제주의 법화사가 당시에 주존불로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었고 사찰의 지세와 위치, 전경 등도 다른 법화사와 일치하고 있을뿐더러 신라시대 사찰에 보이는 기단석 처럼 이중 턱 구조를 갖는 것도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공통점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법화사는 지난 1992부터 1997년까지 발굴된 명문기와를 바탕으로 고찰해 보면 ‘1269년에 중창을 시작해 1279년에 불사를 마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법화사의 중창불사는 몽골에 의해 이뤄졌으며, 탐라에 온 몽골인이나 제주지역 몽골 혼혈인들의 종교적 안식처이자 세력기반을 쌓기 위한 중추적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에 법화사에는 노비가 280여 명이 있었고, 법화사에 봉안된 아미타삼존상을 명나라가 반환 요구했을 때 이를 전남 해남에 숨기기 위해 만든 감실의 높이와 폭이 각각 7척이었다는 기록으로 봤을 때 당시 법화사의 규모가 도내 최대 규모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법화사는 제주도 최대 사찰의 명맥을 유지했지만 유난히도 부침을 많이 겪은 사찰이기도 했다. 특히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는 본격적으로 쇠락의 길에 접어들었다. 1530년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법화사의 존재가 나타나지만, 이원진이 기록한 <탐라지>(1653년)에는 폐사돼 초가 몇 칸만 남아 있다고 기록돼 있어 아에 사찰의 모습이 자취를 감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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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결과 고려시기 법화사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100여평 규모였다. 사진은 1987년에 새로 불사한 대웅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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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08년 제주불교는 중흥조인 안봉려관 스님에 의해 관음사가 창건 되는 등 자연스럽게 중흥을 맞지만, 제주 근현대사의 최대 비극인 1948년 ‘4·3사건’으로 소실되는 비운을 겪는다. 완연히 폐사된 법화사터가 드러난 것은 4·3항쟁 당시 중산간 일대 마을이 불타버리면서이다. 법화사터는 1970년 지방기념물 제3-13호로 지정됐다가, 1982년부터 발굴되기 시작했다. 현재는 1983년에 발굴된 대웅전터에 1987년에 새로 세운 대웅전이 있다. 제주대 박물관팀의 발굴 결과 고려 시기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100여 평 규모였으며, 건물 앞에 넓게 조성한 월대가 마치 고려 궁전의 만월대와 같다고 한다. 이곳에서 나온 운룡문(雲龍文)이 새겨진 수막새 역시 만월대에서 출토된 것과 같다고 한다.
이렇듯 월대를 갖춘 건물 기단도 드물지만, 절터에서 운룡문의 막새가 발견된 예는 법화사를 제외하고는 유례가 없다. 기단부의 지대석을 2단으로 처리해 면석이 놓이는 자리에 턱이 생기도록 한 것도 독특한 고식이다. 대웅전터에 다시 법당을 지었다. 건물 앞에 넓게 조성된 월대는 고려 궁전의 만월대와 같다고 하는데 이와 같은 형식은 법화사를 제외하고는 없다. 사지로만 존재하던 법화사의 본격적인 복원은 1990년대 들어서면서 시작돼 현재의 가람 모습을 갖추게 됐다.
법화사는 뒤쪽으로 작은 산봉우리를 등지고 동서 방향의 양옆으로 뻗어내린 산줄기로 감싸여 있어, 전체적으로는 산자락이 U자형으로 감아도는 지형에 동서로 길게 들어선 가람 형태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남쪽으로는 서귀포 앞바다를 향하는데, 앞에 구산봉의 능선이 바다를 가리고 있다. 절 뒤에는 맑고 찬 석간수가 적잖이 솟아나서 과거에 하원동 주민들이 식수로 이용할 정도였다고 한다. 법화사에 들어서면 제일먼저 눈에 띄는 것은 경내에 자리한 구품연지다.
이는 본래 불국사 앞마당에 있던 큰 연못의 이름인데, 극락정토 구품의 세계관을 상징하는 연지를 일컫는다. 법화사지의 구품연지는 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그대로 복원한 것이다. 특히 7차례의 사찰 주변 일대를 발굴 조사한 결과 오백나한전 터를 비롯해 여러 동의 건물과 3천 8백여평의 구품연지가 실제 존재했음이 확인됐다. 화산섬인 제주는 점토질 토양이 거의 없어 연꽃을 보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법화사는 연꽃의 청정함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사찰로, 누각 ‘구화루’와 어우러진 구품연지는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복원불사로 옛 명성 되찾겠다” 법화사 주지 진우 스님
“법화사가 제주지역 천년고찰로서 옛 명성을 잇고자 복원불사를 지속적으로 추진해 여법한 도량으로 거듭나게 할 계획입니다.”
조계종 제 23교구 본사 관음사 말사인 법화사는 천년고찰답게 제주서 유일하게 격년제로 연꽃축제를 개최하며 연꽃같은 불연의 향기를 도민과 관광객들에게 전하고 있다.
진우 스님은 “템플스테이·명상·일반법회 등을 활성화해 수행도량으로 가꿔나가며 제주불교 활성화에 한 축이 되겠다”고 포부를 밝힌 후 “청정원만 지혜로써 남을 교화 할 수 있는 사섭법을 통해 법화도량에 소승과 대승이 하나를 이루는 세계가 되도록 힘쓰겠다”고 말했다.
이어 스님은 “교구본사와의 원활한 소통은 물론 지역 사회와의 긴밀한 유대관계를 통해 명실공히 법화사가 주축이 되어 제주불교를 불국토로 만드는데 정진하겠다”고 덧붙였다.
여행수첩
▲무오 법정사지
법화사가 자리한 하원동서 1100도로를 따라 구, 탐라대학을 지나 제주시방향으로 1km를 가다보면 법정사 진입로가 나온다, 진입로를 따라 약 2km를 가면 법정사가 있다.
서기 1918년 10월 5일 법정사 주지 김연일을 중심으로 한 불교도가 일본의 침탈에 항쟁한 3·1운동보다 먼저 일어난 전국 최초의 무장항쟁이다. 이 항쟁은 보천교(普天敎)사건으로 잘못 알려졌다가 이 사건과 관련된 수형인 명부가 발견됨에 따라 75년 만에 불교계가 주도한 진상이 밝혀지게 됐다. 현재 서귀포시서 법정사 성역화 사업이 추진되고 있으며, 나라의 독립과 자주를 위해 일어섰던 숭고한 애국정신을 느낄 수 있는 불자라면 꼭 참배해야 할 성지다.
▲서귀포천문과학문화관〈사진 오른쪽 위〉
“무병장수의 상징, 노인성을 서귀포천문과학문화관에서 만나세요.” 옛 사람들이 부르면서 한 번이라도 보면 무병장수한다는 ‘노인성’ 별을 볼 수 있는 곳이 서귀포천문과학문화관이다. 법화사에서 1100도로를 따라 1km정도 가면 만날 수 있다. 한라산 영실 불래(佛來)오름 기슭에 자리한 존자암에는 국성재단이 있다. 그 재단에서는 ‘노인성’ 별이 가장 빛나는 날 국가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제를 지냈다고 전해진다.
▲먹거리
요즘은 자리돔이 제철이다. 어진이네물회(064-732-7442)는 현지인들도 자리돔 물회를 맛보기 위해 즐겨 찾는 집이다. 서귀포시 벌목동에 있다. 자리물회와 구이가 유명하다. 표선부두 옆 포구식당(064-787-1016)도 자리물회, 고등어 조림 등으로 입소문 난 집이다.
▲법화사 가는길
내비게이션 주소창에 서귀포시 하원동 1071번지를 찍으면 된다. 또는 하원동 시내버스 정류소에서 한라산 방향으로 하원마을 관통길을 따라 가다가 보면 1.5킬로 중산간 도로 교차로 코너에 위치해 있다. (064)738-5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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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법화사와 무오법정사지는 몇 년 전에 다녀와서 사찰순례기에 자세히 소개한 바 있습니다.이 만발할 때 가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_()_
구화루 앞 구품연지에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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