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세계가 휘청거리는가 싶더니 이번엔 하마스의 공격으로 이스라엘이 대량 살륙작전에 돌입했다는 뉴스가 언론매체를 도배하듯 덮는다. 2,000여 년을 떠돌다 꿈에도 그리던 고향이랍시고 이스라엘에 정착한 유대인들에겐 환희였지만, 당초 오랜 세월 거주하면서 평화를 구가해 왔던 팔레스타인인들에겐 청천 하늘에 웬 날벼락이었을까. 해서리 민족간 전쟁과 갈등은 영원히 풀 수 없는 숙제일 수밖에 없으리니...
외국어인 영어회화를 공부할 때면 으레 만나는 말인 "Where are you from?"은 상대의 출신을 묻는 말이자 소속을 규정하려는 말일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씌워진 굴레인 '출신'이란 단어는 그 사람에게 평생을 따라다니며 그의 삶을 규정하는 운명이 되기도 한다.
소설『출신』(사샤 스타니시치, 권상희 역, 은행나무, 2020)은 10여 년에 걸쳐 작가가 겪어온 삶의 여정을 할머니 크리스티나의 삶의 족적을 좇아 그리고 있다. 어느 평자는 이 소설이 중부 유럽의 정치적 변화가 작가 자신과 가족의 삶에 끼친 영향을 자전적 소설의 형식을 다룸으로써, 현대 디아스포라 문학의 정점에 오른 작품이라고 그 가치를 평가하는데...
원래 디아스포라(diaspora)란 팔레스타인 지역을 떠나 다른 지역에 모여 살면서 자신들의 규범과 생활관습을 유지하는 유대인 집단 또는 그들이 사는 지역을 의미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 소설이 상징하는 현대적 의미에서의 디아스포라란 자신들의 의지에 관계 없이 전쟁의 참화를 피해 다른 나라로 이주하여 살아가는 사람들 또는 그들의 삶의 모습을 일컬음이리라.
해서리 이 소설을 읽기 전에 작가가 떠날 수밖에 없었던 나라의 사정을 이해하는 게 필요할 것이라 보여지는데...러시아의 속국에서 벗어난 유고슬라비아를 구성하는 여러 민족들(또는 문화, 종교, 언어가 서로 다른 이질적인 집단들)이 1991년부터 내전을 치르면서 각각의 국가로 분리되게 된다(현재까지 분리된 국가의 수는 7개국에 이르는 모양인 듯). 이 과정에서 많은 가족들이 죽고 피난을 가면서 해체의 길을 걷게 되고, 외국으로 도피한 가족들은 '출신'이란 굴레에 갖혀 자신의 의도와 능력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소설은 작가이자 화자인 사샤 스타니시치가 고국을 떠나 독일 국적을 얻기 위해 이력서를 쓰는 데서 시작하여, 전쟁으로 고국에 남겨진 할머니 크리스티나가 치매에 걸려 고생하다 세상을 하직하는 때까지의 10년 간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작가는 이력서를 쓰면서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가를 끊임없이 자문하면서 자연스레 대가족이 함께 부대끼며 살아왔던 지난 세월을 소환한다.
작가는 이전 가족의 성원이었다 세상을 떠난 이들- 그 중에는 친가쪽의 일족들뿐만 아니라 외가 쪽의 어른들을 포함한다-을 망각에서 끌어내면서, '출신'이란 과거로부터 하나의 선으로 이어진 과정이 아니라 수많은 길과 곁가지들로 구성되었다고 본다. 결국은 디아스포라(diaspora)의 본래적 의미인 가족 또는 민족의 정체성(identity)을 고집한다기보다는, 각자의 혈통, 문화, 종교, 언어 등으로 경계지을 게 아니라 현실에 적응하는 과정 또는 의식을 현대적 의미의 디아스포라라고 정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소설의 마지막 장 '용의 보물'에서 'if then'의 어법을 써서 다기다양한 가능성에 따른 독자들의 생각과 행동을 선택하도록 한 게 그러한 모습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