쳇gpt가 출현하여 온 세계가 떠들썩합니다.
제일 큰 타격은 남을 가르치는 선생들이 될 겁니다.
전 세계의 정보가 총집합이 되어 학술지 논문정도는 척척 작성하고 있습니다.
아마 어떤 철학이나 물리학이나 문학이론도 AI를 이길 수가 없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다보니 일부 사람들은 설교도 쳇gpt가 대신 할 수 있으리라 말하기도 합니다.
과연 그렇까요? 그러나 성경에 관한 내용은 정확하게 대답하겠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역사로 일어나는 주관적인 체험에 대해서는 흉내도 내지 못할 겁니다.
다만 어떻게 하니 어떻게 되더라는 사람들의 경험들을 모아 말해 줄 수는 있겠지요.
그리스도를 알기 전의 아볼로처럼 성경을 가르치려는 사람들은 긴장해야 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약3:1)
선생이 되는 것이 사역의 목표가 되면 안 됩니다.
그러다간 진짜 쳇gpt에게 혼쭐이 나는 목사가 됩니다.
목사 노릇이나 선지자 노릇하는 것이 바로 선생이 되려고 하는 일입니다.
우리 중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가
자신을 가르치고 다른 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야죠.
야고보서가 지금 사람의 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즘 같으면 컴퓨터의 자판도 혀와 같은 동급입니다.
비록 손끝이지만 마음에서 나오는 글이기 때문이죠.
어느 시대든지 수사학 곧 혓바닥만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혀를 잘 못 사용하면 자기 구원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잘 못되게 할 수 있으므로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라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몸도 굴레 씌우리라”(약3:2)
아나운서도 말실수를 하는데 그런 실수정도라면 사람이 로봇에게 항상 지겠지요.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말의 실수는 왔다 갔다 하는 것,
곧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은혜로 말했다가 다시 율법으로... 이와 같이 일관성이 없는 말입니다.
뱀의 혀는 갈라져 있어 두 말을 하는 사단의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
만일 사람의 말이 진리 안에 정착이 되어 오락가락하지 않으면 이것으로
온전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합니다. 쳇gpt도 내가졌다 하고 나오겠지요.
그리고 그 사람은 진리의 말씀으로 자신의
온 몸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몸을 제어하는 것이라”(약3:3)
‘보라’하고 강하게 나옵니다.
사람들이 말들을 다스리려고 그 입에 재갈을 물립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이 그 말을 마음대로 끌고 다닙니다.
쳇gpt가 척척 박사처럼 대답하는 것도 그 안에 가득한 데이터로 인함입니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때는 양쪽이 다 말싸움인데 우리의 혀가 매우 중요합니다.
지금 그 안에 내장이 된 데이터에 의해서 혀로 뱉는 말들을 자세히 들어보세요.
그 말들을 주워 모아다가 쳇gpt에게 성경을 바로 설명하느냐고 물어보세요.
아니 자신의 설교를 매주 점검을 한 번 받아 보세요. 재미있을 겁니다.
제가 쳇gpt의 대답을 살펴보니 그리스도를 어떻게 믿느냐 하는 문제를
제대로 설명하고 있지만 영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서는
물리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체임을 부정하고 있는 걸 봅니다.
다만 믿음에 의해 나타나는 심리적인 결과는 잘 설명하더군요.
따라서 선생노릇하려는 사람들은 앞으로 땀깨나 흘려야 할 겁니다.
그러나 바울같이 아비가 되는 사람은 쳇gpt가 감히 넘볼 수 없는 영역이겠지요.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약3:4)
또 ‘보라’입니다. 큰 배가 가만히 두면 광풍에 밀려 떠밀려갑니다.
그러나 지극히 작은 키에 의해서 조종하는 자의 뜻대로 움직입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혀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을까요?
그러므로 잘 못된 혀는 믿지 말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약3:5)
지금 정치인들의 혀들을 한 번 보세요. 아니 종교인들의 혀들을 보세요.
오래 전부터 세상에는 혀를 개발하는 산업이 발달되었습니다.
대화법, 웅변기술이 다 그 부류입니다.
립스비스를 통해 각 분야에서 성공하는 방법이 동원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교회 안에서도 혀로 속이는 자도 있고
그 혀에 속는 자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쳇gpt가 기독교의 개관을 제대로 정립해 주므로
대 놓고 혀를 함부로 놀리는 사람을 솎아내는 일은 하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비록 혀는 작은 지체로되 사람을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는 면에서 큰 것을 자랑합니다(메가라케이)
사람들이 아주 중대하고 큰일을 혀로 끝을 내려고 합니다.
지금은 대단한 일을 혀로 다 해치우고 마는 세상입니다.
옛날 한명회 같은 분은 세치 혀로 나라의 모든 정사를 주물렀습니다.
그래서 또 보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작은 불이 큰 숲을 태우듯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의 혀의 영향력과 그 파괴력이 얼마나 대단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약3:6)
사람의 혀는 곧 불에 태우는 심판이 됩니다(요15:6)
아니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께 붙은 가지가 아니면 버려져 불에 던져져 태워집니다.
온갖 거짓 혀의 말에 중독이 된 신앙에 찬양도 트롯을 부르듯 즐기는 습관에
젖어 몸에는 온갖 질병을 달고 다니면서도 주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지 않습니다.
지금 지옥불과 같은 혀의 말에 의해 자신이
불 태워지고 있음을 알지 못하면 어찌 영원한 불 못을 면할수 있을까요?
다만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오래 참아 주시는 자비를 우리는 알뿐입니다.
아주 무서운 세상이며 한 발 제대로 뗄 수 없는 똥구덩이 같은 현실입니다.
도무지 귀를 둘 데가 없을 지경입니다.
성경에서 ‘보라’(이두)는 말이 나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는 말을 아름답게 하려는 테크닉을
키울 일이 아니라 진리의 성령에 의해 영 안에서 울려나오는
말을 입으로 시인(호모로게오)하는 경건의 연습을 해야 할 땝니다.
배는 나의 구원의 방주와 같고 바다는 현실입니다. 그리고 광풍이 붑니다.
그렇지만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에 따라 배는 이끌려갑니다.
조종하는 자가 원하는 대로 움직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영과 혼과 육이
하나가 되어 혀까지 일체가 되는 레에마의 말을 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배의 키가 큰 배를 마음껏 조종을 하듯 우리의 혀도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면으로 볼 때에 작은 불이 많은 나무를 태웁니다.
숲이란 바로 나무들의 집단입니다. 나무들의 집단이 뭔지 생각해 보세요.
지금 사람들의 작은 혀로 인해 그 숲이 불태워지고 있습니다.
불의의 세계란 우리들 안에 그 혀가 온 몸을 더럽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의 바퀴는 일생입니다. 거짓 혀가 나도 불사르고 남도 불사릅니다.
작은 키와 같은 혀, 작은 불과 같은 혀가 이토록 무서운 일을 하는 겁니다.
지금 성령이 여러분 안에 말씀으로 역사하시고 계십니까?
이는 정상적인 괘도에 오른 구원의 사람입니다.
아직 성령이 불로 역사하시는가요?
이제 불 가운데서 건짐 받고 있는 구원입니다.
성령이 불과 같이 역사하심은 내게 태워버릴 잘 못 된 공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불의의 혀는 일생을 태워 버릴 위력이 있습니다.
그 불은 지옥 불에 의해 태워지는 것과 같은데 비로소 거기서 건짐 받은 겁니다.
진리에 붙잡힌 혀는 이롭기가 한이 없는 반면에
거짓 말 곧 사람의 말이 탑재된 사람의 혀는 정말 무섭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챗gpt가 이렇게 말을 해 줫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은 지금 성경과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혀는 참 부드럽지만 독사의 독이 묻어 있어 사람들을 지옥불로 태우고 있습니다
성경을 머리로 공부하지 마시고 무릎을 꿇고 상한 심령으로 간절히 사모하면서
겸손하게 엎드려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세요’ 하고 말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아마 능히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해 봅니다.
챗gpt가 불의의 혀들에게 그렇게라도 말해 준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첫댓글 아멘! 나의생은 몇년 안남았지만 앞으로의 세상은 어떻게 변 할까요
우주적인 종말이 그리 멀지 않은 듯합니다.
남은 육체의 때를 위해 할 수 있는대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허무한데
굴복하며 신음하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의 자유를 보이다가 주께 가십시다.
저도 제 개안의 종말을 늘 생각하고 하루 하루를 살고 있는 중입니다.
좋은 신앙 글 감사합니다.
이시간 기도실에 나와 한규진 형제님과 김요한 선교사를 위해 중보기도 했습니다.
마지막 순간에도 우리가 집중해서 마음의 눈으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수 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