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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에는 내가 자손과 조상에 대한 교육을 부탁 받았다. 해서 거두절미하고 나의 뿌리인 조상과 자손에 대한 윤리관을 교육시켜 줄 테니 잘 들어봐라.
그저 쉽게 얘기하면 부모는 자손의 하늘이자 땅이다. 또 나에게 있어 생명의 뿌리다.
내가 그 전에 교육시킬 때면 항상 대우주 천체권내에서 나에게 가장 지존한 분은 바로 내 조상이다 하는 얘기를 했다.
왜 그러냐?
내가 있음으로써 부모, 형제, 처자도 있고, 국가, 민족 무엇도 다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있은 연후에 만유가 있지, 내가 없으면 아무 것도 있을 수 없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 아닌가. 그러니 나라는 존재가 이 우주공간에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이다.
허면 나를 있게 해준 사람이 누구인가?
나를 낳아준 사람은 내 부모다. 부모가 나를 낳아주지 않았으면 나라는 존재가 있을 수 없다. 그러니 내게 있어서 제일로 지존지대至尊至大한 분이 내 부모다. 다시 얘기해서 부모는 내 뿌리요, 아주 바탕이고 밑자리다.
<윤리는 자연한 이치>
유가儒家에서 가르치는 오륜삼강五倫三綱이 있다. 오륜五倫이라 하면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 다섯 가지 윤리요, 삼강三綱이란 부위자강父爲子綱하고 군위신강君爲臣綱하고 부위부강夫爲婦綱하는 인간의 도리를 말한다. 그러니 다만 윤리도덕을 ‘오륜삼강’이라 해서 문자화시켜 놓았을 뿐이지, 그게 공자의 전유물이 아닌 것이다.
윤리라 하는 것은 사람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자연한 이치로 꼭 그럴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어질 수밖에 없는 법도다.
하나 예를 들면, 저 까그매(까마귀)라는 놈은 늙어서 사냥을 할 수 없게 되면 높은 나무에 올라앉아 “까옥까옥” 하고 운다. 그러면 그 새끼들이 먹을 걸 물어다 준다. 그래 “오작烏鵲이 반포反哺라”는 말이 생겼다. 돌이킬 반反 자하고, 입 구口 옆에 겨우 보甫 하면 찍어 먹인다는 포哺 자다. 새끼 까마귀가 자기를 먹여 길러준 어미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다.
그런 미물도 저의 조상에게 참 효성이랄까, 그렇게 충성을 다 바친다.
<효는 백행지본>
윤리라 하는 것은 이렇게 자연한 법칙이거니와 그 중에서도 효孝는 백행지본百行之本이다. 효도라 하는 것은 일백 행실의 근원, 근본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가효국충家孝國忠한다고 한다. 집에서 효도하고 국가에 충성한다는 것이다.
헌데 제 어머니 아버지, 제 가정에 불효하는 자는 국가에도 충성을 못하게 돼 있다. 한마디로 불의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래 바탕이 불의한 자가 어떻게 위국지충爲國之忠, 나라를 위해서 충성을 바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예로부터 효도를 일백 행실의 근본이라고 한 것이다.
가르칠 교敎 자를 봐라. 유교다 불교다, 무슨 기독교다 등등 여러 가지 종교, 교화시키는 것을 교라고 하는데 그 교 자가 효도 효孝 옆에 글월 문 을 한 게다. 다시 얘기해서, 가르칠 교 자는 ‘효도하는 글’이란 말이다.
정치라 할 때의 정사 정政 자도 마찬가지다. 『논어』에서 말하기를 “정자政者는 정야正也라”고 했다. 정치라 하는 것은 바른 것이라는 말이다.
정사 정政 자는 바를 정正 옆에 글월 문文 을 한 자다. 그 문 자를 둥글월 문이라고도 하는데, 정치라 하는 것은 ‘바른 글’이다.
그걸 다시 얘기하면 정치란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바르게 정사해야 옳은 정치가 되는 게지, 어떤 특정인을 위한 정치가 될 것 같으면 악정밖에 안 된다는 말이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사람이 많이 있지 않은가. 장관시켜 놓고 조직 짜라고 하면 으레 제 동창을 데려다 놓는다. 그렇게 해서 나라 경제 다 떨어먹고, IMF 시대나 만들어 놓고 말이다. 헌데 나라는 망했는데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정치라 하는 것은 국가와 민족, 대중을 위해 바른 글, 정사를 펴는 것이다.
<윤리는 효도에서 비롯한다>
윤리는 효도에서 비롯한다. 가정에서 효도를 못 하는 자는 절대로 친구끼리 붕우유신도 할 수 없고, 부부유별도 할 수 없고, 장유유서도 있을 수 없다. 아니, 집에서 제 에미 애비에게 잘못하는 사람이 사회 속에서 어른들에게는 잘할 수 있겠는가? 모든 윤리라 하는 것은 효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래서 윤리를 가르치고 사람되는 것을 가르치고, 여러 가지 인사문제를 가르친다는 교 자는 효도 효 옆에 글월 문을 했다. 효도하는 글이란 말이다. 아예 회의會意문자로 그렇게 만들어 버렸다.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효도한다는 것은 극히 자연한 이치다. 가르쳐 주지 않아도 본래 이치가 자식으로서는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수밖에 없고, 그걸 거부하는 자는 불의한 사람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아니, 똥 오줌도 수만 번 치워주고, 갖은 어려운 일 다 해가며 전부를 바쳐서 저를 키워줬는데, 사람이라면 ‘아 참, 우리 어머니가 좋다, 우리 아버지가 좋다!’ 그래야 도리 아닌가.
<어머니에 대한 추억>
나는 어머니에 대해 이런 기억 하나를 갖고 있다. 내가 대여섯 살쯤 먹었을 때 일이다. 내가 참 고집이 셌다. 안가安哥 고집이라는 것 제군들도 잘 알지 않는가. 우리나라 성씨 중에 고집 하면 으레 안安·강姜·최崔를 꼽는다. 안가가 그중 고집쟁이고, 그 다음에는 강가, 그 다음은 최가다. 최가만 해도 산 김가 다섯이 죽은 최가 하나를 못 당한다고 한다. 그러니 얼마나 지독한가? 허면 강가는 어떻겠나? 또 안가는 얼마나 독한 고집쟁이이고?
안가가 얼마나 고집쟁이냐 하면, 내가 안가 핏줄이니까 그걸 대략 아는데, 예를 들어 방에다 벼룩을 하나 갖다놓고 잡아라 할 때, 안가는 그놈을 기어이 잡아 송곳으로 찔러야 성이 풀린다는 것이다. 하하. 벼룩은 팔짝팔짝 뛰어 다니는 놈 아닌가. 그걸 열흘이고 스무날이고 한 달이고, 벼룩과 일대 격전을 벌여서라도 꼭 잡아야지 못 잡으면 그건 안 된다. 안가 고집이 그런 고집이다.
내가 그런 고집의 소유자다. 나는 하고 싶은 건 반드시 관철해야 되는 사람인데 우리 아버지가 그걸 허용을 안 했다.
한번은 내가 말을 안 듣고 고집을 피우니까, 우리 아버지가 ‘요 어린놈의 자식이 말도 안 듣고 꼭 제 고집대로만 한다’고 옷을 홀딱 벗겨서 나를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한참 추운 때인데, 양말 하나도 안 신기고. 그때는 왜 그런지 요새보다 몇 배는 더 추웠다. 영하 30도 이상 오르내리는 혹독한 추위 속에다 아주 홀딱 벗겨서 내쫓아 버린 것이다.
그러니 어떡하나. 어린 나이에도 왜 그렇게 부끄러운지, 두 손으로 자지를 잔뜩 붙잡고서 사람 안 보이는 데로 냅다 뛰어 도망가는데, 갈 데가 뒷동산밖에 없다. 그래 산으로 도망가서는 우선 바람이라도 피한다고 깊은 골탱이로 들어가니 조금 훈훈한 데가 있다. 거기서 잔뜩 쪼그리고 앉아 있는데, 몇 분 지나면 꽁꽁 얼어서 죽게 생겼다.
그때 저 멀리서 “아무개야, 아무개야!” 하는 우리 어머니 목소리가 들린다. 어머니가 나를 찾아 나오신 것이다. 어머니가 쪼그리고 앉아 있는 나를 보시고 가져온 바지저고리를 입혀서 잔등이에 업고 산을 내려오는데, 그때 어머니 잔등이 참 얼마나 훈훈하고 좋은지, 야 참 세상에서 우리 어머니가 가장 좋다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의 사랑>
사람이라면 누구도 다 그렇게 컸다. 그래서 어머니를 사랑 자慈자를 써서, 자당慈堂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것은 뭘 바라고 주는 사랑이 아니다. 그건 일방적으로, 조건 없이 주는 사랑이다. 그저 오줌 똥 싸면 치워주고, 젖은 자리는 어머니가 눕고 마른자리에는 새끼 눕히고 말이다.
하나 예를 들어 얘기하자면, 서울 지하철이 건설되기 전에는 종로 4가에서 남쪽으로 가면 한남대교로 가는 길이고, 저 북쪽으로 올라가면 지금 숭인동 서울대학 올라가는 길이고, 동쪽으로 가면 동대문, 서쪽으로 가면 종로통인 사거리가 있었다. 그 횡단보도를 어떤 애기엄마가 애기를 안고 건너는데, 아니 눈 먼 버스 한 대가 막 달려들어 온다.
그 애기엄마가 가만히 보니 애기를 안고 차를 피하다가는 애기하고 어머니 둘 다 죽게 생겼다. 그래 애기나 살리고 나는 희생하는 수밖에 없다 해서 애기를 냅다 집어던지고 자기는 그 차에 치어 죽었다.
세상의 어머니는 천 년 전 어머니나 천 년 후 지금의 어머니나, 또 앞으로 천 년 후의 어머니나 다 똑같다. 이 세상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서는 생명까지도 바친다. 사랑 자 자가 그런 데에 해당된다. 자식을 위해서 일방적으로, 대가없는 희생을 하는 그런 사랑이다. 참으로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것은 생명과 바꾸는 사랑이다.
그런 걸 받고 컸기 때문에 사람은 인간인지라 부모에게 효도를 해야 하는 게다.
<조상은 하나님>
또 하나 역사적인 예로, 제군들 문왕文王을 잘 알 것이다. 요순우탕문무주공堯舜禹湯文武周公할 때 문왕이다. 문왕의 아버지가 왕계王季라는 사람이다. 벼 화禾 밑에 아들 자子 하면 말제末弟 계 자다. 예를 들어 삼형제가 있다면 맨 끝을 말제라고 한다.
문왕이 천제를 지내는데 자기 아버지 왕계를 상제와 짝을 해서 위패를 모셨다. 자기 아버지를 상제와 대등한 위치에 두고 제사를 모신 것이다. 제군들도 알다시피, 중국 같은 데는 천자天子문화다. 허면 그 동안 여러 천 년이 내려왔는데, 만일 그게 잘못 한 일이라면, 그 수많은 왕조의 역대 제왕들이 문왕을 그냥 뒀겠는가?
허나 저 백정, 무당 같은 사람들, 옛날 제도로 볼 때 그 천한 사람들이 저희 부모를 절대자 상제님하고 동등한 위치로 짝 해서 천제를 올린다고 해도, 그건 잘못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게는 제 부모 이상 더 지극히 높은 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더 하나 예를 들면, 증산도에는 상제님께 올리는 배례법인 반천무지攀天撫地 사배四拜가 있다. 반천무지, 하늘을 받들고 땅을 어루만지는 절인데 반천무지 사배라 하는 것은 오직 상제님에게만 바치는 배례다.
그건 아무에게나 바칠 수도 없고 또 아무나 받을 수도 없는 절이다. 자기가 상제님, 절대자가 아닌 이상 어떻게 감히 반천무지 큰절을 받을 수 있나. 또 그런 절을 올릴 데도 없다.
하지만 제 조상에게는 반천무지 사배를 올릴 수 있다. 제군들이 집에서 기제사를 모실 때도 반천무지를 할 수 있다는 얘기다. 딴 사람은 관계없지만 내게 대해서는 내 조상이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조상을 잘 받들고 위해야>
또 신명과 사람문제를 따져볼 때, 사람도 누가 받들어 주지 않으면 저 혼자 출세를 못 하듯이 신명 역시 사람이 천거를 해줘야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자손들이 떠받들어 주어야 그 조상들도 잘 된다는 말이다.
하니까 생전에는 어떤 천한 경지에서 생활했든지 간에, 내가 좋은 위치에서 내 조상을 좋게 받들어 줘야 한다.
한 예로, 태조 이성계가 이씨조선을 창업하고 자기 조상 5대인가 6대를 다 임금으로 추대했다. 자손이 한 나라 임금이니 임금의 직권으로써 조상에게 대왕의 작호를 붙여준 것이다. 5대면 1대에 30년씩 잡아서 150년이다. 150년 전 5대조 할아버지까지를 임금으로 추존追尊해 줬다. 쫓을 추 자 높일 존 자, 죽은 다음에 그 후손이 떠받들어서 관직 주는 것을 추존이라고 한다.
알아듣기 쉽게 하려고, 내가 자꾸 이런 예를 드는 것이다.
하니까 내가 상제님 도문에 들어와 상제님을 지극정성으로 신앙하면서 내 조상 천도薦道도 해 드리고 잘 받들어주면 그 조상이 해원도 하고 잘 될 수가 있다.
하나 더 실감나는 예를 들어주겠다.
저 부산에 어떤 신도가 있었다. 내가 이름은 밝히지 않겠는데 성은 박가다. 두 남매가 다 신앙을 했는데 걔들이 무슨 얘기를 하느냐 하면, 저희 아버지가 총각시절에 어떤 아가씨를 사귀었단다. 사귀다보니 정도 들고 같이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 아닌가.
헌데 함께 살려면 부모 허가를 받아야 한다. 그 아버지는 없고 외짝 어머니인데, 한 날은 어머니에게 그 아가씨를 더불고 가서 “어머니, 내가 이 아가씨를 좋아하니 장가들여 주십시오.” 했다. 헌데 그 어머니는 잔뜩 틀어져서 꿍하고 앉았다. 뭔가 안 맞는다는 소리다. 아들이 아무리 얘기해도 안 듣는다. 어머니는 싫다고 하고, 아들은 살아야겠다고 하고.
그러니 어떻게 하나.
그러더니 그 어머니가 어떤 아가씨 하나를 급히 구해서 반강제로 아들을 결혼시켜버렸다.
그래 그 사귀던 여자가 그만 충격을 받고 자살해 버렸다. 아, 어떻게 하다가 신랑을 뺏기고, 참 산 목숨이니 살기는 살아야겠지만, 어디다 호소할 데도 없다. 그래 그냥 죽음으로써 보답해 버린 것이다.
헌데 그 뒤로부터 그 집에 생각지도 않은 분란이 한 달이 멀다하고 일어난다. 예를 들어, 결혼한 두 남녀가 자려고 하면, 그 자살한 아가씨가 “너희들만 재미를 보느냐? 나도 같이 살자.”고 하면서 가운데를 파고든단다. 가족들이 꿈을 꾸면 그게 보인다는 것이다.
그 신도들이 커서 스물 댓 살, 근 30이 되도록 그렇게 가정에 풍파가 일어났다고 한다. 그 신도들은 새로 장가든 데서 태어난 애들이다. 그러니 걔들이 그 여자를 큰엄마라고 해야 하나, 뭐라고 해야 하나?
그런 얘기를 하길래 내가 천도식薦道式을 해주라고 했다. 해서 천도식을 지극정성으로 올렸더니 그 후에는 꿈에도 안 뵈고 풍파도 없어졌다고 한다.
헌데 그 후 한 2년 되니까 또 꿈에 나타난다고 한다. 그래 천도식을 한 두어 번 더 해준 줄로 알고 있다.
허나 점점 단체도 커지고, 내가 그걸 일일이 다 간섭할 수가 있나? 그러다 결국 걔들이 이유없이 떨어져나가 버렸다. 공연스레 증산도가 싫다고 나가 버린 것이다.
<천도식의 중요성, 불가분리한 인간과 신명관계>
수많은 신도들을 관리하다 보니 참 별의별 건이 다 있다.
하나 또 얘기를 해주겠다.
6·25동란 이전 얘기다. 내가 8·15 을유乙酉 해방과 더불어 상제님 사업의 포문을 열었는데, 그 당시 저 아산, 구 온양읍에 박모라는 신도가 있었다. 본래 강원도 사람인데 삼팔선 넘어 양양 근처로 월남해서, 배방면이라고 지금 모산이라는 곳에 와 살고 있었다. 그때 내가 온양읍에서 신도들 수련을 시키는데 그가 수련생의 한 사람으로 끼어 있었다.
그때는 일주일을 한도로 수련을 시키는데, 한 사흘 나흘 닷새면 전부 다 개안이 됐다. 일주일까지 가는 사람이 없다.
그 참에 그 신도도 개안이 됐는데, 갑자기 소리지르고 뒤로 나자빠지고 난리가 났다.
그래 주변사람이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무슨 소리를 하느냐?
시간이 없으니 그저 묶어서 얘기한다.
그에게 작은아버지가 있었다. 강원도에 살았는데, 우리나라 시골환경이 다 그랬지만, 거기는 무슨 가시나무 같은 걸 갖다가 울타리를 친다. 그리고 삽짝문이라는 게 있어서 나무때기로 기둥을 세우고 문을 걸어 놓는데, 문짝도 가시나무로 엮어놓은 문이다. 그러고서 한쪽 기둥에다 새끼로 아래위를 잡아매 놓고, 대놨다가 열어 제쳤다가 하는데 그게 문 열고 닫는 것이다. 사실 그런 산촌에는 도둑도 없다. 도둑이 들어도 뭐 가져갈 거나 있나? 곡식이나 퍼 가면 그만이지. 농촌이 다 그랬다.
그러다 하루는 그가 볼일을 보러 어디를 가는데, 한 사흘 걸리는 일정이었다. 그래 그가 볼일을 보러 길을 나섰는데, 도중에 친구들과 만나 딴 일을 보다가 가지를 못했다. 그러고는 한밤중이 잔뜩 돼 가지고 한 잔 얼큰히 걸치고서 삽짝문을 들어서는데, 그런 조그만 오두막집에 뜨락이라고 해야 몇 평이나 되나?
아니, 들어서면서 보니까 알 만한 신발이 자기 집 토방에 자기 마누라 신발하고 나란히 놓여져 있단 말이다. 동네 사람 신발 한 켤레, 자기 마누라 신발 한 켤레. 그걸 보고는 그렇지 않아도 뭔가 수상하다고 느끼고 있던 터에 “옳거니, 그랬구나!” 하는 생각에 피가 머리끝까지 솟구쳐 올랐다.
아, 헌데 도끼는 어디 있고 낫, 괭이는 어디 있고, 제 집 살림이니 오죽 환한가. 그래 등걸 뽀개는, 싹 갈아놓은 도끼를 들고 방문을 열면서 냅다 달려드는데, 여자는 눈치가 빨라 뒷문 차고 도망가 버리고, 간통할 간姦 자 지아비 부夫 자, 간부는 그냥 한 도끼에 죽어 버렸다.
이유야 어쨌든 사람을 죽였으니 그것만은 대가를 받아야 될 것 아닌가.
헌데 과거에 조상이나 누가 저질렀던 그런 게, 큰일을 하려고 하면 틀림없이 마魔가 되어 찾아온다. 그 작은아버지한테 도끼 맞아 죽은 신명이 조카인 그에게 도끼를 들고 달려들더란 말이다. 그래 그만 악 하고 넘어가 버린 것이다. 그게 그렇게 된 얘기다.
그건 자기 조상의 자작지얼自作之孼인데 그걸 우리가 어떻게 해 줄 방법이 있나?
아, 도대체 그 작은아버지하고 조카하고 하등 무슨 관계가 있나? 다만 혈통으로서 숙질간일 뿐이지.
허나 신명과 인간세상의 혈통이라는 것은 그렇게 불가분리한 연관관계를 맺고 있다. 아주 복잡하게 얽혀 있다. 제군들은 그걸 좀 알고 넘어가야 되기 때문에 내가 참고로 얘기해 주는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관계들을 좋게 끄르고, 신명을 해원시키기 위해 천도식이 필요한 것이다.
<폐백옷을 바치면 입고 좋아하신다>
내가 참고로 하나 더 얘기하고 싶은 게 있다.
제군들 근자에 와서 상제님 태모님을 비롯한 선천 성도들, 김형렬 성도, 차경석, 박공우 선생 등등을 위시한 많은 성도들에게 치성 때 폐백 바치는 것을 봤을 것이다. 처음에는 종정과 내가 어렵게 자금을 마련해서 폐백을 바쳤다. 상제님 같은 그런 절대자라 하더라도 폐백을 바쳐야만 한다. 그렇다고 해서 벗고 계신 건 아니지만 바쳐야 좋은 옷을 입으신다.
또 하나 예를 들면, 『도전』에 나오는 김호연 성도 있잖은가. 내가 김호연 성도에게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천으로 옷을 몇 벌 해드렸다. 폐백을 바치면 소의燒衣를 하는데 옷 태우는 것을 불태울 소 자 옷 의 자, 소의라고 한다 그때마다 그 집 혈족인 딸들을 더불고 갔다. 헌데 그 딸들이 볼 때, 저희로서는 저희 어머니인데도 그런 좋은 옷 한 번 못 해드렸는데, 우리 하는 걸 보니 과연 진심이더란 말이다. 그러니 사람이라면 누구도 감동할 것 아닌가.
그러고 나면 자기 어머니가 꿈에 와서 “야, 참 좋기도 하다. 나를 이 좋은 옷으로 좀 갈아 입혀다오.” 하고, 팬티부터 싹 입혀주면 “참 얼마나 좋으냐?” 하며 좋아한단다. 옷을 해주면 꼭 그런 것이 뵈어진다.
내가 참고로 해주는 얘기다.
신명들도 폐백을 바치면 과연 좋은 옷을 입고, 그렇게 좋아라한다. 헌데 그런 것을 신도들이 잘못 이해하면 근래 무당 점쟁이들 하는 식 있잖은가.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곡해를 할까봐 쉬쉬해가며 하다가 지금은 하도 폐백 바칠 분도 많고, 그 돈을 다 댈 수도 없고 해서 공개적으로 폐백성금을 받고 있다.
결론적으로 제군들은 신계와 인간계의 문제도 알아야 한다. 그래 이런 얘기를 하면서 조금씩 힌트를 주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인간계와 신계의 불가분리한 관계 등 여러 가지를 알 수 있다. 우리 신앙인으로서는 교리의 한 부문이기도 하고 말이다.
<이배기근以培其根이면 이달기지以達其枝라>
부모와 자식은 그런 관계가 있다.
옛날 고고학을 보면 “이배기근以培其根이면 이달기지以達其枝라”는 말이 있다. 이배기근이면 이달기지라, 써 이 자, 북돋을 배 자 - 북돋을 배 자는 흙 토土 옆에 설 립立 하고 그 밑에 입 구口 한 자다. 무슨 감자라든지 고구마 그런 걸 심으면 흙으로 모아 북돋아 주잖는가 -, 그 기 자, 뿌리 근 자, 즉 그 뿌리를 북돋아주면, 이달기지라, 써 이 자, 통달 달 자, 그 기 자, 가지 지 자, 그 가지가 발달된다는 말이다.
뿌리를 북돋아주면 가지는 자연 따라서 번영 발달한다.
그런 연유에서 옛날 지리학에서도 좋은 땅에 조상 백골을 묻으면 자손이 잘 되고, 잘못 들어가면 그 자손에게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했다. 지리에는 그런 절대적인 이치가 함축되어 있건만, 지금은 지리 주장하는 나라가 우리나라밖에 없다.
그런 건 접어두고라도, 진리 차원에서 신명과 인간의 관계가 어떻다 하는 것은 똑바로 알아야 한다.
그러니 좋은 진리권 안에서 상제님을 신앙하는 우리 신도들로서는 우리 능력의 한계 내에서 내 조상을 잘 받들어 드려야 한다. 조상을 받드는 문제는 신앙하는 데에도 깊은 관계가 있다.
<척을 잘 이겨내야>
조상에서 지은 척隻이라는 게 어떠냐?
여기도 그 조상대에서 악척을 많이 지은 신도가 있다. 그건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그래 내가 그 신도를 보고 “네가 신앙을 잘 하면 그걸 극복해서 상제님 진리로 도성 덕립될 때까지 잘 신앙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중간에 떨어지고 만다. 매듭을 못 지을 게다.” 하는 얘기를 한 사실이 있다. 그래 그 장본인은 미리 각오를 하고 신앙을 했다.
그 신도는 조상이 지은 척 때문에, 앉아서 떡 하니 주문을 읽으려면 뭔가가 뒤에서 주먹으로 뒤통수를 냅다 후려갈긴다. 그러니 얻어터지고 저만큼 나자빠지는 수밖에.
헌데 신명이 그렇게 했는데도 목적달성을 못하니까, 이젠 모래알 같은 걸 갖다가 눈에다 냅다 비벼 넣는다. 그러니 아파서 죽지. 거 기막힐 일 아닌가.
내가 한참 전에 그런 얘기를 들었다. 그게 벌써 한 10여 년 전 얘기다.
한마디로 그 신명이 척신이다. 그 사람 조상이 지은 죄 때문에 달려붙는 척신이란 말이다.
헌데 신명들도 하다하다 안 되면 도망가 버린다. 그것을 극복하고 신앙을 잘 하면, 신명도 그냥 단념하고 마는 것이다.
그 척신들도 아마 지금쯤은 단념했을 것이다. “야, 이건 안 되는 게다. 우리가 나가떨어지는 수밖에 없다.” 하고서 말이다. 또 세월도 한참 지나지 않았는가.
그 신도는 지금까지 신앙을 잘 하고 있다. 아주 일급으로 잘 한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좋은 일에는 마가 많이 끼는 것과 같이,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조상에서 뭘 잘못했으면 그런 박해도 받는다.
<증산도는 새 문화를 개창하는 일>
내가 그저 조상과 자손에 대해 한 귀퉁이만 허물어서 대강 얘기했는데, 신앙이라 하는 것은 일관된 신앙이라야 한다. 몸도 바치고 마음도 바치고 전부를 다 바치는 신앙 말이다.
아까 제군들이 구호 외친 대로 ‘상제님의 혼이 되자, 증산도의 수호신이 되자’, 그게 한마디로 다 한 소리다.
우리 증산도의 사명이라는 것은 문화혁명이다. 우리 일은 새 세상, 새 문화를 개창하는 일이다.
지금 새 세상 문화라는 게 우리 『도전道典』밖에 없다. 오직 『도전』을 통해서만 그 문화를 접할 수 있다.
그 문화를 세상 사람들에게 쉽게 알리기 위해서는 이렇게도 얘기하고 저렇게도 얘기하고, 다양한 각도에서 글을 많이 써내야 한다.
또 제1외국어가 영어이기 때문에, 영어로 먼저 『도전』을 번역하고, 그러고 영어권을 바탕으로 해서 독일어, 불란서어, 서반아어, 중국어, 러시아어로도 모두 번역하고, 각색 외국어판 『도전』을 내어 전세계에 널리 퍼뜨려야 한다.
그러려면 세계 각국에 나가서 공부하고 들어온 각색 박사들이 필요하다. 그래 이번에 증산도사상연구소를 만들어 1차로 연구원 30여 명을 영입했는데, 양력으로 1월 초닷샛날 입소식을 한다.
지금 그 사람들은 취직해서 오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 우선은 취직하기 위해서 왔는데, 그 사람들 일이라는 게 상제님 글을 쓰는 일이다. 직업이 그런 직업이다.
상제님 글을 쓰려 할 것 같으면, 상제님의 혼이 돼서 써야 한다. 제군들과 똑같이 증산도의 수호신이 돼야 한다. 그럴 것 아닌가?
상제님 진리는 누가 만든 진리가 아니다. 자연섭리, 우주원리다. 자연섭리, 우주원리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는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그건 누가 거역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거역할 수도 없다. 이치라 하는 것은 하늘땅이 생길 때부터 본래 그렇게 정해져 있는, 틀림없이 그렇게만 되는 게다.
<나날이의 교육>
얼마 전 동지가 지났다.
이제 날마다 해가 조금씩 길어진다. 동지 지나면 해가 노루꼬리만큼씩 길어진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하루에 조금씩 길어져서 한 달 지나면 한 30분 길어지고, 두 달 지나면 또 한 30분 길어지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날씨도 훈훈해지고 봄이 오면 냉이서부터 나물도 나오고 꽃망울도 터지고, 여름 되면 꽃도 피고, 모두 그렇게 되잖는가? 그게 바로 역천불변易天不變하는 원리다. 하늘이 변한다 해도 다시 고칠 수 없는 절대적인 원리, 상제님 진리가 그런 진리다.
헌데 그 사람들이 말로만 박사지 증산도가 뭔지도 모르고, 그 귀퉁이도 못 허문 사람들이다. 상제님 진리를 알고 보면 “야, 세상에 참 이런 진리도 있었구나!” 하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지. 헌데 아직은 제군들이 가르쳐도 몇 달은 가르쳐야 될 사람들이다. 아무 것도 모르니까. 그들은 아직 상제님 진리권에서 보면 탯덩이다.
그 박사들을 나날이가 청부靑?라는 버러지 물어다 놓고 만날 “날 닮아라, 날 닮아라” 하듯이 그렇게 교육을 시켜야 한다. 실제로 일주일을 그렇게 하면 그놈이 나날이가 돼서 나온다. 내가 어려서 그걸 지켜봤다.
우리집 사랑방 위에 나날이 집이 지어져 있었는데, 그 나날이가 빨간 흙을 부지런히 물어다 지은 집이다. 나날이가 간신히 들어갈 만하게 구멍을 뚫어놓았는데, 언젠가 보니까 새파란 버러지, 그걸 학술용어로 푸를 청靑 자 버러지 부 ? 자, 청부라고 하는데 그 청부라는 버러지 하나를 떡 물고 들어왔다.
나날이는 나를 모를 테지만 나는 그걸 열심히 지켜보았다. 가만히 보니까, 그 안에 그 버러지를 갖다놓고 일주일 동안을 ‘날날날날날날’ 한다. 그게 그저 쉽게 얘기하면 ‘날 닮아라, 날 닮아라’ 하는 소리다. 그렇게 저를 닮으라고 ‘날 닮아라, 날 닮아라’, 한 일주일 하니까 쬐그만 새끼 하나를 쳤는데, 아니, 그 청부라는 버러지가 나날이가 돼 버렸다. 그래 그 놈을 더불고서 떡 날아가더란 말이다.
<지구상의 모두가 상제님 신도가 돼야>
내가 그 사람들을 볼 때 언제 키워서 일을 시키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저희들 교육시킬 사람 아닌가.
상제님 진리에 적응하는 사람은 진리를 알면 당장 입도한다. 그럴 것 아닌가? 제군들하고 똑같지. 나 같은 사람도 평생을 다 바쳤는데. 그들도 결과적으로는 신도가 돼서 죽자사자 상제님 사업에 봉사해야 한다.
그러고 신도가 안 되는 사람, 신도가 안 될 사람, 그런 사람은 글을 못 쓴다. 상제님 글을 쓰려면 상제님이 돼야 한다. 상제님의 혼, 증산도 수호신이 돼야 상제님 글을 쓰지 그렇지 않고 무슨 수가 있나?
지금은 객원으로 들어왔지만, 상제님 진리를 알고 나면 주체자가 되어 상제님의 글을 쓸 것이다.
이 지구상에서 생존하는 모든 사람은 다 상제님 신도가 돼야 한다. 상제님 신도로서 다같이 한 덩이가 돼서 일심으로 뭉쳐, 상제님 사업에 전부를 다 바쳐야 한다.
<상제님 공사대로 통일기운이 무르익고 있다.
제군들도 잘 알다시피 어제부터 저 유럽 연안 11개국에서 유로(EURO)체제가 출범했다. 유로화라는 화폐화된 특정한 인쇄물을 만들어서 11개국에서 공통으로 통용되도록 한 것이다. 그걸 역사적인 의미에서 볼 때는 ‘아, 거기는 편의를 위해서 그렇게 하는가보다.’ 생각할 수 있다.
허나 증산도 신도 위치에서 보는 관점은 다르다.
머지 않아 상제님 진리가 도성 덕립됨과 동시에 세계 통일국가가 형성된다. 그러면 지역도 하나로 통일되고, 화폐도 통일되고,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합될 게다. 그런 통일 기운이 조성되기 위해서 현실에서도 하나로 뭉쳐지는 것이다. 지금 우루과이라운드니 그린라운드니 하는 체제도 전부 세계가 하나로 통일되려는 기운에 의해 등장하는 것이다.
지금은 지구상에서 비자 갖고 출입하는 나라가 몇 군데 없다. 유럽 같은 데, 영국도 그렇다.
머지않아 우리가 저 태전역에 가서 표 한 장 사면 아무 데나 갈 수 있듯이, 공항에 가서 영국 런던이든 불란서 파리든 마음대로 표를 사서 갈 수가 있다.
통일 기운이 무르익고 있다. 그게 바로 상제님 진리에 의해 오는 것이다. 자연섭리인 상제님 진리가 그렇기 때문에 세상도 그렇게 되는 수밖에 없다.
상제님 천지공사라는 진리차원에서 보면, 벌써 100년 전에 ‘세상은 요렇게만 되라’ 하고 공사로써 프로그램이 다 짜여져 있단 말이다.
<포교 경험을 쌓으라>
8.15 후에 처음 상제님 사업을 시작할 때는, 내가 하는 소리를 개도 안 믿었다. 강증산 이름을 아는 사람도 없고, 들어본 사람도 없다.
제군들 나이가 아마 스물네 살은 다 넘었을 텐데, 그때 내 나이가 스물네 살이다. 스물네 살 먹은 사람이 지구촌에 세계가족을 건설한다고 외치고 다녔다. 그러니 다들 미쳤다고 하지. “도대체 저 사람 미쳤는가봐. 저 사람 부잣집 아들이라 밥도 안 굶었을 텐데 저런 헛소리를 하고 다닌다. 저 사람 뭐 잘못 됐다.” 하고. 그때는 8.15 해방 직후가 돼서 청량리 정신병원도 없을 때다. 그래 어떻게 시렁시렁 하니 저 사람 미쳤나봐 하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그렇게 여러 달을 하다 보면 나중에는 내 말을 알아듣는다. 내가 성한 사람 아닌가. 기가 막히게 세상사에 밝기도 하고, 미친 사람도 아니고 말이다.
그러니 포교하기가 얼마나 힘이 들었겠나?
그 기운으로 지금까지 밀고 내려왔다. 그렇게 해서 겨우 제군들 씨앗을 뿌려놓은 것이다.
지금쯤은 제군들도 『도전』 보고 교육도 받고 해서 이제 새벽종 날 때만큼은 머리가 열렸다.
정신 바짝 차려라. 오늘이 벌써 1999년의 이틀째다. 이제 새해가 들어섰고 시간이 없다.
1999년이라는 게 의미심장한 해다. 하니까 제군들이 알아서 육임六任도 짜라.
이 새해부터는 가능한 한 간부진도 육임 짠 사람으로 교체하려고 한다. 육임을 안 짜 본 사람은 제대로 된 교육을 못시킨다. 포교를 안 해 봤기 때문에 지방실정을 모른다. 사회인과 더불어 의사 교환도 해 보고, 상제님 진리를 주입시키려고 하거니 안 받아들이거니 하는 과정, 거기에서 여러 가지 적지 않은 충격파가 오고 간다. 제군들은 그걸 해봐야 한다, 그걸.
그렇게 해서 다만 얼마 안 되는 숫자라도 포교를 해봐야 한다. 육임 짠다는 것, 난 코웃음 쳐버리고 만다. 내가 지나온 역경을 생각해봐라. 열, 스물 포교하는 것은 장난이다. 그걸 무슨 일이라고 할 수 있나? 그 정도는 심심풀이다. 담배 한 대 피는 것하고 같다.
다만 그런 일이라도 이 조직 속에서 해봐야 세상도 알고, 사람 다루는 것도 알고, 세상 인심도 안다. 그렇지 않고 그런 경험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교육을 시키나, 뭘 가지고?
하니까 실제 세상과 더불어 같이 얼굴 맞대고 앉아 의사도 토론하면서 포교를 해라.
<포교를 해야 성장한다>
포교를 해야 단체도 성장한다. 우리 신도로서는 포교가 제1의 사명이다. 그 이상 더 큰 사명이 없다.
오죽하면 상제님께서도 공은 포교공덕이 가장 크다는 말씀을 하셨겠는가. 공덕 중에는 포덕布德이 가장 크다.
우리 신도 천 명이 하나씩만 포교해도 신도가 천 명이 는다. 천 명이 다섯씩만 해봐라. 그 수가 5천이다. 그러면 교세가 얼마나 비대해지고 얼마나 빠르게 성장하겠나.
그리고 포교를 하면 반드시 조직적으로 신앙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입도와 동시에 교육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래서 나보다 진리를 더 많이 알고, 나보다 신앙도 더 잘 하는 신도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 입도시키고 그냥 내던져 두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건 신앙하지 말라는 것하고 똑같다. 그 사람이 잘 믿고 싶어도 뭘 알아야 믿을 것 아닌가, 알아야. 길을 안 열어주니 모른단 말이다.
그러니 지방에서 일을 잘 하려면, 도장마다 어느 정도 진리를 아는 신도로서 교육위원을 두고, 포교하면 동시에 교육을 시켜라. 교육을 자꾸 시켜버릇하면 구술도 늘고 구변도 는다. 또 얘기하면서 내가 깨달아지는 게 많다.
그렇게 해서 자꾸 교육시키고, 포교하면서 미친놈 소리를 자꾸 들어야 한다.
내가 자주 만나는 사람한테 들은 소리다. 나를 만나면 강증산이 연상된단다. “아이쿠, 저 강증산.” 사실 나는 누구를 만나도 언필칭 강증산 얘기를 했다, 상제님 얘기를. 그래 아예 이 이마에 강증산을 써 붙였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를 만나면 “아이쿠, 저 강증산.”이라고 한다.
아니, 내가 강증산을 업고 한평생 소리지르고 다니는 사람이니 어차피 강증산의 혼 아닌가? 세상 사람들이 나를 보고 강증산을 연상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렇게 선전이 많이 돼야 한다. 그런 소리 듣는 걸 부끄럽게 생각하면 그 사람은 절대로 성공 못 한다. 그런 소리는 가능하면 많이 들어야 한다.
<모범이 되어 생활하라>
요要는 모든 가지의 수많은 교육을 통해서 포교를 하자는 것이다. 제군들, 진리를 알고 포교 안 하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렇다고 해서 내가 신도들을 잘못 신앙하도록 삐꾸럭 길로 인도하는 사람은 아니잖은가. 제군들은 잘 알고도 남을 게다.
학생들은 공부를 잘 해라. 학생들에게 학점 잘 맞으라고 했으니 그 이상 없잖은가? 죽자사자 공부를 해라. 해서 B학점 맞던 사람은 A학점 맞고, C학점 맞던 사람은 B학점을 맞아라. 그렇게 공부를 잘 하란 말이다. 그러면서도 얼마든지 일급신앙을 할 수 있다.
또 직업은 신성한 게다.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은 모범사원이 돼라. 공무원들도 모범 공무원이 되고. 일등 공무원 일등 사원, 사회 속에서 모범이라는 게 얼마나 좋은가.
그렇게 해서 값진 월급 받고, 그 돈을 가정에다 떡 갖다줄 것 같으면 그것 가지고 자녀 교육비도 하고, 여러 가지 세금도 내고, 쓰고 싶은 데 쓰고, 성금도 내고 활동비도 하고, 여러 가지 그렇게 멋지게 잘 쓸 거란 말이다.
<스스로 신바람을 내서 일하라>
금년이 벌써 1999년이다. 몇 달 지나면 2000년이다.
여기 증산도는 보법步法이 다르다. 머지 않아 증산도 문화가 전세계적으로 크게 굽이칠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려고 한다. 틀림없는 사실이다.
내가 비록 늙었어도 내 눈을 봐라. 내 눈은 태양과 같은 눈이다. 아주 반질반질하다. 하니까 나하고 약속을 하자.
나는 죽지도 않는다. 제군들 생각할 때, ‘아이구, 저 늙은이 쪼그라져서 곧 죽지 않을까?’ 하겠지만 천만에, 안 죽는다. 담배도 끊었다. 이제 몇 달 지나면 그 전 목소리가 도로 나온다. 내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아는가.
어려운 점이 있으면 내가 다 풀어주겠다. 하니까 한 번 멋지게 일을 해봐라.
내가 마지막으로 하나 매듭짓고 싶은 게 있다. 사람은 하라고 해서 하는 것과 자기가 자발적으로 하는 것은 다르다.
제군들은 스스로가 상제님 진리를 알아서, 신바람을 내서 일해라.
신바람을 내서 하면 아무리 활동을 해도 어려운 줄을 모른다. A도 만나고 B도 만나고 C도 만나고, 그렇게 한참 돌아다니다 저녁 때가 됐는데, 이상하게 뱃심이 없다. 그래 가만히 생각해보면 점심을 안 먹었다.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다닌 것이다.
일은 그렇게 스스로 재미를 붙여서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상제님 사업은 그런 일이다. 무슨 때 되기만 기다릴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알겠는가?
“예!”
됐다.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