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도 단군으로 썰푼 역사 아닌 허구를 80년대초 접했을 때는 그 환희와 감격을 무어라 말할 수 없게 되어 누군가가 단군신화란 대해 말을 할 때 단군은 신화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역사라고 항변하기도 했지만 그 당시에 쏟아져 나오는 단군에 관한 책을 읽을면 읽을수록 연결도 되지 않는 단군역사에 의문점을 가지고 고문서를 이리 저리 헤집고 다니다가 88년도에 서량지가 쓴 中國史前史話(중국사전사화)란 중국책에 대한 말을 듣고 그 책을 구하기 위해 명동에 있는 중국서점에 가서 그 책을 주문했지만 국내에 아직 없는 책이라 주문을 하고 1주일지나서 그 책을 수중에 넣게 되었다. 그 책 中國史前史話 (중국사전사화) 을 기다리면서 중국이전의 역사를 쓴 책이라면 단군에 관한 사실에 입각해 쓰여진 역사적 이야기가 중국 학자의 글에서 단군을 확인할 수 있겠지 하는 기대 흥분 뭐 이런 것들로 나를 감쌌던 그 당시의 기쁨으로 가득찼던 순간들이 기억난다. 그러니 그 책을 접하고 앞.뒤로 다 흞어보았지만 단군이란 단자는 한 글자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 그때부터 단군에 관한 썰 자체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거 같다. 그렇게 始原(시원)의 역사에 대한 眞僞(진위)도 파악하지 못한 채 결국에는 그냥 우리민족은 그런 역사를 가지고 있어라고 하는 체념아닌 체념으로 지내는 동안에 소남자선생님을 만나고 그 분이 반만년준자를 풀어 역사를 서술하는 것을 들으면서 바로 이것이다 느끼면서도 또 한 번의 오류를 범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신중하게 다가가게 되었다.
그런데 4500년전의 글자를 해독하시면서 문자의 근원을 찿아나가시는데 한 편으로 놀라면서도 아 바로 그거구나하고 인식을 하고 자신도 그런 연구를 하고픈 바램이 생기었지만 소남자선생님 공부하시는 방에 있는 그 엄청난 古書에 주눅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맨처음부터 금문신고의 인물집(요,순,우임금,단주 역사의 문자발달사)을 번역하라는 숙제를 한 1년동안 몰두하는 과정에서 어느정도의 구름은 걷혀지고 역사를 다시보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으며, 다시 한 번 우리민족이 동양 아니 세계역사문화를 포태한 민족이었다는 사실들이 신화가 아닌 현실로서 다가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고문자학에 공부에 몰두하신 이유는 소남자 선생님 자신이 울산 김씨이고, 그것도 대종손인데, 자신이 어디서 부터 시작되었을까 하는 생각에 문무대왕비문을 찾게 되셨고, 그 비문에 나오는 인물들이 언제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기 위해서 여러 고문서를 탐구하셨지만 찾지 못해 우연히 서울 인사동에서 금문신고를 접하게 되고, 그 때부터 우리 시원의 역사가 표면적으로 들어나게 된 것이었다.
한국인의 잃어버린 고대사에 대한 인식을 다시 일으켜세우는데 결정적인 단서(key-point)를 해주고 있는 문무왕비문에 대한 말을 할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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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비문에 대해 말하기전에 종래의 역사인식체계를 한 번 더 생각해봐야 하며,지금 할려고 있는 말들은 이전의 학자들이 전혀 하지 못했던 사실들을 문자학의 객관적인 발전체계에 따라 역사를 재해석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러한 전제를 충분히 인식하기 위해서는 '조선인은 중국인이 아니다. 혹은 '중국인은 조선인이 아니다.'라는 漢人(한인)이후의 儒家史觀(유가사관)에 의해 형성된 夷.夏(이.하) 二分法(이분법) -즉 한국인과 중국인을 따로 분리하여 생각 하는 것- 을 전제로 하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러한 전제자체는, 춘추말기 周(주)를 역사의 宗(뿌리)으로 생각한 魯(노)나라 사람 공중니(공자)의 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로부터 수천년전의 역사사실과는 아무관계가 없다.
공자의 宗周主義(종주주의)의 산물인 詩(시),書(서), 春秋(춘추)등(공자는 이를 述而不作(술이부작)이라 하였는데, 이는 들은 것을 기록했을 뿐 자기가 직접 기술하지 않았다는 말이다)의 고고유물들에 새겨져 있는 五帝 당시의 기록들에 의해 재비판할 수 있는데도 아무도 그 작업을 하지 못했는데, 락빈기선생의 <금문신고>는 그 작업을 해낸 동양학의 기념비적인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
신라 제30대 왕인 '문무대왕비문'도 락빈기선생의 <금문신고>를 원용해야지만 그 해석이 비로서 가능하게 돤다.
특히 이 비의 주인공인 문무대왕의 자기선조에 대한 기록은, 현재 한국인의 모든 姓氏 즉 민족 기원을 밝히는데 값진기록이 된다.. 곧
1. 화관지후(火官之后)
2. 진백(秦伯)
3. 파(派) 경진씨(鯨津氏)
4. 투후(투侯)
5. 가(駕) 주몽(朱蒙)
6. 성한왕(星漢王)
7. 문무왕(文武王)
의 일곱단계는 한국인이 잃어버린 고대사에 대한 인식체계를 다시 찿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
소남자선생님이 先秦史가 한.중 공동사라고 말한 이유도 실은 문무대왕 先系의 근거를 밝히는 과정에서 중국인이 곧 조선인이라고 말한 것도 이 비문을 근거로 말씀하신 것이다.
현재 한국민족 구성원의 4분의1을 차지하고 있는 김씨의 역사는 곧 한국인 역사를 설명하는데 절대적인 근거가 되기 때문에 어느 기록보다 신빙성이 있으며, 물론 동양사뿐만아니라 세계 모든 민족사가 인간의 성씨로부터 시작되고 있으며, 그 성씨의 뿌리를 찿아올라가면 역사의 시원을 밝히는데 훨씬 더 객관성이 부여될 것이다.
1의 '화관지후'는 현재의 판본학 상식으로는 상당히 어려운 문제이며, 특히 그 화관지후라는 말은 통칭 중국이라고 해석하는 夏王祖 성립이전의 문제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고고학 특히 고고문자학의 연구없이는 불가능한 것이 당연할 것이다.
문무대왕능비문을 고찰하는데 앞서, 능비문이 우리 민족의 來源을 알기 위해서 아주 귀중한 단서가 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고려조에 두 김씨가 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기술된 역사기록의 眞僞(참과 거짓)를 가려낼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특히 우리가 가장 궁금해하는 古韓이나 古朝鮮을 중요한 인물이 문무대왕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BC2300년대에 까지 서술되어 있어서 한. 중 고대사는 물론, 일본사의 '天孫降臨'의 실상도 밝혀낼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소남자선생께서 동양고대사의 새로운 권위로 역사 개벽기를 밝혀내신 락빈기선생과 <<금문신고>>를 읽고 '고조선'을 말씀하시게 된 것도 이 문무대왕비문의 인물서술이 전해왔기 때문에 가능하셨다고 술회하셨다.
먼저 문무왕비문을 직접 보시고 그 원문을 그대로 자필로 써서 (베끼시고) 그 원본을 가지고 직접 강의를 해주셨던 소남자선생님의 노고에 감사드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