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부 국권회복과 근대적 시형의 모색
스물셋 청년의 거침없는 자기 고백
자화상
서정주 |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기퍼도 오지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할머니와 대추꽃이 한주 서 있을뿐이었다.
어매는 달을두고 풋살구가 꼭하나만 먹고 싶다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밑에
손톱이 깜한 에미의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도라오지 않는다하는 외外할아버지의 숯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눈이 나는 닮었다한다.
스믈세햇동안 나를 키운건 팔할 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하드라
어떤이는 내입에서 죄인罪人을 읽고가고
어떤이는 내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찰란히 티워오는 어느아침에도
이마우에 언친 시詩의 이슬에는
멫방울의 피가 언제나 서꺼있어
볓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느러트린
병든 숫개만양 헐덕어리며 나는 왔다.
출처 《 미당 서정주 시전집 1 》(1983) 첫 발표 《 시건설 》 (193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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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주 徐廷柱 (1915~2000)
전라북도 고창 출생. 스물한 살인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같은 해 오장환, 함형수 등과 함께 《시인부락》(1936)을 발간하였고, 1941년 첫 시집 《화사집》(1941)을 출간한 이후, 작고할 때까지 <귀촉도>(1948), 《신라초》(1961), 《질마재 신화》(1975) 등 총 열다섯권의 시집과 천여 편의 시를 발표하였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친일행적이라는 오욕을 남긴 바 있으나, 60년이 넘는 오랜 시작 기간 동안 끊임없는 시적 갱신과 문학적 열정을 보여 줌으로써 한국 현대문학사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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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우리나라에서 1990년대를 대표하는 소설의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문장의 출처는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비극 <리어왕(King Lear)》이다. 이 문장은 딸들의 감언이설에 속아 권력을 물려준 후 처절하게 배신을 당하고 폭풍우 속으로 쫓겨나서야 자신의 과오를 깨닫게 된 늙은 왕의 자책과 회한이 절절하게 담겨 있는 독백이다. 인생의 말년에 이르러, 그것도 절대적으로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고 납득 불가능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었다는 것은 한 인간에게 있어 크나큰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우리 시사(詩史)에는 스물세 살의 어린 나이에 이미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치열하게 질문하고, 자신이 그 질문에 스스로 답할 수 있는 자임을 당차게. 표방하며 세상에 나온 젊은 시인이 있다. 스물셋의 젊은 시인 서정주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애비는 종이었다."라는 도발적인 문장으로 그 대답을 시작한다. 서정주의 시 <자화상>은 스스로를 납득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인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 궁금한 점이 생긴다. 서정주에게는 왜 자신에 대한 납득이 필요했는지, 그리고 그 납득의 과정과 결과로 내가 누구인지 말하고자 할 때 그 말이 왜 시여야 했는지 하는 점이다. 전 생애에 걸쳐 한 번도 내가 누구인지 질문해 보지 않았던 리어왕의 비극은, 어떻게 보면 그가 평생 그 질문이 필요하지 않은 안온한 삶을 누려온 데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물셋의 서정주에게는 그 질문이 절실했다. 그는 이미 비극적 운명을, 비극적 삶을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의 삶에 대해 납득이 필요했다. 왜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는지, 왜 자신의 삶은 '죄인'과 '천치'의 그것이어야 하는지 스스로 질문해야 했고, 스스로 대답해야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대답은 왜 시로 말해져야 했던 것일까. 우선 1인칭 화자의 주관적 내면 고백이라는 장르적 속성으로 인해, 시는 어떤 장르보다도 자전(自傳)의 성격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시와 시인을 동일시하는 오래된 관습을 거부한다 치더라도, 시에는 대개 발화의 주체인 1인칭 화자가 존재하며 그 발화는 적어도 화자 자신의 이야기라는 점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전적 텍스트가 지향하는 바와 관련이 있다. 자서전 연구자인 필립 르죈(Philippe Lejeune)의 설명에 따르면 자기 자신에 관한 이야기의 진정성을 판단할 때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은 정확성과 성실성으로, 정확성이 정보에 관계되는 것이라면 성실성은 의미에 관계되는 것이다(Lejeune, 1975/1998: 55). 이를 참조해 볼 때 산문 형태로 발화된 자기 이야기의 경우에는 정보의 정확성을, 시의 형태로 발화된 자기 이야기의 경우에는 의미의 성실성을 지향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최현식, 2011: 416), 비극적 삶의 국면에서 스스로를 납득하려고 하는 시인 서정주에게 필요한 것은 정보의 정확성이 아닌, 의미의 성실성이었을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납득하기 위해, 아니 결코 납득할 수 없는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획득하기 위해 일찍이 몸부림쳤던 서정주였기에, 그리고 마침내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가 될 수 있었기에 그는 리어왕과 달리 자신의 삶을 비극적 운명으로부터 구제해 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긴 생애를 두고 전개된 그의 시작 과정이 지옥에서 열반으로 이르는 과정이었다고 평한 한 평론가의 통찰은 수사도 과장도 아닌 것이다(천이두, 1994: 46).
| 당당한 자기 고백의 실체
그렇다면 이 시를 통해 말해진 '나'는 누구이며, '나'에 대한 자전적 고백을 통해 획득하게 된 의미는 무엇일까. 텍스트의 제목을 중심으로 그 의미를 꼼꼼히 살펴보기 위해 이 시의 화자 '나'라는 인물에 집중해 보기로 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애비는 종이었다.”라는 발화로 시작된 자기 고백은 도발적이고, 그만큼 충격적이다. 자신의 태생적 불우함을 아무렇지도 않게 툭 발설해 버리는 화자의 이 당당한 어조는 자기 폭로에 가깝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 힘없이 서 있는 대추꽃 한 주의 이미지와 함께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화자의 삶은 기댈 곳 없이 허약하고 위태로울 뿐인데도 그토록 당당할 수 있는 에너지의 원천은 무엇인지, 화자는 어떤 사람인지 몹시 궁금해진다. 이어지는 행에서는 임신 중인 어매가 풋살구 하나 먹을 수 없었던, 흙으로 겨우 바람벽을 세운 거처에서 지내야 했던 극도의 가난이 그려진다. 이렇듯 가난한 형편에서 누구의 돌봄도 받지 못한 채 외로이 버텨 내는 한 소년의 어두운 얼굴을 떠올리게 될 때만 해도 그 궁금증은 풀리지 않는다.
그러나 바다에 나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외할아버지가 등장하면서부터 다시 모종의 거친 기운이 감지된다. 결핍과 빈곤이라는 지상의 한계를 박차고 바다로 떠나는 사내의 강인한 모습이 떠오르고, 그 시점이 갑오년이었음에 생각이 이르면 분노와 혁명의 열기가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이에 더해 결국 돌아오지 못한 사내의 비극적 삶을 상상할 때 우리에게 환기되는 기운은 분명 강하고 거칠다. 그리고 그 기운이 어린 외손자의 숱 많은 머리털, 커다란 눈으로 연결되면서 우리는 화자의 내면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반항과 방랑의 기질을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스물셋의 화자에게서 예의 그 당당한 어조가 다시 등장한다. 자신을 키운 것의 팔 할이 바람이었다는 선언은 반항과 방랑의 기질이야말로 자신이 처한 불우와 빈곤, 비극적 운명을 감당하게 한 힘의 원천이라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이 선언은 다시 1연의 마지막 행에서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겠다는 반항적 에너지의 분출로 이어진다. 세상이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고 자신의 삶에는 비록 죄인과 천치의 낙인이 드리워져 있으나, 그 삶이야말로 자신에게 부여된 고유한 운명임을 납득한 자만이 취할 수 있는 반항과 도발의 자세인 것이다.
이러한 삶의 자세는 화자가 시인됨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지점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아니 어쩌면 시인됨을 받아들임으로써 반항과 도발의 자세가 더욱 선명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화자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저주의 운명을, 오히려 시의 표식을 가지고 있는 시인됨의 운명으로 일거에 전위시키는 바로 그 지점에, 자신이 고유하게 선택된 신성한 존재임을 입증하고자 하는 강한 욕망이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물론 이 존재 증명에 대한 강한 욕망은 자신의 존재 의의를 납득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에서 비롯된 것일 터이다.
자신의 이마 위에 시의 이슬이 얹혀 있기에, 화자에게는 자신의 삶이 볕인지 그늘인지가 중요하지 않다. 그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섞여 있지만 그러한 운명적 한계 또한 그저 시인됨의 운명에 내포된 것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오히려 화자는 그 한계 자체가 자신의 고유한 삶의 동력이자 시의 원천임을 믿는다. 그리하여 스물셋의 화자는 어떤 삶에서든 "혓바닥 느러트린 / 병든 수캐만양 헐덕어리"며 올 수 있었고, 그럴 수 있는 삶이 당당할 따름이다.
| 합리화와 예언의 사이 어디쯤
이제 자신의 비극적 삶을 대하는 화자의 자세를 다시 시인 서정주의 그것으로 치환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시를 통해 말해진 '나'는 자신의 운명적 한계를 당당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치열하게 극복해 가는 존재, 모든 삶의 제약들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저돌적이고 반항적인 존재이다. 그리고 이 '나'는 저주받은 시인으로서의 자신이 오히려 얼마나 고유하면서도 신성한 존재인지 한껏 자각하고 온 세상에 천명하는, 도전적 시인으로서의 '나'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산문투에 가까운 시의 형식을 통해서도 전형적인 시적 언술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특별함이 자신에게 있음을 강하게 역설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토록 치열하고 당찬 자기 고백이 시인 자신에게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일견 그것은 납득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을 기어이 납득하고 그 비극에서 자신을 건져내기 위한 자기 합리화의 산물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도전적 시인으로서의 자신의 행로를 일찌감치 꿰뚫어본, 일종의 통찰력 있는 예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 사이 어디쯤에서 자신이 바라는 자신의 모습을 가장 예술적인 형태로 빚어 가고 있는 의미화 과정 그 자체일 수도 있겠다. | 김남희
참고문헌
서정주(1983), <미당 서정주 시전집 1》, 민음사
천이두(1994), 「지옥과 열반』, 김우창 편, 『미당 연구』, 민음사
최현식(2011), 「시적 자서전과 서정주 시 교육의 문제」, 『국어교육연구』 48, 국어교육학회, 413-442.Lejeune, P. (1998), 「자서전의 규약』, 윤진 역, 문학과지성사(원서출판 1975).
사회평론 교육 총서 19 『문학 교육을 위한 현대시작품론』
2024. 11. 5
맹태영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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