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국정(蘭菊亭)
전북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 황토마을에 있는 일제 강점기 누정.
주변은 산이 둘러싸고 있고 전면에 옥정호가 펼쳐져 있어 경관이 수려하다.
1928년 종성리 황토마을 옥정호 주변에 춘란추국(春蘭秋菊)의 뜻을 기리고자 건립하였다. 1965년 옥정호의 섬진강댐을 막으면서 수위가 상승하여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배기묵, 김일서, 배기정, 서용식, 유정열 등 여러 유지들이 기금을 모아 세웠다고 전한다. 편액은 경신년 계하에 오운 김용준이 썼고, 석운 유춘석이 난국정을 차운한 시판이 있다.
난국정이 있는 장금산 일원은 대장금의 고향으로 알려져있다. 난국정을 포함하여 마을 일대에는 대장금 마실길이 조성되어 있다.
정읍 천곡사지 칠층석탑(보물 제309호, 1963.01.21 지정)
망제동의 서쪽 산기슭에 위치한 탑으로 낮은 단층기단 위에 7층탑신을 올린 방형 평면의 석탑이다.
8매의 석재로 구성된 지대석 위에 1매의 판석형 석재로 조성한 낮은 단층기단을 놓았다. 기단은 거칠게 다듬었으며, 측면에는 아무런 조식도 없다. 측면 상단에는 갑석형의 굽을 돌렸는데, 상면은 약간 경사지게 다듬은 후 중앙에 낮은 받침을 조출해 탑신을 받고 있다.
이와 같은 기단구조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로 운주사석탑군에서 볼 수 있어 고려시대에 시작된 기단의 한 유형임을 알 수 있다.
도계서원
1673년(현종 14)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희맹(李希孟) · 김제민(金齊閔) · 최안(崔安) · 김지수(金地粹)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97년(숙종 23) 김제안(金齊顔)과 1840년(헌종 6) 김흔(金昕)을 추가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으나, 1913년 유허비를 세우고 1962년 유림에 의하여 복원됨과 동시에 김섬(金暹)과 김습(金習)을 추가배향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신문(神門), 3칸의 도계서당(道溪書堂), 3칸의 양사재(養士齋), 4칸의 고사(庫舍), 대문 등이 있다.
도계서당은 강당으로도 사용되어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토론장소로 사용되어왔으며, 양사재는 수학하는 유생이 거처하는 곳이다.
정읍 은선리 삼층석탑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높이 6m. 석탑은 천태산의 서남쪽 기슭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석탑을 건립하였던 절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석탑은 단층 받침돌 위에 3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올린 일반형 석탑인데, 원래의 모습 그대로인 것으로 보인다. 바닥돌은 여러 장의 길고 큰 널돌로 조성하였다. 그 위에는 4장의 널돌로 결구(結構)한 네모난 하대석(下臺石)이 놓였는데, 옆면이나 윗면에는 별다른 조각이 없다. 면석은 네 귀퉁이에 각각 네모난 돌기둥 1개씩을 세우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 1장의 널돌을 끼워 구성하였으며, 역시 아무런 장식이 없다. 덮개돌은 2장의 널돌로 덮었지만, 위아래면은 아무런 시설이 없이 그저 평평할 뿐이다. 이와 같은 모습은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1962년 지정)과 같은 양식이다.
1층 몸돌은 매우 길고 높아서 기형적인 느낌을 준다. 길고 큰 널돌 4장을 세워서 조립하였는데, 각 면에는 좌우에 모서리 기둥이 희미하게 표시되어 있으며, 안에는 자연석이 채워져 있다. 2층 몸돌은 높이가 1층에 비해 1/3 정도로 줄었으며, 그에 따라 너비도 급격히 줄었다. 남쪽면에는 2짝의 문비(門扉)가 달려 있는데, 1면에 2짝의 문을 새긴 것은 희귀한 사례에 속한다. 3층 몸돌 역시 높이와 너비가 더욱 줄었으며 특별한 조각도 없다.
우수한 모습을 갖춘 석탑은 아니지만, 일부분이 특이한 양식으로 구성되어 주목된다. 백제 석탑의 전통이 전승된 과정을 알 수 있는 석탑으로 평가되고 있다.
피향정披香亭(보물 제289호, 1963. 1.21 지정 )
처음 지은 시기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신라시대 고운 최치원 선생이 태산 군수로 재임 중에 처음 건축했다는 전설이 남아 있지만 정확한 기록은 발견할 수 없다.
기록에 따르면 조선 광해군 때 현감 이지굉이 다시 짓고 현종 때 현감 박숭고가 건물을 넓혔으며, 지금 크기로는 1716년(숙종 42) 현감 유근이 개축했다고 전한다. 1882년(고종 19)에 중수했다는 기록이 보이며, 단청은 1974년에 다시 칠한 것이다.
정자 내부는 다시 앞면 3칸, 옆면 2칸으로 구획하여 고주를 세우고 둘레에 세워진 변주와 퇴량을 연결했다. 가구는 7량가로, 퇴보나 대들보 밑에는 초각된 보아지가 있고, 중앙 고주와 대들보 사이에는 아름답게 휘어진 충량이 걸쳐 있다. 천장은 연등천장이지만 양 협칸은 귀틀로 짠 우물천장으로 되어 있다. 정자의 정면 중앙 창방 위에 호남제일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원래 커다란 연못 속에 세워져 있었으나 현재는 연못이 메워져 있어 본래의 정취를 찾아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