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병든 몸을 추스르려고 장전동 금정산자락으로 가서 한동안 살았다. 나는 전입신고에 앞서 교적부터 옮겼다. 바깥세상과 관계를 끊고 꺾인 몸을 바로 일으켜 세워보려고 했다. 그러나 몸속의 병은 말없이 진행되었다. 이곳은 봄이면 겨울의 끄트머리 맛이 남은 들녘에 벚꽃길이 상큼하고 산그림자 길게 드리운 가을의 중심에는 단풍 빛이 눈부신 정겨운 산마을이다. 이른 새벽이면 예불을 알리는 산사의 종소리가 맑은 대기를 타고 전해지는 영혼의 울림이 좋은 곳이다. 옛 소정마을을 지나 오른편으로 식물원과 금정산자락을 끼고 그 아래 온천천과 함께 흐르는 금강로가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다. 이 길은 옛날 전차종점으로부터 학교를 오가던 길이기도 했다. 이젠 학창시절의 옛 추억이 깔린 자갈길은 아스팔트로 바뀌었을뿐 보고 싶은 얼굴들이 스친다.
온천성당을 오가는 길은 오직 자신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길이고, 끝없이 묻고 답하는 내면의 성찰에 이르는 길이다.가을이 든 산마을에도 전어가 제철이다. 이맘 때면 금정산성으로 올라가는 교차로 아래 육일횟집의 전어회 무침이 입안에 침을 고이게 한다. 진해만 수도연안에서 주복어업으로 전어를 잡아 5남매를 기르신 아버님 밑에서 자란 베드로 대자와 마주 앉으면 그 맛이 한결 고소하다. 가을산행 뒤에 꼬리를 문 등산객들이 자리를 잡고 여기저기서 산성막걸리병을 흔들어대면 가을은 황금빛 갑옷을 갈아입은 전어와 함께 취기가 올라 얼굴은 어느새 홍단풍이 든다. 금강로 갓길 따라 담장을 삐집고 나온 한 그루의 대추나무에 대추가 무겁게 달려 탐스럽기 그지없고 다소곳한 삼성(三省)한의원의 맑고 정갈한 유리창은 제 속을 다 들여다보게 한다.
건너편에는 가자미구이가 일품인 장수발 보리통집의 젊은 주모의 바쁜 몸놀림이 건너편까지 어른거린다. 성당 가는 길은 침묵 속에 참회의 기도로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는 길이다. 이렇듯 성당 가는 길은 깊어가는 가을정취 속에 기도와 다짐이 어우러진다. 온천장에 가까워지면 원탕에서 솟구치는 뜨거운 온천수가 사시사철 물안개를 피워 올린다. 건너편에는 일제강점기 때 고관대작과 세상모르는 한량들이 줄을 이었던 요정, 동래별장(東萊別莊)이 대문을 닫은 지 오래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등 굽은 소나무 사이로 산마루를 물끄러미 올려다볼 뿐이다. 온천장 골목 따라 한 집 건너 온천여관에 한 집 건너 술집이 이마를 맞대고 고단한 나그네를 유혹한다. 예부터 현자(賢者)는 “길은 걸어 봐야 알게 되고, 산은 올라 봐야 험한 줄 알게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동래는 5세기경 옛 가야의 동쪽 끄트머리에 자리 잡은 작은 부속국가로 해운대 장산기슭 수영강 하구를 중심으로 송정과 기장일원에 걸쳐 형성된 거칠산국(居漆山國), 또는 장산국(萇山國)이다. 완충지역 수영강을 사이에 두고 신라와 국경을 이룬 마을이다. 동래온천은 원래 ‘학이 머무르며 병든 몸을 치유했다.’는 백로(白鷺)온천으로 불린 유래가 지금으로부터 1,5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첫 역사기록으로는 삼국유사에 “신라 신문왕 3년(685)에 재상 충완공이 옛 장산국 온정에서 목욕을 하고 돌아갔다.”는 기록을 남겼다. 조선 영조 42년(1766)에 세워진 온정개건비(溫井改建碑)는 오늘도 오랜 세월의 풍상에도 말없이 서서 세상을 바라본다.
비문에는 “돌로 된 두 개의 탕이 낡아 동래부사 강필리가 다시 고치고 남탕과 여탕을 구분하여 아홉 칸짜리 건물을 지었는데 그 모습이 상쾌하고 화려하여 마치 꿩이 나는 모습 같았다.“고 전한다. 성당 아래 맞은편에 자리 잡은 음식점 호박소의 한 뼘 남짓한 길섶 꽃밭에는 가을의 전령, 상사화가 붉게 타는 그리움을 머리에 올리고 가을하늘을 올려다본다. 온천성당은 설립 7년만인 1965년, 왜관 성베네딕도 수도회 고(故) 알빈 슈미트(Alwin Schmid, 1904~1978)신부의 설계로 새로운 성전을 마련할 수 있었다. 성전으로 들어가는 입구 회랑 위에는 울지 않는 종탑이 오늘도 홀로 외롭고 벽면에는 작은 아치형 창이 바깥세상과의 소통에 목이 탄다.
성당 앞에서 곧장 금강공원으로 올라가는 일방통행로를 곧게 넓히고 인도를 내는 정비작업이 한창이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 온천장 일대를 정비하면서 엉뚱하게 옮겨다놓은 동래도호부(東萊都護府)의 누각, 망미루(望美樓, 부산유형문화재 제4호)를 최근에야 동래읍성의 동래부 동헌 제자리로 옮겼다. 도로정비가 끝나면 ‘수가 화랑’을 드나드는 길이 한결 반반하겠으나 성당을 드나드는 자동차는 한 방향만을 지켜야 한다. 온천본당 성전 서쪽벽면에는 회갑을 넘긴 복숭아나무 한 그루가 비스듬히 기대서서 탐스런 복숭아를 달고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그 복숭아나무에는 해마다 200여개의 복숭아가 열려 여름 한더위를 지내고 평일미사에 참례한 신자들에게 하늘의 선물로 복숭아를 나눈다. 특히 할머니 신자들은 그날을 기다린다. 나는 미사가 끝나면 그 복숭아나무 그늘아래서 성가대에서 가운을 갈아입고 나오는 아내를 기다린다. 그럴 때면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일제강점기를 아파하며 “아, 너도 먼동이 트기 전으로 수밀도(水蜜桃)의 네 가슴에 이슬이 맺도록 달려오너라.”라고 노래한 이상화 시인의 그 주옥같은 싯귀를 외었다. 오늘 따라 젊은 날의 열정이 드높았던 가을하늘을 향해『가을의 기도』를 읊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