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주이멸(生住異滅)의 생(生)은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주(住)는 갖가지 생각으로 마음이 작용하는 것을 이(異)는 생각이 상황 따라 끊임없이 바뀌는 것을 멸(滅)은 마음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理解) 할 수 있을 것이다.
성주괴공(性住壞空)의 성(成)은 물체의 형성(形成)을 주(住)는 물체가 그 형상의 속성(屬性)을 유지하는 것이며 괴(壞)는 한계에 이르기 전 단계로 서서히 부서져 가는 과정을 공(空)은 형상이 사라지고 흩어 없어져 본래의 지수(地水)화풍(火風)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여 진다.
이것을 생명체(生命體)로 본다면 생(生)노(老)병사(病死)에 해당 할 것이다.
생(生)은 하나의 생명이 탄생(誕生)하고 성장(成長)해 가는 것을, 노(老)는 성장(成長)의 과정이 멈추고 수축(收縮) 되는 것을. 병(病)은 노쇠기(老衰期)에 들어가는 상태를 말하고 사(死)란 생명(生命)활동(活動)이 끝나서 지수(地水)화풍(火風)의 4대(大)로 흩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내 몸과 마음 그리고 대상 세계(世界)인 삼라만상(森羅萬象)과 맞물려 함께 돌아가면서 상호 영향(影響)을 주고받으며 끊임없이 변화(變化)의 과정(過程)에 있는 것이, 연기(緣起)의 핵심(核心) 내용(內容) 중 한 부분이다.
그래서 일체 존재(存在)는 마음의 생(生)주(住)이(異)멸(滅)과 생명체(生命體)의 생(生)노(老)병사(病死) 그리고 물질(物質)의 성(性)주(住)괴(壞)공(空)이 돌아가면서 생성(生成)소멸(消滅)을 거듭하는 것이다.
생주이멸(生住異滅)은 일체(一切) 사물의 생성(生成) 소멸(消滅)에 두루 사용(使用) 할 수 있을 것이다.
닭과 계란(鷄卵)을 사례(事例)로 들어보자. 닭이 원인(原因)이 되어 그 결과(結果)로서 계란(鷄卵)을 낳고 결과(結果)인 계란(鷄卵)이 다시 원인(原因)이 되어 병아리(새끼 닭)가 탄생(誕生)한다.
이것이 계속(繼續) 순환(循環)반복(反復)하는 것이 무상(無常)한 현상계(現象界)이다. 원인(原因)과 결과(結果)의 순환(循環)반복(反復)이다.
다시 얘기하면 계란과 닭은 실체(實體)가 아니라는 것이다. 생활(生活) 편의(便宜)상 사용(使用)하는 개념(槪念)으로 명칭(名稱)에 불과(不過)하다.
닭이 고정불변(固定不變)의 실체(實體)라면 닭에서 계란(鷄卵)을 낳을 수 없을 것이며, 계란(鷄卵) 또한 고정불변(固定不變)의 실체(實體)라면 계란에서 병아리가 태어 날 수 없지 않겠는가?
없는 것을 가지고 그 실체(實體)가 존재(存在)한다는 이분법적(二分法的) 사고(思考)로 “계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하면서 문제(問題)가 되지 않는 문제를 내어 놓고 사람의 정신(精神)을 혼란(混亂)스럽게 미혹(迷惑)하게 만든다.
닭과 계란은 일체(一切) 사물[현상계(現象界)]과의 관계(關係) 속에서 끊임없이 변(變)하고 있으므로, 고정(固定) 된 대상으로 비교(比較)가 불가능(不可能)하다는 것이 연기(緣起)의 이치(理致)이다.
“계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고 하는 것은 모두 연기(緣起)하는 세상(世上)에 대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진리(眞理)인 연기법(緣起法)을 모르기 때문에 나온 무지(無知)와 무식(無識)의 소치(所致)라고 생각한다. |
출처: - 물 에 비 친 영 상 - 원문보기 글쓴이: 인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