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 소리
임금재
솔향기 짙은 이른 봄날 이었다.
짧은 하루해가 까치 소리에 떠밀리어 산마루에 걸터앉아, 잠시 남한산성을 감상하는 저녁 해를 바라보며 수어장대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서문근처에 있는 국청사 앞뜰에서 한 스님이 손바닥에 땅콩 몇 알을 놓고 박새에게 모이를 주는 풍경에 사로잡혀서 내려오던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되었다.
가만히 서서 신기한 듯 지켜보다가 그 스님에게 부탁하여 몇 알의 땅콩을 받아서 스님처럼 손바닥에 서너 알씩 올려놓고, 양팔을 수평으로 들고 박새를 유혹했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박새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높은 소나무 가지에서 눈치만 보고 있을 뿐 가까이 내려올 기미를 보이지 않더니, 마침내 한 마리가 차츰차츰 나무 아래 가지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손바닥의 먹이를 물어 가지 못하고 근처를 맴돌면서 작은 머리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인내심을 가지고 작은 소리로 “내려와서 가져가” 하자 그 중에서도 가장 어리고 야윈 듯한 한 놈이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내 손가락 끝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콕 점을 찍은 듯이 아주 작은 까만 눈으로 내 큰 눈을 곁눈질 해가며 땅콩 한 알을 물고 나무 가지 위로 가볍게 날아갔다.
순간 나는 너무나 감격하여 가슴이 울렁거렸다.
작은 새가 생면부지의 나를 믿고 손바닥에 내려와서 나와 눈을 마주 쳤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어디서 지켜보고 있었는지 잠시 후 또 다른 박새들이 연이어 내려 와서는 맨 처음의 새처럼 같은 행동을 했다.
나는 맨 처음 그새가 유독 몸집이 작고 가벼웠던 것에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하얀 눈으로 뒤덮인 아름다운 남한산성이 등산객들에게는 낭만의 멋진 등산코스였을 테지만 그 작은 박새에겐 얼마나 춥고 배고픈 겨울이었을까.
오죽 배가 고팠으면 고 작은 것이 겁도 없이 내 손바닥까지 내려와 떨리는 가슴으로 땅콩 알을 물어 갔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박새와 아쉬운 작별을 하고 소나무 숲 오솔길을 내려왔다.
갈 잎 소복하게 덮인 숲 속에서 샘물을 찾아내어 마셨을 때와 같은 청량 감 은 내려오는 발걸음을 한층 가볍게 했다.
나는 오년 째 남한산성에서 문화유산 해설 자원봉사 일을 하고 있다.
그 동안 잘 알지 못했던 남한산성의 역사와 자연에 매료되어 차츰 산성을 사랑하게 되었고 또 그 매력에 빠져들게 되는 것은, 아마도 오늘 박새와의 만남 같은 것도 각별한 이유가 될 것이다.
소나무 숲 오솔길을 지나 효자정 앞을 거처 역사관 옆에 있는 지수당 까지 내려왔다.
옛날 남한산성을 지키던 고관대작들이 낚시를 즐겼다는 연못이다.
극한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고 살아왔던 옛 선비들의 정취가 어린 곳이기도 하다.
잠시 연못 근처 단풍 나무그늘에 걸터앉아 아주 오래 전의 일이라 추억의 뒷전에 밀려나 있었던 어릴 적 아름답고도 애절한 기억들을 반추 해본다.
아마도 산 중턱에서 잠시 만나 마주친 박새의 작고 까만 눈동자와, 나무 가지에서 짖어대던 까치가 반세기 넘게 메말랐던 감성의 촉수를 자극했던 모양이다.
소나무 숲 오솔길을 따라 내려오면서 내가 만일 진작에 시인이 되었더라면 이 감격스런 체험을 멋진 시로 표현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동료와 나누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강원도 두메산골 벌말 이라는 곳에서 태어나 김일성 치하에서 양지 인민학교에 다닐 무렵이니까 아마도 8-9세 때의 일인 것 같다.
내 위로 오빠가 있었는데 때까치라는 새 한 마리를 숲에서 얻어다주어 메뚜기나 배추벌레 잠자리 등을 잡아다 먹여서 정성 들여 키우다 보니 깊은 정이 들었다.
콩밭 매러 들로 나가시는 어머니 따라, 때론 새참을 이고 가시는 어머니 뒤에 막걸리 주전자 들고 논둑길을 걸을 때도, 나는 때까치를 어깨에 올려놓고 새소리를 들으며 걸어가는 길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른다.
높은 곳에 있다가도 손가락을 펴면 내려 와 앉고 어떤 때는 내 머리 위에다 똥을 싸기도 했다.
그러다 여름방학이 끝나 학교에 가서도 작은 새 생각으로 선생님 말씀은 허공을 맴돌았고, 수업 시간이 끝나기가 무섭게 십 리 길을 단숨에 달려와 새에게 줄 먹이를 구하려고 들판을 헤맸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새장의 문 은 열려 있, 새의 울음소리는 근처에서 통 들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날개를 파닥이며 내게로 날아들지도 않았다.
몇 날 몇 밤이 지나도 새의 울음소리는 귀에 쟁쟁한데, 아무 곳에서도 다시는 그 작은 새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도, 귀여운 모습을 볼 수도 없었다.
새처럼 여리고 작은 가슴이 텅 빈 듯이 허전해서 툇마루에 혼자 걸터앉아 눈물을 질금거렸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맨 처음 정을 주고 가슴이 아팠던 애처롭고도 아름다웠던 일이다.
그 후 피란 동이로 자라 결혼해서 아이들 낳고 광주 보건소에 다닐 때 일이니 삼십 오륙 년 전 일인 것 같다.
하루는 군청 앞 미루나무 높은 가지 사이에 매달린 까치둥지에 뱀이 침입하여 새끼들을 모두 삼켜 버렸던 것이다.
땅에 떨어지는 바람에 구사일생으로 간신히 살아남은 까치새끼 한 마리가 아들놈에게 구출되어 우리 집에 입양이 되었다.
아들아이는 밖에 나가 놀이에만 팔려서 때가 되어도 먹이를 주지 않자 그 일이 내 몫이 되고 말았다.
근무를 마치고 귀가하자마자 어렸을 적의 경험도 있고 하여, 군청 앞 논으로 달려가서 올챙이와 작은 개구리를 잡아다 어린 까치를 먹여 키웠다.
막내 딸 아이 젖을 먹일 때였으니 나는 어린 까치 딸을 하나 더 키우는 셈이 되었다
어린 까치는 내 딸과 더불어 무럭무럭 자라면서 날개가 돋아나고 주둥이가 어미 까치 모양새로 변해가면서 나를 제 어미로 착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출근 할 때마다 길바닥까지 내려와 깍깍거리며 앞을 가로막고, 퇴근 시간을 어떻게 아는지, 지붕 높은 곳에서 기다리다가 내 모습이 가까워지면, 다 자라서 길어진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들며 반기곤 했다.
빨간 털실로 묵었던 다리의 끈을 잘라 주어도 날아가지 않던 그놈이 언제부터인지 내 앞에서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아마도 몸집이 커지자 내가 근무하는 동안 배가 많이 고파서 먹이를 구하려고 날아 다녔던 모양이다.
어느 날인가 마지막 작별 인사차 들렸었던지, 점심시간에 맞춰 한번 나타난 이후 다시 날아간 뒤론 종무소식이 되고 말았다.
그 이후로 근처에서 까치 소리가 들리면 먹던 밥숟가락을 던져버리고 뛰어나가 보았지만, 빨간 털실이 묶여 있는 그 까치는 아니었다.
곱게 키운 자식들이 하나 둘 제 짝을 찾아 어미 품을 벗어나듯이 그 까치도 어디에선가 좋은 신랑 만나서 나처럼 어미 노릇했으리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따뜻해진다.
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나는 근처에서 까치소리가 들리면 다리에 빨간 털실이 묶여진 까치가 아닐까하고 확인하는 버릇이 있었다.
오늘 나는 작은 박새와의 만남으로 땅콩 몇 알 대신에 신선한 충격과 향기로움으로 가득 채워진 보물 상자를 선물로 받아 들고, 아련한 추억으로의 여행을 만끽할 수 있어서 좋았다.
언제 날아 왔는지 지수당 옆 은행나무 가지에서 까치 두 마리가 깍깍거리며 구애 작전이 한창이다.
봄을 맞아 새 가정을 꾸미려나보다.
경기 광주시 탄벌동 현대아파트 107/ 1203
한국 문협 광주시 지부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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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언제쯤 샘의 글이 올라올지 기다려집니다. 읽노라면 잊고 살았던 기억의 저편의 일들이 어느새 나의 일상에 자리를 잡아 바쁘고 지친 일상에 쉬어 가는 쉼터의 자리가 되어집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샘의 글 잘 읽고 갑니다
새에 대한 정말 특별한 추억이 있으셨군요...빨간 실을 묶은 까치 한마리가 생생하게 다가오네요...새가 마중나올 때 얼마나 기분좋았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