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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7월 1일 / 종교인대화마당 종교인들의 초록 실천은? 박영대(우리신학연구소 소장) 언젠가 한 스님이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박노해의 책 이름 <사람만이 희망이다>에 대해 ‘사람만이 문제’라는 촌평을 했듯이, 환경 문제는 사람의 문제이다. 어느 종교이든 착하게 살라고 가르치고 있으니, 착하게 살면 환경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한 것은 가르치는 사람이나 받아들이는 사람이나 ‘적당히 착함’에서 타협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의 예수는 복음을 선포하면서 ‘때가 다가왔어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라고 했다. 회개와 복음 수용은 선후(先後)의 문제가 아니라 동시적 사건이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복음을 믿을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다. 회개는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다. 180도 바꾸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그리스도인들은 전혀 회개하지 않고도 교회에 다닐 수 있고 전혀 불편함이 없다. 최근 근본주의적 종교심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엄밀히 말하면 이들 근본주의는 사이비 근본주의이다. 창시자의 가르침에 대한 근본주의가 아니라 타 종교와 종파에 대한 공격적인 근본주의이기 때문이다. 과거 독재 정권 시절 종교인들이 민주화를 위해 투신하였는데, 아주 소수였고 제도 종단으로부터는 찬밥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제도 종단은 적당한 선에서 반대도 찬성도 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자기 종단의 좋은 이미지 형성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 도가 지나쳐 제도 종단의 물적 기반을 이루고 있는 층의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수준이 되면 종단 안의 민주화 세력에 대해 제재 등의 적절한 대처를 하곤 했다. 독재 정권이 무너지고 형식적 민주주의가 우리 사회 안에서 진전되면서, 제도 종단은 종교인들의 환경 실천에 대해서도 비슷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종단 내의 환경운동을 적극 지원하거나 그 환경 단체들의 의견을 종단 운영의 기본 정책 방향으로 삼지는 않고, 나름대로 활동 공간을 보장해준다. 그러면서도 자연을 훼손하면서 대형 공사를 추진하는 등의 행위를 서슴지 않는다. 즉 지금까지 종교인들의 초록 실천은 종단 일부에서 이루어지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굳은 땅에 비가 내리는 격으로 좀처럼 종교인들의 환경 운동이 각 제도 종단에 스미지 않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초록 실천에 나선 종교인들의 과제는 어떻게 생태적 관점을 종단의 모든 정책의 기본 바탕으로 삼도록 하느냐의 문제이다.
제도 종단이 자정, 쇄신되지 않는다면 제도 종단이 생태적으로 변화될 수 없다. 그러므로 종교인들의 초록 실천은 제도 종단의 자정과 쇄신 활동과 궤를 함께 해야 한다. 과거 천주교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교회 쇄신과 사회 복음화를 양대 과제로 생각해 왔다. 하지만 하나의 사안에서 이 두 과제를 유기적으로 결합시키지 못하였다. 사회 복음화를 위해 시민사회단체들과 연대하는 데 치중하였고, 그러는 동안 집회 인원 동원 등에 지친 회원들이 떨어져나가 대부분의 단체들이 크게 위축되었다. 종교인들의 초록 실천도 바람직하게 추진되려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과 각 종단을 변화시키는 일을 병행할 수밖에 없다. 가장 좋은 것은 이 둘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는 운동 방식을 개발하는 것이고, 만일 어렵다면 우선 각 종단을 변화시키는 일부터 주력할 필요가 있다. 초록 실천은 한 두 해 하고 그만둘 일도 아니고, 환경 문제는 날로 심각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제도 종단 쇄신의 핵심 과제는 다음과 같다. 이는 대형화된 제도 종단이 안고 있는 공통 문제라고 보인다. 가. 기복 신앙에서의 탈피, 창시자의 사상에 대한 충실 대학 입시 때면 절, 성당, 교회 모두 자식을 위해 비는 부모로 넘쳐난다. 행복을 바라는 마음이야 뭐라 탓할 수 없지만, 참 종교란 이에 영합해서 제 몸집 불리는 게 아니라 신앙 대중들에게 참 행복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줘야 한다. 제도 종단은 신자들의 기복 신앙에 대해 관용한다. 이러한 신심은 제도 종단의 물적 기반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울러 제도 종단이 기득권 유지를 위해 생산하고 유포하는 보수적인 교리나 교의에 맞서 생태 영성과 사상을 바탕을 둔 교리나 교의를 확산시켜야 한다. 기존 교리나 교의에서 생태적 전통을 찾아내려는 노력과 아울러 이를 과감하게 뛰어넘는 도전과 모험이 필요하다. 생태 영성과 사상은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창시자 사상에 충실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야 신앙 대중들로부터도 지지를 받을 수 있다. 제도 종단의 폐단은 성직자 위주의 종단 운영에서 비롯된다. 물론 성직자들이 장기간 체계적인 양성과 훈련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협의적․민주적 종단 운영을 한다고 해서 성직자들의 역할이 축소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이 갖는 리더십 유형이 달라지는 것이다. 문제는 어떤 신분의 사람들이 종단을 운영하는가가 아니라 어떤 유형의 리더십이 발휘되고 있는가이다. 그리스도교의 예수는 재물과 하느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했다. 이러한 가르침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가난을 선택하고 실천해야 한다. 가난은 무소유가 아니라 나눔의 결과이어야 한다. 수입을 막는 것이 아니라 지출을 합리화하는 게 바람직하다. 많이 거두어서 많이 쓰자는 식의 생각은 곤란하다. 최근 천주교, 기독교, 불교를 중심으로 ‘개혁을 위한 종교인 네트워크’가 구성되어 활동하고 있다. 현재는 재정의 투명성과 공공성 제고, 학교 내 종교 자유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작은 네트워크에 충실하다보면 더욱 큰 네트워크로 연결되어지리라 생각한다. 종교인대화마당 자료집에 포함된 자료를 참고로 정리해보면, 지금까지 종교인들의 초록 실천은 유형별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연대 활동은 제외).
이상 표에서 보듯이, 아직 종교인들의 초록 실천은 크게 교육 활동과 생활 실천 운동, 생명농업을 중심으로 한 도농 교류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종교인들의 초록 실천의 기본 단위로서의 생태공동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종교인의 초록 실천은 세상과 제도 종단을 변화시키는 일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나부터 변화되어야 하는데, 이 둘 모두에 대한 대안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이 공동체운동이다. 굳이 생태공동체운동이라고 해서 ‘생태’라는 수식어를 부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 시대에서 생태적이지 않은 공동체운동은 참된 공동체운동이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결혼해서 가족이 있는 사람이라면 가족이 함께 참여하는 공동체운동이어야 한다. 가정을 이루고 있는 사람이라면 생태적이고 공동체적인 삶을 혼자만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공동체가 개인이나 개별 가족에게는 확대 가족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최근 천주교에서는 신영성운동1)에 대한 반감과 경계가 심하다. 고위 성직자들은 수녀들이 공공연하게 절의 선방을 드나든다고 걱정이 많이 한다. 천주교 신자들이 신영성운동에 쉽게 매혹되는 것은 천주교 내부에 적당한 수행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착하게 살라고는 하면서 착하게 살기 위한 수행 방법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고, 대신 죄를 지으면 고해성사를 준다. 무슨 일이든 좋은 열매를 맺은 곳을 찾아가 살펴보면, 거기에는 그 일을 가능하게 한 사람이 있다. 운동을 한다는 것은 ‘참 사람’, ‘참 나’가 되어 가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운동을 넓힌다는 것은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생활을 바꾸는 것이다. 어려운 일이다. 공을 들여야 한다. 과거 민주화운동에 투신하는 것으로 투옥과 고난을 각오해야 했던 시절에는 사람 한 명을 변화시키는 것이 어려웠다. 그래서 공을 많이 들였다. 그런데 1987년 이후에는 시민사회운동이 확산되면서 이 같은 노력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한 회원이 나가도 다른 회원이 들어오니 걱정할 게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자성과 쇄신의 기회를 잃은 시민사회운동들은 도태되고 사라져갔다. 환경운동이 계속 확산되고 있는 것은 이 같은 자성과 쇄신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대중의 생활상의 문제와 요구가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영성을 많이 이야기한다. 비단 종교인뿐만 아니라 비종교인들도 영성을 이야기한다. 영성은 ‘총체적인 삶의 양식’이다. 이를 현실화시키는 것은 수행이다. 수행하지 않는 활성가들은 좋은 열매를 거두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이 교의와 교리를 살지 않는 성직자에게 등을 돌리듯이, 수행하지 않는, 자기 생활을 바꾸지 않는 환경운동가를 사람들은 믿고 따르지 않을 것이다. 정토회가 자기들이 먼저 실천해보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남들에게도 권하는 방식은 아주 귀한 모범이다. 자기는 가보지도 않은 길을 지도만 보고 이야기한다면 무슨 감동이 있겠는가? 직접 먼저 가보고 어디 가다보면 절벽이 있는데 거기서 조심해야 하고, 어디 가다보면 풍광도 좋고 사람도 좋은 곳이 있으니 하룻밤 자고 가라고 안내해야 사람들이 가고 싶어 몸살이 날 것 아닌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