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티크라이스트」. 「박쥐」도 충격적이지만, 「안티크라이스트」는 더 말이 많았죠. 기자들이 불쾌해했다는 기사도 있었고, 라스 폰 트리에가 예전 같지 않다는 말도 많았습니다. 몇몇 장면들 때문에 한국에 들어오지 못할 거란 소문도 있을 정도로 영화 자체에 관한 이야기보다 가십거리들이 더 많이 흘러나왔던 영화였죠.
영화는 마치 책을 영화로 옮겨 놓은 듯, 프롤로그로 시작합니다. 헨델의 음악 「울게 하소서」(Lascia ch'io pianga)가 잔잔히 깔리며, 언뜻 뮤직비디오인 것처럼 대사 전혀 없이 음악만으로 시작합니다. 부부로 보이는 남녀가 섹스하는 장면들이 나열되고, 간간이 (그들의 아기임이 분명한) 어린 아이가 움직입니다. 이 아기는 엄마 아빠가 함께 그러고 있는 동안, 책상으로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엄마 아빠의 쾌락이 점점 고조되면서, 아이는 책상에서 눈 내리는 창가로 다가갑니다. 그러다 아이의 인형이 떨어지고, 그 다음 아기도 창 밖으로 떨어집니다.
아이가 그렇게 죽고 난 후, 여자는 공황장애를 겪기 시작합니다. 공황발작을 막기 위해 신경안정제에 의존하는 생활을 하지만, 남자는 약물에 의존하며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는 그녀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죠. 그가 의사인 것도 아니면서, 그녀에게 처방해 주는 약물이 많다는 둥, 이러고선 회복될 수 없다는 둥 불평불만을 늘어놓다가 자기가 그녀를 치료해 주겠다고(남자의 직업은 심리치료사입니다) 집으로 데리고 갑니다. (아이가 죽었는데도 어찌나 그렇게 차분하신지~, 전 영화 보면서 여자는 싱글맘이고 남자는 여자의 애인인 줄 알았답니다.) 여자의 공황발작이 점점 심해지자, 남자는 여자에게 뭐가 그렇게 두렵냐고 묻죠. 그녀가 글을 집필하기 위해 갔던 숲(에덴)이 두렵다고 말하자, 두려움을 치료하기 위해 두 부부가 에덴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숲에서 남자와 여자는 조금씩 미쳐 가고, 결국 둘 중 한 명만 에덴을 나오게 됩니다. 간략한 영화 내용은 여기까지입니다~.

영화 속의 남자는 매우 이성적인 사람입니다. 아내의 불안과 정서적 문제들, 신체로 표현되어 나타나는 공포의 표현들도 그는 매우 논리적이고, 깔끔한 언어로 정리합니다. 아내가 퇴원하고 난 후, 점점 몰락해 가고 있는 데도, 그는 그런 모습들을 치료의 과정이라고 말하죠. 게다가 신체적 접촉을 강렬하게 원하는 아내에게, 치료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하는 사람이죠. 아이가 죽었는 데도 냉정하게 견뎌 내는 남자에 비해, 여자는 계속 우울하고, 죄책감으로 힘들어합니다.
(제가 보면서 저 사람은 새아빠라고 착각할 정도로) 남자는 여자의 감정을 전혀 배려하지 않습니다. 간간이 그들의 대화를 들어 보면, 그가 얼마나 무심했는지를 알 수 있죠. 아내가 논문을 쓰기 위해 아이와 숲에 들어갔을 때도(이미 글을 쓴다고 하는 아내에게 아이까지 딸려 보낸 거 보면 무심한 거죠~) 그는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늘 부재해 있던 남편이었던 거죠.
이런 그의 공감무능력 현상은 영화 내내 계속됩니다. 숲이 무섭다고 말하자, 두려움을 치료해야 한다고 숲으로 데려가고, 아내가 말하기 힘들어할 때도 말해야 나아진다며 끊임없이 그녀에게 묻고 말을 시킵니다. “당신은 왜 나를 가만 두지 않느냐?”고 물을 때도, 그는 아내가 어떤 마음으로 말하는지 전혀 듣지 않습니다. 견고한 성처럼 그녀 앞에 버티고 앉아 그녀의 상태를 자신만의 언어로 정리합니다. 마치 그녀를 입이 없는 존재처럼 취급하는 거죠. 남자를 설득하기 위해, 자신의 불안과 공포를 알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던 여자는 남자가 어떻게 해도 자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않자 조금씩 미쳐 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성은 견고해 보이지만 워낙 연약한 것이라~, 그 단단한 이성도 슬슬 광기에 오염되기 시작합니다. 그가 치료하려던 그녀가 점점 그의 의도대로 치료되지 않자, 그 역시도 그녀의 죄의식과 공포에 엮여 들어가는 거죠. 그로 인해 그들이 들어간 에덴을 아내의 공포증이 시작된 장소로만 보던 남자도, 점점 에덴 안에 있는 복잡한 것들을 보게 됩니다. 쏟아지는 도토리 소리가 무섭게 들리고, 사산한 사슴이 뛰어가는 것을 봅니다. 나중엔 자기 살을 뜯어 먹고 있는 여우가 말을 하는 것도 듣게 되죠. 하지만 그는 그것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살피지 않습니다(그래서 그런지 남자가 여자 외에 다른 것들과 만날 땐 거의 대부분 침묵 상태입니다. 음소거 버튼을 누른 것처럼 말이죠). 결국 그는 아이의 발이 후천적 기형이었다는 검시관의 기록을 전하며, 치료는커녕 남자 자신의 불안과 공포를 이기지 못해 그녀를 벼랑으로 몰아갑니다.
미쳐 버린 여자는 아이처럼 남자도 자기를 떠날까 두려워 남편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다리에 큰 돌을 답니다. (아이의 발이 기형이라는 검시관의 소견은 아내가 아이의 신발을 계속 거꾸로 신기면서 멀리 가지 못하도록, 자신 곁에서 떠나지 못하도록 했다는 걸 설명해 주죠) 남자는 도망치려 하지만 다시 잡혀 오고, 그녀가 죄의식을 견디다 못해 자해하는 것을 보며 그녀가 자신을 죽일까 두려워 여자를 먼저 죽여 버립니다. 결국 그는 에덴이라는 자연과 그녀가 가진 거대한 광기와 어둠을 견뎌 내지 못한 것이죠.

치료와 이성으로도 설명되지 않은 공포와 자연은 우리에게 쉽게 악마로 환원되고 가두어 두어야 할 광기로 설명되죠. 또한 이성 안으로 포섭되지 못하는 것들은 제거해야 할 대상이 되어 버립니다. 어떤 누군가는 남자가 하다 하다 안 되니까 여자를 죽인 거라고 하겠지만~, 어차피 영화에서 볼 수 있듯, 오직 자신만이 옳다는 남자의 독선은 그저 자기 위안에 지나지 않았고, 여성살해는 그 이성의 무능함을 단적으로 보여 준 것뿐이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한 가지 생각을 더 해봤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저 역시도 그녀의 복잡한 심정을 이해하기 위해 “광기”와 “죄의식”이란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것 말고는 그녀를 이해하기 위한 다른 설명 틀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어떻게 보면 오직 광기와 죄의식이야말로, 기독교에서 여성에게 할당해 주는 유일한 자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건 단순히 저만의 생각이 아닙니다~. 기 베슈텔의 『신의 네 여자: 그리스도교 기원 이래 가톨릭교도의 여성 잔혹사』에서도 기독교가 여성을 ‘창녀, 마녀, 성녀, 바보’로 취급했다는 것을 문헌을 통해 잘 보여 주죠. 뒤집어 보면 창녀, 마녀, 성녀, 바보가 아니면 여성이 자신의 위치를 기독교 담론 안에서 허용받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하죠. 여성의 복잡한 맥락을 살피는 단어가 오직 저것밖에 없기에 그 너머의 것들은 모두 은폐되어 있다는 말이기도 하구요.
그렇다면 무엇이 안티크라이스트일까요? 우리가 ‘기독교’라고 말하는 세계는 기본적으로 모든 인간을 죄인이라고 설정합니다. 죄의식을 깨닫고, 회개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죠. 하지만 영화 속에서 죄의식을 담당하고 있는 여자는 과도한 죄의식으로 힘들어하다가 미쳐 버립니다. 그로 인해 구원은커녕 결국 남자에게 살해당하죠. 어쩌면 영화가 말하는 “안티크라이스트”는 기독교적 세계 자체가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죄의식과 구원을 선형적으로 연결하고, 회개하라고 강요하지만, 그것은 인간적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그저 인간을(좁혀 말하자면 여성을) 억압하는 체계일 뿐이죠.
신이 우리를 대신해 죽고, 그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죄의식을 기꺼이 등에 짊어진 인간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과일 하나 따 먹었다고 낙원에서 내쫓은 그 속 좁은 신을 절대자로 믿으며 살고 있는 우리들의 삶은 어떠할까요? 어떻게 보면 우리는 이제까지 신성은 비판했지만, 죄의식을 냉정하게 바라본 적은 (니체 말고는) 없는 듯합니다. 또한 죄의식이 유독 누구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인지 살펴본 적도 없는 듯하구요.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한 주가 되길 바라며 오늘 글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 그린비 편집부 강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