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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의 文化史 스크랩 唐 태종과 貞觀之治(정관의 치)
시너먼 추천 0 조회 92 13.12.14 15:2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당 태종 이세민

 

(唐太宗 李世民, 599년: 개황(開皇) 19년 1월 23일 ~ 649년: 정관(貞觀) 23년 7월 10일)은 중국 당나라의 제2대 황제이며

당 고조 이연의 차남이다.

 

이름인 '세민'의 본래 뜻은

제세안민(濟世安民),

즉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라는 뜻이다.

그는 실제로 뛰어난 장군이자, 정치가, 전략가, 그리고 서예가이기까지 했으며,

중국 역대 황제 중 최고의 성군으로 불리어

청나라강희제와도 줄곧 비교된다.

그가 다스린 시대를 정관의 치라 했다.

 초기 생애

  이세민은 개황 19년 (599년)에

당국공 이연(李淵)과 그 처 두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614년에는 장손씨와 혼인을 올렸고,

617년 수 양제 양광고구려 원정과 엄청난 대토목 공사로

이미 피폐해진 수나라 각지에서 반란군이 일어났으며,

이연 역시 여기에 가담, 봉기했다.

 

그리하여 아버지를 모시고,

수의 수도 장안으로 진격해서 장안을 손에 넣고,

때마침 양광마저 강도에서

그의 시위장이자 우문술의 아들인 우문화급(宇文化及)과 우문지급(宇文智及) 형제에게 암살되자,

이연은 당의 황제의 위에 오르고,

이세민을 진왕(秦王)에 봉했다.

 

뒤이어, 반란을 일으킨 여러 호족과 귀족들이

당에 충성을 바치지 않자,

이세민은 그들을 격파하러 출병했다.

반역 호족은 왕세충, 두건덕, 설인고, 유무주 등이었는데,

이세민은 이들에게 단 한번도 패하지 않고 모두 제거하여,

아버지인 당 고조 이연에게 천책상장(天策上將),

즉 하늘이 내린 장수라는 별호를 얻었다.

 현무문의 변

  이후, 이세민의 권세는 점점 커졌고, 인기 또한 높아졌다.

이것을 불안하게 여긴 형 황태자 이건성

막내동생 제왕(齊王) 이원길

이세민을 죽일 모책을 세우고, 급히 자신들 계파의 대신들을 불렀다.

이건성파 중에는, 위징(魏徵), 왕규, 배적(裵寂) 등이 있어, 이세민 제거 작전을 세운다.

그러나, 이것을 알아챈 이세민은

처남 장손무기(長孫無忌)와 장군 이정(李靖), 서세적(徐世勣) 등을 이용해,

도리어 역으로 그들을 이용하려 했다.

 

626년 7월 2일,

이세민은 부황 이연에게, 형제들이 자기를 죽이려 모함한다 아뢰었고,

이연은 그들을 장안의 궁성으로 불렀다.

그들이 궁성의 현무문으로 들어온 순간,

매복한 이세민의 군사들이

이건성과 이원길에게 화살을 쐈고,

그 자리에서 그들은 살해당한다.

 

이것이 바로 '현무문의 변'이다.

3일 뒤에 이연은 할 수 없이 이세민을 황태자로 삼고,

2개월 뒤에 그에게 양위하였다.

이에 이세민이 9월 4일에 황제에 올랐으며,

이듬해에 연호를 정관(貞觀)이라 하니,

이가 바로 당나라 제2대 황제인 태종이다.

 정관의 치

  이세민은 황제에 오르고 나서,

농민들에게 균등히 토지를 나누어 주어서,

조·용·조 제도로 세금을 걷었다.

 

이 제도는

토지를 받은 사람을 국가에 곡물을 바치고,

1년 중 20일을 국가를 위해 일하며,

직물 등도 바침으로써,

국가는 풍족해졌으며,

민생은 안정되었다.

 

이세민은 형 이건성의 편에 있던 위징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고,

위징은 명재상이 되어,

중국을 안정시켰다.

 

또한,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인재를 양성했고,

군사제도는 징병제로 택하였다.

 

이렇게 많은 인재를 등용시킨 당나라는

나날이 번창해져 갔으며,

백성들도 더더욱 이세민을 우러러 보았다.

 

또한, 이세민은

아무리 적의 밑에서 일했던 장수라 할지라도

능력이 뛰어나면 무슨 일을 해서라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이세민은 아무리 신하들이 자기에게 독설을 퍼부어도,

역정을 내지 않고

그 간언을 잘 받아들여

언제나 국가와 백성들을 위해 좋은 정책을 만들 수 있었다.

 

630년에 이세민은

동돌궐을 정벌하여,

천가한(天可汗), 즉 천하의 칸 중의 칸이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중앙 아시아도 정복해,

당의 영토를 전 황조 수의 2배로 넓혔다.

 이세민의 고구려 원정

  644년 6월

당은 고구려의 요동 공격을 명령한 후

11월

수륙 양면으로 약 30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해 공격을 시작했다.

 

이때 당군은 각종 공성용(攻城用) 기구를 총동원했다.

 

당 태종은

다음해 2월에

뤄양(洛陽)을 출발하여 직접 원정길에 올랐다.

 

요동에 진입한 이세적(李世勣)의 군대는

개모성(蓋牟城)을 함락시키고,

장량(張亮)의 수군은

비사성(卑沙城)을 함락시켰다.

 

태종이 직접 독려하는 가운데

645년 5월에는

요동성까지 함락시킨 뒤

백암성(白巖城)을 공격했다.

 

백암성이 6월에 함락되자

태종은

안시성이 연개소문의 정변 때도 안시성 성주(양만춘이라고 전해지기도 한다.)가

복종하지 않아 공격을 받았으나,

항복시키지 못한 점을 들어

우회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보급로가 차단될 것을 염려한 이세적의 건의를 받아들여

안시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고구려의 중앙정부에서는

고연수(高延壽), 고혜진(高惠眞)의 지휘 아래

말갈군을 포함하여 15만 명의 군사를 내어

안시성 구원을 위해 출동시켰으나

당군의 작전에 말려들어 고전 끝에 항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립된 안시성의 저항이 완강하자

이세적은

태종에게

성이 함락되면 남자를 모두 구덩이에 파묻겠다고 했다.

 

포위공격이 성과가 없자

당의 장군들은 동남쪽에 있는 오골성(烏骨城)을 먼저 치고

곧바로 평양으로 직공하자고 건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태종의 손자 무기(無忌)가

오골성을 공격할 때

후방에서 안시성의 고구려군이 역공할 가능성이 있다며 반대하자

이를 받아들여 계속 안시성을 공격했다.

 

하루에도 6~7차례에 걸쳐

당군의 공격이 계속되었고

포거(抛車:투석기)가 날린 돌에 성벽이 무너지면

고구려군은 재빨리 목책(木柵)을 세워 방어했다.

 

당군은

성 동남쪽에 성과 같은 높이로 흙산을 쌓아 성을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흙산이 거의 완성될 즈음에

갑자기 무너지면서 성벽을 무너뜨리자

고구려군은 재빨리 성벽 밖으로 나와 이를 점령하고,

나무를 쌓아 불을 지르니

당군은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태종은 책임자 부복애의 목을 베고

싸움을 독려하여

마지막 3일간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으나 끝내 실패했다.

 

안시성 전투에서

많은 병력을 잃은 당군은

뒤이어 쫓아온 연개소문에게 크게 패퇴하고,

태종은

결국 고구려 침공에서 얻은 병이 원인이 되어 사망하였다.

 

이후 이세민의 아들인

당 고종

신라와 협공하여,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까지,

고구려는 8번에 걸친 당군의 원정을 막아냈다.

 후계자와 최후

  649년,

당 태종 이세민은 이 때, 이질을 앓고 있었다.

원래 그는 황태자 이승건이 있었으나 폐하고,

이후 4남 복왕 이태를 봉하였으나,

행실을 이유로, 역시 폐하였다.

 

그리하여, 9남 위진왕 이치를 황태자에 세웠다.

황태자 이치는

이후 당의 제3대 황제 당 고종이 되며, 대리 청정을 했다.

 

649년 7월 10일,

당 태종 이세민은

장안 함풍전에서 51세를 일기로 붕어했으며,

시호는

태종 문무대성대광효황제(太宗 文武大聖大廣孝皇帝)이며,

능호는

소릉(昭陵)으로

지금의 섬서성 예천현에서 동북쪽으로 50리 떨어져 있는 산에 묻혔다.

그래서 욕을 먹었다.

 

정관의 치(貞觀之治, 627년~649년)

  당나라의 2대 황제 태종 이세민의 치세를 일컫는 말.

중국 역사상 가장 번영했던 시대 가운데 하나로써,

이때 태종을 보좌했던 재상으로는

위징, 방현령, 장손무기 등이 있다.

 

태종은 이들의 보좌를 받으며

밖으로는 돌궐을 제압하는 한편

토번을 회유했으며,

 

안으로는

조용조 제도와 부병제, 균전제 등의 제도를 마련하고

과거제를 정비했다.

이로 인해, 당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태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고종

태종 때의 관료들을 그대로 등용하였고

그에 따라 태종을 도와 정관의 치를 이룩한 관료들은

계속해서 정치를 이끌었으나,

 

측천무후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관료들을 대거 파직하고

새로운 인재들을 등용하여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삼으면서

당은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한편 측천무후는

중앙집권체제와 관리 감찰을 강화하는 한편

농업 발전에도 힘을 기울여서,

그녀의 치세를 무주의 치 라고도 한다.

위징

 

  위징(魏徵, 580년 - 643년)은

중국 의 정치가이다.

자(字)는 현성(玄成)이며,

당 태종을 섬겨 간의대부(諫議大夫) ? 좌광록대부(左光綠大夫)에 임명되고

정국공(鄭國公)에 봉해졌다.

 

직간(直諫)으로 이름이 높았고

당 태종과의 문답은 대부분 《정관정요》에 실려 있으며,

〈간태종십사소〉(諫太宗十思疏)는 그 중 가장 유명한 글이다.

 

거록(巨鹿) 곡양(曲陽) 사람으로,

대중(大中) 6년(852년) 11월에 세워진 『위공선묘비』(魏公先墓碑)에는

위징의 할아버지는 교(釗), 아버지는 완(琬)으로, 부인은 하동 배씨(河東裴氏) 집안의 여자였다고 전한다.

 

  어려서 집이 가난하였고,

말기에 이밀이 지휘하던 와강군(瓦崗軍)에 들어갔다가

이밀이 패한 뒤 당에 귀순하였다가

다시 두건덕의 포로가 되었는데,

두건덕은 그의 재능을 아껴서 자신의 휘하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두건덕이 패한 뒤에

당으로 돌아가서,

태자 이건성(李建成)의 측근으로서 태자선마(太子洗馬)라는 지위에 올랐다.

 

당시 이세민의 인기와 권력을 불안히 여긴 태자 이건성에게

위징은 이세민을 독살하여 제거할 것을 진언했지만

두건성은 이를 듣지 않았고,

결국 현무문의 변으로 이세민에게 살해당했다.

 

위징은

이를 당연한 결과라 받아들이고,

이세민에게 죽임을 당할 것을 각오하였고

자신의 집에서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세민은

위징을 문책하던 중,

이세민의 형인 이건성이 위징 자신의 충언을 듣지 않아

죽음을 맞이한 것과

자신의 주군을 보필하기 위하여 충언을 한것은

자신의 죄가 아님을 말하였고,

자신이 이세민에게 위협적인 존재였음을 당당히 인정하였기에,

이세민은 그의 솔직함을 높이 사서

그를 간의대부로 삼았다.

 

뒤에 비서감(秘書監), 시중(侍中) 등의 직책을 두루 거쳤으며,

태종에게 2백 회가 넘는 간언을 올렸다.

 

자치통감》권196에 보면,

위징이 죽었을 때 태종은 몹시 슬퍼하며,

옆에서 따르던 신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사람은 구리로 거울을 만들어서 의관을 바로잡고,

옛 것을 거울로 삼아서 역대의 흥망성쇠를 알 수 있으며,

사람을 거울로 삼아서 자신의 득실을 알 수 있다.

위징이 죽음으로서 짐은 거울 하나를 잃고 말았다.

태종은

위징이 죽기 직전,

그의 장남 숙옥(叔玉)에게

딸 형산공주를 시집보내겠다고 약속했는데,

생전에 위징이 태종에게 올렸던 간언서의 부본을

사관(史官) 저수량에게 보여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위징이 명성을 얻기 위해 그런 것이라 의심하면서

위징과 했던 약속을 깨고

형산공주를 장손의에게 시집보냈을 뿐 아니라,

위징의 무덤에 세웠던 묘비까지 부숴버렸다

(묘비의 글은 태종 자신이 친히 쓴 것이었다).

 

또한 생전에 위징은

 중서시랑(中書侍?) 두정륜(杜正倫)과

이부상서(吏部尙書) 후군집

재상이 될 재목(宰相之才)이라며 천거했는데,

위징이 죽은 뒤 두 사람은

위징과 사사로이 파당을 맺었다는 당 태종의 의심을 사서,

두정륜은 죄를 지어 쫓겨나고 후군집도 모반죄로 처형되었다.

 

이후 정관 18년(645년),

당 태종은

고구려 원정을 감행하지만 실패하고,

돌아오는 길에 탄식하며

 "위징이 지금까지 살아있었으면 나한테 이런 걸음을 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

(魏征若在,不使我有是行也)"

이라며 한탄하고,

부숴버렸던 위징의 묘비를 다시 세우게 했다.

 

태종의 명으로 편찬하게 한 《수서》의 서론(序論)과

양서》, 《진서》, 《제서》(齊書)의 총론(總論) 등

많은 저작을 남겼으며,

그의 발언은 《정관정요》에 대부분 수록되었다.

 "사람의 인생에 의기(意氣)가 있다면야/

구구한 공명(功名) 따위 무슨 문제가 되랴"

라는 구절로 유명한 「술회(述懷)」라는 시를 읊었다.

 

방현령

 

방현령(房玄齡, 578년 ~ 648년)은

초기의 정치가로, 제주임치(齊州臨淄:山東) 사람이다.

현령이고, 본래 이름은 (喬)다.

 

본래 제나라 사람으로, 방언겸(房彦謙)의 아들이다.

한때는 수나라의 관리를 지내기도 했으나 법을 어겨 좌천되었다.

그러던 중 태종 이세민을 만나

그가 돈황공(敦煌公)이었을 때부터 섬기어

621년 진왕부(秦王府) 18학사(學士)의 일원이 되었으며

두여회와 같이 당조(唐朝) 대각(臺閣)의 규모와 전장문물(典章文物)의 제정을 맡았다.

 

방현령에 대한 태종의 신망은 매우 두터워서

후한 광무제의 명신(名臣) 등우(鄧禹)에 비유되었다.

 

626년

두여회, 장손무기 등과 현무문의 변을 꾀하여

태종의 위기를 구하였다.

 

방현령은

국사를 논할 때에는 항상 결단력이 있는 두여회가 도착하기를 기다렸으며,

두여회 또한 계획을 잘 세우는 방현령의 책략을 받아들였는데

사람들이 두 사람을 가리켜 '방두'(房杜)라 불렀다.

 

629년

감찰어사 진사합이 〈발사론〉이라는 글을 통해

방현령과 두여회가 조정의 많은 직책을 겸직하는 것을 비판하자

태종은 "두 사람이 겸직을 하는 것은 재능이 있기 때문이다."

하고 반박하며 진사합을 귀양보냈다.

 

630년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감수국사(監修國史)로 올랐고,

이어서 칙령을 받들어

위징 등이 편찬한 북제, , , , 의 각서(各書)를 총감(總監)하여 완성시켰다.

 

재상으로 있은 지 15년이 되자

태자태부(太子太傅)에 임명되었고

사후에는 태위병주도독(太尉幷州都督)에 추증되었다.

 

이세민은 방현령을 매우 총애하여

생사고락을 함께 한 공신들을 기리는 시 〈위풍부〉(威風賦)를 지어

그에게 하사하였다.

 

또한 15년간 재상직에 있었던 방현령이

나이를 이유로 사직을 요청하였자

이세민은

"유능한 재상이 사라지면 두 팔을 잃은 듯한 심정이 들 터이니

정 힘들어 버틸 수 없을 때에 다시 상소를 올리라."

고 말하였고,

이후 방현령은 더 이상 사직 상소를 올리지 않았다.

 

장손무기(長孫無忌, 594년 ~ 659년)는

중국 당나라의 명재상이며 자는 기보(機輔)이다.

 

하남성 낙양 사람으로

과거 북조북위의 황족 척발씨의 후손으로서

수나라의 우효위장군 장손성의 아들이며

당 태종 이세민의 황후인 장손황후의 오빠 즉,

이세민의 처남이다.

 

장손무기는

여동생이 이세민과 혼인을 하자

그 덕분에 친해져서

617년, 수나라에 대항한 반란이 터지자,

태원 유수 이연의 휘하에 들어가 참모가 되었는데

이연은 그를 매우 아꼈다.

 

그리고 이세민의 옆에서 항상 그를 도왔다.

당나라가 건국된 뒤에

개국공신이 되어 제국공과 조국공의 벼슬을 받았다.

 

626년

현무문의 변이 일어나자

장손무기는

이세민을 따르는 무리들과 함께 이 정변에 적극 참여하였고

그 후 매제 이세민이 황제에 오르자

상서복야, 상서령과 사공 등을 역임하였고

곧 사도에도 오르는 등 계속 승승장구하였다.

 

637년에는

방현령과 함께 《정관율령》을 편찬하기도 했다.

 

636년에는

여동생인 장손황후가 병으로 사망하였는데

죽기 전에 그녀는

이세민에게 오빠인 장손무기를 중용하지 말라고 부탁하였으나

이세민은 이를 어겼다.

 

642년에는

 명재상 위징에 이어 승상 겸 태위가 되었고

이후, 이세민을 따라 고구려 원정에 나서기도 했다.

 

644년에는

능연각에 24명의 공신들 중에서 자신의 화상이 제일 먼저 걸렸다.

 

651년에는

당시 황제이자 자신의 조카 고종 이치의 명을 받들어

《율소》30권을 편찬하기도 했다.

 

 655년

이치가 무씨를 황후로 맞아들이자

이를 반대하였으나

작위를 박탈당하고 귀주로 유배보내졌다.

 

659년

무씨의 강요로 유배지 귀주에서 자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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