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5년 어느 날 장래 법률가를 꿈꾸던 청년은
무시무시한 천둥 번개를 만나 공포에 떨었다.
"성 안나시여 살려주세요. 그럼 수도사가 될께요"
그는 1483년 독일 작센 지방 아이스레벤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난 마르틴 루터였다.
그는 부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폭풍우 속에서 했던 서약을 지켰다.
그는 수도원의 엄격한 규율과 금식과 고행들로 건강이 많이 악화되기도 했다.
매서운 영화의 추위에도 담요 없이 잠을 청했고
모든 규칙을 철저하게 지켰다.
루터뿐만 아니라 당시 사람들은 구원을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구원은 개인의 선행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구걸이나 순례나 고행과 성자나 성물 숭배가 지나치게 강죄되었다.
교회나 수도원들은 심지어 성인의 머리털이나 뼈까지 구해 진열했다.
또한 교회는 신자들에게 죄를 고백하는 고해 성사를 철저히 의무화 했다
시대가 불안했기에 유럽인들은 영적신앙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았다.
특히 흑사병이란 무시무시한 공포가 그들의 삶을 짓눌렀다.
회교도 오스만투르크족의 위협도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상황이 이러므로 죄를 경감시켜 주는 면죄부의 판매는 1500년 초에 대유행이었다.
루터도 이러한 선행을 쌓고자 매우 진지하고도 혹독한 노력을 했다.
홀로 있을 때도 더러운 생각 속의 죄들과 싸웠고 그것을 떨쳐 버리려고 무진 애를 썼다. 엄격한 수도원의 규칙들을 잘 지킨 그는 빠르게 정식 사제가 되었다.
2년간 루터의 지켜보단 수도원장
슈타우피츠는 그에게 금요가, 고행, 자학은 그마하면 되었고, 성경을 공부하는 신학을 권한다.
1512년 비텐베르트 대학에서 29세 신학 박사가 될 정도로 성경을 열심히 공부했다.
1513년부터는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 등의 성경학강의도 하였다.
그러던 중 루터는 자신이 품고 있던 의문들이 풀리는 것을 말씀에서 깨달았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이 남기신 말씀에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스도가 버림을 당하시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가?
나 같은 자나 우리 인생은 당연히 버림을 받아도 마땅하지만
죄인도 아닌 예수님이 왜 죽어야 하지?"
말씀을 묵상하고 고민하여 가르치는 과정 가운데 그는 점점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스도는 우리 죄인들의 모습과 같이 되셨지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신해 자신이 직접 처벌을 받기 위해 인간들과 같이 도었다는....."
오랜 진통 끝에 드디어 1515년 바울 서신 중 로마서를 연구하던 루터는 다음 구절에 충격을 받는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
그 구절에서 루터는 영적 확신을 얻고 밤낮으로 묵상하고 깊이 생각했다.
인간은 오직 인간의 죄를 대신해 죽으신 예수님을 믿고 받아드릴때만 의롭게 됨을 확신하였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인간의 죄를 제거하고
사타의 수중에서 건져 내는 능력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루터는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의롭게 된다는 교리에 이르었다. (이신칭의)
그는 이 교리가 로마 카톨릭의 교리와 완전 반대됨을 알았다.
"구원이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서 오는 것이라면
로마 교회의 중보 기도는 전혀 필요하지 않다."
루터의 깨달음이 교회에 어떤 파장을 몰고 올지 그땐 몰랐다.
1517년 도미니크회의 수사 요한 테첼이
순회 설교자를 호위하는 무장 병사를 거느리고 독일에 나타났다.
그는 교황 레오 10세의 문장을 앞세우고 행진하면서
사람들을 끌어 모은 후 면죄부를 팔려고 온 것이었다.
십자군 원정 때 면죄부 판매는 교황의 재정 수입을 위해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방법이었다.
루터 당시 레오 10세는 매우 크고 화려한 성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 때 독일의 알베르트 주교가 마인츠의 대주교 자리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비밀 협상이 이루어져 알베르트를 대신한 독일푸거 가문이 운영하는 은행은 교황청에 돈을 준다.
알베르트는 면죄부를 판 돈의 절반은 교황청에 주고 나머지 반은 자신이 가졌다.
요한 테첼이나 루터 같는 낮은 계급의 성직자들은 교황 선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알 수없었다.
테첼은 모인 사람들 앞에서 면죄부가 마치 마술적 효력이 있는 것처럼 설교하기 시작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면죄부를 팔려고 작정한 듯했다.
"연옥의 형벌에서 해방을 줄 것이다.
그대들의 친척이나 친구들이 연옥에서 옮겨지길 바라는가?"
중세 사람들은 카톨릭 교회가 세부적으로 묘사한 연옥에서의 형벌을 몹시 두려워했다.
지옥보다 오히려 연옥의 형벌을 두려워했다.
하늘에 도착하기 전 세상에서 지은 모든 죄를 연옥에서 깨끗이 씻어야 한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면죄부가 연옥에서 받는 벌을 줄이는 효력이 있다고 믿었다.
루터는 테첼의 설교가 저급하고 면죄부 판매는 성경적 근거도 없다고 했다.
오히려 인간의 죄를 더 짓게 만들고 그리스도의 용서로부터 신자를 멀어지게 한다고 보았다. 이 점에서 루터의 신학은 가톨릭 교회신학고 전혀 달랐다.
마르틴 루터는 신학 논쟁을 목적으로,
95개의 토론문을 작성해 1517년 10월31일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붙였다.
거기엔 면죄부가 효력이 없으며
신자들에게 헛된 안정을 주므로
오히려 해롭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은 라틴어였지만 곧바로 독일어로 번역되어 전국에 퍼지면서
종교개혁의 불을 붙였다.
대주교를 거쳐 교화 레오10세도 문서르 보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독일에서 테첼의 면죄부 수입이 줄고
상황이 교황청 뜻대로 되지 않자
독일 도미니크회는 루터를 고발했다.
"그는 위험한 교뢰를 유포하는 자이다"
루터가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지 않자
추기경이자 도미니크회 수도원 원장인 카에탄이 찾왔다.
1519년 7월 루터는 신학자 요한 엑크를 상대로 라이프치이에서 논쟁했다.
"종교 회의도 오류를 범합니다. 교회나 교황도 신조를 결정할 순 없습니다.
모든 것들이 반드시 성경으로부터 비롯 되어야 합니다
그보다 제 입장이 기독교 적이고 참된 의미에서 더 보편적(가톨리적) 교리라고 봅니다. 구원받기 위해 교황을 인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요한 엑크는 루터가 오래전 죽은 개혁가 존 후스와 닮았음을 깨닫는다.
이 논쟁으로 뤁너는 교황의 눈 밖에 났고 요한 엑크는 그를 고발했다.
이후 루터는 [독일의 귀족들에게 고함]이란 논문을 써서 직접 독일 국민들엑 호소했다.
"독일의 영주들은 교회의 잘못을 바로 잡아야 한다.
주교들과 수도원장들의 재산이나 제속권력을 박탈해야 한다."
또한 실질적으로 독일의 국교를 설립하자"
루터는 [교회의 바벨론 유슈]란 책을 통해서도 말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깨닫고 나자 나의 교회관이 바뀌었다"
그는 성례 제도나 사제들의 중보 제도가 신자들이 하나님께 직접 나가는 길을 막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로마 카톨릭의 성례 가운데 5가지는 정당하지 않다고 했고
단 성찬과 세례만은 인정한다고 했다.
이것을 기독교 신자들의 공동체 가운데 두는게 합당하고 했다.
교황이 머리라는 전통적 교회관을 버리고
모든 신자가 제사장으로서 주께 예배한 초대교회의 본질로 돌아가자고 했다.
1520년 [기독교의 자유]를 통해 기독교인의 생활과 구원에 관해 말했다.
"착한 행실이 사람을 선하게 만들지 못한다.
구원받은 증거는 선행으로 나타나게 된다.
기독교의 삶은 영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을 분리 하지 않고
자기 맡은 분야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꼭 우리가 수도원에 들어가 사는 것만 영적인 것이 아니다."
1520년 교황 레오10세는 루터에게 회개하거나 주장을 접으라고 경고했다.
루터는 학생들과 함께 비텐베르크 성 밖에서 전통적인 신학서들과 교황의 교서를 불에 태웠다. 이제 종교개혁의 불길은 거침없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결국 루터는 파문당했으며
1521년 1월 레오는 그를 이단으로 선포했다.
이 문제를 교황과 사이가 좋지 않은 가톨릭 교인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에게 넘어갔다.
"난 교회를 지키고 제국에서 이단을 제거한다고 선서 했다.
루터에게 해명할 기회를 주라"
1521년 4월 황제를 비롯해 선제후, 영주, 주교, 대도시의 지도자들이 참석한 보름스 제국 회의가 열렸다.
루터는 주장을 철회하지 않으면 매우 위험했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전 교황이나 종교 회의의 권위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저도 실수할 수 있습니다만 성경에 비추어 보아 제 주장이 틀리다면 제 책들을 불사르세요. 하지만 아무것도 취소하거나 철회할 마음이 없어요. 양심에 어긋나는 것은 옪은 것이 아니고 안전할 수 없으니까요."
많은 참석자들은 숙연해졌지만
별로 감명받지 않은 황제는 루터를 지지하는 자들을 의식해 그가 법의 처벌을 받기까지 21일의 여유를 주고 추방시켰다.
다행히 루터는 색소니 지방의 영주 프리드리히 공작 덕분에 체포와 죽음을 면했다.
그는 융커 조지 하급 귀족으로 신분을 위장한 체 1년 가까이 머물렀다. (발트부르크)
그곳에서 신약성경을 쉽게 읽을 수 있게 번역하고자 다짐한다.
신, 구약성경의 독일어 번역 잡은 12년 후인 1534년 9월에 최초의 완역본이 출판된다.
먼저 그가 번역한 신약성경은 독일 문학사와 현대 독일어 발전에 주춧돌이 된다.
루터가 숨어 있는 사이 비텐베르크에선 칼슈타트의 주도 아래 시위가 계속된다 .
그들은 평신도들의 성찬식 참여와 전통 미사의 폐지를 요구했다.
루터가 1522년 비텐베르트에 도착했을때 사태는 잠잠해진 듯했다.
하지만 그 여파는 '가사의 난'과 '농민 전쟁'으로 발전했다.
루터가 그곳에서 개혁 운동을 시작하자
다른 지방들도 그의 방식을 따랐다.
"주교직은 성경에 없으므로 폐지한다.
권력자는 교회에 필요없고 목회자가 필요하다"
색소니 및 인근 지방의 성직자들은 독신주의를 포기했으며
수도사와 수녀들도 결혼하기 시작했다.
(루터는 1525년 수녀 캐더린 폰 보로와 결혼한다)
분명히 새로운 기독교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는평신도들과 빵과 포도주를 받게 했으며
전통 미사는 말씀 선포와 가르침이 있는 예배로 바꿨다.
그런데 대변혁의 바람을 타고 1524년 농민 대반란 운동이 일어났다.
그동안 착취와 멸시와 신분상 농노의 취급을 받던 농민들의 사회 개혁의지가 폭발했던 것이다. 루터에게 돌아선 토머스 뮌처는 종교개혁을 비판하고 빈부 격차 없는 사회가 주의 축복이라면서 12가지 개혁안을 주장했다.
"가난한 자들의 위해 교회와 수도원의 풍부한 재정을 뺏어 나누자!"
루터는 농노들의 요구가 정당하다고 생각했지만
점점 폭력 상황으로 진행되었다.
루터는 대단히 난처했다.
자신을 지원해준 독일 영주들을 농민들 입장에서 착취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농민들보다 힘 있는 영주와 귀족을 지지했고
결과적으로 로마 카톨릭 측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존 체제를 무력으로 전복시키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루터는 영주들에게 글을 섰다.
그는 농노들에 대한 철저한 탄압을 촉구하면서 이들이야말로 반역자요 그 행동은 사탄적이라고 했다.
농민 혁명 세력은 짧은 시간에 만든 조직이어서 결속력이 없었다.
1525년 반란이 진압되는 과정에서 약10만명의 농님들이 죽었다.
그리하여 루터 지지자들이 가톨릭 교회로 다시 돌아가거나 재세레파에 합류했다.
하지만 영주들과의 동맹은 이어져 결국 루터파 교회를 이루게 된다.
이에 대해 교회 개혁의 급진주의자들은 루터를 비난하고 욕했다.
1526년 카를 5세는 슈파이어에서 제국회으리 소집했다.
당시 국제 정세가 매우 불리했기 때문이다.
카를 5세는 교황의 지지를 받는 프랑스의압막이 심하고
오스만 투르크족의 위협은 그에게 상당한 불안감을 주었다.
그는 루터의 개혁 운동과 제후들의 요구를 어느 정도 들어주고 지지를 얻으려고 했다.
그는 종교개혁을 제후들이 판단해 자기 영토에 적용하라고 했다.
제후들은 영지 내에선 루터파 교회를 세울 수도 있다는 것으로 확대 해석하면서 기뻐했다.
그러나 1529년 다시 제국 회의가 열렸을 때 황제는 3년 전의 결정을 바꿔 버렸다.
제후들은 강하게 항의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그들에겐 프로테스탄트(항의하는 자)란 별명이 붙게 된다.
이 말은 현재까지 종교개혁 운동과 그 영향으로 생겨난 교단을 개신교 또는 프로테스탄트라고 부르는 계기가 되었다.
1530년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종교개혁 지도자들의 정상회의 때
비텐베르크 대학의 필립 멜랑흐톤이 루터파를 대변했다.
"이건 영주들과 신학자들이 서명한 개신교의 신앙고백이다. "
황제는 전과 다름없이 이들과 타협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이에 루터파 영주들은 필립의 주도 아래 1531년 독일 중부 지역의 도시 슈말카텐에서 동맹을 결성했다.
이제 기독교와 카톨릭 교회가 분열되는 모습은 기정 사실이 되었다.
1546-1555년 사이 간헐적인 전투도 했다.
루터는 계속 비텐베르크에서 설교하고 가르치다가 1546년 숨을 거둔다.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 회의에서황제, 가톨릭, 루터파 교회는 조약을 맺고 다툼을 ㄲ 끝낸다.
[합의 내용은 제후영지에선 제후의 종교를 따른다]
이후 루터파 교회는 국교로서 자리 잡게 되었다.
스칸디나비아 일대로 펴져나갔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통해 나타난 프로테스탄트주의 중요한 세가지 원리는 다음과 같다.
[인간이 구원 받은 것은 선행이나 공로가 아닌 오직 믿음이다.
궁극적 기독교의 권위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아니라 성경이다]
교회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기독교 신자들의 공동체이다.
모든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들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성속을 막론하고 자기가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한눈에 읽는 교회사 하---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