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2013년 11월 독일3개도시초청공연(쾰른대성당) | 글로리아소년소녀합창단 감독 조선행 장로, 그는 어린 시절 노래를 잘하는 아이였다. 노래를 잘할 뿐만 아니라 노래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그러나 내성적인 성격이라 스스로 손들고 노래를 하겠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음악시간에 노래를 안 시켜 주면 어쩌나 마음을 졸이다가 선생님이 이름을 부르면 신이 나서 앞으로 걸어 나가던 아이였다.
선생님과 친구들 앞에서 노래하는 것이 참으로 신났던 어린 조선행, 그는 노래를 부르고, 노래를 가르치는 것을 평생 직업으로 삼았다. 그러나 누구도 어린 조선행에게 음악가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또한 음악을 지도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고등학생이 된 조선행은 어느 날, 학교 이사장의 회갑잔치에서 노래를 부른다. 조선행 장로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회갑잔치상이 크고 멋지게 차려져 있었어요. 학교 선생님들은 물론 아주 많은 사람들이 참석한 자리였는데, 떨리는 마음을 지그시 누르고 축하노래를 불렀어요. 그 날, 큰 박수갈채와 칭찬을 받았지요. 그 날 이후부터 선생님들이 제게 권하시는 거여요. 음악대학에 가서 성악을 전공하라고요. 저 역시 성악을 전공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음악을 하겠다고 하니까 집안에서는 남자가 무슨 노래를 하느냐고 반대를 했지요. 그런데 어머니가 몰래 레슨비를 챙겨주시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라고 용기를 주셨어요.”
어머니의 지원으로 목원대학교 음악과에 진학한 조선행 장로, 대학시절부터 대전 시립합창단에 들어가서 활동을 한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충남 당진에 있는 송악중학교에서 교편생활을 시작한다. 교사였던 조선행 장로의 젊은 날은 얼마나 풋풋하고 아름다웠을까? 음악에 대한 목마름이 얼마나 깊었을까? 조선행 장로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송악중학교에 부임하자마자 합창단을 만들었어요. 그뿐만 아니라 당진 군민을 대상으로 온누리합창단을 만들었지요. 합창단 창단 1년 만에 정기 연주회를 하는데, 그랜드피아노가 없는 거여요. 당시에는 규모가 좀 크다는 교회에도 그랜드 피아노가 없었어요. 수소문 끝에 어느 집에 그랜드 피아노가 있다는 것을 알고 무조건 찾아가 빌려달라고 사정했지요. 그렇게 그랜드 피아노를 무대 위에 올리고 연주회를 하는데 반응은 대단했어요.” 당진에 있는 온누리합창단, 그동안 지휘자가 여러 번 바뀌었지만 현재 28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 | | ▲ 지휘자 조선행 장로 *목원대학교 음악대학 음악교육과 졸업*미국 Califonia Union University 대학원 교회음악과 졸업 *러시아 Tchaikovsky 음악대학 교수연수과정수료 *독일 Mannheim 음악대학 연수과정수료*대전 KBS 어린이 합창단, 아산시립합창단지휘자, 아산시사보렌교직원합창단, 한국전문합창단연합회 부회장 역임 *Bernadean University 교수 역임*글로리아콘서트콰이어, 글로리아소년소녀합창단 음악감독 *세종시교직원합창단, 충청사모합창단 지휘자*한국소년소녀합창연합회 부회장*기독음대, Piedmont University 교수 | 송악중학교에 부임한지 5년 만에 조선행 장로는 임지를 천안 계광중학교로 옮긴다. 공주사범대학에서 음악을 공부한 아내는 천안여중 교사였다. 조선행 장로는 아내가 재직하는 천안여중 합창단을 도와주면서 아이들에게 음악을 통한 꿈을 확장시킨다.
어린 시절의 조선행 장로처럼 음악을 아주 많이 사랑하는 아이들, 그들은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노래가 하고 싶어서 조선행 장로를 찾아온다. 조선행 장로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학생들과 함께 노래를 시작했다. 침실은 소프라노 연습실, 서재는 알토 연습, 피아노가 있는 거실은 전체 연습장으로 바뀌었다. 노래를 좋아하는 학생들의 간절한 마음은 지금의 글로리아소년소녀합창단으로 성장했다. 글로리아소년소녀합창단, 그동안 손가락으로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초청 연주회를 가졌다. 또한 해마다 가졌던 정기연주회는 벌써 20회가 넘는다. 천안과 아산을 비롯한 충청권에서는 이미 그 명성이 자자하다.
노래를 좋아하는 제자들이 조선행 장로의 아파트로 찾아오면서 시작된 합창단, 지금도 합창단을 유지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초창기에는 참으로 어려웠다. 그러나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 노래를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마음들은 수많은 난관들을 이기고 명성 자자한 오늘의 합창단으로 우뚝 서게 만들었다. 글로리아소년소녀합창단은 세계대회에서 굵직한 상들을 여러 번 받았다. 2002년 제 2회 세계합창올림픽대회 1차에서 금 디폴로마, 2차에서는 은메달을 획득했다. 2004년 제 3회 독일 브레멘합창올림픽에서도 은메달을 획득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2008년에는 오스트리아 그라츠에서 열린 제 5회 합창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수상하였다. 글로리아소년소녀합창단에 재정적인 지원이 있다면 국제대회 석권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글로리아소년소녀합창단은 세계무대에도 여러 번 초청을 받았다. 1999년 일본 구마모토 국제청소년음악제에 초청받아 우리나라 대표로서 세계의 청소년들과 함께 노래를 불렀고, 2000년과 2001년에는 월드비전 세계어린이합창제와 폴란드 세계청소년합창제에서 세계적인 합창단들과 함께 무대에 섰다. 또한 2004년과 2007년에는 필리핀 마드리갈 싱어즈 내한 조인 콘서트를 두 차례 가졌고, 2005년에는 세계평화축전 화음의 축제 초청연주(임진각 특설무대)와 파리나무십자가소년합창단 내한 조인 콘서트를 가졌다. 2006년에는 금난새와 함께하는 음악회에 출연했고(연세대기념관), 2013년에는 독일음악협회 초청으로 쾰른, 뒤셀도르포, 본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특히 쾰른대성당에서의 연주는 동양인으로는 처음 선 무대였다.
어느 무대에 서든지 글로리아소년소녀합창단은 사람들을 열광시켰다. 글로리아소년소녀합창단의 연주를 본 사람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맑고 청아한 목소리다.” “독일에 빈소년합창단이 있다면 대한민국에는 글로리아소년소녀합창단이 있다.” “파리나무십자가단과 구분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오늘 글로리아소년소녀 합창단을 통해서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들을 보았다.” “합창이 주는 빛깔이 아름다워서 그 감동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순수함, 그 자체다.” “어른들로 하여금 잃어버린 동심의 세계를 기억나게 한다.” “다시 듣고 싶은 노래다.”
계광중학교에서 7년간의 교직생활을 끝으로 오로지 합창단에 헌신하고 있는 조선행 장로, 그의 열정에 힘입은 제자들은 세계 곳곳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합창단 1기 출신부터 서울대 음대 성악과에 진학하더니 그 뒤를 이어 세계적인 명문 음악학교인 이태리 로마 산타체실리아음악원, 밀라노 베르디음악원, 미국의 쥴리어드와 독일 프랑크르트 음악대학에서 공부하는 제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아, 글로리아소년소녀합창단이 없었다면, 아니다. 조선행 장로의 헌신적인 열정이 없었다면 많은 음악 영재들이 그 보석을 땅에 묻은 채 평범한 삶을 살았을 것이 분명하다.
조선행 장로가 말한다. “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이 귀국 연주회 무대를 앞에 놓고 초청장을 들고 찾아옵니다. 저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제자들 귀국 연주회에는 참석하는데요, 객석에서 노래를 들으며 울지 않는 때가 없습니다. 정말 감동적이거든요. 남자는 울지 않아야 한다고 하는데 저는 갈수록 눈물이 많아집니다.”
합창단 사역에 자신의 모든 시간을 바치고 있는 조선행 장로, 그가 이끌고 있는 합창단이 소년소녀 합창단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글로리아 콘서트콰이어가 있다. 다음 호에 열정이 가득한 조선행 장로의 음악 이야기는 더 계속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