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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성 함께 쓰기 운동에 관하여
1. 부모성 함께 쓰기의 탄생
여한의사회 편집부는 1996년 11월 발간한 『여한의사 제3호』에서 「아들 낳는 처방활용에 대한 문제제기」라는 기획기사를 통하여 한의사 200여명이 응답한 설문조사 내용을 정리, 발표한 바 있다.
설문에 응한 한의사의 90%가 아들 낳는 처방을 의뢰 받은 경험이 있으며 이들 중 60%가 적극적이던 소극적이던 ‘아들 낳는 처방’을 쓴 경험이 있었다고 답하였다. 한의사에게 아들 낳는 약을 요구하던 사례 중에는 “4녀 출산 후 남편이 외도를 하고 시집에서 박대하여 결혼생활이 파탄날 지경” “아들 없이도 부부금슬이 좋으나 장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신경쇠약이 걸려있다.” “아들 낳기 위해 유산을 20여회 했다.” “4대 독자이므로 첫 아이부터 무조건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경우들이 있었다.
정부는 성비불균형해소와 윤리적인 문제 등을 이유로 지난해에 성감별을 해준 산부인과 의사 몇명을 구속하였다. 그러나 환자들이 위와 같은 ‘절박함’을 눈물로 하소연하며 양·한방 의료인들에 매달릴 때 이를 논리적으로 설득하여 돌려보내는 일이 의료인에게 쉬운 일만은 아니다. 환자들이 중증(重症)의 ‘아들밝힘증’에 걸려있는 이유는 다름 아닌 사회의 법과 제도 속에서 아들이 ‘기득권을 많이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들을 낳아야 그 기득권의 혜택을 부모가 누릴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남녀성비 불균형 해소와 여아선별낙태를 막기 위해서는 법과 제도를 개선하는 정부의 역할이 가장 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에 여한의사회와 사단법인 여성단체연합은 1997년 1월 29일 프레스센타에서 ‘남녀성비불균형의 문제점과 해결방안’이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열고 남아선호관을 부추기는 호주제도 폐지 운동을 전개할 것을 1순위로 하는 10대 과제를 선정하였다.
그러나 토론회 뒷풀이 장소에서 오랫동안 가족법에 관한 연구를 해오신 이효재교수님(정신대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연대 공동대표) 등이 호주제폐지보다 더욱 근본적으로 남아선호를 조장하는 것은 성(姓)씨가 부계로 대물림되기 때문이라는 문제를 제기하셨고 이에 많은 참가자들이 부모성을 함께 쓰는 문화운동을 벌임으로 써 부계성의 ‘신성불가침성’에 도전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에 따라 3.8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하여 연세대학 백주년기념관에서 거행된 한국여성의 날 행사에서 1백70인의 발기인 이름으로 ‘부모성 함께 쓰기’운동이 선언되었다.
2. 한국의 성비불균형 실태
우리나라에 인구억제정책의 일환으로 가족계획사업이 추진된 것은 1962년부터이지만 사업초기부터 출산력 저하나 피임 실천율의 증대에 지대한 저해요인은 바로 남아선호관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서는 출산율이 단기간에 급진적으로 감소되었는데 최신의학기술에 의한 태아의 성감별을 통해 아들을 출산하는 부인의 비율이 증가함에 따라 출생성비(출생여아 100명당 남아수)의 불균형이라는 새로운 문제가 나타나게 되었다.
출생성비는 도시와 농촌의 차이보다는 지리적인 요인에 따라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대구, 경북, 경남 및 부산 지역의 출생성비가 각 시도 중에서 특히 높아서 1994년 현재경북의 출생성비는 124.3이며 특히 대구 부산의 셋 ㎖아이 출생성비는 300:100에 이를 정도로 성비불균형이 심각하다.
1996년 4월을 기준으로 초등학교 1학년의 성비는 113이며 2010년의 신랑감과 신붓감의 성비는 123이며 4살 연하의 신붓감을 구하려 한다면 그 성비는 129가 됨으로써 결혼 풍속도에 심각한 변화가 예상된다. 성폭력이나 매매춘, 포르노 등 성과 관련된 범죄의 증가와 에이즈 등의 성병의 증가도 우려된다.
1994년에 약 3만건의 여아를 기피하기 위한 선별적 인공임신중절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실제 태아 성감별을 위한 의료행위 건수는 약 6만건이 될 터이므로 성감별을 위한 의료비는 건당 평균 50만원으로 과소 추정해도 한해에 약 300억원이라는 의료비가 낭비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남아선호와 성선택 인공임신중절은 남아출산에 대한 가족 및 사회적 압력을 나타내는 문화적 요소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므로 여아낙태에 대한 효과적인 정책은 남편과 부모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며 동시에 가족 내에서 여성의 결정권을 향상시키는 것이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여성은 아들 낳기를 강요받지 말아야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취업, 승진, 임금 등을 비롯하여 경제, 정치, 문화, 사회활동 등 전반에 걸쳐 남녀 차별이 시정되고 기회균등이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자료: 성비불균형의 최근 동향과 대응 방안. 조남훈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부원장)
남성의 가계만을 인정하는 동성동본금혼법이 최근 위헌판결을 받았다고는 하나 아직도 여성에게만 불리한 국적법, 결혼을 양가로부터의 독립으로 인정치 않고 여성이 남성집안의 하부구조로 편입해야 하는 것으로 보는 부가(夫家)입적법, 가정 내의 위계질서를 남성위주로 하여 남존여비, 남아선호를 강력하게 온존시키는 호주제 등 비민주적인 악법 역시 남녀평등을 심각하게 가로막고 있다.
3. 한국의 호주제
「나무꾼과 선녀」는 우리에게 친숙한 동화이다. 사슴은 은혜를 입은 것에 대한 답례로 선녀를 얻는(?) 방법을 나무꾼에게 가르쳐준다. 또 선녀를 확실히 장기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아이를 셋낳기 전까지는 날개옷을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한다. 두 아이를 기르다가 날개옷을 입게된 선녀는 양쪽에 아이들을 끼고 하늘나라로 올라가 버린다.
전 국민에게 친숙한 「나무꾼과 선녀」의 중심인물은 나무꾼과 선녀가 아니라 나무꾼과 사슴이다. 사슴은 자신의 넓적다리나 뿔을 답례로 내어놓지 않는다. 용무가 있어 지상에 잠깐 내려온 선녀를 납치하도록 한다. 또 나무꾼의 안락을 위하여 선녀가 아이를 셋 이상 낳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부자유스러워져야 함을 강조한다. 선녀는 사슴에게는 보은의 수단일 뿐이요, 나무꾼에게는 아이를 낳고 가사노동을 담당할 인력에 불과하다.
선녀의 옷을 훔치도록 하거나 훔친 행위, 오랜 세월 동안 날개옷을 감추어온 행위 등은 전혀 도덕적으로 비난받지 않는다. ‘주체로서의 선녀’는 어느 구석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선녀에 대한 존중, 인정과 배려는 눈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한국의 호주제 역시 그와 같다.
현행 민법은 1958년에 제정되어 1960년에 시행되었다. 그간 일부가 개정되었지만 여전히 호주제도등 개인의 존엄과 양성평등에 배치되는 규정들이 남아있다.
우리나라에 호적이 등장한 것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하고 자기들의 호적제도를 우리나라에 이식한 때이다. 일본은 징병이나 세금징수, 독립군의 색출을 위해 강제로 자기들의 호적제도를 이식했다. (호주라는 말도 일본 용어이다.)
광복 뒤에도 민법은 호주와 가족이라는 장에서 가(家)는 호주와 가족으로 구성하고, 가(家)의 장(長)은 호주이며, 호주는 그 가족을 통솔한다는 일제 식민지 시대에 이식한 일본민법상 호주제도를 그대로 유지하고 호적법은 이것을 한 눈으로 볼 수 있도록 가족원 전부를 호주를 기준으로 기록하도록 하는, 역시 일본 호적제도를 그대로 채용하였다.
원래 구일본 호주제도는 천황지배이데올로기를 구축한 명치절대주의 정부의 정치적 산물이며, 여성을 차별하는 부계혈통의 가부장제도이며, 헌법이 규정한 인간의 존엄과 양성평등에 위반하는 제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주가 대대로 이어가는 호적이 가(家)를 표현하고 호주는 한 가(家)에서 절대적으로 존재해야 하기 때문에 호주제도를 폐지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유림들은 호주제의 존속을 위해 목숨을 걸겠다고 말한다.)
한국의 호적은 호주를 기준으로 편제한다. 호주가 사망하면 호주승계가 발생하고 가족들은 예전 호주와의 관계를 떠나 새 호주와의 관계를 명시한다. 민법은 호주 승계순위를 호주의 아들-딸-배우자-어머니(母)의 순서로 정하고 있다. 좁게는 가족 속에서 아들과 딸의 차별이며 넓게는 남성이 모든 여성에 우선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할머니, 엄마와 딸 넷이 있고 백일된 아들이 있다면 그 아들이 집안을 대표하는 호주가 된다. 나이와 가족 내 위치와 지혜, 경제력 등 모든 것에 우선되는 기준은 性(남성)이다.)
또 혼인으로 부부가 새 호적을 편제할 때는 남편을 호주로 하여 편제하므로 입부혼인(남자가 여성의 호적으로 적을 옮기는 것) 때를 제외하고 여성은 호주가 될 수 없다. 이같은 호주제도에 따른 호적편제는 가정생활에서 남성 우월, 여성 비하의식을 발생시켜 부부평등이나 자녀평등을 실현할 수 없게 할 뿐만 아니라 사회전체로 확산되어 남녀불평등을 초래한다.
그밖에도 자녀의 출생시 아버지 호적에 입적하도록 하고 아버지를 알 수 없을 경우에만 어머니에게 입적하도록 하는 규정, 남편의 혼인 외 자녀의 입적에 배우자인 아내의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 규정, 이혼시 자녀는 당연히 아버지와 함께 호적에 남도록 하는 규정 등 때문에 부부로서, 부모로서의 여성과, 여성의 자녀들은 차별받게 된다.
1990년 민법을 개정하여 호주권한을 대폭 축소했음에도 불구하고 부계혈통주의, 가부장권으로 인한 여성차별은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이러한 호주제도가 존속하고 호적이 이 호주제도를 바탕으로 편제되는 한 이러한 차별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른 나라들은 신분기록제도를 마련한 역사적 배경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호주를 기준으로 편제하는 우리나라 호적제도와는 전혀 다른 방법을 택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호적제도를 이식한 일본도 그것이 헌법상 개인의 존엄과 양성평등 이념, 그리고 민주주의의 질서에 반한다고 하여 폐지하였고 부부와 미혼자녀를 기본으로 하는 호적제도를 창설했다.
중국은 호구등기기관과 혼인등기기관을 따로 두어 호구부에는 가구주와 그 가구원의 출생, 사망, 전입, 전출사항을 명시한다. 부부는 호적에 함께 기재하지 않고 자녀는 원칙으로 모(母)의 호구부에 기록한다.
독일, 프랑스, 영국, 미국 등은 개인별, 사건별 편제방식에 따라 출생, 혼인, 사망의 각 사건마다 각각의 호적부나 증명서를 작성한다. 가족관계를 분명히 하기 위하여 혼인으로 개설된 가족부, 가족대장 등에 부부와 미혼자녀의 신분사항을 기록하기도 한다.
이러한 유럽이나 영미의 호적제도는 호적이 혈통, 가족형태, 가족에 대한 이념이나 가치를 반영하기 위해 탄생한 것이 아니라 교회신자를 파악하거나 헌금을 추산하기 위한 회계장부, 종교탄압을 이용한 중앙집권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가족생활에서 여성차별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성차별을 유도하는 한국의 호주제도를 폐지하면서 대체할 수 있는 개선방안으로는 기본 가족별 호적, 1인 1호적, 개인별 주민등록표를 수정한 호적 등의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문제는 법이나 제도가 어떠한 의미에서든 (성에 의해서 또는 혼인여부 등에 의해서) ‘차별’을 유도해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에 촛점이 맞추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호주제 폐지를 목숨걸고 막겠다고 하는 유림들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씨앗이 중요하며 그 씨앗을 생산하는 것은 남자다. 따라서 남자가 그 가계의 대를 이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과연 그런가.
4.남자는 씨! 여자는 밭?
지난 달 어떤 교육잡지의 만화를 보았다. 다음은 성에 관심을 갖게된 딸과 부모의 식탁 대화이다.
딸 “나두 다 알어! 엄마는 밭이고 아빠는 씨야”
부모 (깜짝 놀라) “얼래, 네가 고걸 어떻게 알어?”
딸 “다 아는 수가 있죠, 씨도 좋고 밭도 좋아야 잘 나오지 뭐”
부모 (놀라며 떠보는) “엄마랑 아빠랑 뽀뽀하면 아기나 나오나?”
딸 “그 정도로는 안될걸요”
부모 (할 말을 잃고 서로 쳐다보면서 땀을 흘린다.)
딸 “동네 전봇대에 다 써있어. 4학년을 우습게 본다니까. 지금이 어느 때야?”(의기양양해 하며 식탁을 떠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의기양양해 하는 4학년짜리 딸의 전봇대 성지식은 틀려도 한참 틀린 것이다. 그녀 뿐 아니라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성지식을 가지고 있다. 남자는 씨, 여자는 밭이라는 말 말이다.
짚신벌레와 같은 하등동물은 암수가 없다. 그냥 쪼개지면 똑 같은 생명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고등생물로 올라갈수록 성은 암·수로 분명하게 나뉘어진다. 많은 과학자들이 왜 생물들은 모두 짚신벌레와 같은 번식의 형태를 취하지 않고 암수의 결합을 통해야만 새로은 생명이 태어나게 되는가를 연구해 왔다. 그들의 잠정적인 결론은 이것이다. “보다 나은 후손을 얻으려고” 생물체는 암수를 나누는 수고와 짝짓기라는 수고를 통하여 각자의 유전자를 나누어 섞음으로써 보다 나은 2세를 얻는 형태로 진화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나누어 섞는다는 것은 바로 짝짓기를 통하여 절반의 유전자를 나누어 가지고 있는 남성의 성세포인 정자와 여성의 성세포인 난자를 결합하게 한다는 것을 뜻한다. 수컷의 유전자 염색체 2n중 절반인 n을 가지고 있는 정자와 암컷의 유전자 염색체 2n중 절반인 n을 나누어 가지고 있는 난자가 만나야 비로서 n+n=2n이 되어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게 된다. 그러니 ‘아빠는 씨, 엄마는 밭’이라고 하는 말은 무식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아빠도 절반의 씨앗, 엄마도 절반의 씨앗’ 이래야 맞는 말이다.
일부 우리나라 사람들은 “동성동본끼리의 결혼은 부도덕한 것이다. 모두 같은 씨앗이므로 형제자매 아닌가? 이들의 결혼을 허용한다면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 밭에 뿌린 씨앗의 위대함을 보아라!!! 남성만이 씨앗을 생산하므로 남자들이 대를 이어야 한다. 아이를 낳으면 아비 성(姓)을 따르게 하고 남자의 조상에게만 차례를 지내야 한다. 남자는 귀하고 여자는 천하다” 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들은 동성동본 금혼 위헌판결에 불복선언을 하고 나섰다.
콩과 팥 등의 씨앗이란 무엇인가? 암술머리에 수술가루가 꽃가루받이를 통해 만나 결과로 생긴 온전한 씨앗이다. 벌과 나비가 그 매개역할을 해주며 따라서 벌과 나비가 없으면 농부가 붓을 들고 인공으로 꽃가루받이를 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씨앗에는 이미 암술의 난핵과 수술의 정핵이 섞여들어 있는 것이다.
여성의 난자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므로 옛날 무지했던 시절에는 남성의 정자(정액)만이 콩과 팥과 같은 온전한 씨앗이라고 잘못 생각하였다. 아니 생각만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21세기를 코 앞에 둔 시점에도 국적법(외국인과 결혼한 한국 여성에게만 불평등을 강요하는), 호주제, 부가(부가)입적법-결혼하면 여성의 호적을 파내어 남성집안의 호적으로 입적시키도록 한 법-등에 시퍼렇게 살아남아 그 무식의 칼을 휘두르고 있다.
남존여비, 남아선호는 이같은 무식에서 출발한다. 잘못된 ‘전봇대 지식’이 일년에 3만명에 달하는 여자태아들을 성감별 후 살해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남자만이 가계의 대를 잇는 중심이 되어야 하며 아버지의 성씨만을 자식에게 물려주어야 한다는 것은 모두 이렇게 무식에서 출발한 강박감 때문이다. 이렇게 무식에서 출발한 강박감은 어떻게 해소될 수 있을까? 바로 부모성 함께 쓰기에 그 답이 있다.
5. 부모성 함께 쓰기의 필요성과 의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성씨’를 신성불가침하거나 절대불변의 가치인양 생각한다. 더욱이 결혼 후 ‘남편 성씨를 알뜰히 따르려는’ 외국여성들과 달리 한국 여성들은 성을 바꾸지 않으므로 ‘세계적인 특전’을 누리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국 청년이 군대를 갔는데 웬 낯선 여인으로부터 편지를 받게 되었다.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가슴을 졸이며 뜯어본 편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컴퓨터 통신에 올라온 이 이야기는 한국여성이 ‘세계적 특전’을 누린 것이 아니라 그동안 성은 고사하고 이름조차 잊혀진 채 살아왔다는 것을 말해준다. 아이의 출생신고도, 이사 후 전입신고도 주부의 이름으로는 불가능했던 것이 그간의 사정이 아니었던가?
(남편이 혼외 자식을 낳았을 경우 아내의 동의 없이도 자신의 호적에 올릴 수 있는 이상한 법은 아직도 대한민국에 건재하다. 아내가 혼외 자식을 낳았다면? 아마도 이혼 당하고 아기와 함께 집에서 겨날 것이다. 여성이 자신의 이름이 호주로 되어있는 호적에 자기가 낳은 아이를 입적시킬 수 있는 경우는 ‘사생아’라는 것이 사회적으로 인정되었을 경우, 또는 아내의 호적에 남편이 입적하는 입부혼(入婦婚)일 경우 밖에 없다.)
한국 여성의 인권은 왜, 언제부터 이렇게 하락되었을까?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왕권강화를 위해 관료들을 회유해야 했다. 그들에게 부역 등 세금을 징수할 권리를 주자니 백성들이 남성중심의 가계로 정리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이성계 이후의 왕들은 그간 지속되어온 장가가는 관습을 시집가는 관습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무수한 칙령을 내렸으며 (태조, 태종, 중종실록) 이러한 노력에 의해 이조 중기에 이르러서야 ‘시집가는’ 혼례풍토가 전국에 걸쳐 자리를 잡았으며 이후 여성의 인권은 급격히 하락되었다.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가부장적인 유교논리와 맞물리면서 ‘삼종지도’(어려서는 아버지를, 커서는 남편을, 늙어서는 아들을 섬기라는) ‘7거지악’(아들을 못 낳으면, 시부모에게 공손치 못하면, 질투를 하면, 나쁜 병에 걸리면....쫓아낸다는)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시집가면 눈 가리고 3년, 귀 막고 3년, 입 막고 3년’ “굶어 죽는 것은 지극히 작은 일이나, 정절을 잃는 것은 지극히 큰 일이다.(주자, 『근사록』)” “무릇 여자는 하품을 하지말며, 큰 소리로 웃거나 말하지 말며, 눈을 크게 뜨지 말며, 다리를 뻗지 말며…….(이퇴계, 『계녀서』)” “여자에게 글을 가르치면 폐해가 무궁하리라. (이퇴계, 『규중요람』)”등의 길들임이 수백년간 지속되었다. 이조 중기 이후 2~300년간 여성은 철저히 남성사회에 종속되어 ‘희생양’으로 살 것을 강요당했던 것이다.
이러한 여성에 대한 억압의 역사는 현대로 넘어오면서 ‘혁명적인 과정’을 걸쳐 비판되고 수정되지 못했다. 현재 한국의 GNP가 세계 11위를 자랑한다면서도 한국여성의 사회권한척도가 116개국중 90위를 차지한다(’94년 UN 발표)는 것은 바로 이러한 지독한 성차별적인 가부장문화가 불식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부장적인 유교문화가 강하게 남아있는 영남지역의 출생 성비불균형이 전국에서 가장 심각한 것도 그러한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아들밝힘증’을 앓고 있는 이유는 아들을 통해 ‘대를 잇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자라는 것이 반쪽의 씨앗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른채 아들만이 ‘온전한 씨앗’을 생산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 가정해 보라. 일본인과 한국인이 함께 사는 나라에서 직장과 사회에서 일본인이 주도권을 잡고 있으며 결혼을 하면 한국인은 일본인 집안의 호적으로 옮겨 들어가야만 하고 일본인 집안의 조상만을 위한 제례를 한국인이 준비해야 하고, 아이를 낳으면 일본인의 성만을 물려주게 한다면 그 사회 전체 구성원은 일본인만 골라서 낳고 싶지 않겠는가?(한국에서 남성과 여성의 역할분담은 이다지도 굴욕적이다.)
이러한 성차별적인 가부장문화는 앞에서 여러 차례 지적했듯이 남자만이 새 생명이 될’온전한 씨앗’을 생산한다고 하는 ‘무식한 강박감’에 의해 지탱되어 왔으므로 새 생명의 탄생에 부단히 섞여 들었던 ‘절반의 씨앗’인 모계의 난자의 존재의미를 부각시키는 것은 가부장문화를 깨는 ‘위력적인 도전’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부모성 함께 쓰기 운동’에는 현재의 비민주적이고 불평등한 남성중심 사회를 양성중심의 사회로 변화시키려는 치열한 노력이 배어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