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용 사진 작업을 할 때 그는 정우성과 이정재를 모델로 한 그림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정우성이나 이정재에 전혀 밀리지 않으시는데요”라는 말에 그는 쑥스러운 듯 표정을 짓더니 이내 다시 능숙하게 포즈를 잡는다. 카메라 앞에서의 이 자연스러움은 오랜 훈련 탓이다. 강강훈이 그리는 인물화에는 작가 스스로의 모습이 꽤 있다. 카메라 앞에서 스스로 모델이 되어서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려 왔다. 이것은 후에 다른 모델들과 작업을 할 때 연출자로서 모델에게 무엇을 요구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보통 한 모델에 100~500컷의 사진을 찍고 그중에서 가장 자신의 생각에 맞는 단 한 점을 골라서 그것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린다. 그의 작품 앞에 서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것은 그림입니다”라고 말해 줄 때까지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모른다. 오히려 이게 사진이 아니었느냐고 반문하기 일쑤다. 첫 개인전을 하는 작가라고는 믿을 수 없는, 완숙한 테크닉으로 그린 작품들이다.
전시장에는 의외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인물들이 눈에 띈다.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 영화배우 노주현, 정우성, 이정재, 인테리어 디자이너 김치호가 그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강강훈의 작품을 위해서 연기하고 있는 인물들이다. 이 인물들은 패션 디자이너 이상봉을 제외하고 모두 검은 슬리브리스 티셔츠에 목에 타이를 하고 있다. 넥타이란 작가 강강훈이 말하는 ‘모던 보이’들에게 요구되는 어떤 사회적인 틀을 상징한다.
“나의 주제는 현대인이 가지는 문제에 관한 것이다. 현대인이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삶을 살기 쉽다. 그들이 찾고 싶은 것, 잃은 것, 잃어버린 꿈,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일탈의 욕구 등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모던 보이’는 결국 현실 속에서 좌충우돌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다.
최근의 한국미술에서 가장 눈에 띄는 흐름은 젊은 작가들에 의한 극사실주의적인 그림들이었다. 미술시장이 활성화되고 초보 컬렉터가 많이 유입되면서 그들의 기호에 맞게 이해하기 쉬운, 극사실적으로 ‘잘 그린 그림’이 선호되었다. 그러나 잘 그리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그 그림들이 진정한 예술의 반열에 올라서려면 매우 중요한 한 가지가 더해져야 한다. 그것은 그 그림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 그림이 전하는 메시지의 예술적인 타당성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그냥 손기술 좋은 그림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강강훈의 작품은 메시지가 분명하고, 그림 속의 여러가지 요소들이 서로 충돌하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상상력을 증폭시키며 성찰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좋은 그림이다. 그의 그림은 증명사진처럼 인물의 얼굴과 어깨 정도의 상반신만을 그린다. 여기에 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모두 담아야 하는 것이다.
“인물들에게 부과된 소품과 표정 연출은 공상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전달하는 방법은 리얼리즘적이다. 이렇게 비현실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이 충돌하면서 생기는 아이러니는 현대인들이 좇는 꿈과 그것을 추구는 하지만 결국 찾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아이러니와 오버랩된다고 느낀다.”
그가 설명하는 대로 그림 속 인물들은 모두 삶의 특수한 순간을 보여준다. 머리에 잘려 나간 검은 뿔과 이마의 상처를 드러낸 <검은 루돌프 III>를 보자. 작가에 따르면 루돌프는 진실의 뿔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순수하고 목적성 없는 것이었는데, 이 순수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잘리고 피를 흘리게 되었다고 한다. 잘려 나간 뿔, 성탄절 장식용 방울 목걸이, 이마의 상처 등의 분장을 한 모델의 얼굴에는 그간 쌓인 피로감이 누적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순응적이고 온유하기만 하다. 세상의 몰이해에도 여전히 착하게만 사는 사람의 얼굴을 보는 듯해서 영 불편하고 내가 미안해진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진실과 상처를 보면서도 때로 못 보는 척 지나쳐 오지 않는가.
순간순간 포착된 표정에서 의미 끄집어내
두 벽에 나란히 있는 영화배우 정우성과 이정재를 모델로 하고 있는 작품들은 맹목적인 대결 구도에서 억지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들은 서부 영화의 주인공같이 대결을 앞둔 적 앞에서 으쓱대는 듯한 표정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넥타이에는 카드가 꽂혀 있는데, 패가 모두 드러난 이 카드에는 스페이드 문양이 하나씩 지워져 있다. 이미 승패가 결정되어 있는데도 무모하게 도전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런 무모한 목표 설정과 경쟁적인 삶의 귀결을 그린 것이 <타깃>이라는 작품이다. 작가가 직접 모델이 된 이 그림에서 타깃은 그의 이마에 그려져 있다. 그러나 명중한 곳은 다름 아닌 모델의 오른쪽 눈 안경이다. 깨진 안경 뒤의 공허한 눈빛과 망연자실한 표정은 우리가 날리는 수많은 오발탄들을 연상시킨다. 얼마나 많은 헛발질과 헛손질들을 하며 하루하루 무언가를 했다는 만족감만으로 살고 있는 것인가. 신랄하면서도 재치 있는 그림이다. 솜씨가 뛰어나다는 의미 이상으로 잘 그린 작품들이다.
그는 철저하게 준비하고 이론적으로 무장되어 있는 작가이다. 그가 인물화를 그리는 이유는 “사람의 표정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진 작업을 통해서 순간순간 포착된 표정을 잡아내고 그 의미를 끄집어내는 과정이 너무나 흥미롭기 때문이다.” 그는 인물화를 극사실적으로 그리기로 하고 미국작가 척 클로스에 대해서 석사 논문을 썼다. 자신의 그림이 극사실주의로 분류된다면 당연히 그 사조의 창시자인 척 클로스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이 존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똑같이 재현하는 것을 넘어서 시대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는 자신감 속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진은 200분의 1초 만의 표정을 잡아내지만, 그림은 이 사진을 바탕으로 3주에서 한 달간의 길게 풀어 나가는 과정이다. 그는 “이 과정에서는 붓 터치 하나하나가 소중해진다. 그림 속에 방 안의 정취가 담기기도 하고, 날카로운 신경쇠약의 순간이 담기기도 한다. 그림을 그리는 이 순간은 정성에 대한 시간적인 기록들이다”라고 말한다. 사진 같은 정밀함과 회화적인 손맛이 동시에 느껴지는 이유다.
개인전을 갖기도 전에 그의 작품은 상하이 아트 페어, 홍콩 아트페어, 키아프 등 국내외 미술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박여숙 화랑에서의 첫 개인전에서도 폭발적인 관객 반응을 얻었다. 젊은 작가답지 않은 성숙한 모습은 그의 철저하고 오랜 준비 과정의 결과였다. 독일의 베를린 화랑협회 레지던스 프로그램에도 참여했는데, 전통적으로 표현주의적인 색채가 강한 프로그램에서 극사실주의적인 그림을 그리는 그의 작품이 발탁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좋은 그림은 어디에서건 통하기 마련이다.
사진 : 이창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