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번에는 동천왕(東川王)이 천도한 평양성(平壤城)의 위치에 대해서 고찰해 보겠습니다.
동천왕(東川王)은 고구려 10대 신상왕의 아들로서 제11대 왕으로서 동양왕(東襄王), 또한 이름은 ‘우위거(憂位居)’ 또는 ‘위궁(位宮)’ 이라 불립니다. 생몰년도는 209∼248년, 재위 년도 227∼248년으로 위(魏)나라와의 전쟁에서 관구검(毌丘儉)의 침략으로 평양성(平壤城)으로 도읍을 옮기게 됩니다.
동천왕의 평양성(平壤城)의 위치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전혀 위치를 잡지 못하는 위치입니다.
처음 동천왕의 평양성의 위치에 대해서 박창범 교수의 고구려 수도의 천문 관측 위치와 분명 관련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동천왕은 단군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으며, 삼국사기의 내용을 보면 서기 246년 동천왕과 전쟁을 벌인 위나라의 관구검을 피해 북쪽으로 이동한 흔적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동천왕은 비류수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나, 이후에 패배하여
압록강의 수원지로 추정되는 압록원(鴨淥原)으로 달아 났다는 기록, 이후 환도성이 함락당하고 남옥저로 달아났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 압록은 고대의 압록강 난하로 추정됩니다.
王以一千餘騎, 奔鴨渌原...王奔南沃沮, 至于竹嶺
왕이 기병 1천여 기(騎)를 거느리고 압록원(鴨淥原)으로 달아났다...왕이 남옥저(南沃沮)로 달아나 죽령(竹嶺)에 이르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髙句麗本紀), 동천왕(東川王) 246년 조
이 남옥저의 기록에 대해서, 다른 사서를 보면 그냥 옥저라고 한 기록도 있으며 이후에 숙신의 남쪽 경계까지 이동했다는 기록도 나옵니다. 또한 오환선비동이전의 동옥저 조를 보면 옥저를 달아나서 최종적으로 숙신, 읍루와 접해있는 북옥저까지 피난한 것으로 보입니다.
儉復討之, 位宮輕將諸加奔沃沮
무구검이 다시 고구려를 치니 위궁이 가벼운 차림으로 (황급히) 제가(諸加)를 거느린 채 옥저로 달아났다.
《양서梁書》 동이열전 고구려 조
過沃沮千有餘里. 至肅愼南界.
옥저를 지나 천 리를 넘어 숙신의 남쪽 경계에까지 이르렀다.
《한원翰苑》
毌丘儉討句麗, 句麗王宮奔沃沮, 遂進師擊之. 沃沮邑落皆破之, 斬獲首虜三千餘級, 宮奔北沃沮.
관구검이 구려를 치니, 구려왕 궁(동천왕)이 옥저로 향했으며, 끝내 군사가 진격해 공격했다.
옥저의 읍은 파괴되고, 잡은 포로 삼천여급의 머리를 베니, 궁은 북옥저로 피했다.
《오환선비동이전》동옥저 조
이런 기록들을 유추에 보면 남옥저는 옥저를 말하는 것이며 또 이동하여 숙신의 경계에 있는 북옥저로 피한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북옥저의 위치에 대해 《삼국지》 『위서』 「동이전」 에서는 읍루와 접해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北沃沮一名置溝婁 去南沃沮八百餘里 其俗南北皆同 與挹婁接
북옥저는 치구루라고도 불린다. 남옥저에서 8백여리의 거리에 있으며, 그 풍속은 남과 북이 같으며, 읍루와 접하였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이를 종합적으로 검토해 보면 동천왕의 이동 경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후에 247년 봄에 환도성으로 전란을 겪고 다시 도읍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평양성(平壤城)을 쌓고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고 이때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王儉)의 땅이다. 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삼국사기의 이 기록을 토대로 중요한 내용은 압록의 수원지로 볼수 있는 압록원의 이동 기록과 옥저로 이동한 기록, 평양성을 쌓고 종묘과 사직을 옮겼다는 기록, 이곳이 선인 왕검(단군 왕검)의 땅이라는 기록입니다. 저는 이 기록을 통해 동천왕이 고조선의 평양성 위치에 수도로 삼았다고 추정합니다.
최근에 고조선의 수도 위치를 고민하면서 고대 압록강의 동쪽 혼동강(속말수) 북쪽에 진한의 수도 아사달이 위치해 있음을 알게되었습니다. 결국 이 내용와 연결해 보면 바로 진한 수도 아사달의 위치가 동천왕의 평양성으로 비정할수 있습니다.
실제 문헌 기록으로 동천왕은 단군(檀君)과 연관되어 있는 인물이며 따라서 이곳을 동천왕의 평양성 위치로 비정할수 있습니다. 또한 이곳 파림좌기(巴林左旗)에서 고구려 성터가 발견되었습니다. 즉 이 고구려 성터가 동천왕의 평양성으로 생각됩니다.
나는 꽤 오래 전에 내몽골 파림좌기(巴林左旗)란 곳을 답사한 적이 있었다. 저녁 무렵 오토바이를 개조한 세발 택시를 탔는데, 내가 한국에서 온 것을 안 기사가 느닷없이 “여기에 고구려 성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이른바 강단사학계는 고구려는 지금의 요하를 건너지 못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광개토대왕이 정복한 곳 중에 염난수라는 곳이 내몽골 시라무렌 강이라고 아무리 주장해도 한국 강단사학계의 부동의 정설인 ‘한국사 강역 축소론’에 따라서 ‘믿지 않겠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택시기사에게 부탁해서 가보니 ‘아! 거대한 토성이 있었다’. 다음날 길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도 모두 ‘고구려성’이라고 답했다. ‘어떻게 아느냐?’는 질문에 ‘조상 대대로 그렇게 전해졌다’는 것이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historyin.org)
고구려는 수도의 위치에 별자리를 관측하는 기구를 두어 관측을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요.
『세종실록(世宗實錄)』 권154 지리지에서 고구려의 도읍으로 보는 평양부를 설명할때 '성 안에는 9개의 사당과 9개의 못이 있는데, 9개의 사당은 바로 9가지의 별이 날아 들어간 곳이며, 9개의 못 옆에는 첨성대가 있었다.'
이런 여러 기록들과 유적의 증거를 통해 이곳이 동천왕이 천도한 평양성의 위치로 생각됩니다.
천문 관측 위치에 대해서는 1차 천문관측 위치를 참고 하여, 태백산이 있다고 보는 이륵호리산으로 추정하였습니다.
박창범 교수의 천문 관측 위치를 보면 이륵호리산의 위치와 대략적으로 일치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데요. 이륵호리산은 실제로 대흥안령 산맥의 상단에 위치해 있습니다. 즉 이 대흥안령 산맥으로 길게 뻗어 있는 산이 길다는 의미의 길장(長)을 쓰는 고대 지도에 표기되어 있는 장백산(長白山)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결론적으로 파림좌기(巴林左旗) 부근이 고조선의 진한의 평양성(平壤城)과 고구려 동천왕의 평양성(平壤城), 발해의 중경 현덕부(中京 顯德府), 금나라의 상경 회령부(上京 會寧府)가 있었던 곳으로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