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 자처럼 생긴 글자가 무슨 글잔가?
-가장귀 아.
-가장귀?
-나뭇가지 갈라진 부분을 가장귀라고 해.
그걸 보고 만든 상형문자야.
가장귀 지게 땋은 머리나 그런 머리를 한 여자 아이를 말할 때도 있어.
일종의 환유법인 셈이지.
-오오, 그렇군요.
유식 군자랑 함께 사는 덕을 단단히 봅니다.()
-별 말씀을. 우연히 아는 것이라 대답한 것일 뿐이지요.()
........................
이상적인 대화다.
현실은 이상과는 달라
대화가 이처럼 고상하게 이루어지지는 못했고,
자전을 찾아보고
국어사전까지 찾아보며 부산을 떨어야 했다.
어쨌거나 그 덕분에
가장귀 '丫' 자를 똑똑히 알게 되었다.
옛글에서는 주로
집안일에 부리던 여자 아이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
외갓집에도 이런 丫가 있었다.
나보다 예닐곱 살이 많았던 순남이 언니.
아마 전쟁통에 고아가 되어
외갓집에서 거두어 먹이며 심부름을 시켰던 것 같다.
박복한 팔자가 그대로 드리워
그러지 않아도 곱지 않은 얼굴은
늘 찡그린 표정이었고
언제나 짜증이 밴 몸짓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잘못이다.
찡그린 얼굴이 팔자 탓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외갓집으로 말하면
할머니 세 분에 나랑 동갑의 왕고모 할머니와
젊은 외삼촌 내외,
그 밑으로 외사촌들이 두 살 터울로 줄줄이 태어나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대가족이었다.
게다가 행랑채에는 머슴이 늘 서너 명은 있었으니
그 어린 것이
그 많은 식구들 사이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채이며
식모살이를 하느라
어느 하루라도 제대로 숨 돌릴 날이 있었을까.
사는 게 무슨 재미가 있어
좋아라 하고 웃어 보았을까.
운명을 바꾸어 보려고 결심했이라도 했던 듯
어느 봄날 순남이 언니가 가출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한 철도 못 넘기고 도로 돌아왔다.
어디서 무얼 하다 왔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미루어 생각하면
그때부터 언니 표정이
한 김 쐬고 난 호박잎처럼 풀이 죽었던 것 같다.
그 후 몇 년을 더 외갓집에서 살다가
머슴과 결혼을 하여 살림을 나갔다.
순남언니 결혼식은 외갓집에서 치렀다.
안방에서 원삼족두리를 곱게 차려입고
연지곤지까지 다 찍고 대청으로 나와
섬돌에 내려서려던 순간,
새색시가 신을 신발이 없었다.
그전 장날에 미처 새신을 준비하지 못했던 것.
그 순간 대청에서 언니가 다리를 쭉 뻗고
어른들 표현을 빌자면
'거심을 지기며' 울고 또 울었다.
시집 가는 날,
새 신발도 못 신는
자신의 팔자를 탓하는 넋두리에
둘러섰던 사람들이 낯을 들지 못했고,
새 신발을 사 놓아야 할 책임이 있었던
외할머니는 좌불안석이었다.
한참을 달랜 끝에 결국 언니는
꽃신이 아닌
흙 묻은 고무신을 젖은 걸레로 닦아 신고
눈물 자국 난 얼굴로 혼례를 치렀다.
같은 모임의 형님 중에
정안 시골 마을에서 자란 분이 있다.
이 형님 자란 이야기가 듣는 재미가 있는데
어떨 땐 가슴이 찡하다.
이 형님도 결혼식날 사연이 있었다.
집에서 혼례를 치렀는데
결혼하는 날 아침에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물 긷고 밥 짓고 소여물 끓이느라
혼례 채비할 시간이 없었다고 했다.
결국 아궁이 불 때다가 구멍이 난 치마를 갈아입을 사이도 없이
그 위에다 혼례복을 입은 채 혼례식을 치렀다고 했다.
그래도 그 형님은 남의 집살이가 아니었으니
아쉬움은 있었을지언정
설움이 북받치는 정도까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내 어렸을 적에는 수양딸 보낸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렸다.
한 입 먹이기도 힘이 들어
딸들을 식모살이로 보내는 집이 많았다.
그렇지 않으면 초등학교 마치자마자
편물점이나 공장으로
돈벌이를 나가거나 집을 떠났다.
내가 자란 비산동 357번지,
골목길을 함께 썼던 예닐곱 집 가운데서
중학교를 간 여자로는 내가 유일했다.
한번은 편물점에 다니던 옆집 언니가
올이 풀어지기 시작한 내 '독구리'를 보고서는
편물바늘로 코를 바로잡아 준 적이 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요술같은 일에 신기해했던 기억이 난다.
그 언니들은 다 무얼 하고 있을까.
공장에 다니고, 버스 차장을 하고, 식모살이를 하며
집안살림을 보태고
남동생이나 오빠를 뒷바라지했을 언니들.
그런 언니들 가운데 몇몇은 기가 막히게 '성공'하여
중앙 무대에서 원없이 활동하고 있지만
대다수 언니들은 자식에게조차 그런 '과거'를 말하지 못하고
전생의 일인 듯이 잊어버렸거나 잊은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어정쩡한 소설보다는
이런 언니들의 이야기가
어떤 형태로든 소개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사실은 그런 것들이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 삶과 연결된 뿌리들이다.
자식들이
부모의 이야기를 알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한다면
후세에게 무엇을 전해 줄 수 있을 것인가.
역사란 것도 어차피
선택적인 편집과 기억의 결과이겠지만 말이다.
가장귀 丫 자를 찾아보다가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옛날의 수많은 丫들을 생각했다.
어떤 아줌마 내지 할머니가
어렸을 때 '식모살이를 했다'고 떳떳이 말하고
그때 살았던 이야기를
후손들에게 조근조근 들려주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런 것이 바로
자기가 쓰는 자신의 역사가 아닐까.
후손 또한 그 이야기를
부끄러운 사실로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다시금 생각해 보는 계기로 받아들이며
사는 일에 좀 더 숙연해지는
그런 장면을 보고 싶다.
(2008. 8. 14)
2009. 홍차 |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와이'자가 아니라, '아'자를 보다가--로 읽어야 하는군요. 비산동은 나도 3-4살 무렵, 아님 4-5살인지도모르겠으나 잠시 살았었죠.
오오 그래요? 만날 뻔하다가 비껴 가고 비껴 가다 만나고~
의진이...여섯살 때 나의 친구. 20여년이 흘러 찾아갔었는데 서울로 이사갔다고만..ㅎㅎ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