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적'에 이어 '문진'에 대한 단상(斷想)을 올려 봅니다. 다음은 '벼루'에 대한 글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문진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책장 또는 종이쪽이 날리거나 넘어가지 않도록 눌러 놓는 문방구의 하나.
그러나 이 작은 도구는 대체로 두 가지로 명칭이 구분된다.
먼저, 동·서양 모두에서 옛날부터 쓰여 왔던, 책이나 종이를 눌러 두는 도구이다.
그리고 붓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종이를 눌러 놓는 도구이다.

중국에서 종이가 발명된 때가 기원 전후 시기이니 이때부터 문진도 자연스레 만들어져 쓰였을 것이다. 초창기에 글을 쓰다가 종이가 바람에 날려 곤욕을 몇 번 치르고는 곧바로 돌이나 나뭇가지 등을 얹었던 것이 문진으로 발전된 듯 하다.

문진의 모양은 길쭉한 것, 동그란 것, 납작한 것 등 여러 가지 형태가 있으며, 용·두꺼비·호랑이 등 동물의 모습이나 산천 등을 조각하여 아름답게 꾸민 것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가지 모양에 따라 명칭이 따로 있지는 않다. 크기와 모양이 각양각색인데 대개 우리나라에서는 자(尺)의 모양으로 길쭉한 것을 많이 애용하였다. 중국에서는 이러한 문진을 압척(壓尺)이라고 불렀다. 재질을 보면 돌·나무·수정·옥·은·동·놋쇠 등이 주로 쓰였으며, 무쇠로 만들어 가죽을 씌우는 경우도 있었다.
종이로 된 책이나 문서가 세상을 이끌어 가던 시대에는 이 문진이 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러나 종이를 컴퓨터 화면이 대신하고 붓이나 펜의 기능을 키보드나 마우스가 대신하는 오늘날에 와서 문진을 책이나 종이에 얹어 사용하는 예는 보기가 매우 드물다. 그저 기념품으로 주고 받거나 장식용으로 책상에 두고 완상할 따름이다. 해외 여행 중에 기념품 샵서 꽤 보기 좋은 문진류를 발견하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나라는 아직 이런 종류의 관광 기념품이 드문 편이다.

* 좌로부터 호박모양 크리스탈 문진, 시계 문진, 상패용 문진
문진이 실용적인 형태로 계속 쓰이고 있는 곳이 바로 서예와 동양화 분야이다. 화선지를 문진으로 눌러 두지 않으면 글씨나 그림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장식품이 아니라 필수품 대접을 받는다. 서예 도구를 준비할 때 빠지지 않는다.

* 작자 미상, 물고기 문진
문진은 종이를 누르는 도구인데, 가끔씩 '누른다'는 뜻에 큰 의미를 두어 생각하여 본다. 우리 일상에 '누른다'는 의미가 '분한 감정을 누른다', '욕정을 누른다' 등과 같이 '나를 다스리고 순화시킨다'는 말에서 보여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문진'의 한자를 살펴보니 '文鎭'인데, 이 '鎭'자가 누를 진, 진정할 진이라서 '진압(반란 따위를 가라앉힘)', '진통(아픔을 달램)', '진화(불을 끔)'등에서 쓰이는 글자이다. 그래서 나름대로 '문진'을 해석해 보니, '글을 쓸 때 누르는' 도구이기도 하지만(원 뜻), '글로써 (마음을) 누르는' 도구, 또는 '글을 쓸 때 (마음을) 달래는' 도구라고도 해석할 수도 있지 않겠냐는 생각이 든다.

* 청화분청 문진(조선초기)
나는 성격이 급하고 생활리듬이 빠르게 돌아가는 편이라서 서예를 쓸 때 조급함이 글씨를 망칠 때가 많다. 그래서 서예를 시작하고 나서 한 10분 이상 지나야 마음의 안정을 찾아 글씨가 좀 제대로 되는 편이다. 그뿐 아니다. 글씨 연습이 제대로 성과가 나지 않거나 생각한 대로 글씨가 되지 않을 때 마음 속에서 안타깝고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글씨 쓰기가 제대로 되기 위해서는 그만한 마음 준비와 성실한 자세가 있어야 됨을 어찌 모르겠는가? 도구와 종이를 정확히 바로 놓은 뒤에 정돈된 마음으로 화선지 빈칸을 보면서 미리 글씨의 순서와 필기 방법, 획의 방향 등을 살피고 먹의 양이나 집필, 운필 등의 여러 자세 등도 제대로 가다듬은 다음에 하면 틀림없이 좋은 글씨가 쓰여진다는 것을 다 알면서 매번 그것을 잊어버리고 놓쳐 버린다.

* 여러 가지 모양의 서양 문진들
고등학교 시절, '흑마'라고 불리는(얼굴이 새까매서) 체육선생님이 계셨다. 그 때에는 대학 입시의 하나로 체력장을 치렀는데, 우리보고 항상 이런 말씀을 하시며 격려하셨다. "다른 시험은 정답이 없지만, 체력장 시험은 이미 정답이 나와 있다. 정답이 있고 치루는 방법도 아는 이 시험을 왜 잘 치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이미 그 정답을 알고 있다고 해서 그렇게 다 된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굳은 의지력과 체력, 그리고 수많은 훈련이 바탕이 되어야 그 정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그 선생님은 당신 말씀에서 은근히 강조하셨던 것이다.
매주 월요일 서실에서 거의 똑같은 실수나 타성에 빠지고, 또 선생님께 똑같은 지적을 받는다. 가장 많이 받는 지적이 '자세'와 '기본 필법'이다. 서예 시작한 지 이미 계절이 세 번째로 접어들었건만 아직도 완벽하게 자세와 기본 필법을 익히지 못한 것이다.
서예를 시작하면서 다시 책상 위의 문진을 바라본다. 서예를 처음 시작할 때에 물품을 구입하면서 덤으로 주어진 작은 네모 막대기 문진, 이 문진을 종이에 바로 놓고 심호흡을 하며 자신을 다시 추스려본다.

* 전통 서각으로 만든 나무 문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