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 뒀더라? 기억을 더듬으며 집안 여기저기 서랍을 열어본다.
한참 만에야 잡동사니를 담아둔 바구니 안에서 종이로 만든 납작한
바늘쌈지를 발견한다. 단추가 떨어졌다거나 원피스 아랫단이 조금
뜯어졌다거나 하는 등속의, 소소하지만 꼭 손보아야 했던 어떤 필요에 의해 어느 날 바늘은 내게 왔을 것이다. 무언가 긴요한 필요에
의해 호출당한 바늘은 임무를 마치면 곧 기억에서 잊혀진다. 탁자나 침대처럼 특정한 공간을 점유하기에는 너무도 작고, 숟가락이나
도마처럼 생활 속에서 늘 사용하게 되는 사물에 비하면 너무도 미미한 기억밖에는 지니지 않았고, 손톱깎이나 면봉처럼 작지만 주기적인 소용을 갖는 것에 비하면 바늘의 소용은 너무도 불규칙한 것이어서 그 존재는 자꾸 사라진다.
자꾸 사라지는 존재. 그러나 바늘을 호출해야 할 때는 거의 언제나
바늘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안 되는 일들이다. 침대가 없으면 소파에서 잠을 잘 수도 있고 도마가 없으면 접시에 대고 사과를 썰 수도
있지만 떨어진 단추를 다는 일은 바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뜯어진 아랫단을 맵시나게 공그르기할 수 있는 것도, 그리고 살갗 바로
밑에 예리하게 박힌 아주 작은 가시를 뽑아내는 것도 바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바늘을 뽑아 든다. 어디에서 박혔는지 모르는 가시가 왼손 셋째손가락 끝에서 욱신거린다. 가시가 살 속으로 숨어들어올 때는 거의
이런 식이다. 조용히, 소문 없이 감각을 깨운다. 조심스럽게 손끝의
살갗을 헤치고 가시를 빼낸다. 한참 만에야 예리한 바늘 끝에 묻어나온 아주 작고 날카로운 가시. 가시와 바늘은 닮은 구석이 있다.
가시를 휴지에 싸서 버린 후 바늘을 쌈지에 꽂으려는데 초인종이
울린다. 서둘러 문간으로 나가 방문객을 확인한 후 돌아온다. 이런,
바늘이 어디 갔지? 그새 숨어버린 바늘을 가만가만 찾는다. 혹시나
밟지 않게 조심하면서.
숨기 좋은 몸
바늘은 가볍고 작다. 미미하다. 그런데도 바늘은 종종
위험한 무엇인가로 분류된다. 작은 단추 하나가 떨어져 눈에 띄지 않는다면 찾다가 포기할 수도 있지만 바늘의 경우는 다르다. 찾아서
어딘가에 꽂아두어야만 찜찜하지 않다. 바늘에게는 그
외연이 야기하는 기묘한 공격성의 이미지가 있다. 중학교 시절 가사시간에 부주의하게 바늘을 잃어버리곤 하던 아이들에게 선생님이 좀
과장된 뉘앙스로 들려주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잃어버린 바늘이 있었단다. 어느
날 그 바늘에 사람이 찔렸단다. 살 속으로 파고든 부러진 바늘끝이 혈관을 타고 순식간에 심장에 꽂혔단다…
날카로운 바늘 끝이 피와 함께 돌다가 심장을 찔렀다는 그 얘기는 정말로 심장이 따끔거리는
듯한 통증을 유발시키는 것이어서 바느질을 배우던 가사시간이 끝나면 가장 먼저 바늘을 챙기곤 했다. 바늘이 야기할 수도 있는 상처, 그것은 둔중한 무엇인가가 유발할 수 있는 통증과는 전혀 다른
몹시도 신경질적이면서 단번에 급소를 찔러오는 치명적인 아픔을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바늘에 찔려 죽은 사람을 실제로 본 적도 없으면서 바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지니게 된 마음의 경로에는
날카로운 바늘의 생김새가 주는 다소 과장된 공격성이 있다. 그리고, 숨기 좋은 몸을 지닌 바늘에 대한 기묘한 두려움이 있다. 바늘은 잘 숨는다. 작고 날렵하고 가벼운 바늘의 몸은 자기의 흔적을 감추기에 안성맞춤이다.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기이한 공포를 느낀다. 배후, 라는 말은 그래서 은밀하고도 지속적인 긴장을 유발한다.
그러나 그것은 숨은 자를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이다. 날카로운 생김새가 유발하는 공격적인 이미지가 바늘의 외연을 이룬다면 바늘의 내면은 의외로 내성적이며 수줍음을 많이 타는 듯하다. 바늘은
은자(隱者)다. 바늘은 발언과 꿈을, 현실과 초현실을, 실재와 흔적을 함께 지닌다. 차갑고 단호해 보이는 바늘은 실상 자신을 주장하는 데에 별반 흥미가 없어 보인다. 자기 주장이 강할 때 사람들은
흔히 배타적인 공격성을 지니게 되곤 한다. 바늘은 자기를 주장하기보다는 오히려 듣는 쪽이다. 바늘은 단순한 몸을 지녔다. 단 하나의 귀를 가진 극도로 심플한 바늘의 몸. 그 심플함은 구상과 비구상을 자유롭게 오간다. 극도의 리얼리티와 리얼리티를 초월한 몽상이
바늘귀 속에서 고요하게 공존한다. 바늘의 귀는 바늘의 눈이기도
해서 중생의 소리를 듣는다는 관음의 귀처럼 깊다. 바늘은 말하기
전에 몸으로 실천한다. 소리를 듣고 그 소리가 이끄는 대로 길을 정한다. 그리고 온몸으로 그 길을 간다. 예리한 바늘끝과 다소 뭉툭한
바늘의 귀, 극도로 심플한 바늘의 몸은 이 두 극점으로 자신의 외연과 내면을 소통시킨다. 바늘은 자기의 몸에 실을 꿰고 온몸으로 옷감-현실을 관통한다. 그리고 숨는다. 바늘은 현실에 깊숙이 관여하면서도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보여지는 것들 속에서 자기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안달하지 않는다. 바늘이 자기의 몸을 빌려준 실만이 바늘이 지나간 자리를 증거할 뿐이다. 바늘에게는 아상(我相)이 없다. 찢어지고 떨어지고 조각나고 해진 것들을 이어붙이고 매달아주고 기워주면서 자신의 존재를 타자 속에 스미게 한다.
바늘의 자아는 그 자신의 이름으로써가 아니라 자신이 이어붙이고
부활하게 한 옷감으로 증명된다.
모든 옷에 바늘이 숨어 있다. 바늘이 지나간 자리는 가장 현실적인
자리면서 그 자리에 자신이 이미 없다는 면에서 초현실적이다. 현실에 스며 있으면서 현실에 발목 잡히지 않는다. 자기의 온몸으로
자기를 넘어가는 바늘의 흔적은 고요하다.
두 여자의 바늘집 이야기
예전엔 집집마다 반짇고리가 있었다. 어린 나에게 반짇고리는 마술상자 같은 것이기도 했다. 크기가 조금씩 다른 바늘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는 바늘집, 골무, 가위, 색색의 실이 감긴 각종 실패와 쪼가리 천들, 헌옷에서 뜯어낸 각양각색의 단추들… . 빨간 실이 감겨
있는 실패는 엄마인형이 되고 하얀 무명실이 감겨 있는 나무실패는
할머니 인형이 되기도 한다. 흰 단추는 쌀밥이 되고 노란 단추는 아주 이따금씩만 맛볼 수 있는 달걀 프라이가 되기도 한다. 가위는 무서운 도깨비가 되고 골무는 세상의 모든 창과 칼을 막을 수 있는 방패가 되기도 한다. 변변한 장난감이 없던 시절 반짇고리를 열면 한나절이 너끈하게 즐거워지곤 했다. 물론 반짇고리가 항상 즐거운
기억만을 준 건 아니다. 무엇이든 기우고 붙이는 반짇고리의 마술은 어린 나를 실망시킨 적도 많았다. 앞집 친구의 새로 산 나팔바지가 너무 부러웠던 어느날, 두 눈 질끈 감고 일부러 넘어져 무릎을
찢어왔을 때 새바지를 살 수 있을 거라는 내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린 것도 반짇고리였다. 반짇고리 속에는 팔꿈치와 무릎이 해져버린 빨간 내복에 덧댈 덧감들이 언제나 들어 있었고 그것은 때로 야속한 것이기도 했다.
우리 집에는 두개의 반짇고리가 있었다. 엄마의 반짇고리와 할머니의 반짇고리. 엄마의 반짇고리는 고리버들로 만든 것이었고 할머니의 반짇고리는 대나무껍질로 만든 것이었다. 무언가 찢어지고 해지고 탈이 난 것을 깁고 고쳐내는 일을 하는 것은 같았지만 엄마의 반짇고리와 할머니의 반짇고리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엄마의 반짇고리에는 소용이 닿을 만한 온갖 자투리 천들과 단추, 호크들이 가득
들어 있었고, 할머니의 반짇고리에는 반짇고리가 지니고 있어야 할
꼭 필요한 것들만 단정하게 들어가 있었다. 엄마의 반짇고리가 응급실이나 노상진료를 하는 천막병원 같은 느낌이라면 할머니의 반짇고리는 안정을 취할 수 있는 정갈한 요양소 같은 느낌, 엄마의 것이 만물상이라면 할머니의 것은 잘 정돈된 한옥의 후원 같은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할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쪽진 머리를 매일 아침 공들여
빗던 분이었다. 정갈하게 물을
발라가며 참빗질을 하고 빠진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깨끗하게 훑어 모아 기름 먹인 한지에 차곡차곡 보관했다가 일
년에 한 번 시골 장터에 나가
얼레빗이며 박하사탕 같은 걸로 바꿔오곤 하셨다. 내 언니들은 달비장수가 아직 마을을
다니던 시절, 할머니의 머리칼로 맞바꾼 조청이며 꿀단지를
기억한다. 할머니는 일흔이 넘어서도 단오절이 오면 창포물을 달여 머리를 감던 분이었다. 엄마는 할머니보다 훨씬
젊었지만 나는 엄마가 거울 앞에서 공들여 머리를 빗는 것을
본 기억이 거의 없다. 가난한
대식구의 맏며느리로 식솔들을 먹이고 자식들을 공부시키는 일에 억척스러웠던 엄마는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몸뻬바지가 일상이었다. 할머니가 아침마다
정성스레 긴 머리를 쪽질 때 엄마는 감기 편하고 쓱쓱 빗어넘기면
되는 짧은 파마머리를 하고 있었다. 한국적 가족구조에서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종종 기묘한 긴장관계를 달리는 평행선에 놓인다. 할머니가 살아계셨을 때 나는 할머니를 좋아하지 않았다. 너무 고생하는 엄마 편이 되어드려야 한다고 생각했고 할머니 손보다 더 거친 엄마 손이 마음 아팠다. 엄마가 딸들을 가꾸고 꾸미는 일에 여유가 없었던 반면 우리들의 머리를 빗기고 야무지게 땋아내려 준 것은 주로 할머니였고 어린 나는 그런 할머니의 손길이 내심 좋았지만 티내지 않았다. 여자들 속에는 많은 여자들이 존재한다. 엄마와
할머니는 가난에 적응하는 방식이 판이하게 다른 이들이었다. 가난한 대로 검소하고 만족하면서 자신을 가꾸는 일에 소홀하지 않았던
할머니와 이 악물고 가난을 극복하고자 하고 자신을 희생하면서라도 자식들을 공부시키는 것에 열렬했던 어머니. 그녀들은 여러 문화권에서 검토되는 여신들의 원형 중 대표적인 두 유형에 속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토록 판이하게 다른 두 여자의 반짇고리 속에서 유독 느낌이 닮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늘집이다. 바늘을 잃어버리지
않고 녹슬지 않게 하려고 꽂아두는 헝겊 주머니인 바늘집은 솜이나
겨 또는 머리카락으로 속을 채워 넣는다. 엄마의 반짇고리에는 겨를 넣은 여분의 바늘집이 있었고 할머니의 반짇고리에는 솜을 넣은
여분의 바늘집이 있었지만, 즐겨 쓰는 것은 둘 다 머리카락을 채운
바늘집이었다. 머리카락을 채워넣은 바늘집은 만지는 느낌이 특별하다. 엄마의 바늘집에는 처녀 적 엄마 머리칼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할머니의 바늘집에도 처녀 적 할머니의 머리칼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시집오기 전에 만들었다는, 아직 젊고 아름다웠던 그녀들의 머리카락이 가득 들어 있는 바늘집에 가지런히 꽂혀 있는 바늘들. 그것은 좀 기이한 전율과 어떤 일렁거림과 눈물겨움 같은 것을
동시에 일깨우는 것이어서 머리카락을 채운 바늘집은 오래도록 내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문득문득 젊은 엄마의 윤기나는 검은
머리카락이 가득 든 바늘집이 떠오르고, 나는 왜 엄마가 꽃이라든가 무언가 달콤하고 부드러운 것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되묻는 날이 있다. 젊은 날의 할머니의 머리카락을 떠올리며,
노년에 들어서까지 창포물에 머리를 감던 할머니를 나는 그때 왜
이해하지 못했을까, 되묻는 날도 있다. 내 핏속에서 엄마와 할머니는 아주 오래도록 투닥거리며, 그러나 정말은 서로를 향해 손 내밀고 글썽이면서 늙어갈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바늘귀 속의 두근거림
바늘을 들여다본다. 바늘귀가 두근거린다. 깁고 이어붙이고 꽃봉오리 같은 단추를 매달아주기 위해 바늘은 오늘도 온몸으로 귀기울인다. 우리가 사용하는 거의 모든 사물들은 자연의 그 무엇인가를 닮아 있다. 바늘은 당신 속의 그 무엇인가를 닮아 있다. 최초의 바늘은 아마도 짐승의 뼈였으리라. 구멍이 뚫려 있는 날카로운 뼈를 우연히 발견하고 그 구멍에 가죽실을 꿰었던 최초의 석기인들을 생각한다. 벗은 몸이 추웠던 날들이 있었을 것이다. 벗은 몸의 아이와
사랑하는 사람을 걱정하던 날들이 있었을 것이다. 연민하고 글썽이며 두근거리던 마음이 최초의 뼈바늘로 최초의 가죽옷을 지었을 것이다. 바늘은 살리는 문화에 가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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