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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정일기 요약 : 딴지일보에 저에 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올 한 해 제가 무엇을 해야 할 지를 선명하게 알려 준 귀한 글이었습니다.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 일본 평화기행 : 7일부터 11일까지 일본 규슈지역으로 평화기행을 갑니다. 헌법9조 운동을 하는 마사키 선생을 만나고 아소탄광의 징용역사도 체험하고 오겠습니다. 일제의 강제병합 100년을 맞는 시점에서 해야 할 일도 생각해 보겠습니다.
[의정일기-슬픔도 힘이 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셨습니까? 저는 연초부터 넘치도록 복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지역 인터넷신문 부천타임즈가 주관하는 제2회 희망대상에서 저를 의정부문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합니다. 정말 감사하고 기쁜 소식입니다.
또 다른 복은 새해 첫 날 김대중 대통령님 묘소에 참배를 가던 길에 들었습니다. ‘딴지일보’라고 들어보신 적이 있지요? 이것저것 눈치 보지 않는 날선 비판과 해학적인 패러디로 유명했던 인터넷 매체입니다. 초창기에는 저도 애독자였는데 언젠지 잘 모르지만 업데이트가 느려졌다 싶을 즈음부터 자주 찾지 않게 됐습니다. 최근에 새 단장을 했다는 소식을 듣기는 했는데, 거기에 저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는 전화를 받은 것입니다. 기사 내용이 노무현 전 대통령 분향소 관련한 것이라고 얼핏 듣기는 했지만 차 안이라 길게 통화를 못하고 ‘그저 기사 속에 잠깐 이름이 언급됐나보다’ 생각하고 말았습니다.
새해 첫 날을 김대중 대통령님 묘소 참배로 시작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묘소도 함께 참배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갑작스레 떠날 수 있는 거리가 아니라 아쉬움을 삼켰습니다. 동작동 국립현충원에는 그 분과 고락을 함께 한 기라성 같은 정치인들이 속속 도착했습니다. 참배가 끝나고 이희호 여사님은 장갑도 벗은 맨 손으로 참배객들의 한명 한명의 손을 말없이 꼭 잡아 주셨습니다. 여사님 어깨에 내려앉은 세월의 무게가 무거워 보였습니다.
잔설이 남아있는 봉분 앞에는 지난 여름 내내 함께 했던 향냄새가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진한 향냄새로 인하여 지난해 두 분 대통령님을 보낼 때를 떠 올릴 수 있었습니다. 11월 하순부터 연말까지 숨 가쁜 일정을 소화하느라 까맣게 잊고 있던 숙제들을 생각해냈습니다. 하루하루 이렇게 정신없이 눈앞의 일에만 빠져 사는 것이 옳은 것인가, 다시 시의원 선거에 나서려는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 분들이 나에게 남긴 과제는 무엇인가…. 지난 여름의 뜨거움이 다시 밀려오며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돌아와서 딴지일보 기사를 검색했습니다. ‘슬픔도 힘이 된다’는 제목의 기사가 위에서 두 번째 기사로 걸려 있었습니다. ‘최초로 분향소를 만든 사람’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었습니다. 저를 단독으로 다룬 기사였습니다. 6개월도 더 지난 시점에서 굳이 그 일을 다시 다룬 것도 뜻밖이고, 저 한테는 아무 연락도 없었는데 단독기사로 다룬 것도 뜻밖이었습니다.
다른 분들 모두가 함께 고생한 일인데도 이름 팔아야 되는 일을 한다며 굳이 저를 앞에 세워 놓은 것인데 저만 부각되서 미안하고 쑥스러웠습니다. 일면식도 없는 기자가 어떻게 이런 기사를 썼는지, 통렬한 사회비평을 주로 하는 딴지일보가 왜 이런 기사를 다뤘는지 의아했습니다. 기자는 2010년이 되면 다시 하기 힘든 이야기라 2009년 마지막 날에 쓴다며, 지난 5월에 시민분향소를 차린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었습니다.
기사 중반에는 ‘시의원’이라는 자가 왜 이런 일을 했으며, 그는 이런 일을 할 자격이 있는지를 따졌고, 시민단체의 의정평가를 근거로 합격점을 매겼습니다. 결국 기자는 제가 ‘시의원’이라는 점을 연결하여 지난 여름의 슬픔과 분노를 올해 지방자치 선거를 통해 묶어내자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나는 저 슬픔의 행렬을 다른 말로 ‘행동하는 양심’이라 부르고 싶다. 그리고 그 양심들을 한데 어울러 묶을 수 있다면, 그 묶음을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 부르고 싶다. 그것만이 2009년의 슬픔을 역사 속으로 방치하지 않는 길일 것이다’는 말이 그 말 아니겠습니까?
기사는 시민들을 향해 말하고 있었지만 저 역시도 기사를 통해 국립현충원에서 떠 올렸던 과제의 답을 구체적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제가 할 일이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의정일기 독자여러분. 제가 지금 서 있는 이 자리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겠습니다. 올 한 해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참으로 귀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열심히 살겠습니다. 슬픔이 만든 힘에 기대어 사는 것이 아니라 슬픔의 힘을 모아나가는 일꾼이 되겠습니다.
* 딴지일보 기사를 직접 보실 분은 http://www.ddanzi.com/news/281 로 가시면 사진과 함께 볼 수 있습니다. 아래는 기사 전문을 퍼 온 것입니다. 슬픔도 힘이 된다 2009.12.31.수요일 뚱딴지 부제: 최초로 시민분향소를 만든 사람 그 날. 그를 지지했던 사람이던 반대했던 사람이던 간에, 모두가 놀라고 얼이 빠지고 정신이 혼미해지던 그 날. 이어 더러는 격한 감정으로 슬픔이 밀려 올라오고 더러는 분노가 솟구치고 더러는 그저 먹먹해지던 그 날.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23일 아침운동을 마치고 돌아와서 도저히 믿기지 않는 비보를 접하고 한 동안 넋을 놓고 있다가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가슴이 답답해 졌습니다. 이 억울한 이야기를 누군가와 나누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 아는 사람들과 긴급 연락을 한 후 같은 심정들을 서로 나누기 위해 분향소를 만들자는 안을 냈어요.” 부천시의원 윤병국. 서거정국에서 그는 전국최초로 시민분향소를 만든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물론 그 혼자 한 것은 아니었다. 장의용품은 부천노사모 한인수 회장, 추모게시판은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 임성한 부지부장, 분향소 영정사진, 조기 등 현수막은 박정현 현에드컴 대표가 각자 역할을 분담하고 묵묵히 추진해 나갔다. 분향소가 완성되기도 전에 이미 추모의 줄은 길게 늘어서 있었다. 역곡에 시민분향소가 차려질 것이라는 소식이 TV에 자막으로 나간 것이 오후3시 경. 그때부터 부천시민들은 역곡역을 찾기 시작했으며 가던 걸음을 멈추고 일손을 돕거나 줄 뒤에 가 서곤 했다. 기나긴 슬픔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오후 4시, 분향소가 완성됐고 조문이 시작되었다. 시민분향소라는 이름의, 유례가 없는 추모의 제단은 그렇게 만들어졌고 그 슬픔의 물결은 대한문으로, 이어 전국으로 퍼져나갔으며 산하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슬픔의 물결에 덮였다. 그리고 그 슬픔은 8월에, 또 다른 슬픔으로 이어지며 2009년을 물들였다. 윤병국. 그는 국민장이 치러지는 기간 내내 부천의 상주였으며, 노병국이라는 별칭까지 얻게 되었다. 저 노명박이란 단어에 조롱과 폄하, 비아냥이 섞여있다면 이 노병국이란 단어에는 눈물과 땀, 진정성과 슬픔이 섞여있다.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의자 위에서 손나팔을 만들어 외치는 사람, 분향소 앞에서 대성통곡하는 아주머니, 무작정 봉하마을로 가야한다는 사람도 많았어요. 어떤 모습을 했건, 어떤 주장을 했건 광장에 나온 모든 사람들은 가슴 한 곳이 뻥 뚫린 것 같아 보였지요.” “분향소에는 유난히 여성들이 많았습니다. 평소라면 누가 말이라도 걸라치면 쌀쌀맞게 돌아섰을 젊은 아가씨들이 나부죽이 절을 올리고 돌아서는 모습, 고인이 마지막에 찾았다는 담배 하나를 올리고 싶은데 어떻게 불을 붙이는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모습, 교복차림으로 통곡하는 여학생들, 그리고 새벽에 술기운으로 약간 비틀거리며 찾아와서 하염없이 울고 가던 여성까지...” “남자들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지요. 체면 때문인지 대놓고 통곡하는 사람은 적었지만 통곡하는 사람이나 남몰래 눈물만 훔치는 사람 모두 비통한 마음은 한가지였을 겁니다. 새벽 4시에 배달용 오토바이를 몰고 와서 ‘너무 늦었는데 괜찮나요?’ 라며 조문하던 아저씨도 기억나고....” 여기서 드는 의문 한 가지, 그렇다면 그는 시민분향소의 상주 될 자격이 있었을까? 만약 그가 난닝구든가 또는 궁물이든가, 아무튼 고인의 뜻을 이을 만 한 자격이 부족한 인물이라면, 그런 인물이라도 단지 최초의 분향소를 설치했다는 것만으로 한 지역의 상주자격이 될 수 있을까? 뚱딴지같은 생각이라고? 아니, 이건 당연한 의문이다. 만약 상주가 그런 인물이라면 시민들의 그 순수한 슬픔은 그만큼 훼손당한 것이다. 우리가 영결식장의 누군가를 보며 분노에 치를 떨었듯이, 그래 누군가는 고함을 치고 마침내는 약식이든 뭐든 검찰에 기소까지 당하게 되었듯이, 순수해야할 슬픔을 우롱당한 것이 되므로. 하지만 그는, 자격이 있었다. <한겨레> 2009, 7월14일자 기사의 일부. [윤병국 부천시의원이 지난해에 이어 2년째 의정활동을 가장 잘한 지역 의원으로 뽑혔다. 부천지역 시민단체로 구성된 ‘참여예산부천시민네트워크’는 지난해 7월부터 올해 6월까지 부천시의회 상임위원회, 행정사무감사, 시정질문, 기타 의정활동 등 4개 분야에 대해 평가한 결과 행정복지위원회 소속 윤 의원이 유일하게 4개 분야 모두 최고 등급인 A등급을 받았다고 14일 발표했다. 윤 의원은 지난해 평가에서도 4개 분야 모두 A등급을 받았다.] 올해가 저물기 전, 처음 시민분향소를 만든 사람의 이야기를 꼭 하고 싶었다. 이제 해를 넘기면 영원히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가 돼 버릴 터이므로. 그 슬픔과 고통이 아무리 컸다 하더라도 이젠, 지난해라 칭해지고 머지않아 모두 역사의 한 페이지로 들어가 버릴 터이므로. 이제 그렇게 슬픔의 해를 넘어, 지방자치선거의 해가 열린다. 그런데 슬픔은 힘이 될 수 없을까? 나는 저 슬픔의 행렬을 다른 말로 ‘행동하는 양심’이라 부르고 싶다. 그리고 그 양심들을 한데 어울러 묶을 수 있다면, 그 묶음을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 부르고 싶다. 그것만이 2009년의 슬픔을 역사 속으로 방치하지 않는 길일 것이다. 그것을 묶는 것은 정치인들의 몫도 있겠지만 우리 모두에게도 나름대로 몫이 있을 것이다. 여기 딴지스들에게는 거의 분노가 내재되어 있으리라 믿는다. 분노가 폭발하면 그 힘은 물론 강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저 슬픔의 행렬. 그 행렬의, 더러 정치와는 무관하기도 하고, 국화를 바치고 눈물 훔친 것만으로 소임을 다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 순수한 그 슬픔까지 힘으로 일으켜 세워야한다. 하여 슬픔도 분노 못지않은 강한 힘이란 것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다시 벅찬 감동을 누릴 수 있으리라 믿는다. 2010 지방자치혁명. 그래야 푸른 하늘을 대할 때, 조금 덜 부끄럽지 않을까. 새해에는 모두 지난해의 슬픔을, 그보다 더 큰 크기의 거대한 힘으로 만들어 보자. |
첫댓글 같은 교회 교인으로서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집사님의 성실성과 진정성에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겠지요. 내년에도 필승하시고 건승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