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에서 연행되어
증언상자 : 신성준(남)
생년월일 : 1957.(당시 나이 23세)
직 업 : 광성여객 정비공(현재 광성여객 정비공)
조사일시 : 1989. 1
개 요
신안동에 있는 광성여객 정비공장에서 동료들과 라면을 끓여 먹다가 들어온 공수부대에게 얻어맞고 8명 전체가 전남대를 거쳐 교도소에 구속되었다. 6월초 석방되어 어수원내과에서 치료를 받았다.
공수들의 훈련
순창에서 중학교를 마친 나는 광주 중흥동에 있는 광성여객 정비공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때가 1970년 12월부터였는데 1976년도에 신안동으로 회사를 옮김에 따라 1980년 5월은 신안동에서 맞이하게 되었다.
아침마다 전남대 운동장으로 직원들과 함께 운동을 하러 다녔으므로 18일 아침에도 전남대 안으로 들어갔다. 새벽 6시 30분에 회사 마크가 붙은 트레이닝 복장으로 갔기 때문인지 정문에서는 별일 없었다. 그러나 운동장에는 군인들이 텐트를 쳐놓고 있어 간단하게 운동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리고 회사 안에서 정상적으로 근무를 했다.
19일에는 정비공이 차를 정비해서 시운전을 하다가 전남대 정문 앞 다리 밑으로 굴려버려서 직원들이 차를 꺼내려 갔다. 차를 꺼내는데 통행금지 시간을 넘겨 버렸는데 군인들이 도로에서 자기들끼리 조를 짜서 쫓고 쫓기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 것을 본 우리들은 무슨 큰일이 일어나겠구나 싶어 아예 시내 쪽엔 나갈 생각을 안 했다.
부상과 연행
21일에는 시내 도청 앞이나 전대 앞에서 데모를 많이 하고 있었는데 시위대들이 와서 차를 달라고 하자 회사에서는 폐차 2대를 내주었다. 이미 폐차처분 시키려 한 것이어서 1시쯤에는 시민들이 그 차를 버리고 트럭으로 사람들을 싣고 왔다. 그러고는 벽돌공장 옆 사거리에 받쳐놓은 관광차인 새 차를 가져가버렸다. 차를 가져갔다 하면 못쓰게 되어 버릴 게 뻔했으므로 직원들이 모두 나가서 대기시켜 놓은 버스의 앞 타이어 바람을 빼버렸다.
그 작업을 하고 식당으로 왔는데 그날 따라 밥이 없었다. 그래서 라면을 끓여 달라고 하고는 우리 여덟 명은 2층 사무실에 가 있었다. 한 30분 후 라면이 다 되어 2층 사무실에서 라면 한 그릇씩을 떠서 막 먹으려고 하는데 20명 정도의 공수부대들이 들어왔다. 사무실과 구내식당과는 함께 붙어 있었는데 그들은 우리를 훑어보더니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에 있는 사람들을 발로 차고 때리기 시작했다. 회사 사람들은 갑자기 당한 일이라 몹시 놀라 2층에서 밑으로 뛰어내리고 소리를 지르는 등 야단법석이 아니었다.
공수들은 처음에 라면 먹으려는 우리들을 보고 그냥 나갔으나 사거리에서 보고 있던 지휘자인 듯한 한 명의 공수가 "조져라"라고 지시를 하니까 다시 들어왔다. 그리고 막무가내로 때리기 시작했다. 우리 여덟 명은 라면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까닭도 없이 죽도록 얻어맞았다. 그러고는 밖으로 끌려나왔다. 그때 안민구 씨는 책상 밑으로 숨어 들었기 때문에 등을 맞아 기절해 버렸으므로 제외되었다.
모두 자신의 허리띠를 풀어 손을 뒤로 묶인 다음 전남대 수위실 난간 밑에다 머리를 처박고 있으라고 하였다. 공수 한 명이 안으로 전화를 하더니 본관 쪽으로 끌고 갔다. 본관 안에는 이미 70-80명이 감금되어 있었다. 그 사람들은 하나 같이 피가 묻어 있었다. 우리 일곱 명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공수부대 대여섯 명이 달려들어 발로 차고 곤봉으로 때리는 등 30분 정도 무자비하게 구타했다.
교도소로
전남대로 잡혀온 사람들 중 우리는 맨 마지막이었는데 조금 후엔 어딘가로 이동해 가야 한다고 밖으로 끌어내었다. 군용 트럭에 탔다. 그들은 밖을 내다보지 못하게 커버(포장)를 전부 씌워버렸다. 나는 차가 전남대 후문을 통과해서 고속도로변을 달리다가 우회전을 했으므로 교도소로 가는 길인가보다고 짐작했다. 군인들이 우리를 태운 차 밖에서 도보로 따라오고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꽤 많이 걸렸다.
해 질 무렵에 교도소에 도착했다. 우리가 차에서 내렸을 때 교도소 밖에서 총 소리가 많이 나기 시작했다. 내 생각에 그 총소리는 시위대와 공수들이 싸웠던 것 같다. 공수부대 지휘관은 "너희들이 불리하면 이놈들 싹 긁어버리고 도망가라"고 지시하고는 어딘가로 들어가버렸다.
우리는 총소리가 빨리 멈추지 않아 11시까지 그렇게 있었다. 11시가 넘어서야 창고처럼 생긴 곳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서는 물 한 모금씩을 먹으라고 주었다. 그러나 교도소 안에 있는 창고로 12시가 넘어서야 들어갔다. 요즈음 닭장차라고 불리는 버스와 군용 트럭 1대에 타고 갔던 우리들은 그날 저녁 거적을 깔고 그대로 잤다.
특별한 기준도 없는 급수 분류
그 이튿날 아침 자기들끼리 우리들을 A급, B급, C급으로 나누어서 하루종일 무릎을 꿇려놓았는데 특별한 기준도 없었다.
그날 저녁에는 보안대에서 나와 직접 조사를 했는데 3명씩 1개조를 만들어 2층 조사실로 데리고 갔다. 나는 12시가 다 된 시각에 옆에 있던 고향 후배에게, "야, 맞으려면 얼른 가서 맞아버리자. 그래야 자고 일어나면 좀 나을 것 아니냐?"고 했다. 2층 조사실 복도에서는 조사실 밖에서 공수 4명에게 이유도 없이 한 30분 동안 두들겨맞았다. 그러다가 후배가 먼저 조사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안에서 중사 한 명이 나왔다. 그 중사는 고창 사람으로 우리 광성여객에 근무하는 박기사 친구라고 했다. 그는 문 밖의 공수 4명에게 광성여객에서 왔다고 하면 그냥 들여보내지 왜 구타를 하느냐고 꾸중을 했다.
공수들은 그대로 들어가면 안 되니까 여기에서 씻고 들어가라고 세숫물을 떠주었다. 대충 핏자국만 지워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별로 조사할 것이 없는지 이름 쓰고 사인만 하라고 했다. 내 앞에 갔던 일행들이 다 이야기한 모양이었다.
1층으로 내려오니까 A급, B급으로 구별해 놓았는데 데모한 사람들은 A급으로 해서 시멘트 바닥에 그대로 있고 데모 안 한 사람들은 B급으로 가마니를 깔아놓고 그 위에 앉아 있었다.
교도소에 오기 전에 나는 회사 가운을 전남대 본관에서 벗겨졌기 때문에 남보다 더 많이 맞았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회사 직원들은 우리가 끌려가고 난 후 찾으러 돌아다녔는데 전남대 수위들에게 물어보니까 옷을 벗겨가지고 데리고 간 사람들은 아마 죽었을 거라고 했다 한다. 그런데 내 가운이 하수구 속에서 발견되어 내가 이미 죽어버린 줄 알고 이틀 동안이나 산으로 찾으러 다녔다 한다. 그래도 내가 입고 있는 트레이닝에 광성이라고 씌어 있어서 다행이었다.
2층에서 내려 오자마자 문 앞에 있는 공수들이 대학생이라고 발로 차고 때렸다. 그때 마침 중사가 뒤따라와서 그들을 야단쳤다.
"광성여객에서 온 사람들은 잘못이 없는데 또 장난하느냐?"
나는 가마니 깔아놓은 곳에 앉아 있었다. 그렇게 밤을 보내고 난 아침이었다. 공수들은 1개 분대식으로 보초를 서 있다가 아침이 되자 "기상" 했다. 우리들은 얼른 일어났다. 내 옆사람이 움직이지 않자 확인해 본 공수들이 죽었다며 가마니로 된 들것에 들고 나가버렸다. 전날 밤 별다른 구타도 없었는데 왜 죽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 후 많이 다친 사람들 10명 정도는 헬기로 수송되어 갔다. 나중에 들으니 통합병원으로 갔다고 했다.
현위치에서 그대로 취침
23일 오후에는 공수부대와 20사단 보병들이 교대되었다. 저녁 식사로 주먹밥을 나눠주면서 빨리 먹으라고 했다. 주먹밥을 막 먹고 불안에 떨고 있는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들은 밥을 먹고 난 상태에서 아무렇게나 앉아 있는데 저녁 8시가 되자 공수가 갑자기 말했다.
"지금부터 움직이는 놈은 죽을 줄 알아."
우리는 너무 갑자기 당해 움직이기도 했는데 움직이는 사람은 가차없이 끌어내 때리기 시작했다. 눈도 못 뜨고 있게 하였지만 맞을 때 새어나오는 비명 소리만 듣고도 대충 누가 끌려나갔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옆에 있는 사람이 누우면서 내 머리를 눌러버려 죽어버릴 것 같았지만 참고 있었다.
저녁 내내 그러다가 일어나서 군대 갔다 온 사람과 안 갔다 온 사람을 구분했다. 일어나려 했으나 눈이 안 떨어지고 다리에 힘이 없어서 벽을 붙잡고 일어서는데 동작이 느리다는 이유로 맞았다. 난 엉겁결에 군대 안 갔다 온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가서 오전 내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12시경이 되자 어떤 군인이 카드를 들고 와 세 부류로 나누어 이름을 불렀다. 나는 C급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C급으로 분리된 사람은 형을 안 받고 나갈 사람들로 시내상황이 조용해지면 내보내주겠다고 했다. 그때부터는 앉아 있는 것도 자유롭고 앉든지 눕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물론 구타도 없었다.
상무대로
그러다가 30일인가 31일인가 우리는 상무대로 옮겨졌다. 그때도 버스 의자 밑으로 머리를 처박고 있도록 했으며 2명이 총을 겨누고 있었다. 그리고 지형을 모르게 하기 위해서인지 눈을 헝겊으로 가리라고 했다. 상무대에 도착해서도 앞사람 허리춤만 잡고 따라 내리고 내리자마자 머리를 땅에 처박고 있었다.
한참 있다가 누군가 안으로 들여보내라고 했다. 그러자 우리에게 일어서서 앞 사람만 잡고 따라 들어가라고 했는데 들어가는 대로 눈가리개를 벗겨버렸다. 우리가 들어간 곳은 교회였다. 그곳에서도 공수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이 새끼들 잘 왔다."며 한바탕 구타를 하고는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앉혔다. 교도소에는 120명 정도 있었는데 상무대 온 인원은 40여 명이었다. 그날 밤 괜한 까탈을 부려 귀찮게 했는데 특히 나를 보고는 '덩치가 좋은 게 데모 잘하게 생겼다'며 많이 때렸다. 그 이튿날부터 구타는 없었다.
우리들은 6월 6일쯤 현충일이고 하니까 석방시켜 주지 않을까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6월 3일이 되자 면도도 하고 목욕을 하라고 다섯 명씩 목욕탕으로 데리고 갔다. 목욕 시간은 겨우 3분! 물이 빨리 나오면 물을 몸에 쏟고 그렇지 않으면 물을 쏟지도 못하고 그냥 나와야 했다. 정말 오랜만에 면도도 하고 아침에는 돼지고기까지 끓여주었다.
소준열 장군의 설교
10시쯤 되니까 소준열 장군이 우리들을 모아놓고 한 시간 정도 설교를 했다.
"오늘 잡혀 들어와서 오늘 나가는 동안까지 어디에 있었고 또 맞았다는 얘기는 안 하는 게 좋다."
그리고 12시쯤 되어 점심이 나왔는데 쌀은 없고 콩과 보리가 섞여 있는 밥이었다. 콩이 썩어서 메주 냄새가 났다. 우리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했다.
각 주소지별로 차가 와서 인수를 해가도록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당시 주소가 전라북도 순창으로 되어 있어서 순창군에서 인수반이 왔다. 군수가 보내 준 것이라고 내의 한 벌과 옷 한 벌씩을 주었다. 전라북도로 갈 사람은 나와 순창 후배와 또 정신이상자, 그렇게 셋이었다.
우리는 봉고차로 순창 군청까지 갔다. 군수는 그동안 애썼다고 하면서 몸조리 잘하라고 했다. 다음에는 경찰서장에게로 갔다. 경찰서에서 근무하는 사람이 나를 보고 말했다.
"몸을 보니까 꼭 데모한 놈 같구나."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국인데 내가 데모를 했으면 지금 이렇게 나왔겠소?"
나는 경찰서에서 나와 터미널에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갔다. 집으로 돌아왔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려 일어나지도 못하고 다리를 오그리지도 펴지도 못했다. 우리는 1년 이내에는 어디로 이동을 할 때는 반드시 지서에 신고를 하고 다니도록 되어 있었다. 집에 돌아온 후 5일, 6일은 광성여객 사장이 승용차를 가지고 와서 입원하라고 했는데 마음도 불안하고 일어날 수도 없어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어수원 내과 치료
영업부장이 어수원 내과 앰뷸런스를 가지고 와서 할 수 없이 경찰서에 신고를 하고 입원을 하였다. 그때 어수원 내과에 함께 입원해 있던 동료 직원들은 유기성, 범정진, 김명수, 안민구, 박신열, 임춘례 등이었다. 그때 박신열 씨와 안민구 씨는 12주 진단이 나왔고 나머지는 3-4주 치료를 받고 나왔다.
퇴원 후 나는 광성여객에 다시 복직을 하였다. 그러다가 광성여객 사장 동생이 해남에 있는 해광여객을 1981년에 사서 나는 해남으로 가서 근무를 하였다. 그러다가 구례까지 오게 되었다. 현재도 구례에서 살고 있다.
1984년에 부상자로 신고한 사람도 있지만 그때는 누구에게도 이야기를 못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나는 1988년에야 신고를 했다. 진단서를 보니까 그때의 치료비는 시에서 지급한 걸로 되어 있었다.
박옥재 씨가 회장으로 있는 5·18 광주의거 부상자회에 2번 참석해 보았다.
한번은 5월 8주기 행사 때였고, 또 한번은 11월 월례회의 때 회원증을 발급한다고 사진 1장씩을 가지고 오라고 해서 참석을 했다. 정부에서는 돈 몇 푼으로 보상을 해주면서 없었던 일로 해버리려고 하는데 그래서는 안 될 것 같다. 부상자회에서는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그렇게 되었으니까 원호대상자로 해달라고 요구를 하고 있다. 그러나 4·19의거 당시에도 유족들에게 아무런 대책이 없었고 전례가 없어서 힘들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유족회나 부상자회를 둘로 나누어 내분 이 있는 것처럼 이간을 시키려고 하는 것 같다. 빨리 하나로 통합되었으면 좋겠다.
(조사.정리 장옥근)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