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도, 민란의 시대>가 개봉 첫 날(7월 23일) 55만 관객을 동원했다. 한국 영화 신기록이다.
윤종빈 감독과 배우 하정우는 중앙대학교 선후배 사이다. 97학번 하정우는 연극을, 98학번 윤종빈은 영화를 전공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미니홈피가 유행이었는데, 어느 날 윤종빈은 비밀글로 하정우에게 메시지를 남긴다. “언젠가 제가 시나리오를 쓰게 된다면 가장 먼저 선배님께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가 <용서받지 못한 자, 2005>, <비스티 보이즈, 2008>, <범죄와의 전쟁, 2012> 그리고 <군도, 2014>다. 윤종빈 감독의 모든 작품에 하정우가 출연했다. 윤종빈 감독은 이번<군도>의 시나리오를 쓰면서는 10년 전 대학 연극 <오델로>에서 민머리로 무대에 선 하정우가 떠올랐다고 했다. 구한 말, 민머리 백정이 있다면 그는 어떤 사연을 가진 인물일까. 그는 왜 민머리가 되었고, 어떻게 의적이 되었을까.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다. 시대상은 어두웠고, 민머리 백정의 사연은 기구했지만 이들의 작품은 활기찼다. 애초에 ‘활극(活劇)’을 찍고 싶었다고 했다. 검은 시대상도 단칼에 베어버릴 수 있을 만큼의 통쾌함이 있었으면 했다. 그러려면 이 군도의 무리에 맞설 서늘한 악역이 필요했다. 그가 매력적일수록 사극은 비극으로 흐르지 않고, 활극이 되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캐스팅 된 게 비극의 서자 ‘조윤’, 강동원이다.
나주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서자라는 굴레를 벗지 못한 조선 최고의 무관, 조윤(강동원)
강동원은 4년을 쉬었다. 쉬면서 에너지를 비축했다. 이윽고 터뜨릴 기회가 찾아왔다. 주변에서는 ‘원톱’도 아닌 떼극(?)에, 영웅도 아닌 악역으로 왜 복귀를 하느냐고 의아해했다고 한다. 강동원에게는 명료한 선택이었다. 윤종빈 감독과 말이 통했고, 조윤과 마음이 통했다. 강동원은 자신이 맡은 배역을 ‘양반’이라고 소개한다. 민중과 의적이 주인공인 영화에서 유일무이한 인물이다. 그리고 관객과 맞서는 유일한 악역이다. 홀로 비단옷을 입고, 긴 칼을 휘두르는데 그 선이 퍽 곱다. 그렇게 고운 선을 그리며 사람을 벤다. 홀로 맞서는데도 전혀 밀리지 않는다. ‘이 중 누구라도 조윤에게 걸리면, 끝이겠구나’라는 느낌이 든다.
우덜과 함께 대업을 이루겠는가
극의 배경은 철종 13년, 철종은 조선왕조 제 25대 왕(1849~1863 재위)이다. 열여덟이던 1849년에 왕에 즉위했다. 이제 스물 남짓의 왕은 정세에 어두웠고, 특히 외척이었던 안동 김씨 일파의 전횡으로 정치가 부패했다. 대왕대비 김씨는 철종의 즉위 직후부터 수렴청정을 시작했는데 김씨 집안의 세도는 삼정(전정, 군정, 환정 등의 수취체제)을 문란하게 만들었다. 지역마다 이들의 세도를 등에 업은 탐관오리가 들끓었다. 경상도 진주, 함경도 함흥, 전라도 전주에서 대규모의 민란이 일어났다.
8명의 의적떼, 각각 주특기를 갖고 있다_영화스틸
당시 역사의 기록을 보면 조선 후기를 대표했던 의적이 있다. 구월단 목단설과 지리산 추설. 오늘의 <군도> 무리를 이끄는 자가 바로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삼남 지방에서 활약했던 추설이다. 이들은 조선 3대 의적인 홍길동, 임꺽정, 장길산 중 의적의 시조인 홍길동의 후예를 자처했다고 한다. 나라가 쇠망해가던 18세기 후반부터 일제강점기까지 200여 년을 민중과 함께 했다. 탐관과 토호들에게 빼앗은 재물을 농민과 천민들에게 나누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뭉치면 백성, 흩어지면 도적
순박한 백정이던 돌무치는 어떻게 의적이 되었을까_영화스틸
윤종빈 감독과 하정우는 게임에 능하다
. 두 사람은 영화 관련 인터뷰에서 시종일관 ‘관객이 즐거우면 그만’이라고 말하는데 관객이 어디에서 즐거워하는지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그건 다름 아닌 감독과 배우들이 즐거워하는 지점이다. 하정우는 극 중 ‘돌무치(후반 도치)’의 캐릭터를 잡기 위해 매일 8시간씩 한 달을 걸었다고 한다. 돌무치의 고갯짓과 리듬을 타듯 건들거리는 걸음이 그 때 나왔다. 모든 캐릭터가 감독 안에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윤종빈 감독을 관찰했다. 윤종빈이 하정우를 기억해 만든 캐릭터 돌무치는, 하정우가 윤종빈을 관찰하면서 완성됐다.
“심장이 먼저 반응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이성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영화가 아닌 일단 심장이 뛰는 영화. 감독이 되기 전 어린 시절 극장에서 보면 나도 모르게 심장 박동이 빨라졌던 영화들. 액션이든, 웨스턴이든, 무협 영화든, 기본적으로 그 영화들이 주는 쾌감의 실체는 액션 활극이었다. <용서받지 못한 자>부터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까지, 한 시대와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을 통해 현실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했던 전작들과는 다른 길로 새보고 싶었고, 그게 조선의 의적을 스크린으로 불러내는 것이었다. (윤종빈)”
타고난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 생을 걸어 본 자가 있거든 나서거라.
그 자의 칼은 받겠다
모티프가 좋고, 배우가 좋아도, 내용에 합이 맞지 않으면 ‘장쾌함’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영화의 쾌감은 드넓은 벌판에 말을 타고 달린다고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행히 화면 가득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등장한 이들 도적떼의 무리는 보는 이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다. 영화를 장악하겠다는 욕심이 없는 하정우는 어디 한 구석 있는 돌멩이처럼 우직하게 자리를 지킨다. 캐릭터의 잔재미는 군도의 무리인 조진웅(태기)과 마동석(천보)이, 영웅으로서의 숭고함은 군도의 수장인 이성민(대호)와 이경영(땡추)가 담당한다. 여기에 비주얼이 주는 우아함과 주인공으로서의 멋까지 강동원에게 양보했다.
영화 <군도>의 배우들, 가운데 (하정우 옆)이 윤종빈 감독
그럼에도 영화를 보고난 뒤 남는 것은 윤종빈과 하정우라는 콤비에 대한 감탄이다. 어떻게 이토록 영민할 수가 있는가. 올 여름에는 <군도>와 최민식의 <명량>, 봉준호 감독 제작의 <해무>, 손예진의 <해적>이 맞붙는다. 흡사 월드컵 4강같다. 그럼에도 <군도>는 큰 걱정이 없어보인다. 애초 이들의 목적은 우승이 아닌 한 바탕 신나게 놀아보는 것, 노는 이들이 신명나면 보는 이들은 덩달아 흥이 나게 마련이다. 어깨에 힘을 빼고도 한 번도 허점을 보이지 않는다, 이 유연하고 영민한 무리가 한여름 소나기처럼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