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면(福壽面) 곡남리(谷南里)
남쪽 진산면 석막리에서 발원하여 여러 작은 냇물을 합류하면서 진산면을 벗어나 복수면으로 들어서는 버드내는 곡남리에서 여러 냇물을 합치면서 동쪽, 서쪽, 남쪽에서 흘러들어 오는 큰 냇물을 합치면서 그 주변에 넓은 들을 조성한다. 동북쪽으로는 수려한 산 골내미가 우뚝 서서 합쳐지는 냇물을 바라보고 다시 북쪽으로 헐러갈 버드내와 그 주변에 조성되는 들을 환송도 해야 할 세월과 같은 흐름의 조화에 곡남리는 자리한다.
북쪽으로는 수영리와 접하고, 동쪽으로는 다복리와, 그리고 서쪽으로는 진산면 교촌리와, 남쪽으로는 진산면 만악리, 엄정리, 부암리와 조금씩 접하는 위치에서 바둑판 같은 집을 들에 판점을 찍듯 깔아놓은 이 지역을 옛사람들은 옥계(玉溪)라고 불렀고 사람이 살기에 좋은 길지라 지적을 했다.
인류의 정착은 신석기시대로 보며 백제 때에는 진동현에 속했었다. 신라 때는 황산군의 영현에 속했다가 뒤에 진례군의 영현에 속했으며 고려 때에도 그리 속했다가 고려말기 공양왕 때 잠시 고산현감이 겸직해서 다스리는 고을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옥계부에 속했으며 잠시 진주현에 속했다가 태종 12년(1412)부터 진산군에 속했었다. 조선시대 500년간 많은 인물 배출보다는 농촌의 순박한 지역으로 향리에서 낳아서 향리에서 묻히는 선비와 서민이 많았던 지역으로 특수한 연대를 제하고는 태평세월을 스스로 자초했던 지역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진산군 일남면(一南面)의 지역으로서 골내미 산 아래 펼쳐진 지역이므로 골내미 또는 곡남(谷南)이라고 부르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송현리, 수심대리, 연흥리, 수영리 일부를 병합하여 곡남리라 하고 금산군 복수면에 편입되었다. 복수면의 행정기관은 모두 여기에 있으며 1928년 9월 10일에 설립된 복수초등학교도 있다. 리의 면적은 3.17㎢이며 김해김씨(金海金氏), 기계유씨(杞溪兪氏), 은진송씨(恩津宋氏), 백천조씨(白川趙氏), 풍천노씨(豊川盧氏)가 옛날부터 많이 세거하는 지역이다.
자연부락(自然部落)
<골내미, 매방골, 상보들, 송천, 수심대, 연흥, 웃말, 은내>
골내미
동쪽으로 산을 끼고 그 아래에 펼쳐진 마을이다. 송천 동북쪽에 위치해서 북쪽으로 굽이쳐 흘러가는 버드내가 한 눈에 보이는 마을이다. 골내미라고 부르는 산 아래 마을이 있으므로 그 산 이름을 따서 골내미라고 부른다. 김해김씨(金海金氏)와 기계유씨(杞溪兪氏)가 옛날부터 많이 사는 마을이다. 마을에서 수영리로 넘어가는 고개는 골내미재라고 부른다.
마을 뒷산이 누워 있는 소 와우형(臥牛形)에 비정된다. 또 마을 앞쪽에는 흡사 뱀처럼 길게 뻗어내린 산줄기가 지나는데, 일제시대 때 신작로가 나면서 뱀산의 목을 끊어버린 꼴이 되어 그로부터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고 촌로들은 입을 모은다.
송천
상보들 서쪽에 있는 마을을 송천이라고 부른다. 골내미에서 바라보면 버드내가 굽이쳐서 태극을 이루는 그 지형 중심부에 자리해 있는 마을이다. 마을과 그 주변에 소나무가 무성하였으며 송씨들이 많이 살고, 버드내 가에 마을이 있으므로 송천(宋川), 송현(松峴), 송촌(宋村)이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옛날부터 은진송씨(恩津宋氏)가 많이 사는 마을이다.
상보들
웃말 동남쪽에 자리한 마을을 상보들이라고 부른다. 북쪽으로는 산을 두고, 마을앞으로는 냇물이 흐르며 그 냇물 건너에 금산에서 진산으로 통하는 지방도가 놓여있다. 마을 앞에 상보가 있으므로 상보들이라고 부른다.
수심대
웃말 서쪽에 있는 마을을 수심대라고 부른다. 버드내가 마을을 빙 돌아 흐르고 수심대라고 쓴 바위가 강변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이 지역 풍수에 감탄하고 여기 와서 잠시 머무를 때 이 바위에서 낚시질을 하며 소요하였다 한다. 그 수심대가 있는 마을이라 바위 이름따라 수심대라고 부르는 마을이다. 옛날부터 백천조씨(白川趙氏)가 많이 세거하는 마을이다.
연흥
골내미 서남쪽에 있는 마을을 연흥(燕興) 또는 연흥리라고 부른다. 버드내가 태극을 긋는 모양의 들판 가에서 냇물이 휘여지는 곳에 자리한 마을이다. 마을이 자리잡은 곳이 제비가 깃드는 연소형(燕巢形)의 명당자리가 있다 해서 연흥, 연흥리라고 부른다. 옛날에는 풍천노씨(豊川盧氏)의 집성부락이었던 마을이다. 연소형(燕巢形)의 경우 마을이 입지하는 자리는 국면 내에서도 비교적 높은 등성이로 올라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처마 끝 제비둥지에서 벌어지는 새끼들의 먹이 쟁탈전을 연상하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예로부터 제비는 중양절(重陽節)인 9월 9일 강남에 갔다가 3월 3일 삼짇날 돌아온다는, 즉 양수(陽數)가 겹치는 날에 오고간다는 상서러운 새로 여겨져 왔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제비가 처마나 마루 끝에 둥지를 지어 집을 더럽혀도 이를 좋은 징조로 여기며 허물지 않았던 것이다. 이 외에도 제비에게 해를 끼치면 학질(瘧疾)을 앓는다든가, 또는 봄은 제비와 함께 온다든가 하는 등의 제비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게끔 하는 여러 이야기들은 제비형국으로 비유되는 국면을 길격으로 생각하게 하는 조건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제비모양의 형국으로는 제비 둥지 모양의 연소형(燕巢形)과 무연형(舞燕形:제비가 춤추는 모양)이 있다.
웃말
수심대 동남쪽에 있는 마을을 웃말 또는 상촌(上村)이라고 부른다. 대전에서 진산으로 통하는 길과, 금산에서 진산으로 통하는 길과, 연흥리로 통하는 길이 합치는 네거리 북쪽으로 곡남리에서는 가장 위쪽에 마을이 있으므로 웃말 또는 상촌이라고 부른다.
은내
상보들 서남쪽으로 대전에서 진산으로 통하는 길가에 자리한 마을을 은내 또는 은천(隱川), 장터라고 부른다. 두 냇물이 합치는 곳에 마을이 있으며 조선시대에 조세미를 쌓아놓은 사창이 있었던 마을이다. 마을 남쪽에는 전설에 서린 각시바위가 있으며 건너편에 신랑바위도 있는 마을이다.
첫댓글 백발대장님 덕에 마을의 유래를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