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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고구려.백제.신라.대진국(발해) ☞출처:http://cafe.daum.net/do92
북부여(北夫餘)(BCE239-58): 고조선(古朝鮮)의 국통을 계승한 '해모수(解慕漱)’가 나라를 세우고, 오가(五加)들에 의해 단군(檀君)의 권좌에 추대되었다.
동부여(東夫餘)(BCE86-AD22) : 북부여의 4대왕 고우루가 죽자, 그의 동생 '해부루(解夫婁)'가 왕위에 올랐으나, 골본부여의 고두막한(동명성왕)에게 쫓기어 동쪽 가섭원에 세운 나라이다.
고구려(高句麗)(BCE58-AD668) : 북부여 시조 해모수(解慕漱)의 둘째 아들, 고진(高辰)의 3세손, 고주몽(高朱蒙)이 세운 나라이다.
백제(百帝): 동부여의 우태(해부루의 서손庶孫)와 소서노(召西奴)의 첫째 아들 비류(沸流)가 요녕성 패(浿).대(帶) 지역에 비류 백제를 세우고, 소서노(召西奴)의 둘째 아들,온조(溫祚)가 남쪽 한강 지역으로 내려와서 확립한 나라이다.
고조선시대에서 열국시대로 접어 들었다. 해모수(解慕漱)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웅심산(熊心山)에서 일찍이 살다가 부여의 옛 서울에서 군대를 일으켜 五加(오가)들에 의해 단군으로 추대되시어 북부여를 세우고 왕이 되니, 이를 북부여의 시조라 합니다.(B.C232년). 단군 해모수가 처음 하늘에서 내려오심은 임술년 4월 초 여드레로서 곧 진시황 8년입니다. 북부여는 7대를 계승해 내려갑니다.
북부여 1대 해모수(解慕漱)
2대 모수리(慕漱離)
3대 고해사(高奚斯)
4대 고우루(高于婁),혹은 해우루(解于婁) : 고우루가 죽자, 고우루의 동생 해부루는 왕위에 올랐으나, 한나라의 침범에 대항해 의병을 일으킨 고두막에게 쫓기어 가섭원으로 가서 나라를 열었는데,동부여라고 합니다. 늙도록 아들이 없어 근심하다가 곤연(鯤淵)의 큰 돌 밑에서 아이를 얻어 이름을 금와(金蛙)라 짓고, 그가 성장하자 태자로 삼았습니다. 그 뒤 재상 아란불(阿蘭弗)의 권고에 따라 도읍을 동해에 가까운 가섭원(迦葉原)으로 옮겼습니다.
5대 고두막(高豆莫)으로 계승되는데, 이분이 바로 동명성왕(東明聖王)이시며 골본(졸본)사람 이십니다. 이때부터 골본(졸본)부여라고 합니다. (BC108)년에 즉위하시고 명실상부하게 고조선 영토를 크게 회복하십니다.
6대 고무서(高無胥):
7대 고주몽(高朱蒙)으로 계승하는데,
동부여의 해부루(解夫婁)가 승하하고 금와(金蛙)가 즉위하였는데, 이때 금와왕은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를 만나서 정분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유화는 천제의 아들 해모수(解慕漱)의 증손자 옥저후(沃沮侯) 불리지(弗離支)와 부모의 허락없이 맺어짐을 들켜 부모에게 쫓겨나 우발수에 살고있다 하므로,금와왕은 유화를 데려다 궁중에 유폐시켰습니다. 유화께서 남아(男兒)를 낳아 성장하니,이가 곧 주몽입니다. 불리지가 죽으니 유화는 아들 주몽을 데리고 웅심산으로 돌아왔으니 지금의 서란(舒蘭)입니다.
주몽이 성장하여 사방을 주유하다가 가섭원(迦葉原)을 택하여 살다가 관가에 뽑혀 말지기로 임명되었습니다. 주몽은 예씨 부인과 결혼하여 살고 있었는데 얼마 안 되어 관가의 미움을 사고 금와왕의 일곱 왕자 및 여러 신하들이 시기하여 죽이려 하였습니다. 이에 어머니 유화의 뜻을 따라 화를 피하여 예씨 부인과 정표를 남기고, 동남으로 도망하였다가 동부여에서 골본(졸본) 부여로 남하하게 된 것 입니다.
골본부여에는 통치권을 이어받은 스물아홉살의 과부인 소서노(召西奴) 왕녀가 계승하고 있었습니다. 소서노(召西奴)는 해부루의 서자의 아들인 우태(優台)의 부인이었고, 우태(優台)는 일찍 세상을 하직하여 소서노(召西奴)는 과부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소서노(召西奴)에게는 우태(優台) 사이에 낳은 어린아들 비류와 온조가 있었습니다.
B.C 58년 골본부여 고무서 임금은 아들이 없었는데,고주몽을 보고 범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과부가 된 자신의 딸,소서노(召西奴) 왕녀를 아내로 삼게 하였는데,고주몽은 왕위에 오르게 되고, 해모수 사당을 짓고 고구려(高句麗)의 국통을 확립합니다. 동부여에 있는 예씨 부인과의 사이에 남겨두고 왔던 아들 유리(琉璃)가 찾아오자 그를 태자로 삼았습니다. BC 37년 주몽은 성(姓)을 고(高)라 하였습니다. BC 36년 비류국(沸流國)의 왕 송양(松讓)의 항복을 받았고, BC33년 행인국(荇人國)을 정복하고, BC28년 북옥저(北沃沮)를 멸망시켰습니다.
중국의 사서에서 골본(忽本)이 졸본(卒本)으로 적혀 있는 것은, 한나라가 고구려의 후기 수도인 골본(忽本)을 포함한 고구려의 영역 일부를 점령하면서 다시는 고구려가 일어나 강국이 되지 못하도록 기원하는 마음에서 고구려의 수도를 골본(忽本)으로 적지 않고 졸(卒)자를 사용하여 졸본(卒本)으로 적었기 때문입니다. 광개토왕 비문에는 골본(忽本)으로 적혀 있습니다. 졸본(卒本)의 원래 명칭은 골본(忽本)입니다. 골본(忽本)은 수도라는 뜻이므로, 수도가 바뀌면 골본(졸본)이라 부른 곳의 위치도 바뀌었습니다. 즉 환단고기 북부여기나 고구려 본기에 골본(忽本)으로 적혀 있는 지점은 심양(沈陽)이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고주몽이 임시 수도를 둔 곳으로 적혀있는 졸본천(卒本川)은 비류강 상류이며, 그 뒤 유리(琉璃)가 고주몽을 찾아온 졸본(卒本)은 당시 고주몽 고구려의 수도인 북옥저(北沃沮)입니다.
한편, 전한서(前漢書) 등에는 고구려(高九黎)가 고구려(高句麗) 또는 구려(句麗)로 적혀 있는데, 고(高)자가 천제(天帝)를 뜻하고, 구려(九黎)가 하늘나라(九天)에서 내려온 무리(黎)를 뜻하자 천제를 뜻하는 고(高)자를 빼고 구려(九黎)를 같은 음의 구려(句麗)로 바꾸어 적었기 때문입니다.
동이는 동쪽의 활을 쏘는 어진 민족이란 뜻인데 동이는 구이족(구려족九黎族이나 동이족東夷族) 중 하나였습니다. 동북아시아를 지배했던 민족을 한족들은 예로 부터 동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한족은 자기네 역사는 부풀리고 타민족의 역사는 축소시킵니다. 동이를 어진민족에서 오랑케라고 고쳐 부르고 역사왜곡이 시작된 때가 한무제 때부터 입니다. 우리는 한무제가 천하를 통일한 군주로 아는데 사실은 동북아시아의 맹주 북부여와의 전쟁에서 패전을 합니다. 한무제가 고조선을 멸망시켰다고 하는데, 그건 당시 고조선의 국호가 북부여로 바뀌고 그 제후국인 번조선을 찬탈한 위만정권을 한무제가 복속시킨 것입니다. 그 여세로 북부여를 공격하지만 고두막한이라는 북부여의 영웅이 한무제의 침략을 막아 냅니다. 북부여 침략에 실패한 한무제가 그때부터 그 보복으로 역사왜곡을 하게됩니다. 한나라의 한사군에 저항에서 고구려가 힘을 키워 나라를 세운다고 하는데 고구려라는 나라는 원래 부족국가로 출발한 것이 아닙니다
고주몽이 동부여를 떠나면서 임신중인 동부여의 예씨부인에게 자신의 아이가 성인이 되면, 자신을 찾아오라고 하면서 떠난다. 주몽은 징표를 가지고 오라고 했는데, 그 징표는 육각나무 밑의 육각돌 밑에 묻어놓았으니, 이 징표를 가져오면 자신의 아들로 인정해 주리라고 하였다. 이에 태어난 아들이 유리이다. 유리(琉璃)는 어머니인 예씨부인의 슬하에서 열심히 학문과 무예를 익히면서 성인이 되자,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서 온 산의 나무를 찾아 보았지만, 도저히 육각나무와 육각돌맹이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느날 지쳐서 마루에 누워서 보니 바로 자신의 집의 기둥이 육각기둥이고, 그 밑의 돌이 육각돌인 것을 알 게 되었다.그 밑의 땅을 파보니 부러진 칼 한자루가 나왔다. 유리(琉璃)는 이것을 들고,고구려로 찾아간다. 주몽이 자신의 아들이면 징표를 내놓으라고 하자, 부러진 칼을 내 놓았고, 이것이 주몽이 가지고 있던 반쪽의 칼과 일치하자 자신의 후계자임을 선포한다.
이 당시 고구려에서 주몽을 도와서 나라 건국에 힘쓴 골본 부여의 여왕 소서노(召西奴)"는 고주몽이 동부여에서 찾아온 고주몽의 아들 유리(琉璃)를 고구려의 후계자로 지목하자, 소외감을 느끼고, 전 남편의 아들 비류(沸流)와 함께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로 결심한다. B.C 19년에 고주몽이 죽자,요녕성 패(浿).대(帶) 지역에 소서노(召西努)와 아들 비류(沸流)가 세운 나라가 백제(百帝)이다. 비류(沸流)는 고구려의 정통성이 맏이(伯)인 자기에게 있다는 뜻으로 자신을 백제(伯帝)라 칭하였다. 백제(百帝)는 동부여의 우태(해부루의 서손庶孫)와 소서노(召西奴)의 첫째 아들 비류(沸流)가 요녕성 패(浿).대(帶) 지역에 세운 나라이고, 소서노(召西奴)의 둘째 아들 온조(溫祚)가 남쪽 한강지역으로 내려와서 계승한 나라이다.
백제의 기원
백제의 기원은 역사책마다 각각 틀리게 나와 있다.
환단고기(桓檀古記)에는 비류(沸流),온조(溫祚) 2명으로 적혀 있으며,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백제(百濟)의 시조가 온조(溫祚) 1명으로 적혀 있고,삼국사기(三國史紀) 백제본기(百濟本紀)에는 비류(沸流),온조(溫祚),구태(九台) 3명으로 적혀있다.
이곳에서는 아직까지 역사학계의 일반으로 받아들이는 비류와 온조 백제설을 시작으로 풀어나가고자 한다.
동명성왕이 세운 골본(忽本) 부여(夫餘)에 인물이 출중한“소서노(召西奴)라는 여왕이 살고 있었다. 소서노(召西奴)는 동명성왕의 아들 "고무서왕"의 딸이었고,우태(해부루의 서손庶孫)와 결혼하여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라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남편이 일찍 세상을 하직하여 여왕이면서 과부로 살고 있었다. 바로 그 무렵, 그녀 앞에 고주몽이라는 젊은 청년이 불쑥 나타났다. 고주몽은 겨우 신하 세명 끌고,동부여(東夫餘)에서 이웃 나라로 도망쳐 온 주제에 자기는 북부여의 천제이신 해모수의 3세손 "고모수"와 만주의 군장 하백의 딸“유화”사이에서 태어나신 귀하신 몸이라고 떠벌리며 백발백중 만주 벌판 최고의 궁사로 이름을 날려, 그녀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B.C 58년 골본부여 고무서 임금은 아들이 없었는데, 고주몽을 보고 범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과부가 된 자신의 딸과의 결혼을 허락하였다. 소서노(召西奴)는 우태(해부루의 서손庶孫)와 사별한 후, 주몽을 두 번째 남편으로 맞이 한 것이다. 소서노(召西奴)와 주몽은 세력을 키우고 도읍을 옮겨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로 바꾼 뒤, 일대의 부족들을 정복하며 점점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소서노(召西奴)는 토착세력의 분열을 잠재우고 주몽에게 힘을 집결시키는 킹메이커(king maker)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전 남편(우태)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큰 아들 비류(沸流)가 후계자가 될 것이라 굳게 믿었다.
그러나, 주몽이 동부여에서 도망쳐 나올 무렵,동부여의 예씨부인과 사이에 태어난 “유리(琉璃)"라는 아이가 성장하여 왕이 된 아버지 주몽을 찾아왔다. 그리고, 주몽은 바로 그 유리(琉璃)에게 태자 자리를 넘겨주게 된다. 고주몽은 고구려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자신의 입국(立國)과 성장을 도운 소서노(召西奴)를 왕비로 하였지만, 소서노(召西奴)의 큰아들 비류(沸流)를 태자로 삼지 않고 전에 골본(忽本)에 있을 때 북부여(北夫餘) 6세 고무서(高無胥) 단제(檀帝)의 딸 예씨(禮氏)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유리(琉璃)를 태자로 삼은 것이다.
소서노(召西奴)와 그녀의 아들 비류(沸流)는 동부여에서 찾아온 고주몽의 아들 유리(琉璃)를 고구려의 후계자로 지목하자, 소외감을 느꼈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로 결심하였다. 비류(沸流)는 자신이 비록 적자는 아니지만 맏이(伯)이고 또 고주몽의 입국(立國)을 도왔는데도 자신을 태자로 삼지 않고 유리(琉璃)를 태자로 삼은데 불만을 품었다. 마침 그무렵, 고주몽이 죽게 되는데, 고주몽이 죽은 바로 그해 B.C 19년에 요녕성 패(浿).대(帶) 지역에서 스스로 임금(帝)의 위(位)에 올랐다. 이때 비류(沸流)는 고구려의 정통성이 맏이(伯)인 자기에게 있다는 뜻으로 자신을 백제(伯帝)라 칭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비류(沸流)를 따르지 않아 비류(沸流)는 유리(琉璃)와의 정통성 싸움에서 패하였다. 그 결과 고주몽 고구려지역 대부분은 유리(琉璃)가 장악하였고,비류(沸流)는 근거지인 패.대 지역만 장악하였다.
온조(溫祚)는 형인 비류(沸流)가 B.C 19년에 패.대 지역에서 스스로 임금(帝)의 위(位)에 올랐을 때, 아무도 비류를 따르지 않는 것을 보고 후환을 걱정하여 B.C 18년에 따르는 무리들을 이끌고 배를 타고 한반도로 와서 한강(漢江) 북쪽에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온조국(溫祚國)으로, 수도 명칭을 위례성(尉禮城)이라 칭하였다. 고대 시대에 ‘온(百)’은 단순히 '100'이라는 뜻이 아니고 아주 많다는 뜻이고, 조(祚)는 천자(天子)의 자리를 뜻하므로, 온조(溫祚)는 온(百) 세상을 다스리는 임금(帝)이라는 뜻이다. 즉 온조(溫祚)는 백제(百帝)와도 같은 뜻이다. 그리고 위(尉)는 하늘에 있는 해 즉 천제(天帝)를 뜻하고, 례(禮)는 부여 무리를 뜻하므로, 위례성은 천제의 아들 무리가 살고 있는 성(城)이라는 뜻이다. 이를 보면 온조는 해님의 아들을 상징하는 글자로 "위(尉)"자를 사용하였다.
또한,온조(溫祚)가 백제(百帝)라 칭하지 않고 온조(溫祚)라 칭한 것은 형 비류(沸流)가 칭한 백제(伯帝)와 같은 발음을 피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온조국(溫祚國)은 B.C 6년에 낙랑(樂浪)이 보낸 5무리의 기마부대(五虎)에 의해 위례성이 점령당하였다. 위례성이 점령당하자 온조(溫祚)는 온조국(溫祚國)의 유민들을 데리고, 한강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다급한 처지에 빠진 온조(溫祚)는 한강 이남 지방을 다스리고 있던 홍성(洪城) 금마(金馬) 마한(馬韓)으로부터 마한(馬韓)의 동북 땅 1백 리를 할양 받아 금마산(金馬山:홍성 금마)에서 마한(馬韓)의 후국(侯國)인 십제국(十濟國)을 세웠다. 이 십제(十濟)는 10명이 한강을 건너와서 세운 나라라는 뜻이 아니고 아주 적은 숫자의 사람이 한강을 건너와서 세운 나라라는 뜻이다. 그 뒤 온조(溫祚)는 힘을 길러 홍성 금마 마한의 세력권에서 벗어난 후부터 다시 위례(尉禮)라는 칭호를 사용하였고, 비류 백제가 멸망하자, 다시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에서 백제(百帝)로 바꾸었다.
백제(百帝)는 동부여의 우태(해부루의 서손庶孫)와 소서노(召西奴)의 첫째 아들 비류(沸流)가 요녕성 패(浿).대(帶) 지역에 세운 나라이고,소서노(召西奴)의 둘째 아들 온조(溫祚)가 남쪽 한강지역으로 내려와서 계승한 나라이다.
글 작성: 최병문 (010-4607-3746) [펌]정은실사랑 http://cafe.daum.net/sdiwi100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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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鼎山 칼럼:http://blog.naver.com/wondreams7/
중국대륙,그곳은 우리역사의 주무대였다. -鼎山 칼럼
아직까지 사람들과 대화를 해보면 많은 사람들이 철저하게 반도사관에 얽매어 헤어나질 못하고 있음을 알게되고 답답함을 금할 수 없다. 중국의 요?순도 동이족이고 백이?숙제도 동이족이며 심지어 삼황오제의 黃帝도 동이족이라는 이야기에까지 미치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며,미쳐도 보통 미친게 아니구나 하고는 아주 불쌍한 듯이 삐딱하게 쳐다볼 때는 정말 미치고 싶은 심정이다.
최근 중국에서는 대진국의 역사를 자기들의 역사라고 어거지를 쓰던 것도 부족해 이제는 고국려의 역사도 자기들의 역사라고 떼거지를 쓰며 방치되어있던 광개토왕의 비까지 엄청난 돈을들여 건물을 지어 보호하고 있다고 최근 언론에 보도된 바 있다.
그래서 우리의 역사는 반도의 역사가 아니고 중원의 역사였음을 알리기 위해 몇가지 사실을 알리고자 한다. 역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적어도 이정도는 알고 있어야 되지 않을까. 그리고 이 칼럼은 한국상고사를 연구하고 계시는 전문가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분들에게는 아주 기본적이고 이미 잘 알려진 것이기 때문에 세삼스러운 것이 못되고, 단지 엉터리 국사교과서만 믿고 맹종하며 중국대륙의 역사가 곧 우리의 상고사이다라고 하면 웃을 분들을 위한 칼럼이며,그러한 분들로 하여금 조금이라도 우리의 상고사에 관심을 가져주십사 하는 의미로 쓰는 글이다.
주장하는 바를 입증키위해 많은 우리의 사서 자료가 있음에도 중국의 사서를 많이 인용케 되는데 이는 중국의 사서가 훌륭하고 정확해서라는 이유가 아니고 중원에서의 우리의 고대사기록이 그들의 정사에 버젓이 등장하기 때문인 것이다. 예컨데 그들의 사서에서 대륙백제의 존재를 인정하는데, 없는 백제를 만들어 올리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正史인 25史에 대해서 조금 알고 넘어가야겠다.
25史란 천자 치세(天子治世)의 연대기인 본기(本紀)와 저명한 개인의 사적(事績)을 기록한 열전(列傳)을 불가결의 요소로 하여 기전체(紀傳體)에 따른 중국 역대의 역사서로서 한(漢)나라의 사마천(司馬遷)이 상고(上古)로부터 한나라 무제(武帝) 때까지 기록한 《사기(史記)》에서 시작되는데,
이하는 단대사(斷代史)로서 1 왕조마다 1 부씩 사서(史書)가 만들어져 반고(班固)의 《전한서(前漢書)》, 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를 합하여 사사(四史)라고 부른다. 이후의 왕조에 대해서는 《진서(晉書)》 《송서(宋書)》 《남제서(南齊書)》 《양서(梁書)》 《진서(陳書)》 《위서(魏書)》 《북제서(北齊書)》 《주서(周書)》 《수서(隋書)》 《신당서(新唐書)》 《신오대사(新五代史)》가 만들어졌고, 남송(南宋)시대에 와서 《남사(南史)》 《북사(北史)》를 더하여 17사(史)로 총칭되었다.
원(元)나라 말기에 《송사(宋史)》 《요사(遼史)》 《금사(金史)》가 저술되었고, 명(明)나라 초 《원사(元史)》가 성립되었으므로 이들을 합하여 21사(史), 청(淸)나라 초 만들어진 《명사(明史)》를 합하여 22사라고 하였다. 청나라 왕명성(王鳴盛)의 《17사 상각(商
)》, 조익(趙翼)의 《22사 차기(箚記)》 등의 이름은 여기에 유래한다. 건륭제(乾隆帝)는 이에 더하여 《구당서(舊唐書)》와 《구오대사(舊五代史)》를 내어 24사로서 궁중의 무영전(武英殿)에서 인행(印行)하였는데, 합하여 3,243권에 달한다. 민국 초에는 커사오민[柯
]의 《신원사(新元史)》가 정사로 추가되어 25사가 되었다. 청나라에 대해서는 민국 초에 《청사고(淸史稿)》가 나왔으나 아직 정사로서 권위 있는 ‘청사(淸史)’는 나와 있지 않다.
<1> 한반도 뿐만 아니라 중국대륙이 오랫동안 우리역사의 주무대였던 사실 및 그 증거들
1. 한사군의 실체를 알면 거의 다 알았다.
"기원전 108년 한무제가 군사를 파병해 위만조선을 격파하고 평양부근의 낙랑을 비롯하여 진번,임둔,현도의 4군을 설치했다"는 것이 그동안 인정되온 漢四郡의 내용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의 황국사관,혹은 그에 중독된 우리의 일부 사학자들이 주장해온 망발에 지나지 않음을 곧 알게 될 것이다.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는 증거
가. 《史記》《朝鮮列傳》에 보면, 한무제가 보낸 수군의 사령관 양복은 열수를 거슬러 올라가다가 조선수군의 습격을 받아 패전하여 배는 가라앉아버렸고 상륙하여 "遁山中十餘日(산속에 10여일을 도망다니다)"의 치욕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패전의 책임을 물어 사형을 당하였고,그것도 부족해 시체를 ??어 장안의 4대문에 거는 기시(棄市)형을 당하였으며.육군사령관 순채도 같은 기시형을 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승전하여 한사군을 설치하고 돌아온 장군 같으면 상을 주었으면 주었지,기시와 같은 참형에 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거의 위만조선이 조선족의 쿠데타로 무너져 옛 위만조선의 땅을 조선사람 참?최?음?협의 평주·홰청· 추저·날영이며 그 위치를,《사기》는 발해연안에서 산동반도까지라고 하였다. 즉 고조선이 그쪽에 있었다는 말이다. 《사기》의 저자 사마천은 소위 한사군전쟁때 생존했던 사람으로서 그 전쟁을 직접 보고,듣고,체험하였고,그를 역사로 기록한 것이 《사기》중 《조선열전》이며,그 기에는 낙랑?진번?임둔?현도란 말은 한마디도 안나온다.
나. 후한서 권85 동이 부여전에 부여왕이 보병과 기병 7.000~8,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후한의 낙랑군을 공격했다고 기록돼 있다. 낙랑이 평양에 있다면 부여는 고구려를 거쳐야 공격할 수 있다. 그러나 대무신왕때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대소왕이 죽는 등 양국은 적대관계에 있었다. 부여가 우회에서 공격했다 해도 고구려군에게 후방을 차단당하면 전멸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공격 그 자체가 설명되지 않는다. 낙랑이 평양에 있지 않았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다. 또 후한서 권85 동이열전 고구려조에 보면 고구려군이 우북평,어양,상곡,태원에 진출한 기록이 나온다. 후한의 내지에 깊숙이 침투할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던 고구려가 반도 내의 조그만 낙랑군을 그대로 좌시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다. 고고학적 증거로는 1976년 평남 대안시 덕흥리의 무학산 밑에서 발굴된 고분이 결정적 증거가 될 수 있다. 이 고분벽화에는 유주자사 진에게 보고하는 13명의 태수그림이 그려져있는데 그 뒤에 관명이 새겨져 있다. 그 이름은 다음과 같다. 연군태수(하북성 보정부 서쪽의 완현부근), 광령태수(하북성 탁현의 군치), 상곡태수(보정부,하문부 및 순천부 서남경계), 어양태수(하북성 밀운형 동쪽), 범양태수(북경의 서쪽), 대군태수(산서성 대동현 동쪽), 북평태수(북경지방), 낙랑태수(북경 동쪽의 하북성), 창려태수(산해관 남쪽), 요동태수(하북성 영정하 동쪽), 요서태수(하북성 영정하 서쪽), 현도태수(하북성 북경 서남쪽), 대방태수(창려,금주일대)이다. 유주는 연나라 지역으로 북경일대를 말한다. 그 유주의 관할태수중에 낙랑,현도,대방등의 이름이 나왔으니 과연 한사군의 실체가 무엇인지 능히 짐작할 만하다.
2. 패수(浿水)의 위치
패수,열수는 대동강이나 천천강이 아니고 중국에 있는 강이다. 양자강 이북,만리장성 이남 사이에 있는 강물에 대한 글인 상흠(桑欽)의 《水經》에 보면 "浿水出樂浪郡樓方縣 東方過於臨溟縣 東入于海(패수는 낙랑군 누방현에서 흘러나와 동쪽으로 임명현을 지나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대동강이나 청천강은 우리나라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 서해바다로 들어간다. 그러므로 이와 반대로 흐르는 패수나 열수는 중국에 있는 강이며 양복이 7,000의 군사를 이끌고 왕검성을 치기 위해 거슬러올라간 것은 한반도의 대동강이 아니고 중국에 있는 강이다. 이병도는 열수가 대동강인 것으로 아예 못박아놓고는 원전이 '東入于海'의 '東'은 '西'의 誤記인 것같다란 망발을 하고 있다.
3. 대륙에 신라,백제,고구려가 다 있었다.
대륙의 삼국의 殘影을 찾아보자. 백제의 첫수도 하남 위례성은 산동반도에 있었다.
산동성 시대의 백제
신라 역시 절강성에서 건국되었다.
삼국사기 어디를 찾아 보아도,백제,신라가 중국대륙 동안에서 건국되었다는 기사는 보이지 않는다.
이는 삼국사기의 편찬책임자였던 김부식의 극심한 사대적 반도사관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면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교수의 "인간과 우주"라는 저서에 발표된 삼국의 천문관측지도로 보면,백제와 신라의 수도가 당연히 대륙에 있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삼국사기는 위서 혹은 날조서로 전락하므로) 중국의 이른바 주요사서들에서 나타나는 여러 기사를 종합해 볼 때,백제와 신라가 대륙에서 건국되지 않고서는 설명될 수 없는 기사들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태백일사> 등의 여러 기록들을 보더라도 백제와 신라의 수도는 대륙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추정을 바탕으로 위 지도를 작성해 본 것이다.
위만조선과 구별하기 위해서,일연은 <삼국유사>에서 단군 진조선을 고조선이라 불렀는데,바로 그 고조선에는 진조선의 왕인 단군 이외에 2명의 비왕이 더 있었다. 그 하나가 번한이고 다른 하나는 마한이었다. 번한이 다스린 조선을 번조선(불조선), 마한이 다스린 조선을 마조선(말조선)이라 했으며,연나라 사람 위만이 멸망시킨 고조선은 삼조선 가운데 최후의 왕 기준이 다스린 번조선에 불과했다.
번조선의 위치는 오늘날 산동반도에서 난하 유역,북경을 아우르는 지역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고구려 유주자사 진의 무덤으로 알려진 덕흥리 고분의 벽화와 유물을 통해서도 입증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번한조선이 멸망한 후,그 유민들이 동쪽이 아닌 서쪽으로 이동하여 타클라마한,토번등의 후서삼한을 건설하였는데,김부식은 그의 졸저 <삼국사기>에서 후서삼한의 마한과 온조 27년에 백제에 의해 멸망당한 후동삼한의 마한을 구분하지 못하고 햇갈리는 추태를 보여주고 있다. 다만 후동삼한의 마한은 원삼한의 마조선과 동일한 마한임은 틀림없다. 그러므로 백제는 중국사서의 기록대로,기원전 3세기경에 이미 <구대 백제>로서 산동반도 일대에서 건국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대륙백제는 AD 503년에 요서,진평군 등의 산동반도 일대를 고구려에게 내준 다음,한반도의 서남단으로 천도하였고,고구려가 당나라에 의해 멸망한 이후에는 신라방이라는 지방정부 형태로 일정기간 신라에 의해 지배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른바 후기 신라(속칭 통일신라) 사람으로 출생지가 분명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진 해상왕 장보고 역시 옛 백제땅의 신라방 사람이다.
신라 역시 대륙 남동안에서 건국되었고,한반도의 남단을 겸병하다가 중화족에 점차 밀리면서 한반도로 천도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부식은 사대적 합리주의 발상에 따라 반도사관을 고수하며,삼국의 대륙역사를 모두 부정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신라에서는 나라를 "방"이라 한다'는 중국사서의 기록에 유념하자. 특히 중화족은 예컨대 "고구려현"의 경우에서처럼 엄연히 고구려라는 국가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지네들 멋대로 일개 현으로 격하시키는 만행을 서슴지않아 왔는데 산동성의 백제와 절강성의 신라 역시 엄연히 국가로 존속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개 주,군,현 쯤으로 치부하여 버리고 의도적으로 대륙백제와 대륙신라의 역사를 삭제시켜버린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다음문헌을 한번보자.
鄭福田 可永雪 楊效春 主編 {中國將帥全傳}(권中 劉仁軌), (北京, 工商出版社, 1997), p.933,
龍朔三年(663年) 劉仁軌所率的水軍及運粮船隊與刮兵大戰于白江(今湖南稚陽)之上, 接連四戰, 均茯大, 焚燒刮船四百余, 一時江上火光 天, 江水都被染紅了. 刮兵大敗, 百濟王危惶逃避, 其余刮都歸降了唐軍. 劉仁軌因功任帶方州刺史, 鎭守百濟. 乾封元年(666年) 任右相.
용삭삼년(663년)
유인궤는 소속한 수군과 운량선대와 병사를 인솔하여,白江(지금의 호남치양)의 위에서, 연속 四戰에 접하? ---중략---,전선 4백여를 불태우고 깨트려서,일시 강 상류에 화광이 빛나고 하늘은,강물이 빨갛게 물듦이 배었다. 병이 대패한 백제왕은 황급히 도망하여 도피했는데,우리가 그 도읍을 쳐부수고 당군은 그 항복을 받았다. 유인궤는 그 공으로 인해서 대방주자사에 임명됐고,백제의 진을 수비했다. 건봉원년(666연) 우상에 임명되었다. 명백하지 않는가. 백마강 달밤도,낙화암도 없는 중국대륙의 호남인 것이다.
대륙 백제
중국 <송서>,<양서>의 <백제전>에서는,
[백제는 후에 점점 강하고 켜져서 여러나라를 병합하였다.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265~316)때에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점령했고,백제도 역시 진평,요서의 2군을 점거,소유했다..... 백제가 백제군을 자치했다.]라고 하였다.
백제가 한반도 서남쪽인 충청도,전라도,경기도 일대를 점유했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 통념이요 상식이다. 그러나 그 백제가 중국대륙 가운데서도 황하문명의 심장부라 할 수있는 황하 북쪽의 하북성에 요서군을,남쪽의 하남성에 진평군을 개척하고 자치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백제군>이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중국 동해안의 백제 7군도
<남제서>에서는 백제의 중국 식민지 명칭과 그 통치자의 관직명이 상세히 언급되고 있는데,그중 중요한 7군의 명칭과 위치는 옆과 같다...
대륙 백제는 중국사가 증명한다.
<남제서>권 58의 <백제전>에는 북위의 군대와 백제와의 전쟁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고,<삼국사기>엔 [동성왕(벡제24대왕,479~501)10년에 북위가 파병하여 침벌해왔으나 백제에 의해 패퇴되었다]고 하였으며, <자치통감>에서도 [영명 6년(488)에 북위의 군대가 백제를 쳤으나 패퇴되었다.]고 하였다.
종래엔 이 기록들을 한반도의 백제와 중국 산서성 대동에 도읍한 북위국과의 전쟁기사로 오인하여,난해안 기사라고 착각해온 것이 통례였다. 북위는 중국 남북조시대에 양자강 북쪽에 위치한 앙조로서 양자강을 넘지 못하여 남조인 송,제,양,진 등과 대치하고 있었다. 따라서 황해나 동지나해를 건너 백제를 침략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막강한 고구려를 뛰어넘어 반도 서남의 백제를 공략할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에,위의 전승기사는 수수께끼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이는 반도사관의 해동 때문이다. 여기의 백제는 반도의 백제가 아니라 대륙의 백제인 것이다. 당시 동성왕은 상동반도의 백제 서경인 불기(거발성)에 도읍하여,가까운 곳은 공격하고 먼 곳은 화친한다는 정책을 쓰고 있었다. 이에 멀리서 화친관계에 있는 남제의 왕에게 동성왕의 인사명령 내용을 국서로서 통고한 것이 <남제서>의 <백제전>의 내용인 것이다.
고구려 백제가 요중심의 동쪽에서 북으로 유연제노 남으로 오월을 평정
고구려 백제가 유연제노와 오월에 있었다고 배운바 없으나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 백제가 강병 100만으로 북으로 유연제노,남으로 오월을 침범하여 장안중심국가의 큰걱정거리가 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 유연제노오월에 고구려 백제가 있었다고 배우지 않았다. 현재 만주까지 고구려가 통치하였고 백제가 요서진출이라고 하여 요하의 서쪽으로 진출한 것으로 배울 뿐이다. 그러나,삼국사기 최치원전에는 제목과 같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유는 하북성 북쪽지역,제노는 상동성,오는 강소성 남부,월은 절강성을 나타내고,연나라는 사기에 의하면 산서성 북쪽이다. 유연지역에는 고구려초기 고구려와 한이 전쟁을 하였고 고구려가 평정한 북평 태원이 현존하고 있으며,고구려와 당의 전쟁관계 지명으로 용도,은산,신성 등이 있다.
연제노오 지역에는 개로왕 때의 지명 하수,숭산,제방이 있고,의자왕 때 지명 평원,황산,동명,침현(침구) 주류성(주류자),백마강(백마하),항성(당항성),동성,잠산,독산,덕안 등이 있다.
유연제노 오월에는 강병백만을 동원할 인적자원이 있다고 보여지고,의자왕때 지명이 있는 산동성의 명나라때 인구가 백제인구와 비슷하지만,한반도는 조선초기에도 백제 인구를 따를수 없다.
유연제노에서 오월지역에는 한웅으로 불리는 치우천자 능이 있고,소호금천씨 능이 있고,기자총이 있다고 하였으니,우리민족의 연속성이 있는 지역이다. 이 지역에는 삼국사기,삼국유사,중국25사의 공통부분이 있는 곳이다. 최치원은 북으로 유연제노,남으로 오월이라고 하였는데,가운데 사와 로가 있는 강소성과 안휘성, 해가 있는 강소성과 령이 있는 안휘성 사람으로 보여진다. 삼국사기가 사대주의에 의해서 편찬되었다면 결코 이런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사로신라 즉,대륙신라의 건국과 패망의 추정
대륙신라는 중국25사와 삼국사기의 공통부분으로 복원이 가능한데,건국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에서는 22대 지증왕이 마립간에서 신라왕으로 변경하니 진평이 26대이다.
그런데 북사에서 진평은 30대이니 4대의 오차가 있다. 간에서 왕으로 변경한 동쪽 신라는 21대까지는 간으로서,22대 지증이 옳다고 보아야 한다. 대륙신라는 30대 진평이니 사로의 건국은 현재의 서기전 57년보다 4대를 더한 년대가 건국년대로 추정해야 한다.
동쪽 신라는 936년에 패망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대륙신라는 663년에 당나라의 속국으로 계림도독부로 되었으며,당나라 연방의 1국으로 존재하였다고 보여지는데 장보고 최치원에 의하여 진평10년까지는 존재하였다고 보아야 하지만,당나라 패망과 함께 패망한 것으로 보아야 할지,아니면 더 존재하였는지는 앞으로 계속하여 연구해보아야 할것 같다.
자장법사는 사로신라와 신라를 모두 다닌 유일한 기록이다.
삼국유사에서도 사로신라와 신라가 각각 있음을 확인하고 있다. 자장법사가 돌아왔을 때 신라왕이 선덕여왕이었다. 선덕여왕은 결혼을 했다는 기록도 아들이 있다는 기록도 없다. 이름은 덕만이었다. 그런데 또 다른 항목에서는 자장법사가 돌아왔을 때 신라왕은 정신대왕이며 정신대왕에게는 보천태자와 또다른 왕자가 있었다. 자장법사가 돌아왔을 때 신라왕이 다르다는 것은 사로신라왕과 신라왕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결국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나 25사나 사로신라와 신라가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으나,명칭이 신라이므로 단일국가로 인식하려고 하다보니 사서를 부정하는 쪽으로 기울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삼황오제는 모두 東夷族이었다.
중국문헌에서 찾은 동이족에 대한 고증
▒ 중국민족의 조상은 바로 동이족이다. <중국 고사변>
▒ 삼황오제의 8대 임금들은 숙신(조선의 옛이름)에서 나왔다. <산해경>
▒ 순임금은 동이족이다. <맹자(孟子)8편> 또 순임금의 선조인 황제도 동이족이 되는 것이다.
▒ 태호복희의 성은 風이며,고대 동이족이다. <98년판 중국상해출판사, 역대제왕록>
▒ 은나라는 이(동이족)의 나라이고,주나라는 화(華 : 중국 漢족)의 나라이다. <사마천의 사기>
▒ 은나라는 동이족이다. <고사변, 현재 홍콩대학의 임혜상교수, 대만대학의 서량지교수>
▒ 중국 고대사는 모두 동이족의 역사다. <중국 북경대 고고학과 엄문명 주임고수 증언>
(東夷 歷史는 본 홈페이지,"테마별 소고"의 "대동이'에 게재되어 있습니다)
알려진 자료만해도 너무 방대한 양이라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어려운 바,우리역사가 정말 그랬을까 하는 호기심이라도 갖게 되었다면,이 칼럼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하겠다.
2003.10.17. 鼎山> [펌]☞鼎山 칼럼:http://blog.naver.com/wondreams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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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동부 지배한 황제국 – 백제
(흠정 만주 원류고를 중심으로)
沈伯綱
●1956년 경기 파주 출생
●국립 대만 사대 및 중국 옌볜대 대학원 역사학 박사
●월간 ‘한배달’ 편집인
●저서 : ‘사고전서 중의 동이사료’ ‘조선왕조실록 중의 단군사료’ ‘조선왕조실록 중의 기자사료’ ‘이이 왕안석 경제개혁사상 비교연구’ 등
청나라 역사서, 중국 요서를 백제 영토로 인정
중국의 동북공정 뒤엎을 史料 찾았다!
●‘흠정만주원류고’, 백제를 중국 동부 지배한 황제국으로 기술
●온조왕~다루왕 사이 11명의 왕이 역사에서 사라졌다
●소정방이 멸망시킨 것은 일부분, 신라 멸망 후에도 백제는 존속
●한반도 서부 중심의 백제사는 일제의 역사 왜곡
최근 중국 동부지방에 위치했다는 ‘화북백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흔히 백제라고 하면 의자왕, 삼천궁녀, 낙화암 같은 패망의 역사, 부끄러운 역사를 떠올린다. 그것은 백제 역사에서 자랑스러운 면보다 어둡고 수치스러운 면이 부각됐기 때문이다.
우리는 백제를 제대로 알고 있는가.
백제가 부여의 정통성을 계승한 국가이고, 대륙 깊숙한 요서(遼西)지역에 수도를 가질 만큼 강력한 대제국이었다는 사실은 망각되었다. 그러나 백제는 삼국 중 제일 먼저 패망한 나라가 아니라 가장 오랫동안 존속하며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준 나라였다.
잃어버린 백제사를 복원하기 위해선 백제의 뿌리인 부여에서 실마리를 풀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시경(詩經) 노송(魯頌) 비궁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부산(鳧山)과 역산(繹山)을 차지하고 마침내 서국(徐國)의 영토를 짓밟아 해방(海邦)에 이르니 회이(淮夷)와 만맥(蠻貊)과 저 남쪽 이족들이 따르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감히 순응하지 않는 이가 없어 노후에게 순종했다.”
노송이란 동방의 동이족을 몰아내고 노나라를 세운 주공(周公)을 칭송하기 위해 자손들이 쓴 글로 여기에 나타나는 부, 역, 서택, 해방, 회이, 만맥, 남이는 노나라 건국 당시 오늘의 산둥성, 장쑤성, 저장성, 안후이성, 푸젠성 일대 동남방 지역에 분포해 있던 동이족을 가리킨다.
이 가운데 부(鳧)는 9이(九夷)의 다섯 번째인 부유(鳧臾)로 바로 부여국의 전신이다.
이순의 ‘이아석지주’와 형병의 ‘논어주소’는 “동북지역 구이의 다섯 번째가 부유”라 했다. ‘자회보’에는 “부유는 동방의 나라 이름인데 바로 부여다”라고 기록돼 있다.
그리고 ‘논어’ 자한 편에도 “구이의 다섯 번째인 부유는 바로 부여”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처럼 고대문헌을 통해 오늘날 취푸를 중심으로 한 산둥성 일대가 노(魯)나라가 세워지기 전까지 부여의 발상지였음을 알 수 있다.
중국 산둥성의 부산이 부여의 발상지라는 사실은 중국 고대문헌에서 쉽게 확인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현대 역사학자들도 널리 인정하는 바다.
예컨대 중국 역사학자 허광웨(何光岳)는 그의 저서 ‘동이원류사(東夷源流史)’에서 “‘후한서’ 등 사서에 이미 부여, 동명에 관한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동명이 나라를 세운 것은 동한시대 중엽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동명 이전에 이미 부여족이 존재했다. 이 부여족은 어느 지역에서 기원했는가? 묻고 “사료로 보건대 동한 이전 부여족의 발원지는 산둥성 추현 부근에 있는 부산, 즉 부유”라고 했다.
복희에서 부여로 정통성 계승한 백제
사마천이 쓴 중국 역사 ‘사기’는 황제(黃帝)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공자는 분명히 ‘황제 이전에 신농씨(神農氏)가 있었고 신농씨 이전에 복희씨(伏羲氏)가 있었다’고 했다. 사마천은 왜 황제를 출발점으로 삼았을까.
그것은 복희를 한족의 시조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여지지(輿地志)’의 다음 기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부산은 추현에 있다. 살피건대 어대(魚台)지방의 지형이 마치 오리가 날아가는 모양과 비슷하다. 세상에서는 복희가 이곳에서 팔괘(八卦)를 그었다고 한다.”
중국인이 한족의 시조로 받드는 황제보다도 훨씬 앞선 시기에 동양 인류의 시조라 해도 과언이 아닌 복희가 있었고, 그의 활동무대는 다름 아닌 부여의 발원지 부산이었다는 기록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올해 4월 필자가 현지답사를 통해 확인한 바로는 중국 산둥성 줘청(鄒城)시 이산(繹山)에서 그리 멀지 않은 미산호(微山湖)부근에 실재 부산이 있었으며 복희의 사당을 비롯한 유물유적들이 집중해 있었다.
이처럼 고대 문헌기록과 유물유적들은 산둥성 부산이 동이 부유의 근거지이고, 부유가 부여의 발원지이며 곧 복희의 주요 활동무대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복희가 동이족의 시조이고 부산이 동이문화의 발상지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복희 시대는 고대국가 수립단계에 진입하기 이전 씨족사회였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세기’에 의하면 동이 9족이 모여서 최초로 나라를 세운 것은 고조선이다.
그러니까 부유에서 9부족으로 발전하고 9부족이 모여 고조선을 세운 것으로, 단군은 동이의 국조(國祖)이고 복희는 동이족의 시조(始祖)이며 부유는 동이 역사의 출발점이 된다.
허광웨는 ‘동이 원류사’에서 부여족의 발전경로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부여는 바로 구이의 하나였던 부유의 후예다. 일명 부유(浮楡), 어여(於余)라고도 하는데 원래는 산둥 린이 일대에 살다가 뒤에 한 갈래는 서진하여 하남성 내향의 어중으로 옮겨갔고, 다른 한 갈래는 동북지방으로 옮겨가 부여국을 세웠다. 이것이 북부여(北夫餘)다.
북부여는 전연(前燕)에 의해 멸망했다. 북부여의 다른 한 갈래는 동쪽으로 나아가 졸본천(卒本川)으로 옮겨갔는데 이것이 동부여(東夫餘), 또는 졸본부여라 칭한다. 동부여는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부여왕족의 또 다른 한 갈래는 남조선 지역으로 건너가서 백제국을 세웠는데 뒤에 당태종에 의해 멸망했다.”
고구려와 백제가 모두 부유의 후예인 부여족의 한 갈래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 중 굳이 부여족의 정통성을 따진다면 필자는 백제에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 이유는 고구려는 나중에 동부여를 병합함으로써 부여를 멸망시키는 결과를 가져온 데 반하여, 백제는 부여장(夫餘璋), 부여륭(夫餘隆), 부여풍(夫餘豊) 등 왕조의 성씨를 아예 부여로 쓰고 또 남쪽으로 천도한 이후에도 남부여(南夫餘)라는 국명을 쓰면서 부여를 계승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기 때문이다.
산둥성 제수(濟水)에서 국명 유래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는 ‘백제 시조 온조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10명의 신하를 보좌진으로 삼았다. 그래서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고 했다. …그 후 처음 위례로 올 때 백성들이 기꺼이 따라왔다고 하여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로 고쳤다’고 한다.
그러나 이 설명만으로는 국명에 왜 제(濟)자가 들어갔는지 논리가 빈약하다.
허광웨는 ‘동이원류사’에서 백제의 ‘제(濟)’를 산둥성의 제수(濟水)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았다.
즉 남쪽으로 내려온 부여족은 부락이 점차 늘어나자 옛 산둥성 ‘제수’로부터 유래한 그 뿌리를 망각하지 않기 위해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이다.
필자도 백제의 ‘제(濟)’를 산둥성의 제수로 보는 데 동의한다.
우리는 그 동안 백제의 발상지를 한반도의 하남 위례성으로만 인식했기 때문에 백제라는 나라 이름에 대한 명확한 유래를 찾을 길이 없었다. 그러나 백제의 발상지가 지금의 산둥성 추현의 부산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백제 국명의 유래도 제수와 연관 지어 찾아야 옳다.
지금도 제수는 산둥성을 가로질러 흐른다. 현재 산둥성 성소재지 지난(濟南)시는 제수의 남쪽에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제수는 옛 사독(四瀆), 즉 강(江), 하(河), 회(淮), 제(濟) 등 사대수(四大水) 중의 하나로 허난성현 서쪽 왕옥산에서 발원해 동쪽으로 흘러 산둥성으로 들어간다. 그 하류는 동북쪽으로 흘러 황하와 함께 바다로 들어간다.
이처럼 제수 주위에 여러 동이부족 집단이 형성되어 국명을 백제(百濟)라 했을 수도 있고 또 ‘삼국사기’에 기록된 대로 100여명에 이르는 부여족이 제수를 건너 남쪽으로 내려와서 나라를 세웠다 해서 백제라 했을 수도 있다. 따라서 백제는 산둥성의 제수와 연관 지어 보는 것이 자연스럽고 논리적이다.
백제는 고구려나 신라와 달리 건국시조 설화부터 논의가 엇갈린다.
예컨대 ‘삼국사기’를 비롯한 우리의 고대문헌기록은 백제의 시조는 온조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반하여 ‘주서(周書)’ 49권 백제전, ‘수서(隋書)’81권 백제전 등 중국 사서 가운데 일부는 백제의 건국시조를 구태(九台)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같은 차이는 백제의 초기역사기록에 문제가 있음을 말해준다.
사라진 백제 초기 역사
일본의 옛 문헌인 ‘신찬성씨록’(24권 제번 우경 하) 구다라노기미(백제공) 조에는 “구다라노기미가 백제국 추모왕의 30세 손인 혜왕의 손자 문연왕 후손이다”라고 했는데 ‘삼국사기’ 왕세계표에는 혜왕이 온조왕의 18세 손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추모왕으로부터 계산하면 19세 손이 된다.
이것은 ‘삼국사기’ 왕세계표에 온조왕과 다루왕 사이 11명의 왕이 빠져 있음을 의미한다.
또 ‘신찬성씨록’(24권 제번 우경 하) 후지이노수쿠네 조에는 그가 ‘백제 추모왕의 10대손 귀수왕의 후손이다’라고 했는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귀수왕(214~234년)은 시조의 5대 손, 동명왕의 6대 손이라 되어 있다. 역시 온조왕과 다루왕 사이에 4명의 왕이 빠져있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보다 ‘신찬성씨록’에 왕이 4대 혹은 11대나 더 많다는 것을 통해 초기 백제의 역사가 잘려나갔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신찬성씨록’에는 추모왕의 아들로 전하는 음태귀수왕, 추모왕의 손자라고 하는 덕좌왕 등의 이름이 보이나 ‘삼국사기’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잘려나간 초기 백제의 역사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알 길이 없다.
백제 역사의 뿌리가 상당부분 삭제된 것은 백제 건국 초기의 수도변천과정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예컨대 ‘백제 본기’에 의하면 백제는 처음 하남 위례성에 수도를 정하고 국가 성립을 선포한 다음 불과 10여년 만에 수도를 한산, 즉 지금의 남한산 일대로 옮겨 2년 후 왕궁을 지었다. 10여년 만에 수도를 옮기고 연이어 궁전을 건립하는 대역사를 진행한다는 것은 영역이 100여 리에 불과했던 백제 초기의 경제능력으로 보아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백제가 수도를 하남 위례성으로 옮기기 이전, 하북 위례성에 이미 초기 백제가 있었을 개연성이 높고 바로 이 하북시대의 백제사가 잘려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는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가정을 할 수 있다.
즉 하남 위례성에 한반도 백제가 수립되기 이전 하북에 대륙백제가 건립되어 있었는데 대륙백제를 세운 시조는 구태이고 한반도 백제의 시조는 온조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온조의 기록만 남고 대륙백제의 역사가 사라진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후기 신라의 역사 편찬자들이 신라 중심으로 역사를 재편하면서 백제사의 시작을 신라 창건보다 후대로 끌어내리려 한반도로 이주해온 후 온조왕 시대를 백제의 창건 기준으로 설정하고, 온조 이전 대륙백제 구태왕 시대를 잘라버린 데서 연유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한반도 백제는 자생적으로 성립한 나라가 아니고 대륙 서북지역으로부터 선진적인 제도와 기술문화를 가진 동이 부여계통의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이주해 와서 건립한 나라다. 따라서 한반도 하남 백제 이전에 대륙의 하북 백제가 있었다는 논리를 전면 부인할 수 없다.
그 동안 우리는 하남 위례성을 한성으로 인정해 왔다. 그러나 한강은 역사적으로 강(江)이지 하(河)가 아니다. 백제가 실제 요서 진평 등을 지배한 기록이 중국문헌 여러 군데 나타나는 것으로 미루어 하남 위례성의 ‘하’를 한강이 아닌 지금의 랴오닝성 요하(遼河)로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초기 백제 역사의 복원을 위해서는 하남 위례성 시대 이전 대륙의 하북 백제와 그 시조 구태에 대한 연구가 수반돼야 한다.
중국 요서지역에서 한반도로 이주
백제가 요서(遼西)를 지배했다는 최초의 기록은 ‘송서(宋書)’ 97권 백제전에 실려 있다.
‘고구려가 요동을 지배하고 백제는 요서를 지배했는데 백제의 소치(所治)는 진평군 진평현이다.’
이 기록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백제의 소치(所治)’라는 표현이다. ‘치(治)’는 고대사회에서 도성을 가리키는 용어로 군치(郡治) 현치(縣治)일 경우에는 지방장관이 거주하는 군청, 현청 소재지를 뜻하고 국가의 소치(所治)는 소도(所都) 즉 국도를 의미했다.
예컨대 ‘한서(漢書)’ 고제기에 ‘치진중(治秦中)’이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여기서 ‘치’는 다스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도성이라는 뜻으로, 한(漢) 고조가 진중(秦中)에 수도를 정했다는 얘기다. 따라서 ‘백제소치는 백제국의 도성, 즉 국도를 가리킨 것으로 보아야 한다.
청나라 때 편찬된 ‘흠정 만주 원류고’에서는 이런 고기록을 근거로 ‘백제의 국도는 요서에 있었다(國都在遼西)’고 잘라 말했다.
그런데 한국사학계는 그 동안 이 ‘소치’를 도성이 아닌 통치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했다.
백제의 수도가 있었다는 요서 진평군은 과연 중국의 어느 지역일까.
마단림(馬端臨)이 지은 ‘통고(通考)’에는 그 지역을 ‘당나라 때 유성과 북평의 중간지대라 했는데 ‘흠정만주원류고’에서는 다시 마단림의 견해를 기초로 이곳을 청나라 때 금주, 영원, 광녕 일대라 추정했다.
그러면 백제가 중국의 요서 지역에 국도를 정했다가 한반도 지역으로 도읍을 옮긴 시기는 언제쯤이었을까.
‘흠정 만주 원류고’는 그 시기를 양나라 천감(天監)시대로 보았다.
천감이란 중국 양나라 무제의 연호로 천감 1년은 서기 502년이며 신라 지증왕 3년, 고구려 문자왕 11년, 백제 무령왕 2년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백제 수도가 본래는 요서에 있다가 무령왕 때 비로소 남쪽 한반도로 천도해 왔다는 것이다. 이 주장의 근거는 ‘양서(梁書)’ 백제열전에 있다.
“진(晉)나라 때 요서, 진평 두 군을 차지하고 있던 백제가 남제(南齊) 천감시대에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국력이 크게 약해지자 그 후 남한(南韓)지역으로 옮겨갔다.”
‘삼국유사’는 ‘구당서’를 인용하여 ‘백제는 부여의 별종인데…왕의 거처로 동, 서 두 성이 있다’고 했다. ‘북사(北史)’의 백제국에 대한 설명 가운데는 ‘백제의 왕은 동, 서 두 성에서 사는데 하나는 거발성(居拔城)이고 다른 하나는 고마성(古麻城)이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고마성의 고마는 곧 곰(熊)을 뜻하므로 웅진성의 우리말인 ‘고마나루’의 ‘고마’를 한자로 음사(音寫)한 것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지만 거발성은 어떤 성을 가리키는지 우리 학계에서는 아직까지 정설이 없는 실정이다.
그런데 ‘흠정 만주 원류고’는 거발성이 바로 요서의 진평성(晉平城)이라고 적시했다.
양나라 때 외국사절들의 용모를 그린 그림과 함께 그 나라에 관한 간단한 설명을 덧붙인 ‘양직공도(梁職貢圖)’를 보면 ‘백제국기(百濟國記)’를 인용하여 ‘백제는 옛날의 내이(萊夷)이며 마한족이다’라 했다.
내이는 우이와 함께 청주(靑州), 즉 오늘의 산둥성 일대에 거주하던 동이족의 하나다(‘서경’ 우공편). 산둥성 내산(萊山) 밑에 살아서 그들을 내이(萊夷)라 불렀는데 내산은 바로 오늘의 칭다오와 옌타이 일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571년에 북제(北齊)가 백제 위덕왕에게 ‘사지절도독동청주자사(使持節都督東靑州刺史)’의 직을 수여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는 이 지역에 대한 백제의 지배를 승인한 것으로 간주되는데 동청주는 오늘날 산둥성 자오저우완 일대에 해당된다. 역사학자 허광웨는 ‘부유인이 본래는 산둥성에 있다가 차츰 이동하여 춘추시대에 요서에 도달하고 전국시대에 다시 오늘의 지린성 부여지역에 도착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기록들을 미루어 볼 때 원래 한반도 지역에 있던 백제가 중국의 요서에 진출하여 요서, 진평을 잠시 경략했다기보다, 대륙의 요서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백제 세력이 나중에 차츰 남하하여 한반도에서 정착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백제의 요서 지배에 관한 기록은 ‘송서’ 이외에도 ‘양서’ 백제전, ‘남사’ 백제전, ‘자치통감’ ‘위서물길전(魏書勿吉傳)’ 등에 나타나는 명백한 사실임에도 일본의 나카 미치요(那珂通世)를 위시한 식민사학자들은 대체로 이를 부정하거나 묵살하는 태도를 취했다. 요서 지방은 한반도 서남부에서 바다를 사이에 두고 수천 리 떨어져 있는 곳인데, 백제가 이곳에 진출해야 할 필요성이나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고교 국사교과서는 ‘백제가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룩하게 된 것은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때의 일이었다. … 백제는 수군을 증강시켜 중국의 요서 지방으로 진출하였다”라고 기술하여 백제의 요서 지방에 대한 지배를 진출로 폄훼했고, 또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발간한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한술 더 떠서 “근초고왕은 해상무역에도 힘을 기울여 요서지방에 무역기지로서 백제군을 설치했다”고 기술하여 지배와는 상관없는 무역기지의 건설로 왜곡했다. 이는 일제 식민사관의 잔재를 탈피하지 못한 데서 온 오류다.
대륙 백제의 수도 요서의 정체를 파악하는 일은 미궁에 싸인 한성 백제 이전의 백제사를 푸는 열쇠가 될 것이다.
왕과 제후 거느린 대제국
‘흠정 만주 원류고’ 3권은 “사서(史書)에 ‘백제는 무예를 숭상하고 문화를 사랑하는 나라’라고 했는데 그 말은 전혀 거짓이 아니고 사실이다”라고 한 뒤 다음과 같이 말을 잇고 있다. “백제는 여러 제후나 왕을 세워 그들의 공훈에 보답했는데 송(宋), 제(齊)나라 시대로부터 이미 그러했다. 이는 백제의 땅이 넓고 백성도 많았다는 증거다.”
일부 사학자들 중에는 ‘백제가 왕과 제후를 거느린 대제국이었다’고 말하면 코웃음을 칠 사람도 있겠지만 그러나 이는 허무맹랑한 주장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다.
‘흠정 만주 원류고’의 이 기록은 ‘남제서(南齊書)’ 백제전에 나타난 사료를 근거로 한 것이다.
‘남제서’ 백제전에는 “건무(建武) 2년에 백제의 모대왕(牟大王)이 자기의 신하 사법명을 매라왕, 찬수류를 벽중왕, 해례곤을 불중후, 목간나를 면중후로 책봉한 뒤 형식상 남제에 국서를 보내 승인을 요청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건무는 남제 명제(明帝)의 연호로 서기 494년이며 신라 소지왕 16년, 고구려 문자왕 3년, 백제 동성왕 16년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백제의 동성왕 시대에 백제가 자체적으로 왕과 제후를 책봉했다는 이야기인데, 모대왕이 남제에 요청한 사법명 등의 왕후 관작 칭호 앞에 붙여진 명칭이 대체로 북 중국의 동부해안 지대 지명인 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백제의 왕과 제후는 단순히 명의상으로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실제 백제세력이 이 지역 해안지대까지 뻗쳐 있었음을 말해준다.
옛날 천자(天子)밑에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이 있었다. 제후와 왕공을 분봉(分封)하는 것은 대제국의 천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고구려가 비록 강성했지만 왕과 제후를 책봉했다는 역사기록은 찾아볼 수 없으며 신라는 삼국 통일을 이룩한 후에도 왕과 제후를 거느리지 못했다.
그런데 백제가 ‘중건후왕(衆建侯王)’, 즉 자체적으로 여러 제후와 왕을 책봉했다고 하는 것은 백제는 제후국이 아니라 대제국이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백제의 강역은 서북으로는 광녕, 금주, 의주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해성, 개주, 동남쪽으로는 조선의 황해, 충청, 전라도 등을 포괄하고 있었다. 따라서 백제의 강역은 동서가 좁고 남북으로 길었다. 또 위(魏)나라 때 물길(勿吉)과 도모해 고구려 땅을 빼앗아 동북으로는 물길과도 이웃해 있었다. 당나라 초기에는 또 신라의 60~70성을 취하여 그 강토가 더욱 넓어졌다.” 이것은 ‘흠정만주원류고’에 나오는 당시 백제의 강역에 관한 기록이다.
이 기록에 따른다면 백제는 융성기에 한반도뿐만 아니라 중국대륙의 서북과 동북쪽에 걸쳐 광활한 영토를 소유했고 이런 기초 위에서 왕과 제후를 거느리는 제국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신라는 백제의 속국이었다
우리 국사교과서는 서력 기원전 57년 박혁거세가 경주 평야에 신라를 세웠고,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주몽이 압록강 중류의 동가강 유역에서 건립했으며,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온조가 한강유역에 터잡고 출발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삼국 중 신라가 가장 먼저 건국됐고 20년 후 고구려, 그로부터 다시 19년 후 백제가 성립됐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의 기록을 ‘흠정 만주 원류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라는 처음에 백제의 부용(附庸) 국가였는데 나중에 가라, 임나 등 여러 나라를 겸병하여 백제와 대등한 이웃나라가 됐다.”
‘흠정만주원류고’는 무슨 근거로 이러한 논리를 전개한 것일까. 아마 북사(北史)의 다음 기록을 참고한 듯하다. “신라는 백제에 부용되어 있던 국가다.” 여기서 ‘부용’이란 큰 나라에 부속된 작은 나라, 즉 독자적으로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는 국가를 말한다. ‘맹자’에는 ‘강역이 50리가 안 되어 제후에게 부속된 작은 국가를 부용국이라 한다’는 설명이 있다.
‘흠정만주원류고’에 따르면 신라는 원래 독립국가가 아니라 백제의 부속국가로 있다가 나중에 차츰 발전하여 독립국이 된다. 그렇다면 백제보다 먼저 신라가 건국했다는 논리는 설득력이 없다.
신라와 백제의 출발을 놓고 한국과 중국의 역사 기록이 이처럼 현격한 차이가 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우리민족의 역사를 주로 한반도 이주 이후의 역사로 한정한데 반해 중국의 고대사료는 그 이전 대륙시대 역사까지 포괄하여 다룬 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 것이다.
삼국 중 가장 생명력이 길었던 백제
‘나-당 연합군은 먼저 백제를 공격했다. 김유신이 이끈 신라군은 탄현을 넘어 황산벌에 이르렀고 소정방이 이끈 당군은 금강하류로 침입했다. 이로써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이 나-당 연합군에 함락됐다.’
이것은 백제 멸망에 대해 우리나라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 실려 있는 기록이다.
660년 백제가 멸망하고 고구려는 668년, 신라는 935년에 멸망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역사상식이다. 따라서 백제는 삼국 중 가장 먼저 패망한 나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흠정 만주 원류고’의 기록을 통해서 본 백제의 패망 시기는 이와 전혀 다르다.
아마 ‘북사(北史)’와 ‘구당서(舊唐書)의 다음과 같은 기록을 참고한 듯하다.
‘북사(北史)’에는 “백제에는 5방(五方)이 있고 방은 10군(郡)을 관리한다”라고 했고, ‘구당서(舊唐書)’에는 “6방이 각각 10개군을 관리한다”라고 했다. 두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군이 50개 내지 60개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소정방이 백제를 공격해 빼앗은 것은 37군이다. 빼앗지 못한 군이 5분의 2나 된다.
이것은 백제가 완전히 멸망하지 않고 상당 부분 그대로 보존됐음을 뜻한다.
660년 당나라 소정방에 의해 멸망한 백제는 일부분에 불과하며 절반 가까운 세력이 그대로 남아 백제라는 이름으로 존속했다는 것이 ‘흠정만주원류고’의 주장이다.
또한 삼국 중 백제가 최후까지 남았다는 사실의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후당 시기에 백제에서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한 기록이 사서에 실려 있고 원(元)나라 때도 백제가 중국과 내왕한 사실이 사서에 등장한다.”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는 1280~1367년까지 존속했다. 이를 근거로 추정하면 백제는 935년에 멸망한 신라보다 최소한 수백년 가량 더 존속했고, 따라서 백제는 삼국 중 최후까지 남아 있었던 나라였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어느 민족이나 자기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미화하고 과장하고 싶은 것이 일반적인 속성이다. 그런데 우리 역사를 돌아보면 미화나 과장은커녕 오히려 축소되고 폄훼된 경향이 짙다.
중화 중심의 사대(事大)사관과 일제 식민사관의 영향이다.
백제사는 두 번에 걸쳐 크게 왜곡되는 수난을 겪었다.
첫째, 고려 시기 신라 중심으로 삼국사의 정통을 세우는 과정에서 초기 백제사의 상당부분이 삭제 혹은 훼손되었다고 본다.
둘째, 일제에 의한 왜곡으로, 일제는 한반도에 대한 식민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해 먼저 한국사 연구에 손을 댔는데, 이때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백제사를 총관(總觀·전체를 대충 살펴봄)하는 ‘백제 약사’와 ‘백제사 강화’를 저술했다.
이마니시의 백제사 서술의 핵심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백제가 신사시대(信史時代)로 들어간 시기를 근초고왕대로 잡고 그 이전은 전설의 시기로 파악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백제가 왜의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보호와 통치하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마니시의 이와 같은 백제사 인식체계는 백제의 후진성과 타율성을 강조함으로써 일제의 식민통치를 학문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다.
‘흠정 만주 원류고’의 가치
광복 이후 일제에 의해 왜곡된 백제사를 주체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연구인력의 제한과 문헌자료의 부족 등으로 인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늘날까지 일본 사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백제사 인식체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흠정만주원류고’는 청나라 때 편찬된 책이다. 흠정이란 황제의 저술 또는 황제의 칙명에 의해 만들어진 저술을 뜻한다. 청나라 건륭 43년에 아계(阿桂) 등이 칙명을 받들어 편찬한 이 책은 부족, 강역, 산천(山川), 국속(國俗) 네 부문으로 나누어 총 20권으로 간행됐다.
당시 조선은 친명배청(親明排淸)정책을 견지하는 바람에 조선과 청의 관계는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따라서 청나라가 한국 고대사를 의도적으로 미화했을 리 만무하다. 단지 자신들의 터전인 만주의 고대사 원류를 추적 하다 보니 우리 민족사의 한 축인 백제사와 만나게 되고 그것을 가감 없이 사실대로 기술했다고 봐야 한다.
이 ‘만주원류고’에 보이는 백제는 후진적이고 허약한 나라가 아니라 강토는 광대하고, 인구는 많고, 역사는 깊고, 문화는 우수하고, 국력은 강대한 대제국이었다.
광복된 지 어언 60년인데 우리가 아직도 식민사관의 잔재를 벗지 못한 채 고대사 연구를 국내의 한정된 자료에 의존하면서 ‘흠정 만주 원류고’와 같은 소중한 역사기록을 방치하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중국의 이른바 동북공정(東北工程)을 통한 고구려사 탈취 시도 과정에서 우리 국민의 역사문화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고 또 동북공정에 대응하기 위해 국책연구기관이 출범하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고구려나 신라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연구가 취약하고 또 삼국사 중 일제에 의한 왜곡의 정도가 가장 심각한 부여, 백제사가 여기서 제외된 것은 매우 유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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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