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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개혁주의 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이지명
제 110문 하나님은 제 8계명에서 무엇을 금하셨습니까?
답: 하나님은 국가 기관이 벌주는 도둑질이나 강도질을 금지하실 뿐아니라 그는 모든 형태의 악과 사기 곧 이를 통해 우리가 남의 것을 탈취하고 또 강제로 또는 권한을 지닌 문서로 우리 것으로 만들려고 애쓰는 사기를 도둑질로 봅니다. 이를테면 공평치 못한 저울, 불의한 자(尺), 시종일관치 않는 척도, 가짜 상품, 위조 돈, 고리대금, 그리고 하나님이 금지하신 어떤 수단 등이 그런 것인데 여기엔 또한 모든 탐욕과 자기가 받은 선물을 무용하게 낭비하는 일이 포함됩니다.
-Quid vetat Deus in octavo praecepto?
-Non solum ea furta & rapinas, quas Magistratus punit: sed furti nomine coprehendit, quidquid est malarum artium & aucupiorum, quibus aliena captamus, & ad nos vi, aut specie recti transferre studemus: qualiasunt, iniquum pondus, inivsta ulna, inaequalia mensura, fucosa merx, fallax moneta, usura, aut alia quaevis ratio aut mondus a Deo interdictus. His adde omnem auaritiam, & multiplicem divinorum donorum profusionem & abusum.
(해설)
제 8계명은 어느 때보다 지금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충격을 가하는 계명으로 여겨진다. 이는 매스컴은 연일연야(連日連夜) 남의 돈 내지 국가의 돈을 훔친 자들에 대해 대서특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 8계명은 크게 두 가지를 가르친다. 1) 이웃의 재산을 공격하지 말 것을 가르친다. 즉 금지내용인데, 우리는 그것을 제 110문에서 볼 수 있다. 2) 이웃의 재산과 권익을 보호할 것을 가르친다. 이것은 적극적인 차원에서 이웃을 도울 것을 가르친다. 제 111문이 이 문제를 다룬다.
우리가 이웃의 재산을 침범하는 문제를 다루기 이전에 먼저 다루어야 할 문제가 있다. 도대체 재산이란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제 8계명은 이 문제를 전제한다. 하나님은 사유재산을 인정하셨는가? 그러면 왜 그것을 허용하셨는가?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일터와 과제를 주셨다(창 1장). 아담은 이 일을 수행함을 통해 자기 존재의의를 실현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왕국을 이루는데 일조(一助)하도록 되어 있었다. 아담과 하와는 타락 후에도 농사를 지으며 살도록 조치되었다.
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가나안 복지를 기업으로 주셨다. 모든 가족은 일정한 분량의 농토와 일거리를 얻은 것이다. 그 분깃은 물론 영원한 기업에 대한 예표이지만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재산이었다. 성경은 이런 기업 내지 일거리를 통해 각기 자기 존재의의를 이루어감을 가르친다. 그러나 지상의 모든 땅과 거기에 속한 것은 창조주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분명하게 가르친다. 말하자면 인간은 이 우주 어느 한 지점도 자기의 소유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 단지 하나님의 것을 잠시 빌려 사용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가는 존재라는 말이다.
I. 제 8계명에서 금지하신 내용
제 110문은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분류하여 생각할 수 있다.
1. 도둑질, 강도질
도둑질이란 남의 것을 불의한 방법으로 자기 것으로 만드는 행위를 말한다. 도둑질은 무거운 죄이다. 이는 하나님의 질서를 깨뜨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기업을 각각 나누어주시어 사회적인 질서를 유지하도록 하셨다. 따라서 도둑질하는 것은 사탄처럼 하나님의 왕국을 어지럽히는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잠언서는 도둑질을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일과 연관시킨다. “잠 30:9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심지어 성경은 도둑질 한 자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을 지적한다. “고전 6:10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그 이유는 도둑질하는 자들은 탐심 때문에 그렇게 하는데 탐심은 우상숭배와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런 자들은 물질만을 숭상하지 결코 하나님을 믿고 섬기지 않는 것이다. 아간은 도둑질하다가 멸망당했다. 즉 그는 금덩이과 시날산 외투와 같은 물질이 탐나서 하나님이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 것이다. 성경은 가룟 유다도 도둑이었다. “요 12: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그 결과 예수도 돈 몇 푼으로 보여 팔아 넘긴 것이다.
2. 도적질 방법
이런 도둑질은 물리적인 힘을 이용하여 즉 강제력으로 빼앗는 경우와 간교한 방법으로 다른 사람의 재산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방법이 있다.
a) 전자(前者)의 경우 무력을 쿠웨이트를 침범한 이라크나 한국전쟁을 일으킨 김일성, 또는 군사력으로 정권을 탈취하는 경우 그리고 공권력으로 압력을 넣어 개인의 재산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경우가 여기에 속한다. 또 공권력으로 회사의 채권을 헐하게 구입하는 것도 여기에 속한다. 구약성경은 강도질을 엄중하게 경고한다. “레 19:13 너는 네 이웃을 압제하지 말며 늑탈하지 말며 품군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 “암 8:4 궁핍한 자를 삼키며 땅의 가난한 자를 망케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 아합이 왕권으로 기업으로 받은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것도 이런 강도질에 속한다(왕상 21장).
b) 교묘한 도적질: 돈 세탁, 국가의 재산 내지 공기업의 돈을 훔치고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시도하는 방법이 바로 돈 세탁이다. 또는 교묘하게 경계선을 옮기는 행위도 여기에 속한다. “신 27:17 그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3. 사기
제 110문은 사기 행각을 도둑에 포함시킨다. 사기란 “사람을 속여 착오를 일으키게 함으로써, 일정한 의사표시나 처분행위를 하게 하는 일”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남을 실족시켜 그것을 자기 이익에 이용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제 110문은 사기 행각을 3 가지로 나누어 지적했다.
a) 불공평한 저울과 불의한 자(尺)로 이웃을 속여 이득을 취함: 이런 행위는 하나님의 공의를 무너뜨리는 행위이다. “잠 11:1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따라서 성경은 엄중하게 경고한다. “레 19:35 너희는 재판에든지 도량형에든지 불의를 행치 말고 레 19:36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사용하라 나는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 땅에서 나오게 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b) 가짜 상품매매: 우리는 지금 가짜 상품으로 가득한 세상에 살고 있다. 젖소 고기가 한우 고기로 둔갑하여 팔려 나가는가 하면, 한국 제품 옷에 외제(外製) 브랜드를 달아 비싸게 팔려나가고 있다. 이는 상인들이 폭리를 취하기 위함이다. 가짜 대학생에, 가짜 학자에, 가짜 종교인 내지 목사까지 등장하고 있다. 사이비 종파는 가짜를 의미한다. 가짜의 원형은 예수 그리스도와 비슷하게 등장하는 적그리스도이다. 문제는 가짜들이 진짜를 몰아내고 이익을 다 챙긴 나머지 진짜들이 침체한다는 데 있다. 이런 데서는 발전이 있을 수 없다.
c) 위조: 학력을 위조하는 국회의원들, 가짜 박사학위를 위조하는 행위. 위조화폐 제조. 진짜들은 진짜를 위해 많은 시간과 물질을 소모했다. 그런데 가짜들은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고 위조한 것을 이용하여 진짜에게 해당하는 것을 탈취하는 셈이 된다.
d) 고리대금: 정당한 이윤을 얻기보다는 상대방의 약점을 이용하여 폭리를 위하는 행위를 말한다. 우리는 지금 가난한 사람들에게 사채를 쓰게 하고 비싼 이자를 내게 하는 자들 속에서 이런 강도질을 볼 수 있다. 이들이 이자를 너무나 지나치게 올려 폭리하기 때문에 국가에서는 그 이자율을 70%로 제한하기도 했다(조선일보 2002 7 31). 이것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폭력을 가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성경은 이런 행위를 금지한다. “레 25:35 네 동족이 빈한하게 되어 빈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너는 그를 도와 객이나 우거하는 자처럼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되 레 25:36 너는 그에게 이식을 취하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여 네 형제로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할 것인즉 레 25:37 너는 그에게 이식을 위하여 돈을 꾸이지 말고 이익을 위하여 식물을 꾸이지 말라” 그러나 칼빈과 개혁파 신학은 자본을 빌려준 것에 대해 합당한 이자만 받을 것을 가르친다.
사기는 거짓에 근거한다. 거짓은 사탄에 속한 것이다. 따라서 사기하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이를 통해 그는 점점 사탄의 사고방식을 구축하기 때문이다.
4. 그 외에 도둑질에 속하는 행위
a) 직책을 이용하여 국가의 돈이나 회사의 돈을 횡령하는 것.
b) 남의 돈을 차용하고 갚지 않음. 성경은 이런 자들을 악인이라 칭한다. “시 37:21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
c) 가난한 노동자의 임금을 무리하게 깎음. 이런 행위는 가난한 자의 피를 말리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자에게 화가 있다고 성경은 지적한다. “렘 22:13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불공평으로 그 다락방을 지으며 그 이웃을 고용하고 그 고가를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성경은 심지어 가난한 자들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이른다고 말한다. “약 5:4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군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따라서 성경은 엄중하게 이런 행위를 금한다. “레 19:13 너는 네 이웃을 압제하지 말며 늑탈하지 말며 품군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
d) 남의 물건을 발견하고 찾아주지 않음(레 6:7).
e) 카드나 화투로 돈을 벌려는 시도, 투기행각, 카지노 놀음 등은 모두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 이득을 얻는 행위이다.
f) 불의한 재판: “렘 5:28 살지고 윤택하며 또 행위가 심히 악하여 자기 이익을 얻으려고 송사 곧 고아의 송사를 공정히 하지 아니하며 빈민의 송사를 공평히 판결치 아니하니” 부자들은 금력을 재판을 왜곡시켜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게 한다. “약 2:6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이것 역시 도둑질에 해당하는 것이다.
7. 낭비하는 일
a) 음식, 마심, 의복구입, 오락에 돈을 지나치게 지출하는 일. 지금 우리 사회는 어마어마한 량의 남은 음식이 쓰레기로 버려지고 있다. 북한은 초근목피로 연명(延命) 내지 아사(餓死)하고 있는데 남한에는 버려는 음식이 너무나 많다. 물질적으로 낭비하는 사람은 대개 가난한 사람들의 형편을 고려할 줄 모른다.(부자와 나사로 비유). 허랑방탕(虛浪放蕩)한 탕자(눅 15:13-14).
조선일보 한 사설은 ‘쓰레기 대란’이라는 말까지 사용하면서 그 심각성을 지적하고 있다. 이에 대한 대책은 음식쓰레기를 줄이는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근본적으로는 음식쓰레기를 줄이는 것이 가장 확실한 대책이다. 하지만 우리 음식은 구조적으로 잔반이 나오게 돼 있는 데다 근검절약 풍토가 사라져버린 탓에 온 국민이 음식을 흥청망청 남겨버리고 있다. 7월1일부터 쓰레기 대란을 맞지 않기 위해서는 정부와 지자체, 그리고 시민단체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수도권 주민들이 음식쓰레기를 대폭 줄이는 등 무언가 가시적인 결과를 이루어내야 할 것이다” [사설] 수도권 음식쓰레기 대란 임박 (조선일보 2000.03.05)
b) 시간낭비: 하나님은 6일 동안 열심히 일하도록 조치하셨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일생이라는 시간을 부여하시어 주어진 일을 완수하도록 하셨다. 따라서 이 기간에 시간을 낭비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선물을 낭비하는 자들이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낭비하는 습성이 제 8계명을 어기는 일에 해당한다는 사실이다.
제 111문: 하나님이 이 계명에서 명령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답: 이웃의 유익과 안녕을 내가 할 수 있는 한 진작시키며, 내가 남으로부터 대접을 받고 싶은 대로 그에게 행하며 또한 가난하고 불행을 당한 이웃을 도울 수 있기 위해 열심히 그리고 진실하게 일하는 것입니다.
-Quae sunt ea quae Deus hic iubet?
-Ut commoda & utilitates proximi, quantum possim adiuvem & augeam: cum 대 sic agam, ut mecum agi cupere: sedulo & fideliter opus faciam, ut alio rum quoque egestati & calamitati sub venire queam.
1. 이웃의 유익과 안녕을 위하여
모든 타락한 인간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고 자기 유익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 시기, 질투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는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해 살려는 이기주의 사고방식 때문이다. 성경은 인간이 타락한 이후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을 지니게 되었음을 가르친다. 도둑질이란 ‘나’라는 실존 밖에 있는 물질을 불의한 방법으로 내게로 이끌어 들이는 행위인 것이다. 말하자면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의 구조를 실현하는 행위라는 말이다.
그런데 인간은 창조함을 받을 때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살도록 설정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마음은 수직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을 향해 쏟아져 바쳐져야 하고 이웃에게 자기의 가장 귀중한 것은 주는 사랑의 존재로 창조된 것이다. 교회론이 가르치는 지체론은 인간의 이런 성격을 잘 반영하고 있다. 우리 몸의 한 지체는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다른 지체에게 봉사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를테면, 인간은 자신을 위해 일하지 않고 다른 지체를 위해 기능을 발휘한다. 모든 지체가 다른 지체들을 위해 수고한다면 거기에는 평화가 있을 것이다.
바울은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할 것을 말한 다음에 이를 위해 겸손해야 되는데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예로 들고 있다 “빌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빌 2: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베드로의 말도 이와 같다. “벧전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벧전 4: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벧전 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모든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봉사하는 식으로 산다면 그 사회는 행복할 것이다. 우리가 직업생활을 하는 것도 가만히 따지고 보면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한 대가로 월급을 받는 것이다. 오늘날 성공적인 기업체를 경영하려면 고객들을 위해 봉사하는 마음으로 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움직임이 있는데 매우 바람직한 것이다. ‘도둑질하지 말라’는 제 8계명이 적극적으로 이웃을 위해 살도록 강권한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2. 황금률 실천(기준)
그러면 이웃을 위해 봉사할 때 어떤 기준에 따라 해야 할까? 우리는 여기서 황금률(黃金律)이 언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다른 사람이 내게 그렇게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내가 그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헤아려 해주라는 말이다. 이 황금률은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을 탈피해야 실현이 가능한 것이다.
이런 마음을 지닌 자들은 남의 것을 토색했을 때 즉시 보상해준다. 삭개오처럼 회심한 자들은 토색을 당한 사람들이 잃은 물질을 다시 찾고 싶어 하는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다. 삭개오(눅 19:8). 따라서 성경은 보상을 강조한다. “출 22:3 해돋은 후이면 피 흘린 죄가 있으리라 도적은 반드시 배상할 것이나 배상할 것이 없으면 그 몸을 팔아 그 도적질한 것을 배상할 것이요”
3.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게 일함
도둑질을 하지 않으려면 자기 직업에 충실히 일해서 일용할 양식을 확보해야 한다. 일할 때는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절약생활을 하며 그리고 만족할 줄 아는 마음으로 일해야 한다. 야곱에게는 여러 가지 단점이 있었지만 그에게는 최선을 다해 부지런히 일했다는 장점이 있다. 그는 최소한 다른 사람의 재물을 도둑질하지는 않았다(창 31장). 성경은 정직하게 일거리를 가지고 일할 것을 강조한다. “잠 13:11 망령되이 얻은 재물은 줄어가고 손으로 모은 것은 늘어가느니라” 바울 자신도 직접 일하면서 일할 것을 권고했다. “살전 4:11 또 너희에게 명한 것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특별히 일할 때에도 지나친 욕심을 가져서는 안 됨을 성경은 말한다. 지나친 욕심을 가질 때 다시 도둑질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딤전 6:6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딤전 6:7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딤전 6: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딤전 6: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이렇게 만족할 줄 하는 근거는 하나님을 의뢰하기 때문이다. “히 13:5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나아가 우리가 남을 제대로 돕기 위해서는 전문 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전문 지식을 직업생활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III. 제 8계명이 지향하는 목표
우리가 제 8계명을 지킬 때, 우리 사회는 어떤 덕이 함양되고 또 우리 속에는 어떤 품성이 훈련될 수 있을까? 하이델베르크 저자 중에 하나인 Ursinus는 일곱 가지 품성을 언급했다.1)
1. 상호 교류하는 정의
제 8계명이 실현되면, 사회정의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소유물을 탐내지 않는 자비한 마음이 얻어진다(596). 복음을 이해하고 있는 부자들은 자기들의 재물을 사회에 환원하여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사용한다. 지금 미국사회는 이런 일들이 잘 실현되고 있다. 어떤 사업가는 어마어마한 돈을 무명으로 대학에 기부하고 혼자 기뻐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빌 게이츠도 자기의 재산을 다른 사람을 위해 기부하는 일에 익숙하다. 이것은 만물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상을 지니고 있고 물질에 대한 청지기 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2. 만족하는 품성
전쟁은 주어진 물질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가장 중요한 재산이 되어 있는 사람들은 현재의 주어진 물질에 대해 만족하는 품성을 지니게 된다.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한편으로는 낭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도둑질을 하게 된다(597).
3. 충성스러운 마음
다른 사람들이 재산을 잃거나 빼앗기는 것을 염려하고 그들이 그런 손해를 당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마음이다(597). 이것은 원수의 가축이 길을 잃으면 주인에게 찾아주는 마음과 일치한다. “출 23:4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나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
이런 마음에 대한 양 극단은 1) 다른 사람들이 손해를 당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마음, 2) 공공의 선행을 위해 기여함이 이 없이 단지 공공의 선행으로 인해 얻어지는 결과만 차지하려는 게으른 자세. 이것은 선인 줄 알면서도 선행을 하지 않는 마음을 의미한다. “약 4:17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4. 물질을 아낌없이 주는 후한 마음
바른 생각과 바른 동기에 의해 필요한 사람들에게 물질을 기여할 줄 아는 성품을 의미한다. 이때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법과 자연법에 의지하여 경건과 사랑에 근거하여 능력 있는 자들에게 물질을 아낌없이 주는 성품이다. 이런 자들은 왼손이 한 일을 오른 손이 알지 못하도록 하는데 오직 심판자이신 하나님만이 아는 것으로 만족한다. 寄附金(기부금) 제도는 이런 마음이 사회에 보편화되어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이런 덕 내지 성품의 양극단은 인색과 낭비벽이다. 인색한 자들은 오직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재산을 증가시키는 데만 몰두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자기 재물만 신뢰한다. 낭비벽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위임한 그 이상의 물질을 사용하는 데서 즐거움을 발견하는 사람을 말한다(598).
5. 친절함
친절이란 후한 마음의 특별한 형태이다. 나그네와 여행자 특별히 복음의 가르침 때문에 추방을 당한 영접하는 마음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같은 신앙을 지닌 사람들을 배려하는 사람의 마음을 의미한다. 빌립보 성의 루디아, 마가의 다락방을 예수를 위해 내어준 마가의 어머니,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도망다니던 주의 종들을 영접한 사람들이 여기에 속한다.
6. 절약하는 덕 내지 성품
절약이란 불필요한 낭비를 저지하고 우리 자신과 우리과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정직하게 획득한 것을 공동체 삶 속에서 관리하되 우리 자신의 안락을 위한 것만을 원하지 않는 마음을 의미한다(598f.).
후한 마음은 절약하는 마음이 없으면 낭비벽에 빠지게 된다. 후한 마음이 절약만 하려고 든다면 탐욕에 빠지게 된다. 절약하고 검소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후한 마음이 없다. 또 검소한 사람이 아니고는 후할 수 없다.
7. 검소
검소란 정직하게 획득된 소득을 적절하고 유익하게 배치하며 소모하는 것도 오직 필요하고 유익 처리하는 성향을 의미한다. 절약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주는 것이라면 검소는 물건을 적적하게 배치하는 능력을 말한다. 검소에는 경영마인드가 포함되어 있다. 검소한 어머니들은 주어진 소득을 잘 쪼개어 한 달 동안 가사를 꾸려간다.
쓰레기를 분리수거하여 재활용하는 행위는 절약과 검소 두 가지를 포함한다.
요컨대 제 8계명은 올바른 물질관 내지 창조론을 확립하게 할뿐만 아니라 이웃에 대해 배려하는 사랑을 함양케 한다. 이론 보건대 청교도의 자본주의는 제 8계명과 연관된다. 우리 사회가 지나치게 과소비하는 것은 제 8계명을 모르기 때문이다. 또 교회가 건물을 수리하고 보수하고 장식하는데 지나치게 많은 돈을 쓰는 것도 제 8계명을 어기는 행위이다.
1) Ursinus, Commentary on the Heidelberg Catechism, 596-598.
제 112문: 제 9계명은 무엇을 요구합니까?
답: 내가 누구에게도 거짓 증거하지 말며, 누구의 말도 왜곡시키지 말며, 어떤 누구도 중상비방하거나 헐뜯지 않으며, 어떤 누구의 명예를 손상시키지 말며, 듣지 않은 체 쉽게 남을 정죄하지 말 것과, 만일 내가 내 속에 하나님의 무겁디 무거운 진노를 임하지 않기를 원한다면 오히려 사탄의 고유의 행사인 모든 형태의 거짓과 속임수를 모든 관심을 다하여 피하며 법정에서 그리고 모든 일상적인 삶에서 진리를 사랑하고, 사실 그대로 말하며 또 계속적으로 이 진리를 고백하며 그 외에 이웃의 명예와 명성을 내 힘이 닿는 대로 방어하고 진작시킬 것을 요구하십니다.
-Quid exigit nonum praecaptum?
-Ne adversus quempiam dicam falsum testimondium, nullius verba calunier, nulli obtrectem, aut conviciufaciam. neminem temere, vel indicta causa condemnem: Verum omnis generis mendactia, fraudes, ut opera propria Diaboli, nisi me gravissimam iram Dei concitare velim, omni cura fugiam: In iudicijs caeterisque; negotijs, veritatem secter, & id quod res est, libere & constanter profitear: Ad haec samam aliorum & existimationem, quamtum queam, defendam & augeam.
(해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제 9계명은 이웃의 명예를 위한 행위가 어떠해야 할지 그리고 인간 사회에 진리를 확립하고 보존해야 할지를 가르친다. 이를 위해 정리된제 112문은 다음과 같이 분석된다.
1) 일곱 가지 금지 내용: 거짓 증거 금지, 왜곡시키지 않음, 증상비방하지 않음, 헐뜯음, 듣지 않고 쉽게 정죄하는 일을 하지 않음, 거짓말을 않음, 속임수 금지.
2) 거짓과 사기를 피해야 하는 이유
a) 사탄의 고유한 행사니까.
b) 하나님의 무거운 진노가 임하니까.
3) 네 가지 덕: 법정에서 일상생활에서 진리사랑, 사실 그대로 말함, 항상 진리를 고백함, 이웃의 명예를 방어하고 진작시킴.
I. 하나님이 금지하신 내용
제 9계명은 ‘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명령이지만 이 속에는 긍정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너는 네 이웃을 위한 참된 증인이 되어야 한다”1) 다른 말로 만일 너가 진실되기를 원한다면, 진리를 배우고 말하기를 좋아하라는 말이다. 제 9계명에 포함된 모든 덕들의 으뜸, 원천 그리고 핵심은 진리 또는 정직성 곧 말과 생각과 판단, 계약 그리고 가르침에 있어서 정직한 태도라는 말이다. 그럼 진리란 무엇일까? 진리란2) 어떤 무엇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말이 이 대상 자체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사실에 대해 말할 때 있는 그대로 말하고 증언해야 된다는 말이다.
1. 금지한 것
a) 거짓 증거: 법정에서 사실과 다르게 증언하여 억울하게 만드는 경우는 인류의 역사 가운데는 나무나 많다. 그만큼 인간은 간사하다는 말이다. 아합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탈취할 때도 거짓 증인들을 등장시켜 그를 억울하게 죽였다(왕상 21장). 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일 때 유대인들도 억울한 누명을 덮어 씌웠다(마 26:61; 요 2:19,21). 우리는 타락한 정치권에서 소위 공작정치를 통해 억울한 누명을 덮어 씌워 진신을 왜곡하는 일들을 자주 본다.
성경은 엄중하게 거짓 증언을 하지 못하도록 명령한다. “출 23:1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 출 23:2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정당한 증거를 하지 말며 출 23:3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지니라” 나아가 성경은 이런 자들은 벌을 받을 것을 말한다. “잠 19:5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내는 자도 피치 못하리라” 거짓 증거하는 자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권사들의 전쟁에서 성경이 손을 얹어놓고 거짓말 한 권사는 어떻게 치리해야 될까?)
b) 왜곡시킴: 왜곡시킴이란 어떤 사람의 명예를 추락시킬 때 그 사람이 한 말을 왜곡시킴을 통해 마치 거짓을 말한 것처럼 하여 추락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정치 후진국에서 정적을 모함할 때 이런 방법을 사용함을 본다. 이런 성향은 하나님 나라 시민의 성향이 아니다. 따라서 성경은 그런 일을 멀리할 것을 말씀한다. “레 19:16 너는 네 백성 중으로 돌아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며 네 이웃을 대적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잠 4:24 궤휼을 네 입에서 버리며 사곡을 네 입술에서 멀리하라” “시 15:3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우리 주위에서 남의 말을 왜곡시키는 실례를 6하 원칙에 의해 말해보자)
c) 중상 비방: 중상이란 근거가 없는 말로 헐뜯어 명예에 손상을 입히는 것이고 비방이란 비웃고 헐뜯어 말하는 것이다. 이런 자들은 자기가 표준이 되어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되 비난하듯이 판단하는 것이다. 이런 자들의 비판은 일방적이기 때문에 객관성을 상실한다. 이런 자들은 단지 고자질자 또는 밀고자들의 말만 믿고 다른 사람들을 중상 비방하는 것이다. “약 4:11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이런 자들은 심지어 하나님을 심판하게 되는 것이다.(역사 속에서 대표적인 중상비방자를 한 사람 말해보시오)
d) 헐뜯음: 이것은 남을 공연히 해쳐서 말하여 다른 사람들의 멸시를 받도록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렘 18:18 그들이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꾀를 내어 예레미야를 치자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모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니 오라 우리가 혀로 그를 치고 그의 아무 말에도 주의치 말자” “엡 4: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우리 정치권에서 이회창씨 장남 군복문 문제를 가지고 민주당이 들고 나와 마치 이회창에게 큰 문제가 있는 듯이 선전하는 것은 헐 뜯는 일이다)
e) 듣지 않고 정죄하거나 경솔하게 심판함: 사려 깊은 인간은 깊이 생각한 후에 판단을 내리고 행동에 옮기는 것이다. 이런 자들은 말에 실수하지 않고 정확한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듣고 → 생각하고 → 판단하고 → 행동에 옮김. 성경의 하나님은 이성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건전한 사회는 자신을 먼저 알고 겸손한 자세로 다른 사람을 판단한다. “눅 6:41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따라서 건전한 사회에서 깊이 사고하지 않는 사람은 욕을 당하는 것이다. “잠 18:13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
f) 거짓말: 알고 의도적으로 진실이 아닌 것을 말하는 것.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거짓말 하다가 죽임을 당했다(행 5장).
g) 속임수: 외식자들이 사업상 속임수를 쓰고 또 겉으로 겸손한 척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 시민들이 할 일이 아니다.
2. 이런 것을 피해야 하는 이유
“만일 내가 내 속에 하나님의 무겁디 무거운 진노를 임하지 않기를 원한다면 오히려 사탄의 고유의 행사인 모든 형태의 거짓과 속임수를 모든 관심을 다하여 피하며”
한 마디로 이런 짓은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받을 뿐 아니라 사탄의 행실이기 때문에 피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이런 짓을 하는 사람은 사탄적인 사람으로 사탄과 함께 지옥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을 이 사실을 잘 요약하고 있다. “시 5:5 오만한 자가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시 5:6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고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예수께서는 마귀의 정체를 잘 아시고 외식하는 유대인들의 정곡을 찌르셨다.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II. 권장하는 덕들
1. 진리를 사랑하라
하나님께서 제 9계명을 통해 은연중에 가르치시는 내용은 진리를 사랑하는 삶이다. 진리를 사랑하려면 먼저 우리의 마음이 관심을 가지고 진리를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 성경은 진리를 사랑하려면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됨을 가르친다. 말하자면 성령으로 거듭난 중생한 사람만이 진리를 사랑한다는 말이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이 정하신 인간의 도리 곧 진리대로 살면 행복하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진리를 사랑할 것을 강조한다. “슥 8:19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월의 금식과 오월의 금식과 칠월의 금식과 시월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가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실과 화평을 사랑할지니라”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풍토에는 통일성이나 질서가 없는 혼돈의 상태와 같다. 우리 지금 음식물도 믿고 사 먹을 수 없는 불신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인간의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농약을 많이 뿌려 기른 콩나물을 먹어야 하는가 하면 불신의 눈초리로 채소를 사먹고 있다. 말하자면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풍토에서는 거짓이 그 자양분을 흡수하여 거짓된 열매만 가득 맺는 것이다.
다른 한편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곳에는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의 선입관이나 미신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다. 그 선입관이 삶을 완전히 피폐하게 만드는데도 불구하고 거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혈연, 지연, 학연을 중요시하는 유교적 인맥주의가 사회를 질식시킴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여 발전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진 것이다. 이런 경우 붕당의 보스의 말이 항상 진리이기 때문에 사람의 눈치만 보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1+1=2가 진리이나 이런 데서는 보스가 1+1=3이 진리라고 하면 모두 거기에 찬성하게 된다. 따라서 이런 곳에서는 한 사람의 보수의 비위를 맞추는데 신경을 쓰지 진리를 규명하는 일에는 등한시한다.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고 상식이 있는 사회가 되려면 객관적인 진리를 좋아하고 진리를 찾는 운동이 있어야 할 것이다. 제 9계명은 이것을 은연중에 가르치는 것이다.
2. 진리를 바로 말함
성경은 우리가 일상생활 가운데 진리를 말할 것을 가르친다. 이는 공의롭고 의로운 사회가 되려면 진리가 거침없이 말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엡 4: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ajlhvqeian)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또 거짓된 무리들이 사회를 거짓으로 혼돈시키지 않게 하려면 항상 진리를 말해야 하는 것이다. “잠 12:17 진리를 말하는 자는 의를 나타내어도 거짓 증인은 궤휼을 말하느니라”. 그 사회의 선한 정도를 측정하는 잣대는 진리를 얼마나 과감하게 말하느냐에 달려 있다. “잠 14:22 악을 도모하는 자는 그릇 가는 것이 아니냐 선을 도모하는 자에게는 인자와 진리가 있으리라”
나단은 은폐하려는 다윗의 죄악을 과감히 책망했다(삼하 12). 그는 왕에게 무서운 책망을 하고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했다. 다윗은 거짓과 온갖 음모를 자신의 죄악을 감추려 했으나 나단 선지자는 사실을 말함으로써 이스라엘이 거짓 왕국으로 둔갑되는 것을 막은 것이다.
세례요한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민중들에게 자기가 메시아라고 속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실 곧 자기 뒤에 오시는 이가 메시아임을 말했다. 또 헤롯이 범죄했을 때 모두가 칼이 무서워 침묵했으나 과감하게 그것이(죄수와 결혼) 죄악임을 지적했다. 그런데 성경은 거짓을 숭상하는 나라는 망할 것을 말씀한다. “사 5:20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
이 세상에서 완전한 진리를 기대할 수 없지만 민주국가에서는 최소한 언론을 통해 진실을 규명할 수 있다. 하기사 언론을 이용하여 거짓이 지배하도록 만들수도 있지만 말이다. 훌륭한 정치가란 그 나라에 진리가 지배하도록 만드는 사람일 것이다.
교회의 당회나 재직회 등 모든 회의에서 모든 회원들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도록 해야 교회가 건강하게 되는 것이다. 더러 거짓을 진리로 포장하여 선동하는 무리들이 회의 분위기를 어지럽힐 수도 있다. 그러나 끝까지 규명하는 풍토가 되면 그런 풍조는 사라질 것이다.
학문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학자들이 객관적인 진리를 찾도록 자유를 주고 마음껏 토론하는 분위기가 되어야 진리를 규명하는 일에 최선의 열매를 얻을 있을 것이다. 기독교 신학의 경우 교단의 정치가들이 기득권을 위해 기존의 이데올로기적 신학을 옹호하면서 학자들로 하여금 자유롭게 진리를 규명하지 못하도록 만든다면, 더 심한 경우는 정치의 힘으로 진리를 규명하는 기회조차 막아버린다면, 그 교단은 얼마 가지 않아 거짓된 루머(소문) 때문에 곤경에 빠질 것이다.
이로 보건대, 건전한 사회풍토, 건전한 교회 풍토 그리고 건전한 학문 풍토를 유지하는데 제 9계명은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3. 진리를 계속 고백함
그리스도인이란 더러 진리를 고백하면 죽인다는 위협이 있어도 진리를 고백해야 한다. 베드로와 요한 등 사도들은 유대인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고백하고 증거했다. 스데반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고백하다가 죽임을 당했다(행 7장). 사실 순교자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거한 자들을 말하는데, 자기 목숨까지 버리면서 증거한 사람을 뜻한다. 이런 증인들을 통해 복음이 지구 전체로 퍼져 나가면서 한 바퀴 돌고 있는 있다.
하나님을 다른 신들과 상대화시키는 종교다원주의 풍조가 팽배하는 우리 시대에 가장 중요한 진리 고백은 창조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유일성을 고백하는 일일 것이다. 제 9계명은 우리에게 이런 과제를 계속 강요할 것이다.
4. 이웃의 좋은 이름을 구원하고 영예를 진작시킴.
명예와 좋은 이름은 재산이다. 우리의 이웃이 억울한 누명을 덮어쓰고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는 그들의 옹호하며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말 속담에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말이 있다. 그 만큼 우리는 이웃이 잘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 모두를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다룬다. 우리 개인의 영예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나 하나님 나라라는 공동체 전체가 잘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요나단은, 따지고 보면 자기의 政敵인, 자기 친구 다윗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자기 아버지로부터 책망하는 말도 마다하지 않았다. “삼상 19:4 요나단이 그 아비 사울에게 다윗을 포장하여 가로되 원컨대 왕은 신하 다윗에게 범죄치 마옵소서 그는 왕께 득죄하지 아니하였고 그가 왕께 행한 일은 심히 함이니이다 삼상 19:5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는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왕이 이를 보고 기뻐하셨거늘 어찌 무고히 다윗을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려 하시나이까”
직장의 상사에게 자기의 경쟁상대에 대해 말할 때에 직설적이지는 않지만 은근히 그의 명예를 허는 자들이 있다. 사실 이런 자들은 직접 비판적인 말을 하는 사람보다 더 나쁘다 이런 자들의 문제는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을 구축하고 있다는 데 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은 결국 멸하실 것을 말씀 하셨다. “시 101:5 그 이웃을 그윽히 허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지 아니하리로다”
III. 제 9계명이 만들어 내는 인간의 성품
제 9계명은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심을 천명하는 동시에 이것을 지킴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 백성들의 품성을 보여준다. 이에 대해 Ursinus는 8가지를 열거했다.3)
1. 진리를 좋아하고 진리대로 살려고 함
2. 정직성(Candor)
2. 단순성(Simplicity)
3. 일관성, 충실(Caonstancy)
4. 순함(Docility)
5. 과묵성(Taciturnity)
6. 상냥함(Affability)
7. 예의 바름(Urbanity)
이런 품성들은 무게가 있고 인간미가 있으며 정직한 사회를 구현하는데 필요한 요소들이다. 이런 품성들을 현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성품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1) Ursinus, Commentary on the Heidelberg Catechism, 600f.
2) 진리: 일반적으로 “S는 P이다”라고 표기되는 명제 또는 판단, 예컨대 “인간은 식물이다. 이 꽃은 흰색이다” 등은 반드시 참[眞]이든지 거짓이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참인 명제의 파악 또는 참인 판단이 지식이고, 지식은 참이기 때문에 지식이 되는 것이므로, 진리는 인식에 관한 초월적인 가치이며, 지성(知性)이 노리는 목적으로서의 초월적인 대상이다.
진리의 기준이 무엇인가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說)이 있다. 전통적인 형이상학에서는 “사고(思考)와 존재의 합치(adaequatio rei et intellectus)”가 진리라고 하였다. 그리스어의 al曉theia(진리)의 의미는 본래 “은폐되지 않은 것, 드러나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즉, 진리라는 것은 존재 그 자체의 모습이 드러난 것이고, 그와 같이 존재 그 자체를 드러나게 하는 것, 또는 존재의 진실상(眞實相)이 그곳에 드러나게 되는 장소가 이성(理性)이라고 생각된다. 이와 같이 진리를 존재 그 자체에 관하여 논할 때 그것을 존재론적 진리(存在論的眞理)라고 한다.
이에 반하여, 진리가 지성(知性)의 분석과 종합 작용인 판단에 관하여 논해질 때 그것을 인식론적 진리(認識論的眞理)라고 한다. 중세에는, 여러 가지 진리가 유일한 진리인 신(神)에 기인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신의 진리는 사물을 창조하는 진리이다. 따라서, 이것은 존재의 참[眞]에 관계를 맺고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의 참이 그것에 관계를 맺고서 성립하는 것으로 되었다. 지성이 지성 외부에 있는 존재에 어떻게 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물음에 의해서 회의론(懷疑論)이 생겨난다. 고르기아스나 고대 회의파에서는, 거기에서 진리의 인식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도출(導出)되었다. 프로타고라스에게서는 “진리란 각자에게 그렇게 생각되는 것이다‘라고 하는 상대주의가 생겨났다. 이것은 인간을 진리의 척도로 하는 점에서 ”인간척도설(homo-mensura-theorie)“이라고 불린다. 회의론의 주장에 대해서 ”만민(萬民)의 일치(consensus gentium)가 진리의 기준으로서 주장된 적도 있었다. 지성은 지성의 외부에 있는 “물자체(物自體)”에는 도달할 수 없지만, 지성 내부에서 진위(眞僞)를 판별한다고 생각할 때 근대의 주관주의(主觀主義)가 생겨났다. 이 경우, I.칸트의 구성주의(構成主義)에서와 같이 진리의 기준은 관념의 명증성(明證性) 또는 지성의 법칙과의 정합성(整合性)에 놓여지고 지성 내의 기준이 진리의 기준이 된다. 또 진리의 기준을 지식의 유효성에 있다고 하는 프래그머티즘의 진리설도 주관주의의 한 형태이다(두산 백과사전).
그러나 우리는 이런 대답으로 만족할 수 없다. 성경적으로 진리를 정의한다면,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설정하신 그대로의 사실을 의미한다. 만물이 어떻게 설계되었고 어떤 질서를 지니고 있고 그 형성 구조가 무엇인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 등등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대로의 사실을 의미한다. 예수를 진리라고 한다면 예수만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방법을 아시고 그대로 수행하셨다는 말이다.
3) Ursinus, Commentary on the Heidelberg Catechism, 601f.